눈이 밝아진 그들
누가복음 24:13-35, 부활절 셋째 주일, 2011년 5월8일
누가복음 24:13-35절은 예수님의 십자가 처형 뒤에 예루살렘에서 엠마오로 가던 두 제자가 중간에 부활의 주님을 만났다는 이야기입니다. 이 두 제자는 우리가 알고 있는 열두 제자와는 다른 이들입니다. 이야기의 구성은 마치 바울의 다메섹 도상의 예수 경험 이야기와(행 9장) 비슷합니다. 바울도 다메섹으로 가는 중간에 부활의 주님을 만났습니다. 그 충격으로 바울은 잠시 시력을 잃었다가 다메섹에서 아나니아라는 사람을 통해서 다시 시력을 찾게 되었고, 그 이후로 복음을 전하는 사람으로 변화되었습니다. 바울의 이 다메섹 사건에서 특별한 점은 바울 이외의 사람들이 이 사건의 진수를 알아보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바울과 함께 길을 가던 사람들은 어떤 소리만 들었지 바울이 본 빛은 보지 못했습니다. 초기 그리스도교는 부활 경험을 배타적인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다른 이들에게 보여줄 수 없는 사건이었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 대답을 우리는 엠마오 두 제자 이야기에서도 찾아볼 수 있습니다.
이 이야기는 연극으로 치자면 2막으로 구성되었습니다. 1막은 길입니다. 먼저 두 사람이 등장합니다. 이 둘은 예루살렘에서 10km 쯤 떨어진 엠마오로 가면서 예루살렘에서 십자가에 처형당한 예수님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습니다. 중간에 어떤 한 남자가 끼어듭니다. 성서기자는 부활의 예수님이라고 말하지만 이야기 속의 두 사람은 아직 모릅니다. 그들은 ‘눈이 가리어져서’ 몰라봤다고 합니다.(16절) 이제 세 사람이 서로 이야기를 나눕니다. 예수님은 그들에게 무슨 이야기를 했느냐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둘 중의 하나인 글로바라는 이름의 한 사람이 대략 다음과 같이 대답했습니다. 나사렛 예수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나사렛 예수는 하나님과 모든 사람들 앞에서 말과 일에 능력이 많은 선지자셨습니다. 우리는 그가 이스라엘을 구원하기를 바랐습니다. 그런데 대제사장들과 관리들이 그를 십자가에 처형당하게 내어주어 결국 죽어 무덤에 묻혔습니다. 이 일이 일어난 지가 벌써 사흘이 되었습니다. 평소에 예수님을 따르던 여자들이 새벽에 예수님의 무덤에 갔다가 시체는 못 보고 예수님이 살아났다는 천사들의 말을 들었다고 합니다. 제자들도 무덤에 갔지만 아무도 만나지 못했습니다. 도대체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아무 것도 모르겠고, 그냥 놀라울 뿐이랍니다. 예수님은 구약성경을 근거로 그리스도가 고난을 당하고 영광에 들어가야 한다는 사실을 자세하게 설명했습니다. 그렇게 이야기를 나누는 중에 엠마오까지 다 왔습니다. 그 장면이 상상이 갑니다. 영적인 대화를 나누는 순례의 길과 같습니다. 우리가 인생살이에서 이런 순간이 얼마나 될는지요.
2막은 주막집입니다. 예수님은 길을 더 가려고 했지만 두 사람은 날이 저물었으니 그곳에서 하룻밤을 함께 묵자고 붙들었습니다. 이 두 사람은 중간에 끼어든 한 남자에게서 아직 확실한 것은 아니었지만 어떤 강력한 영적인 힘을 느꼈을 겁니다. 그를 그냥 보낼 수 없다고 생각했겠지요. 삶을 새로운 차원으로 변화시키는 순간은 붙들어야합니다. 이런 점에서 이 두 사람은 지혜롭습니다. 예수님은 주막집에서 그들과 함께 저녁밥을 먹게 되었습니다. 떡을 들어 축사하고 떼어서 그들에게 주었습니다. 그들의 눈이 밝아졌습니다. 그때서야 그들은 예수님을 알아볼 수 있었다고 합니다. 앞서 길에서 만났을 때는 눈이 가리어져서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성서기자들이 말하려고 하는 핵심이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부활의 주님을 알아보려면 눈이 밝아져야 합니다. 눈이 가리어져 있으면 주님이 옆에 있어도 알아볼 수 없습니다. 부활의 주님이 빌라도와 가야바에게, 그리고 예루살렘의 일반 사람들에게 나타나지 않은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그들은 눈이 가리어져서 부활의 주님을 알아볼 수 없었습니다.
눈이 가리어졌다거나 밝아졌다는 표현을 이상하게 생각하지 마십시오. 실제로 시각 장애를 일으키거나 그것을 회복했다는 뜻은 아닙니다. 우리는 일반적으로 눈이 있으면 모든 것을 보고, 귀가 있으면 모든 소리를 듣는다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색맹은 사물을 색깔로 인식하지 못합니다. 우리의 귀도 주파수가 너무 낮거나 높은 소리는 듣지 못합니다. 예술적인 세계에서는 이 문제가 더 심각합니다. 작곡가들은 다른 사람들이 듣지 못하는 어떤 음을 듣습니다. 그림을 그리는 사람들도 다른 사람들이 보지 못하는 어떤 세계를 봅니다. 들을 귀가 있는 사람에게만 들리는 소리가 있고, 볼 눈을 가진 사람에게만 보이는 세계가 있다는 뜻입니다. 오늘 본문은 그것을 가리켜 눈이 밝아져서 부활의 주님을 알아보았다고 말했습니다.
눈이 밝아지는데 결정적인 매개는 예수님이 축사하고 떼어주신 떡입니다. 떡은 유대인들이 먹는 빵을 가리킵니다. 이 떡에 어떤 주술적인 능력이 들어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없겠지요. 이 떡은 예수님의 몸을 가리킵니다. 예수님은 대제사장이 보낸 병사들에게 체포되어 빌라도에게 넘겨지기 전날 저녁에 제자들과 함께 유월절 만찬을 함께 먹었습니다. 예수님은 떡을 떼어 제자들에게 주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은 너희를 위하여 주는 내 몸이라. 너희가 이를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눅 22:19) 지금 글로바를 비롯한 두 명의 제자들도 바로 이 떡을 받았습니다. 떡을 통해서 그분의 몸을 받았다는 것은 그분의 운명을 그대로 받아들였다는 뜻입니다. 그러자 눈이 밝아져서 부활의 예수님을 알아보았습니다. 무슨 말인가요? 부활 경험은 예수님과의 특별한 관계에서만 가능하다는 뜻입니다.
예수님과의 특별한 관계가 무엇인지를 생각해보십시오. 우리의 일상에서도 어떤 사람과의 특별한 관계를 통해서 어떤 사건을 경험합니다. 스승과의 특별한 관계를 맺으면 진리의 세계에 눈을 뜰 수 있습니다. 도자기를 만드는 사람들은 흙과 불과 특별한 관계를 맺습니다. 예수님과의 특별한 관계를 맺는 출발은 예수님의 정체성에 대한 바른 이해입니다. 제자들이 예수님의 부활을 경험할 수 있었던 이유는 그들이 예수님을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가르치신 하나님 나라에 대한 이야기, 그분이 행하신 치유와 축귀, 그의 삶과 운명을 깊이 아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런 것이 밑받침이 되지 않으면 우리는 부활을 경험할 수 없습니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그리스도교 신앙을 알려고 하지 않고 무조건 믿으려고만 합니다. 신앙 열정만 있지 신앙공부는 없습니다. 나름으로 일리가 있습니다. 전문적인 신학자도 아닌 일반 신자들이 그리스도교의 깊이로 들어가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또한 그리스도교 신앙이 진리라고 한다면 그런 전문적인 공부가 없이도 얼마든지 구원 경험이 가능해야 합니다. 저는 지금 전문적인 신학공부를 말씀드리는 게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기본적인 태도입니다. 방향성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에게 관심을 두고 있는가 하는 문제입니다. 그것은 잘 드러나지 않습니다. 교회에 매달리듯이 신앙생활을 한다고 해서 그것이 반드시 예수 그리스도에게 관심이 있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예수님 당시에 대제사장들이 예루살렘 성전에 매달렸지만 그것이 곧 하나님에 대한 관심이 아닌 것과 같습니다. 바리새인들이 율법에 철저했지만 그것이 곧 하나님 나라에 대한 관심이 아닌 것과 같습니다. 자기열망이 종교적 열정으로 나타날 때가 많습니다. 신앙적인 포즈는 그럴듯한데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관심은 별로 없다는 것입니다. 이런 상태에서는 평생 교회에 다녀도 예수 그리스도가 누군지 모릅니다. 결국 부활 경험은 요원합니다. 오늘 그리스도인들에게 부활은 먼 나라 이야기가 되고 말았습니다.
오늘 본문이 거론하는 성찬식만 해도 그렇습니다. 평생 성찬예식에 참여하지만 그것의 세계 속으로 들어가지 못합니다. 실제로 성찬식에 관심이 없습니다. 특히 한국의 개신교회는 성찬식을 시시하게 생각합니다. 성찬식을 주술적으로 받아들이는 로마가톨릭교회에 대한 반감에서 나온 것 같습니다. 그런 탓에 성찬식을 형식적으로만 대하는 이들이 많습니다. 조금 진지한 사람들은 주님이 나를 대신해서 돌아가셨다는 차원에서만 성찬을 대합니다. 이런 데만 머물러 있으면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몸과 세계의 일치라는, 그리고 빵과 포도주가 예수 그리스도의 몸과 피로 변화되듯이 부활이 궁극적인 생명으로의 변화라는 그리스도교 신앙의 신비로 들어갈 수 없으며, 그것을 이해할 수도 없습니다. 그리스도교 신앙의 핵심인 부활도 무의미해집니다. 그것이 무의미해지면 결국 삶의 능력도 무기력해집니다. 신앙의 세월은 흘러가는데 신앙은 성숙해지지 않습니다. 신앙과 삶이 따로 놉니다.
떡을 떼어주신 이야기에서 볼 수 있듯이 부활의 주님과 특별한 관계를 맺는 게 부활 경험에서 중요하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렇다면 이제 여러분들의 부활 경험이 참된 것인지를 확인하기 위해서라도 부활이 무엇인지, 부활 경험이 무엇인지 구체적으로 설명하는 게 좋을까요? 그럴 수만 있다면 오죽이나 좋겠습니까. 그런데 그게 불가능합니다. 예수님의 부활이 어떤 것인지 객관적으로 묘사해보라는 요구는 부활의 주님을 기자들 앞에 세워서 공개 인터뷰를 하라는 요구와 비슷합니다. 그런 것은 사이비 교주들에게만 가능한 일입니다. 부활의 주님을 경험한 초기 그리스도인들도 그 경험을 구체적으로 묘사하지 않았습니다. 묘사할 수도 없었습니다. 하나님을 직접적으로 만나거나 묘사할 수 없듯이 부활의 주님도 그렇습니다. 성서는 하나님을 바람이나 빛이라는 메타포로 설명할 뿐입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두 제자들이 눈이 밝아져서 알아보았다고만 말하지만 그 경험을 구체적으로 묘사하지 않습니다. 절대적인 세계는 성격이 그렇습니다. 노자도 ‘도가도비상도’라고 말했습니다. 도를 규정하면 이미 도(道)가 아니라는 겁니다. 부활도 그와 같습니다.
그리스도교 신앙이 너무 어렵다고 생각되시나요? 또는 좀 막연하다고 생각되나요?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의 하나님은 막연한 분이 아닙니다. 그분은 우주 너머에서 유유자적하면서 인간과 세계를 관조하는 분이 아니라 구체적인 역사에 개입하시는 분입니다. 그걸 가리켜 하나님의 ‘자기계시’라고 합니다. 부활의 주님도 그렇습니다. 스승의 십자가 처형 앞에서 당황하고 있던 제자들을 찾아오셨습니다. 실망하고 엠마오로 내려가던 두 제자에게 오셨습니다. 말을 거시고, 구약을 해설하셨고, 떡을 떼어주셨습니다. 그분은 우리를 찾아오시는 분입니다. 그분은 행동하는 분입니다. 문제는 우리의 눈이 밝으냐 하는 것입니다. 눈이 가리어져 있으면 바로 옆에 부활의 주님이 계서도 알아볼 수 없습니다. 눈이 밝아진 경험이 없는 사람들에게 부활 생명을 설명한다는 것은 이런 점에서 불가능한 일입니다. 바나나를 먹어보지 못한 사람에게 말로 설명이 안 되는 것과 비슷합니다. 눈이 밝으면 그 세계가 환한데, 어두우면 막막합니다. 밝음과 어둠 사이의 어느 쯤에서 우리는 살아갑니다. 밝음과 어둠이 왔다 갔다 합니다. 마치 풍랑 속에서 등대가 보이다가, 안보이다가 하는 것과 비슷합니다.
오늘 본문은 이런 사태를 우리에게 이미 암시하고 있습니다. 눈이 밝아진 두 제자가 예수님을 알아보자 곧 예수님이 보이지 않게 되었습니다. 그들의 경험은 한 순간이었습니다. 그 순간에 사진기가 있었다고 하더라도 사진을 찍을 수는 없습니다. 어떤 절대적인 경험은 잠시 머물다가 사라지는 법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것이 불확실하다고 생각합니다. 불확실한 게 아니라 인간의 인식이 제한적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초기 그리스도교 공동체가 처한 영적인 자리였습니다. 부활 경험은 분명하지만 엘리야가 승천할 때 제자 엘리사에게 남겨준 겉옷과 같은 어떤 증거는 남아있지 않았습니다. 초기 그리스도인들 중에서도 부활을 믿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성서기자는 그들을 향해서 눈이 밝아진 사람들에게만 그 경험이 가능하다고 말합니다. 눈이 밝아지려면 설교 처음에 말씀드렸듯이 예수님과의 내밀한 관계가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초기 그리스도교는 모일 때마다 성찬식을 거행하고 주님의 말씀을 나누었습니다. 오늘의 교회도 그런 전통에 서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교회는 영적인 눈이 밝아져서 부활의 주님을 기억하고 그분이 우리에게 다시 오실 순간을 기다라며 살아가는 사람들의 모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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