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 하나도 돌 위에 남지 않는 날!
눅 21:5-19, 창조절 열둘째 주일, 2019년 11월17일
어떤 사람들이 성전을 가리켜 그 아름다운 돌과 헌물로 꾸민 것을 말하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 보는 이것들이 날이 이르면 돌 하나도 돌 위에 남지 않고 다 무너뜨려지리라 그들이 물어 이르되 선생님이여 그러면 어느 때에 이런 일이 있겠사오며 이런 일이 일어나려 할 때에 무슨 징조가 있사오리이까 이르시되 미혹을 받지 않도록 주의하라 많은 사람이 내 이름으로 와서 이르되 내가 그라 하며 때가 가까이 왔다 하겠으나 그들을 따르지 말라 난리와 소요의 소문을 들을 때에 두려워하지 말라 이 일이 먼저 있어야 하되 끝은 곧 되지 아니하리라 또 이르시되 민족이 민족을, 나라가 나라를 대적하여 일어나겠고 곳곳에 큰 지진과 기근과 전염병이 있겠고 또 무서운 일과 하늘로부터 큰 징조들이 있으리라 이 모든 일 전에 내 이름으로 말미암아 너희에게 손을 대어 박해하며 회당과 옥에 넘겨 주며 임금들과 집권자들 앞에 끌어 가려니와 이 일이 도리어 너희에게 증거가 되리라 그러므로 너희는 변명할 것을 미리 궁리하지 않도록 명심하라 내가 너희의 모든 대적이 능히 대항하거나 변박할 수 없는 구변과 지혜를 너희에게 주리라 심지어 부모와 형제와 친척과 벗이 너희를 넘겨 주어 너희 중의 몇을 죽이게 하겠고 또 너희가 내 이름으로 말미암아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을 것이나 너희 머리털 하나도 상하지 아니하리라 너희의 인내로 너희 영혼을 얻으리라(눅 21:5-19).
지난 화요일(11월12일) 밤 7시 30분에 범어성당 드망즈 홀에서 열린 오카리나 연주회에 다녀왔습니다. 인근에서 몇몇 교우들과 함께 저녁밥을 먹고 걸어서 천천히 범어성당 마당으로 들어갔습니다. 모처럼 깊은 가을밤 정취를 대구에서 경험했습니다. 말은 여러 번 들었으나 실제로 그곳에 가본 건 그날이 처음이었습니다. 이미 날이 어두워진 마당에서 우리는 잠시 주변을 빙 둘러보았습니다. 은은한 조명을 받는 붉은 벽돌의 본당 건물이 우리를 압도하듯이 우뚝 섰고, 주변에 몇몇 부속 건물이 둘러서 있었습니다. 한순간 우리가 지금 유럽의 어느 수도원 마당에 들어와 있는 게 아닌가 하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본당 안으로 들어가 보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당연히 닫혀있을 거라는 생각과 공연 시간이 다가와서 그냥 연주회장으로 발걸음을 옮겼습니다. 범어성당에서 받은 인상이 강렬해서 나중에 저의 안사람에게 “만약 내가 처음으로 종교를 택해야 할 상황이라면 범어성당 교인이 되고 싶은 마음이 들더라.”라고 말했습니다. 품격 있는 종교건물이 사람에게 종교심을 불러일으키는 건 자연스러운 현상입니다.
예수 님 당시의 예루살렘 성전은 수십 년에 걸쳐서 건축 중이었습니다. 바로 앞에서 말씀드린 범어성당이나 서울의 ‘사랑의 교회’ 건물을 상상하면 됩니다. 예루살렘 성전 안에 잠시 머무는 예수 님에게 어떤 사람이 성전 건물을 입에 침이 마르도록 자랑했습니다. 그는 예수 님도 맞장구를 치실 거라고 기대했겠지만 예수 님은 예상 밖의 말씀을 하셨습니다. 오늘 설교 본문에 속한 눅 21:6절입니다.
너희 보는 이것들이 날이 이르면 돌 하나도 돌 위에 남지 않고 다 무너뜨려지리라.
이 말씀은 당시에 황당하게 들렸을 겁니다. 그 앞에 서면 모두가 감탄사를 연발할 수밖에 없을 정도로 예루살렘 성전은 품격이 있고 화려하면서도 종교적 상징이 가득한 건물이면서, 유대인들의 민족적 정체성을 나타내는 건물이기 때문입니다. 앞서 예루살렘 성전은 두 번이나 붕괴한 적이 있습니다. 그런 순간을 유대인은 뼈아프게 생각했습니다. 앞으로는 무슨 일이 있어도 예루살렘 성전이 무너지게 하지 않겠다고 모두 다짐했을 겁니다. 지금 한창 건축 중이기에 이 건물이 무너진다는 것은 아무도 생각할 수 없었습니다. 예수님은 무엇을 근거로, 무슨 의미로 예루살렘 성전이 파멸될 것이라고 말씀하신 걸까요?
아는 분들이 계시겠지만 지금 예수님이 말씀하신 예루살렘 성전, 더 정확하게 말하면 제3 성전이라 불리는 헤롯 성전은 예수 님이 세상을 떠나신 뒤 40년쯤의 세월이 흘렀을 때 로마 티투스 장군에 의해서 파괴되었습니다. 로마와 유대의 전쟁이 끝난 기원후 70년에 이 성전은 돌 하나도 돌 위에 남지 않게 되었습니다. 바로 이 시기에 기독교는 유대교에서 벗어나서 독자적인 길을 가게 되었습니다. 신약성경에 나오는 네 권의 복음서는 모두 기원후 70년 이후에 기록된 문서입니다. 예루살렘 성전 붕괴는 초기 기독교인들에게도 충격적인 사건이었습니다. 세상이 몰락하는 징후로 읽혔습니다. 누가복음 기자는 예루살렘 성전 붕괴를 목격한 상태에서 예수 님의 예루살렘 성전 순례 사건을 기록하는 중입니다.
예수 님이 40년 후에 일어날 전쟁과 예루살렘 성전 붕괴를 점쟁이처럼 예측하셨다고 말할 수는 없으나 당시 문명의 가장 화려한 꽃이었던 예루살렘 성전의 운명을 분명하게 인식하고 있었다는 사실은 부정할 수 없습니다. 누가복음 기자만이 아니라 마태복음 기자와 마가복음 기자도 이 예수 님이 말씀을 똑같은 내용으로 전한다는 사실에서 이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복음서 기자들의 영혼을 사로잡은 생각은 세상의 묵시적 종말입니다. 하나님의 직접적인 통치가 시작하는 묵시적 종말이 오면 예루살렘 성전은 무의미해집니다. 그 종말을 10, 11절이 이렇게 묘사합니다.
민족이 민족을, 나라가 나라를 대적하여 일어나겠고 곳곳에 큰 지진과 기근과 전염병이 있겠고 또 무서운 일과 하늘로부터 큰 징조들이 있으리라.
이런 말씀이 현대인들에게는 진지하게 들리지 않을 겁니다. 지금 세상은 예루살렘 성전보다 더 크고 장엄하고, 더 화려하고 품격 있는 문명을 발전시키는 중입니다. 평균 수명도 늘고, 먹을거리도 더 많아지고, 옛날에는 꿈도 꾸지 못할 해외여행 기회도 쉽게 주어집니다. 일본에 가끔 지진과 해일이 일어나고 우리나라에 돼지 열병이 돌고 젊은이들은 생존을 힘겨워하지만, 전체적으로 보면 묵시적 종말의 조짐은 전혀 없습니다. 돌 하나도 돌 위에 남지 않는다기보다는 돌 위에 돌이 차곡차곡 쌓이면서 사람들의 자신감이 넘치고 있으니 예수님의 말씀은 뭔가 현실감이 떨어지는 것으로 들립니다.
6절에서 예수님은 ‘날이 이르면’이라고 분명하게 짚으셨습니다. 여기서 ‘날’은 하나님이 정하신 때입니다. 우리가 연대기로 계산하는 시간이 아닙니다. 예를 들어 남북통일 문제를 생각해보십시오. 국내외 정치 상황을 종합적으로 고려하여 2050년이 되어야 통일할 수 있다고 분석하는 정치인이나 사회학자가 있을 겁니다. 인공지능이 이런 문제도 푼다면 다른 답을 내겠지요. 이런 계산은 모두 연대기입니다. 성경이 말하는 ‘날’은 차원이 다릅니다. 100년 후일 수도 있고, 10년 안일 수도 있습니다. 어쩌면 내년일 수도 있습니다. 우리는 연극 무대에서 자기 역할을 연기하는 배우와 같습니다. 결론이 나온 대본에 따라서 연기하는 게 아니라 매번 달라지는 대본을 따라야 하는 배우입니다. 그 대본은 감독에 의해서 결정됩니다. 그 연극의 마지막은 감독만 압니다. 감독은 바로 성경이 말하는 역사의 주인이신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시간에 따라서 우리의 삶과 역사에 개입하십니다. 이를 성경은 하나님의 ‘때’라고, 오늘 본문에 따르면 ‘날’이라고 표현했습니다. 그런 순간이 오면 돌 하나도 돌 위에 남지 않습니다.
이런 표현을 기분 나쁘게 받아들이는 사람도 있습니다. 우리를 꼭두각시로 만드는 거냐고, 세상이 완전히 망하는 게 하나님의 뜻이냐고 말입니다. 그런 생각은 성경을 피상적으로만 아는 겁니다. 다른 건 접어두고 돌 하나도 돌 위에 남지 않는다는 표현이 우리를 좌절시키는 말씀이 아니라는 점은 분명하게 짚어야겠습니다. 묵시적 종말 현상은 물론 두렵기는 합니다. 지진과 기근과 전염병이 창궐하면 누구나 떨지 않을 수 없습니다. 고대인들은 이런 자연재해를 신의 벌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이런 자연재해 앞에서 그들은 자신들이 얼마나 무기력한지를 알고 있었습니다. 현대문명은 이런 자연재해를 완전하지는 않지만, 어느 정도는 극복했습니다. 지진이나 화산 폭발, 태풍과 폭풍을 예측하기도 하고 발생했을 때 첨단 기술을 통해서 빨리 대처합니다. 과학이 충분히 발전하지 못하기에 해결하지 못하는 사건이 있지만 언젠가는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 거로 사람들은 믿습니다. 그런 기대가 충족될지는 확실하지 않습니다. 요즘 기후 변화 문제가 국제 관계에서도 크게 주목받았습니다. 현재와 같은 속도로 지구의 평균 온도가 올라가면 빙하가 녹으면서 해수면이 올라가고, 내륙의 많은 부분이 사막화하고, 생태계의 큰 혼란이 온다는 겁니다.
저는 지금 거시적 차원에서 지구 생태계 문제를 말씀드리고 싶지는 않습니다. 그런 문제는 개별 기독교인이 해결하기 어렵습니다. 이에 관해서 학문적으로 연구하는 전문가 집단이나 여론을 만들어가는 정치 집단도 있습니다. 기독교 처지에서는 교단이나 남한 교회 전체를 대표하는 기관이 사회 선교의 관점으로 대처하는 게 최선입니다. 물론 기독교인 개인도 문제의 심각성은 당연히 알고 있어야 합니다. 저는 오늘 본문이 묘사하는 묵시적 종말에 관한 메시지를 기독교인 개인이 자신의 실존에서 어떻게 받아들이고 삶의 중심으로 붙들어야 하는지만 좀 더 구체적으로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즉 개인의 묵시적 종말 신앙이 무엇이냐, 하는 질문입니다.
지진과 기근과 전염병과 무서운 일과 하늘의 큰 징조는 오늘 여기 우리 개인의 일상에서 벌어집니다. 땅이 흔들리는 경험은 우리의 삶에서 종종 일어납니다. 실연당하거나 사업이 망하거나 자신의 부끄러움이 발각되는 경우에는 지진이 일어난 거와 비슷한 일이 벌어집니다. 이런 불상사가 일어나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나이가 들면 걷지 못하게 될 겁니다. 지팡이에 의지하거나 나중에는 휠체어를 타고, 그것도 안 되면 햇살 좋은 거실 한 귀퉁이 의자에 앉아서 시간을 보내다가 마지막 얼마 동안은 자리를 보존하고 누워지냅니다. 이런 일련의 과정은 지진 경험입니다. 기근과 전염병도 마찬가지입니다. 죽을 삼키기 힘들 정도로 아파본 적이 있으신가요? 건강한 사람도 언젠가는 밥을 먹지 못하는 순간이 옵니다. 소화가 안 될 수도 있고, 식도가 막힐 수도 있습니다. 좀 멀리 내다보면 지구가 먹을거리를 생산하지 못할 순간이 온다는 사실도 분명합니다.
오늘은 2019년 추수감사절입니다. 어떤 마음으로 오늘 예배에 오셨습니까? 한해 농사를 잘 지어서 풍년 든 것에 대한 감사한 마음이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우리 교우들은 전업 농사꾼이 아니지만, 마음만은 농사꾼의 그것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산업화 이후로 현대인들은 농사까지도 산업으로 여깁니다. 투자와 생산의 메커니즘으로 농사를 생각하기에 농사가 바로 생명의 본질이라는 사실을 말로만 알지 실제로 느끼지 못합니다. 스마트폰 시대 젊은이들은 스마트폰에서 쌀도 나오고 과일도 나온다고 생각할 겁니다. 가상 현실에 익숙해졌기에 씨가 땅에 떨어져서 싹이 나고 잎과 꽃을 피워 결실을 보는 과정이 얼마나 신비로운지, 우리 인간도 그런 과정에 포함된다는 사실을 눈치채지 못하는 겁니다. 이런 방식으로 계속 살면 아무리 좋은 집에서 고급스럽게 살아도 실재의 삶에서 점점 멀어집니다.
추수감사절은 풍년에 대한 감사를 새기는 날이 아닙니다. 그런 감사는 유대의 선지자들이 저항했던 바알 숭배입니다. 추수 감사의 본질은 흉년인데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우리의 생명을 지켜주신다는 사실에 대한 감사이자 찬양이며 희망이고 기도입니다. 이런 찬양과 기도는 돌 하나도 돌 위에 남지 않는 날이 온다는 사실에 대한 심각한 각성에서만 나옵니다. 공기가 허파로 들어가는 기도가 하루 이틀 다르게 좁아진다고 생각해보십시오. 식도가 좁아질 수도 있습니다. 아니 먹는 행위마저 기억나지 않는 상태에 떨어졌다고 생각해보십시오. 오늘 하루의 숨쉬기와 일용할 양식과 오늘의 이 예배가 황홀하게 다가올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돌 하나도 돌 위에 남지 않는다는 이 묵시적 종말 메시지가 어떤 이들에게는 죽음의 심판이겠지만 우리에게는 구원 소식입니다. 이런 신앙에서만 오늘 우리는 ‘살아있다.’라는 사실을 충만하게 경험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12절은 지진과 기근이라는 묵시적 종말이 시작하면 기독교인들이 박해를 받는다고 했습니다. 인간성이 말살되는 때입니다. 하나님을 거부하는 때입니다. 악이 보편화하는 때입니다. 어려운 이들을 외면하는 각자도생을 당연하게 여기는 때입니다. 이런 때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사람들은 박해당할 수밖에 없습니다. 돈이 지배하는 세상에 저항하다 보면 여러 가지 불이익을 당할 수 있습니다. 대다수 교회가 최고 가치로 여기는 교회 성장에 저항하는 교회 역시 현실적인 어려움을 당할 수 있습니다. 번듯한 교회당에 다니는 신자들에게서 대구 샘터교회 신자들은 지하 월세 교회당에 다니는 사람들이라는, 약간 조롱 섞인 말을 들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 님은 정말 놀라운 말씀을 제자들에게 주셨습니다. 14, 5절을 보십시오.
그러므로 너희는 변명할 것을 미리 궁리하지 않도록 명심하라 내가 너희의 모든 대적이 능히 대항하거나 변박할 수 없는 구변과 지혜를 너희에게 주리라.
절체절명의 순간에는 뭔가를 생각해서 대응할 수 없습니다. 속에 이미 들어있는 말과 행동이 저절로 나옵니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은 묵시적이고 종말론적인 절체절명의 순간을 늘 준비하는 사람으로 살기에 돌 하나도 돌 위에 남지 않는 상황을 미리 걱정할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를 파괴하는 대적이 거부할 수 없는 구변과 지혜를 제자들에게 주신다는 주님의 말씀이 바로 이를 의미합니다. 더 노골적으로 말씀드리면, 우리가 죽을 때 어떻게 대처할지 당황하지 않을 수 있다는 뜻입니다. 여러분도 다 그런 차원의 신앙인이 되고 싶겠지요. 이를 위해서는 우리의 평생 삶이 주님에게 연결되어 있어야 하고, 가능한 한 더 가까이 가야 합니다. 이런 영적인 수행 없이 ‘믿기만 하면 천국에 갈 거야.’라고, 또는 그때 가면 어떻게 되겠지, 하는 생각에 머물러 있다면 그 결정적인 순간에 추하거나 부끄러운 모습을 보이고 말 겁니다. 구변과 지혜가 내면에 없어서 말을 더듬든지 겁에 질리거나 자포자기하겠지요.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마지막으로 18절과 19절에서 결정적으로 큰 위로와 용기가 되는 말씀을 주셨습니다. 저는 이 말씀이 묵시적인 종말을 늘 마음에 두고 사는 우리에게 주는 복음이라고 생각합니다. 들어보십시오. 여러분의 영혼에 공명이 일어나면 여러분은 예수를 따르는 제자인 게 틀림없습니다.
너희 머리털 하나도 상하지 아니하리라 너희의 인내로 너희 영혼을 얻으리라.
놀라운 말씀입니다. 영혼의 눈이 밝지 않으면 읽히지 않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지진과 기근이 일어나고 기독교 신앙으로 인해서 박해받고, 16절과 17절에 따르면 가까운 사람들에게 배신당하고 미움을 받아도 우리의 머리털까지 손상당하지 않고 구원받는다고 했습니다. 머리털은 불에 닿기만 해도 없어질 정도로 약합니다. 머리털 하나도 상하지 않는다는 말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이 세상의 구원과 완전히 차원을 달리한다는 뜻입니다. 가장 기초적인 교리로 말씀드리면,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로 인해서 죄와 죽음으로부터 자유를 얻었습니다. 이 자유는 세상의 재물과 사회적 지위를 통해서 주어지는 약간의 위로가 아닙니다. 세상의 조건에 따라서 일희일비하는 게 아니라 하나님만이 주실 수 있는 안식을 누리는 자유입니다. 대개 기독교인들은 그런 자유와 안식을 누리고 싶으나 노력해도 잘되지 않으니 중도에서 아예 포기합니다. 왜 그럴까요? 오늘 본문 19절에 따르면 ‘인내’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신앙의 깊이로 들어가는 인내심이 없다는 뜻입니다. 물리학자가 되려는 사람이 미분과 적분을 공부하지 않으려는 모습과 같습니다. 신앙의 세계에서도 인내하지 않으면 생명을 얻지 못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우리는 2019년도 추수감사절 예배를 함께 드리고 있습니다. 참된 의미에서 추수감사절 예배에 참여하려면 여러분은 두 가지 사실을 진지하게 생각해야 합니다. 하나는 돌 하나도 돌 위에 남지 않는 순간이 곧 다가온다는 사실, 아니 이미 왔다는 사실입니다. 다른 하나는 그런 순간에도 예수의 제자들은 머리털 하나도 상하지 않기에 무슨 말을 할지 걱정하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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