닫힘과 열림
(막 7:31-37)
복음서에 따르면 예수님은 사람들의 병을 고치거나 장애를 고친 일이 많습니다. 귀신을 내쫓는 일도 심심치 않게 벌어졌습니다. 이런 이야기를 읽거나 들을 때 사람들의 반응은 각양각색입니다. 첫째, 성경을 순박한 태도로 받아들이는 사람들은 그런 일들을 실증적인 사실로 받아들입니다. 복음서는 실제로 벌어진 일을 기록했을 거라고 믿는 겁니다. 또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고 메시아이니까 그런 능력을 행사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둘째, 그런 일들은 고대인들의 미숙한 세계관을 반영하는 것으로 보고 이를 부정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말이 안 되는 이야기라는 거지요. 성경을 지성적인 관점으로만 접근하는 사람들에게서 주로 나타나는 반응입니다. 셋째, 가장 일반적인 반응은 뭐가 뭔지 잘 모르겠다는 것입니다. 성경에 기록되어 있으니까 믿지 않을 수도 없고, 무조건 믿자니 지금의 현실 경험과 위배되니까, 어정쩡한 태도를 취합니다. 여러분은 어느 쪽인가요? 어느 쪽이 옳을까요? 세상살이에 바빠서, 또는 그런 문제는 신앙과 별로 상관이 없는 거로 보고 별로 진지하게 생각해보지 않으셨나요? 일단 이런 질문을 안고 오늘 본문에 나오는 이야기를 살펴봅시다. 그 과정에서 대답을 찾을 수 있을 겁니다.
에바다
예수님이 긴 여행 끝에 갈릴리 호수 근방에 도착했을 때 사람들이 언어 장애를 앓고 있는 한 사람을 데리고 왔습니다. 안수를 받아 고침을 받으려는 생각입니다. 이런 일들은 동서양을 막론하고 고대사회에 흔했습니다. 고대인들은 의료행위를 주술적인 차원에서 이해했으니까요. 요즘도 한국교회에서는 이런 신유집회가 간혹 벌어지기도 하고, 예상 외로 큰 호응을 얻기도 합니다. 많은 신자들이 지푸라기라도 잡으려는 물에 빠진 이의 심정으로 이런 집회에 따라다니는 것 같습니다. 예수님은 사람들에게 아무 말씀도 하지 않고 그 장애인만을 데리고 다른 장소로 가셨습니다. 손가락을 그의 양 귀에 넣고 침을 손에 뱉어 그의 혀에 대시면서 ‘에바다’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일종의 퍼포먼스로 보이는 이런 행위도 고대 유대와 헬라 시대에는 흔했습니다. 에바다는 아람어로 “열리라.”는 뜻입니다. 이 장애인의 귀가 열리고 혀가 풀려서 말이 분명해졌다고 합니다. 참으로 놀라운 일이 벌어졌습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예수님이 그들에게 이 사실을 아무에게도 알리지 말라고 단단히 이르셨다는 것입니다. 상식적으로 생각한다면 이런 일은 크게 떠들어야 합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며, 그리스도라는 사실을 증명할 수 있는 좋은 기회니까요. 오늘로 바꿔 놓고 생각해보세요. 어느 교회에서 장애인이 기도를 받고 치유되었다고 합시다. 그걸 숨겨야 할까요? 그럴 교회는 아마 하나도 없을 겁니다. 신문과 티브이 기자들을 불러서 알리느라 정신이 없겠지요. 예수님은 왜 그 장애인 치유 사건을 소문내지 말라고 경고하셨을까요?
장애인 치유 사건은 예수님이 메시아라는 사실을 증명해주는 직접적인 단서가 아닙니다. 그런 능력은 고대 시대에 종교 지도자들에게 흔하게 나타나는 현상으로 사람들의 호기심을 자극할 뿐입니다. 사람들이 예수님을 이런 호기심으로 대하는 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오히려 예수님을 오해할 가능성이 높아집니다. 요한복음이 전하는 바에 따르면 오병이어 사건이 일어난 뒤에 사람들은 예수님에게 열광했습니다. 오천 명 이상이나 되는 사람들이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충분히 먹고 열두 광주리가 남았으니, 그럴 만도 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참된 신앙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이 당신을 가리켜 생명의 떡이라고 말씀하시고, 승천에 대해서 말씀하시자 사람들이 예수님을 떠났다고 합니다.(요 7:66) 사람들의 관심은 모두 배불리 먹은 것뿐이었습니다. ‘거지 나사로’의 비유에 의하면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 사람이 말씀을 전해도 사람들은 듣지 않는다고 합니다.(눅 16:31) 이런 초능력, 초자연, 기적 같은 일들은 그저 호기심을 자극할 뿐이지 신앙의 근본에 눈을 뜨게 하지는 못합니다. 이 대목에서 이상하게 생각할 분들이 있을 겁니다. 신앙에서 별로 중요하지 않은 기적, 치유, 축귀에 대한 이야기가 왜 복음서에서 자주 거론되는가 하고 말입니다. 오늘 말씀에 좀더 귀를 기울여봅시다.
오늘 본문의 키워드(keyword)는 ‘열림’입니다. 앞에서 잠시 설명한 대로 예수님은 언어 장애를 겪고 있는 사람을 향해서 ‘에바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열리라는 뜻입니다. 그 사람은 오랫동안 듣지 못하고, 따라서 말하지 못하던 사람입니다. 소리를 듣지 못하면 결국 소리를 내는 방법도 까먹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이 사람은 아예 말을 못하는 벙어리는 아닌 것 같습니다. 이 사람을 가리키는 헬라어 ‘모기라로스’는 전혀 못하는 장애와 더듬는 장애의 두 가지 뜻을 다 갖고 있는데, 본문에서는 뒤의 뜻이 강합니다. 그냥 편하게 언어장애인이라고 합시다.
우리는 이 사람의 인생 여정을 모두 따라갈 수 없습니다. 소설을 쓰는 글쟁이라고 한다면 이 사람의 인생을 새롭게 구성해서 세상의 새로운 모습을 살펴볼 수 있겠지요. <뻐꾸기 둥지 위로 날아간 새>라는 영화를 기억하면 될 것 같군요. 정신병원에서 벌어지는 이야기입니다. 오랫동안 그곳에서 치료받고 있는 덩치 큰 환자는 듣지도 못하고 말도 하지 못하는 사람이었습니다. 물론 겉으로만 그런 거지요. 그는 무슨 인생의 상처 때문인지 아무 것도 듣지도 못하고, 말도 못하는 사람 흉내를 냈습니다. 극적인 사건을 통해서 이 사람은 주인공과 말을 나누기 시작했고, 결국 정신병원을 탈출합니다. 본문의 이 장애인은 예수에게서 ‘에바다’라는 말을 들었습니다. 그는 장애를 얻은 뒤로 생전 처음 인격적인 경험을 한 것입니다. 그 순간에 그의 귀가 열리고 혀가 풀려 말을 분명하게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35절)
사람들은 이 장애인에게 일어난 일을 보고 놀라워했습니다. 더 정확하게 말하면 그 일을 행하신 예수님에게 놀란 것입니다. 이 사람의 치유를 똑같이 전하고 있는 35절과 37절의 문장 구조가 서로 다릅니다. 35절은 장애인이 주어라고 한다면, 37절은 예수님이 주어입니다. 예수님이 못 듣는 사람도 듣게 하고, 말 못하는 사람도 말하게 하셨다는 사실에 대한 강조입니다. 예수님에게서 메시아적 사건이 일어난 것입니다. 그 메시아적 사건은 이사야가 이미 오래 전에 전한 메시지에 담겨 있습니다. 초기 기독교 공동체는 바로 그 말씀을 기억했겠지요. 다음과 같습니다. “그때에 맹인의 눈이 밝을 것이며 못 듣는 사람의 귀가 열릴 것이며 그때에 저는 자는 사슴같이 뛸 것이며 말 못하는 자의 혀는 노래하리니 이는 광야에서 물이 솟겠고 사막에서 시내가 흐를 것임이라.”(사 35:5,6) 다시 말씀드립니다. 오늘 본문에서 사람들이 놀란 이유는 장애 치유 자체가 아니라 그것을 행하신 분이 예수님이라는 데에 놓여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에게서 메시아적인 구원 사건을 경험하고 놀라며 찬양했습니다. 오늘 우리도 바로 그 예수님 앞에서 놀라워하는 사람들입니다.
저는 앞에서 치유, 치병, 축귀 같은 초자연적 기적 사건이 신앙에서 본질적인 게 아니라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런 것에 대한 호기심은 오히려 신앙을 방해할 수 있다고 말입니다. 그 말씀과 바로 위에서 맹인의 눈이 밝아지고 못 듣는 귀가 열릴 것이라는 이사야 35:5,6절을 인용해서 설명한 말씀이 서로 모순되는 것처럼 들리지 않으시나요? 두 가지 관점은 분명히 다릅니다. 기적 사건 자체에 호기심을 보이고 열광하는 것과 예수님을 놀라워하고 찬양하는 것은 다릅니다. 마가복음이 본문에서 말하려는 것은 물론 후자입니다. 마가복음의 관심은 예수 그리스도이지 장애 치료는 아니었습니다. 장애 치료는 예수가 메시아라는 사실을 인식하게 하는 통로일 뿐이었습니다.
이런 설명이 좀 복잡하게 들리시나요? 그래도 여러분이 그걸 정확하게 알아야 하니까 보충해서 설명하겠습니다. 예수님이 자신을 위해서는 아무런 기적도 행하지 않으셨다는 사실을 알고 계시나요? 오히려 그는 그런 초능력인 일과는 정반대되는 십자가에 처형당하셨습니다. 십자가는 가장 무능력한 사건입니다. 놀랍게도 그 무능력한 사건이 메시아에게 일어났습니다. 그것이 구원의 길이었습니다. 큰 기적만이 아니라 오히려 그것과 정반대되는 십자가도 역시, 아니 그것만이 구원 사건이라는 뜻입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에게만 참된 메시아적 구원이 일어났으며, 앞으로 그를 통해서 완성될 것입니다.
보충설명으로 머리만 더 복잡하게 되었거나, 아니면 뻔히 알고 있는 이야기를 구구하게 설명한 건 아닌가 모르겠군요. 그렇다면 직접적으로 말씀을 드리는 게 좋겠습니다. 우리는 대개 믿음을 가시적인 성과에서만 확인하려고 합니다. 병이 낫고, 돈을 잘 벌고, 출세하고, 교회가 부흥하는 것으로만 하나님을 경험하려는 경향이 큽니다. 큰 정도가 아니라 절대적입니다. 한 가지 일을 처리하면 다음 일을 계획합니다. 죽을 때까지는 우리는 그런 방식으로 신앙의 강도를 확인합니다. 예수님을 통해서 장애를 고친 오늘 본문의 주인공이 그 뒤로 어떻게 살았을지 생각해보십시오. 직장을 얻었거나 결혼을 해서 가정을 이루고 아이들도 낳았을지 모릅니다. 이것으로 그의 인생이 완전히 달라졌을까요? 장애 치유로 완전히 구원을 받은 것일까요? 아닙니다. 그런 모든 것들은 일시적입니다. 결혼도 그때뿐입니다. 멋진 집도 그때뿐입니다. 여러 가지 다른 일들로 이전보다 더 힘들어질 수 있습니다. 듣지 못하고 말하지 못할 때가 훨씬 좋았다는 마음이 들 순간도 불현듯 찾아올지 모릅니다. 그래서 지난날 장애를 고침 받았듯이 모든 인생의 문제를 해결받기 위해서 다시 예수님을 찾습니다. 이런 신앙생활은 말을 더듬는 상태와 비슷합니다.
메시아 경험
여기서 무엇이 문제일까요? 예수님을 경험한다는 것이 무엇인지 모르고 공연한 것에 마음을 두고 있다는 게 대답입니다. 정확히 말해서 예수를 메시아로 경험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기껏해야 예수님을 마술사, 심리치료사, 도덕선생, CEO나 리더로만 경험합니다. 기분 나쁘게 생각하지 마세요. 여러분 모두가 그렇다는 뜻은 아닙니다. 적지 않은 분들이 예수님을 실제로 메시아로 경험하고, 그래서 매순간 놀라워하면서 그분을 찬양하면서 살아가리라고 봅니다. 그런 분들은 주마가편의 의미로 이 설교를 들으시면 됩니다.
예수님을 메시아로 경험한다는 것이 무엇일까요? 예수님에게서 메시아적인 사건이 일어났다는 사실을 이해하고 거기에 자신의 운명을 거는 것이 그 대답입니다. 메시아적 사건은 곧 구원이며 생명입니다. 오늘 본문의 키워드로 말씀드린다면 예수님을 통해서 ‘열림’을 경험하는 것입니다. 닫힘의 세계에서 열림의 세계로 나가는 것입니다. 열림은 생명의 특성입니다. 모든 생명은 주변 세계로 열려 있습니다. 그것이 단절되면 생명은 끝장입니다. 생물학적인 차원에서 우리는 세상에서 음식을 공급받고, 공기를 들이마십니다. 세상으로 열려 있다는 뜻입니다. 영적인 차원에서 우리는 하나님에게 열려 있어야 합니다. 숨을 쉬지 않으면 죽듯이 하나님의 숨을 들이마시지 않으면 사람은 영적으로 죽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을 향해 열려 있는 문입니다. 그 문을 통해서 우리는 하나님과 연결됩니다.
영화 한편을 소개하겠습니다. 산제이 일라 반살리 감독의 <블랙>은 시각장애와 청각장애를 동시에 앓는 8살 소녀 미셸 맥날리가 데브라이 사하이 선생님을 만나서 빛을 발견한다는 영화입니다. 이 영화는 헬렌 켈러의 삶에서 예술적 동기를 얻었습니다. 헬렌 켈러가 어둠의 세계로부터 빛의 세계로 들어가는 순간과 미셸이 경험한 그 순간이 똑같습니다. 미셸은 손바닥 촉감으로 알파벳을 배웠지만 그것이 무슨 뜻인지 몰랐습니다. 언어와 사물이 미셸의 인식과 사유에서 분리되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어느 날 사하이 선생님은 미셸을 분수대의 물에 빠뜨립니다. 거기서 허우적거리던 미셸은 그 순간 어떤 영감에 사로잡힙니다. 선생님은 그의 손바닥에 water이라는 알파벳을 써줍니다. 미셸은 모든 사물에 이름이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나무, 풀, 아버지, 어머니, 선생님이라는 단어가 어떤 구체적인 대상을 가리킨다는 사실 말입니다. 모든 게 어둠, 블랙이었던 그의 영적인 세계가 빛으로 나오는 순간이었습니다. 그 뒤로 손에 닿은 모든 것들이 그녀에게 말을 걸어옵니다. 선생님보다 먼저 눈이 내리는 것을 느낍니다. 세계가 그렇게 존재한다는 사실 안으로 깊이 뛰어든 것입니다. 세계가 열린 것입니다.
그 영화에서 유명한 경구가 나옵니다. “모든 사람은 하나님 앞에서 블랙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을 본 사람은 없기 때문이다.” 세상을 눈으로 보면서도 여전히 어둠에서 사는 사람이 있는 반면에 세상을 보지 못하지만 빛을 보는 사람이 있다는 뜻이겠지요. 물론 장애와 가난은 불편합니다. 그러나 그 방식으로도 얼마든지 빛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이 지구 곳곳에, 인간 경험의 가장 세밀하고 어두운 곳에 편만하시기 때문입니다. 역설적으로 멀쩡한 눈과 귀와 사지를 갖고 있으면서, 물질적으로 풍요로우면서도 그것에만 전적으로 매달려 살기 때문에 그것 너머의, 그것의 깊은 세계와 단절될 수 있습니다. 오히려 하나님과 멀어질 수 있습니다. 불행한 일이지만 그런 일들은 신자들에게도 흔하게 일어납니다.
<블랙>에서 중요한 사실이 남아 있습니다. 미셸은 빛을 보았지만 여전히 장애를 갖고 살아야 했습니다. 그가 살아가는 방식이 바뀐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모든 게 불편합니다. 모든 게 여전히 어둡습니다. 예수님을 통해서 빛을 본 우리도 여전히 이 세상의 온갖 부조리와 궁핍을 안고 살아야 합니다. 그것만이 아니라 우리의 인간적인 한계를 벗어날 수도 없습니다. 그 무게가 얼마나 무거운지 예수님을 통해서 경험한 구원의 기쁨을 때때로 망각할 정도입니다. 이게 우리의 현실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깨어 있기만 한다면, 주님의 말씀과 성찬을 간직한 교회 공동체와 연결되어 있기만 하다면 그 생명의 빛이 결국은 우리의 존재 전체를 휩쌀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마지막으로 묻습니다. 예수님을 통해서 하나님의 나라가 열리는 경험이 있으신가요? 아니면 여전히 닫혀 있나요? 열림의 경험은 억지로 가르치거나 배울 수는 없습니다. 그것은 우리의 노력이라기보다는 오히려 하나님의 은총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경험이 있는 분들은 그분의 은총에 감사하십시오. 없는 분들은 은총을 구하십시오. (2009.9.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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