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제사장인 예수 그리스도
히 4:12-16, 창조절 일곱째 주일, 2018년 10월14일
12.하나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활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판단하나니 13.지으신 것이 하나도 그 앞에 나타나지 않음이 없고 우리의 결산을 받으실 이의 눈 앞에 만물이 벌거벗은 것 같이 드러나느니라 14.그러므로 우리에게 큰 대제사장이 계시니 승천하신 이 곧 하나님의 아들 예수시라 우리가 믿는 도리를 굳게 잡을지어다 15.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의 연약함을 동정하지 못하실 이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똑같이 시험을 받으신 이로되 죄는 없으시니라 16.그러므로 우리는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
현재 여러분의 삶을 끌어가는 에너지는 무엇인가요? 이것은 현재 가장 큰 관심사가 무엇이냐, 하는 질문이기도 합니다. 각자 다 다릅니다. 건강을 잃은 사람에게는 건강 회복이 가장 중요합니다. 이런저런 일로 재판을 받고 있는 분들은 그것만 눈에 들어오겠지요. 결혼이나 이혼을 앞둔 경우나 자식에게 어려움이 생긴 경우에 그것만이 삶을 지배합니다. 교회도 비슷합니다. 서울의 한 대형교회는 지금 세습 문제와 800억 비자금 건에 모든 교우들의 신경이 쏠려있을 겁니다. 좋은 일이나 언짢은 일이나 우리는 발등에 떨어진 불을 끄는 방식으로 평생을 보낸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여러분들이 그런 문제를 지혜롭게 대처하고 해결하면서 살아가기를 바랍니다.
아무리 현안을 잘 처리한다고 해도 인생살이의 모든 문제가 일시에 해결되지는 않습니다. 한 가지 문제를 해결하면 다른 문제가 벌어집니다. 더 근본적으로는 걱정거리가 사라져도 그것으로 행복이 보장되지 않습니다. 그 어떤 경우에도 흔들리지 않고 늘 행복을 만끽한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정신 이상자가 아닌 한 여기서 예외는 없습니다. 이런 인생살이에서 어떻게 사는 것이 최선일까요? 우리의 영혼을 사로잡을 수 있는 절대적인 세계로 들어가는 것이 최선입니다. 영적으로 어른이 되는 것입니다. 어렸을 때는 친구 사이에서 벌어지는 작은 일로 속상해하지만 어른이 되면 다릅니다. 어린아이들이 심각하게 대하던 문제들이 시시해보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기독교인들은 성경의 세계를 그런 절대적인 것으로 알고 믿는 사람들입니다. 다른 것들은 우리의 삶에서 점점 영향력을 잃습니다. 이런 경험이 여러분들에게 실제로 있는지를 돌아보십시오.
하나님의 말씀
오늘 설교 본문 첫 구절인 히 4:12절은 성경의 세계가 무엇인지, 그 능력이 무엇인지를 정확하게 묘사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활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판단하나니 ... ” 여기서 하나님의 말씀은 단순히 문자로 된 성경이 아니라 하나님이 창조하신 만물의 근원을 가리킵니다. 헬라어 성경은 ‘호 로고스 투 데우’라고 표기했습니다. 로고스는 요 1:1절에도 나옵니다.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로고스는 이성, 언어, 합리성, 근거 등등을 의미합니다. 이걸 확대 해석하면 하나님 나라라고 할 수 있고, 좁혀서 해석하면 성경이고, 직접적으로 해석하면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더 넓게 보면 하나님 자체라고 해도 좋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묘사하는 세 가지 형용사가 나옵니다. 생생하고, 강력하고, 날카롭습니다. 그래서 혼과 영을 갈라내고, 관절과 골수를 갈라내며, 마음의 생각과 의도까지 밝혀냅니다.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자신의 생각을 숨길 수 없다는 뜻입니다. 이런 하나님 말씀에 가장 가까운 것은 양심입니다. 양심 앞에서는 아무도 자기를 숨길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은 양심에 한정되지는 않습니다. 양심은 삐뚤어질 수도 있습니다. 양심이 과민하면 오히려 우리의 삶이 왜곡되거나 파괴될 수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보는 게 가장 정확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의 생각과 의도까지 들춰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바로 어둠을 밝히는 빛이기 때문입니다. 어둠 속에서는 아무리 좋은 일이라 하더라도 어둠에 속할 뿐입니다. 조금 더 어둡거나 조금 덜 어두운 차이만 있을 뿐이지 근본적으로는 아무 차이가 없습니다. 앞에서 말한 것처럼 일상에 묶이면, 즉 일상의 과잉에 떨어지면 골치 아픈 문제가 해결되어도 근본적인 해결은 요원한 거와 같습니다. 중요한 것은 빛이신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 되는 것입니다. 거기서 우리는 무엇이 우리의 생각인지, 무엇이 우리의 실제 의도인지를 정확하게 알 수 있습니다.
사람들은 자신의 생각과 의지가 무엇인지를 잘 안다고 생각합니다. 세상에서 배운 것을 기준으로 그렇게 생각합니다. 가장 간단하게는 돈이 많아야 하고, 다른 이들에게 존경을 받아야 하고, 다른 사람보다 자기가 잘나야 행복하다고 생각합니다. 그게 자신의 생각이자 뜻이라고 여기는 겁니다. 심층심리학이 이미 밝혀주고 있듯이 우리의 행동은 겉으로 드러난 의식보다는 숨은 무의식에 더 큰 영향을 받습니다. 간혹 어떤 사람을 보면 공연히 기분이 나쁠 수 있습니다. 그럴 이유가 없는데도 기분이 나쁘다면 무의식에 어떤 좋지 않은 경험이 숨어 있다는 뜻입니다. 어떤 상황을 접하면 이유 없이 불안해지거나 충동적으로 행동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게 심하면 공황장애를 겪습니다. 무슨 말씀인가요? 우리는 겉으로 멀쩡하고 나름 똑똑해도 자기의 정체를 정확하게 아는 게 아닙니다. 자신의 생각과 의지와 판단이 자신도 모르게 왜곡될 가능성이 인간에게는 큽니다. 이건 특별히 이상한 사람들만이 아니라 정도의 차이만 있지 모든 사람들에게 나타납니다. 이런 점에서 기독교는 인간을 죄인이라고, 스스로 자기를 구원할 수 없다고 주장합니다. 인간학적으로도 옳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사람의 생각과 뜻을 판단한다는 말은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설 때 실제의 자신이 누구인지가 드러난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일종의 거울입니다. 깨끗한 거울 앞에 서면 자신의 모습이 나타납니다. 자신이 지금 옷을 바로 입었는지, 머리는 빗었는지, 얼굴에 볼펜 자국은 없는지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거룩한 거울 앞에 선다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가 누군지를 알고 믿는 것입니다. 즉 예수 그리스도와 대면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진리와의 대면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특히 신약성경은 예수가 누군지를 반복해서 설명합니다. 그런 설명에 귀를 기울이기는 쉽지 않습니다. 자신의 인식과 판단 능력에 아무런 문제가 없다고 여기기 때문입니다. 뭔가를 안다는 확신만큼 큰 착각도 없습니다. 차라리 나는 아무 것도 모른다고 여기고 예수에 대한 성경의 설명에 귀를 기울이는 것이 실제의 자기를 찾는 최선의 길입니다. 저는 그 길을 통해서 ‘나’가 누구인지를 좀더 잘 알게 되었고, 지금도 더 깊이 알아가는 중입니다.
대제사장
오늘 설교 본문에 속한 히 4:14절부터 예수가 누군지에 대한 특별한 설명이 나오기 시작해서 10장까지 계속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대제사장으로 묘사했습니다. 14절을 읽겠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큰 대제사장이 계시니 승천하신 이 곧 하나님의 아들 예수시라 우리가 믿는 도리를 굳게 잡을지어다.
‘큰 대제사장’이라는 표현은 약간 어색합니다. 대제사장이라는 단어에 이미 크다는 의미가 들어가 있는데, 다시 앞에 ‘큰’이라는 형용사가 들어갔습니다. 영어 성경은 ‘a great high priest’라고 번역했습니다. 우리말로 직역하면 ‘위대한 최고위 제사장’입니다. 유대교에서 대제사장은 예루살렘 성전에서 제사 업무를 총괄하는 사람입니다. 오늘날로 말하면 로마가톨릭교회의 교황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세속의 질서로 말한다면 대법원장이 이에 해당됩니다.
유대교에서 제사를 드리는 목적은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감사와 찬양이고, 다른 하나는 속죄입니다. 감사와 찬양은 하나님의 창조를 향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자연을 창조하셨을 뿐만 아니라 우리 사람을 창조하셨습니다. 창조하셨기에 우리의 삶까지도 하나님이 책임지십니다. 바람이 불고 비가 오고, 곡식이 자라고, 자식을 낳고 키웁니다. 그 모든 것은 창조의 능력에 의해서 진행됩니다. 유대인들은 제사를 드리면서 창조의 하나님께 감사를 드리고 찬양을 바쳤습니다. 제사에서 핵심은 소나 양을 잡아서 하나님께 희생 제물로 바치는 희생제사입니다. 유대인들은 자신들의 실존을 죄로 보았습니다. 크고 작은 죄가 자신들의 삶을 지배하고 있다는 통찰입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용서를 받지 못하면 죽음을 면할 수 없습니다. 용서를 받기 위해서 자신을 하나님께 드려야하지만 동물을 잡아서 대신 드렸습니다. 이런 일을 맡은 사람이 대제사장이었습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예수 그리스도야말로 위대한 대제사장이라고 주장합니다. 유대교에서는 대제사장이 여럿이지만, 기독교에서 대제사장은 오직 한 분 예수 그리스도뿐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유일하신 대제사장인 이유는 예수님만이 승천하신 분이기 때문입니다. ‘승천’은 적당한 번역이 아닙니다. 승천은 손오공이 구름을 타고 공중 곡예 하는 것처럼 들립니다. 사도신경에는 ‘하늘에 오르시어’라고 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은 공생애 중에 하늘나라가 가까이 왔다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늘나라가 이미 여기에 왔다면 예수님 역시 공중 어딘가로 올라갈 필요는 없습니다. 예수님이 하늘에 올라가셨다는 말은 하늘로 표상되는 절대 생명으로 숨기셨다는 뜻입니다. 사도신경은 하늘에 오르신 예수님이 ‘하나님 아버지 우편에 앉아 계시다.’라고 묘사했습니다. 그게 바로 절대 생명으로 숨기셨다는 뜻입니다. ‘숨기셨다.’는 말들이 애매하게 들릴지 모르겠습니다. 오늘 예배드리는 이 순간과 이 사건은 10년 전으로 돌아가서 보면 숨긴 것입니다. 지금 우리의 입장에서 볼 때 10년 후의 여러분과 우리 모두에게 일어날 일들은 은폐된 것입니다. 신약성경은 은폐된 생명이 발현되는 순간에 예수님이 하늘로부터 이곳으로 다시 오신다고 믿었습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하늘로 오르신 예수님을 또 하나의 다른 개념으로 설명합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그것입니다. 하나님은 생명 창조자이시니 예수에게서 생명 구원이 실현되었다면 당연히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표현해도 틀린 게 아닙니다. 원래 하나님의 아들, 즉 신의 아들이라는 표현은 유대의 왕들, 플라톤이나 피타고라스 같은 현자들, 헬레니즘 시대의 예언자들과 기적 행위자들, 그리고 후대 로마 통치자들에게 붙여졌던 칭호입니다. 초기 기독교는 이런 일반적인 의미를 거부하고 나사렛 예수님에게만 이 칭호를 붙였습니다. 예수님만이 인류에게 생명을 주는 분이라는 사실을 경험하고 믿을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에게 유일하고 위대한 대제사장입니다.
이런 설명이 실감 나지 않을 수 있습니다. 도대체 예수를 통해서 생명을 얻는다는 것이 뭐냐, 하는 질문입니다. 예수 믿으면 부자가 된다거나 불치병이 순식간에 치료된다거나 다른 사람들보다 오래 산다거나 마음에 완전한 평화가 주어진다면 모를까, 예수 믿으나 믿지 않으나 다른 게 눈에 안 들어오니 그런 질문을 할 만합니다. 어떤 이들은 확신을 얻기 위해서 열정적으로 진행되는 목요 심야집회에 따라다니고 간증거리를 찾아다닙니다. 그런 것을 보면 뭔가 뜨거운 경험이 주어지긴 할 겁니다. 그러나 기적과 표적이 아무리 많아도 그것이 믿음의 토대가 되는 게 아니라는 걸 알아야합니다. 예수님의 운명 자체가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는 기적이며 표적입니다. 대제사장인 그의 운명에서 우리는 하나님께 감사하고 찬양하며 속죄의 은총에 휩싸입니다. 그를 통해서 절대 생명인 하나님과 결속된다는 뜻입니다. 이 사실이 여전히 눈에 들어오지 않는 분들은 안타깝지만 소리꾼을 찾아와서 소리를 배우겠다고 나섰으나 득음에 이르지 못한 사람과 같습니다.
은혜의 보좌
히브리서 기자는 ‘믿음의 도리’를 굳게 잡으라고 충고했습니다. 잡는다고 해서 저절로 잡히는 게 아니라는 사실을 그도 알고 있었을 겁니다. 당시에도 믿음을 포기하는 사람들이 제법 많았습니다. 모든 궁극적인 진리는 단숨에 깨달아지는 게 아닙니다. 앞에 나타났다가 순식간에 사라지곤 합니다. 그래서 대다수는 중간에 포기합니다. 그래도 어쩔 수 없고, 또 괜찮기도 합니다. 모두가 복음의 중심으로 들어갈 수 없으니 주변에 얹혀서 가도 됩니다. 그러나 가능하면 중심으로 들어가야 합니다. 득음에 이르지 못하고 남의 소리를 듣고 즐거워하기만 해도 좋지만 자신이 득음으로 들어가면 더 좋은 거 아니겠습니까. 믿음생활에서의 득음은 하루 이틀에 해결되지 않습니다. 꾸준한 수행이 필요합니다. 그걸 히브리서 기자는 16절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루터 성경이 내용을 좀더 충실하게 전달합니다.
그러므로 기쁘게 은혜의 보좌로 나아갑시다. 그러면 우리는 자비를 얻을 것이며, 우리에게 도움이 절실히 필요할 때에 은혜를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위 구절에 특별한 표현이 나옵니다. ‘은혜의 보좌’가 그것입니다. 성경은 하나님이 앉아계신 곳을 보통 보좌라고 표현합니다. 은혜의 보좌는 은혜가 시작되는 원천이라고 보면 됩니다. 이런 표현을 21세기 현대인들은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냉소적으로 보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기독교인들 중에서도 교회생활은 하지만 은혜의 보좌에는 아무 관심이 없는 이들도 있습니다. 그럴만합니다. 현대는 세속의 원리가 완전히 지배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자연과학의 발전 앞에서 정신을 차릴 수 없습니다. 더 많이 소유하고 더 즐겁게 살아야 한다는 강박에 사로잡힙니다. 서로 간의 경쟁은 더 심해졌습니다. 낙오되지 않으려고 끝없이 자신을 닦달합니다. 그래도 불안을 떨쳐낼 수 없습니다. 더 자극적으로 자신을 긍정하고 자신을 사랑하고 자신에게 집중하라고 가르칩니다. 방탄소년단의 노랫말은 대부분 이런 내용입니다. 그게 오늘날 청소년들에게 강력한 복음으로 자리를 잡았습니다. 그런 방식으로 그들이 영혼의 자유를 누린다면, 생명을 누린다면 좋겠지만 그럴 가능성은 크지 않습니다. 현대인들은 영혼의 자유가 무엇인지를 아예 생각하지도 않습니다. 다른 길이 눈에 안 보이니 호랑이 등에 탄 사람처럼 떨어지지 않기 위해서 정신 바짝 차리고 무조건 앞을 향해서 달려갈 뿐입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은혜의 보좌에서 하나님으로부터 두 가지 삶의 능력을 얻을 수 있다고 말합니다. 하나는 하나님의 자비이고, 다른 하나는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하나님의 자비와 은혜는 우리를 근본으로부터 살리는 거룩한 능력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있는 그대로 받아주신다는 뜻이기 때문입니다. 이 사실을 안다면 세상과 자신을 보는 눈이 완전히 달라집니다. 사람들에게서 인정을 받지 않아도 아쉬울 게 없습니다. 외로워도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여러분은 실제로 하나님의 자비와 은혜를 느껴보셨는지요. 이런 현상을 문학적으로 표현하면 석양 노을을 보는 순간에 존재의 환희와 신비에 휩싸이는 것과 비슷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너무 많은 것으로 영혼을 소비하지 마십시오. 어떻게 살아야 성공한 인생인지도 너무 따지지 않는 게 좋습니다. 세상에서 배운 처세술은 그저 참고만 하십시오. 오직 한 가지 사실만 확실하게 붙들면 됩니다. 대제사장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자비와 은혜의 유일한 통로라는 사실이 그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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