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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타

두려움을 넘어서




두려움을 넘어서
눅 12:22-32

우연하게도 지난 86년 6월에 현풍에서 교회를 개척할 당시부터 지금
까지 계속적으로 장(場)이 서는 지역에서 살게 되었습니다. 현풍에 있을
때는 우리 교회인들 중에서 장날 장사를 나가는 분들이 있었기 때문에
비교적 자주 나갔습니다. 사람 사는 게 이런 것이구나 하고 느낄만한 풍
경이 참으로 많았습니다. 맑은 날은 맑은 대로, 비 오는 날은 비 오는 대
로, 날씨에 상관없이 아주 치열한 삶의 모습을 간직하고 있었습니다. 내
가 이곳 하양에 처음 왔던 98년 초만 해도 하양 장이 풍성했습니다. 장사
꾼들도 많았고 손님들도 북적댔습니다. 그런데 몇 년 전부터 대형 매장
이 곳곳에 들어서면서 하양 장이 침체되었습니다. 그렇지만 아직도 장날
나가보면 온갖 먹거리와 실용품들이며, 사람과 사람들이 떠들썩한 어울
림이라든지, 여전히 생기가 넘칩니다. 우울증에 빠진 사람들이 장에 나
가면 아마 병을 고치지 않을까 생각됩니다.
5일장을 한번 다녀온 날은 신학이나 철학이 쏟아내는 여러 가지 진
리론적 담론들이 무색해지면서 치열한 삶의 현장감에 휩싸이게 됩니다.
사는 게 별 게 아니구나. 열심히 농사짓고, 생활용품을 만들고, 장사하면
서 어울려서 살아가는 것이구나. 먹고, 마시고, 입고 사는 그런 삶의 단
순성이 인간 삶의 기본이구나. 대충 그런 소박한 삶의 리얼리티와 열정
에 동참하게 됩니다.
그런데 왜 예수님께서는 그런 것을 걱정하지 말라고 말씀하셨을까
요? 오늘 본문에 여러 번 강조되어 있습니다. 그러니 잘 들어라. 너희는
무엇을 먹고살아 갈까, 또 몸에다 무엇을 걸칠까 하고 걱정하지 말라.(22
절). 그런 것들은 다 이 세상 사람들이 찾는 것이다.(30절). 이런 예수님
의 말씀에 따르면 우리는 장날 우리가 만날 수 있는 그런 평범한 사람들
처럼 그런 것을 위해 살지 말고 무언가 고상하고 거룩하게 살아야 하는
게 아닌가 하고 생각됩니다. 교회에 열심히 나가서 기도 많이 하고 훗날
죽어서 가게 될 하나님 나라만을 생각하며 살아야 한다고 말입니다.

성속이원론
기독교 역사에는 이렇듯 일상적인 일들을 세속적이라고 생각하고,
반면에 종교적인 일을 거룩한 것으로 여기는 이원론이 상당히 오랫동안
중심적 역할을 했습니다. 세속적인 일들은 그것 자체로는 의미가 없기
때문에 가능한 대로 포기해야 하며 대신 거룩한 일들을 열심히 추구해야
한다고 가르쳤습니다. 이 말 자체가 근본적으로 잘못된 것은 아닙니다.
예컨대 다른 사람을 늘 경쟁의 대상으로만 여기는 이런 자본주의적 원리
를 보면 참으로 세속적이라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습니다. 이렇게 서로
끝없이 경쟁만 하면서 살아가는 데서는 인간다운 삶을 결코 발견할 수
없으니까 말입니다.
그런데 기독교 역사에 나타난 이원론은 이 세상의 악한 세력과 질서
를 극복하기 위한 적극적인 삶의 태도이기보다는 구체적이고 실질적인
삶을 부정하고 관념적이고 추상적인 것만을 우월한 가치로 본다는 데에
문제가 있습니다. 먹고 마시는 삶은 시시하고 찬송 부르고 기도하는 일
은 거룩하다는 그런 관점 말입니다. 그래서 한국 많은 기독교인들도 인
간으로서 이 세상에서 투철하게 살아가는 것보다는 교회를 중심으로 한
순전히 종교적인 활동에 많이 기울어졌습니다. 한국교회처럼 자주 모이
는 교회는 이 세상 그 어디에도 없습니다. 주일에도 몇 번씩의 모임이 있
고, 수요일, 금요일, 그리고 매일 새벽마다 모입니다. 물론 이슬람교인들
은 우리보다 더 근본적이고 적극적으로 종교적인 삶을 살아갑니다. 하루
에도 대 여섯 번씩 메카를 향해서 엎드려 기도합니다. 어떤 면에서 일상
적인 삶 자체를 거룩하게 여긴다는 점에서 이런 그들의 생활태도 자체는
문제가 아닙니다. 매일 모이든, 일주일에 한번 모이든 세상의 구체적인
삶을 무시하고 어떤 종교적인 안식처로 피신하고 싶어하는 의식이 우리
의 삶을 왜곡시키고 있습니다. 복음송 가사 중에 이런 것이 있습니다.
"세상 등지고 십자가 보네." 한국 기독교인들은 이토록 철저하게 이원론
적인 세계관 속에서 살아갑니다.
이원론적인 신앙은 다시 두 가지로 구분됩니다. 한쪽은 그야말로 순
수하게 초월적 신앙의 세계에 머물러 있는 반면에, 다른 한쪽은 형식적
으로만 거룩한 것을 찾으면서 실제로는 이 세상의 욕망에 물들어 있습니
다. 전자보다는 후자가 훨씬 문제가 많습니다. 순수한 마음으로 이 세상
을 초월하고 보다 거룩한 세계만을 지향한다는 것은 나름대로 의미가 있
습니다. 흡사 중세기의 '사막의 교부'나 수도원의 '승려'들처럼 말입니
다. 그런데 현대의 이원론적 신앙은 세상의 물질적 욕망을 노골적으로
드러내지 못하는 그 불안을 대신 거룩한 종교의식에 적극적으로 참여함
으로써 해결해보려고 합니다. 어쨌든지 양자 모두 기독교적인 면에서 건
강한 신앙은 결코 아닙니다.

일상의 필요성
그렇다면 무엇을 먹을까 걱정하지 말고 "먼저 하느님의 나라를 찾아
라"(31절)라는 예수님의 말씀은 무슨 의미입니까? 우리는 예수님의 말씀
을 아주 정확하게 이해해야 합니다. 언어는 어떤 것에 대한 사실적인 표
현일 경우도 있고, 그 이면의 사태를 숨겨두는 경우도 있습니다. 오늘 예
수님은 먹고 마시며 입는 일상의 일들이 필요없다고 말씀하지 않았습니
다. 우리가 본문을 읽으면서 이것을 놓치면 안 됩니다. 예수님은 거룩한
것과 세속적인 것을 이원론적으로 구분하는 차원에서 일상적인 일을 걱
정하지 말라고 말씀하신 게 아닙니다. 예수님은 오히려 그런 일상을 매
우 소중하게 생각하신 분입니다. 바리새인들은 기도하고 말씀을 읽고 금
식하는 데 열심을 냈지만 예수님은 세상 사람들과 함께 먹고 마시는 일
을 즐겨 하셨습니다. 물론 예수님이 실제로 놀고 먹는 일이 좋아했다는
말은 아니겠지만 성속이원론이 뚜렷한 사회적 기준으로 작동되던 그 시
기에 랍비로 칭함을 받던 예수님이 세속적인 사람들과, 때로는 죄인의
범주에 들던 사람들과 함께 어울려 지냈다는 것만은 분명합니다.
예수님은 분명히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의 아버지께서는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것을 잘 알고 계신다.(30절). 예수님은 인
간에게 일상의 삶이, 즉 일상을 유지시켜나갈 수 있는 생활필수품들이
있어야 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습니다. 이 사실은 하나님의 관심 사항
입니다. 생명이 하나님에게서 왔다면 그 생명의 유지되기 위해서 필요한
것들이 무엇인지 하나님께서 미리 알고 있다는 말은 당연합니다. 즉 인
간이 이 땅에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서 필요한 것들은 천부적인 성격이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의 실제적인 인간의 삶에는 이런 필수적인 것들이 부족
하거나 아예 없어서 생존의 위협을 당하는 일들이 적지 않습니다. 하나
님이 미리 알고 있으며, 그분이 미리 준비해 놓은 그 생활필수품들이 어
디에 있기에 우리 주변에는 굶는 사람들이 생기는 것입니까? 아프리카
에는 최소한의 생활조건이 유지되지 못하는 나라가 상당히 많다고 합니
다. 고고학자들에 의하면 지구의 생명이 아프리카에서 시작되었으며, 그
렇다면 그 지역이야말로 생명을 유지하는 데 가장 풍요로운 땅이라고 할
수 있는데 말입니다. 북한에도 가뭄과 홍수 등 자연재해로 인해 오래 전
부터 무엇을 먹어야 할지 걱정해야 할 사람들이 많아졌습니다. 이런 상
황이 초래된 이유를 찾아보려면 몇 권의 책을 써도 부족할 것입니다. 또
한 보는 관점에 따라서 상당히 다른 대답들이 나올 것입니다.
저는 사회학이나 정치학, 또는 경제학적인 차원이 아니라 성서의 관
점에 따라서 하나의 원론적인 대답을 할 수밖에 없습니다. 인간의 먹거
리와 쓸거리는 하나님이 창조한 이 지구가 충분히 감당할 수 있습니다.
먹어야 산다는 사실을 이미 하나님이 알기 때문에 이 지구를 그렇게 창
조하셨습니다. 그런데 인간의 소유욕이 필요한 것으로 만족하지 않고 그
이상의 소유하게 함으로써 극심한 부의 불균형이 이루어지고, 시간이 갈
수록 그것이 심화됨으로써 생존의 위협을 받는 이들이 생겼는지도 모릅
니다. 마르크스가 <자본론>에서 그런 말을 했나요? 또는 그 나라의 오
랜 내전이나 독재자로 인해서 농지가 황폐화되고, 사회 기반시설이 허물
어진 탓일지도 모릅니다. 어쨌든지 분명한 사실은 이 지구에는 인간과
다른 동물들이 함께 생명을 유지할 수 있을만한 토대가 확실하다는 점입
니다. 이런 상황인데도 불구하고 어떤 사람들에게 먹거리가 제공되지 않
는다면 그 어딘가에 인간의 탐욕이 작용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이런 점
에서 함께 먹고 함께 마시면서 평화롭게 살아가지 못하게 하는 어떤 힘
이 바로 악이며 죄입니다.

추구해야 할 것
먹을 것과 마실 것은 인간이 염려할 부분이 아니라 하나님이 챙겨주
실 부분이라는 게 바로 오늘 본문이 말하고 있는 주제입니다. 생명의 조
건은 생명을 만드신 분의 책임이라는 말씀입니다. 당연하지요. 이는 흡
사 아이를 낳고 기르는 부모가 있다면 그는 당연히 아이들의 생명을 위
해서 여러 가지 준비를 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런 것을 아이들이 염려하
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인간이 해야할 일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알아서
하실 일을 공연히 염려하지 말고 마땅히 인간이 해야 할 일을 해야만 합
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입니다. 너희는 먼저 하느님
의 나라를 찾아라. 그러면 이 모든 것도 곁들여 받게 될 것이다.(31절).
먹을 것에 대한 걱정을 접어두고 하나님의 나라를 찾기만 하면 모든
것을 곁들여 받게 된다는 이 말씀을 위에서 언급한 이원론적 시각으로
해석하면 다시 논란의 원점으로 돌아가게 됩니다. 일상적인 일이 따로
있고 하나님의 나라가 따로 있기 때문에 하나님의 특별한 일들에만 관심
을 가지라는 말이 아닙니다. 물론 겉으로만 보면 다르게 보입니다. 장날
장사하는 일과 교회에 나와서 예배드리는 일이 달라 보이듯이 말입니다.
그러나 이 두 일, 즉 일상과 하나님의 나라는 비록 구분은 되지만 구별되
는 것은 아닙니다. 일상은 드러나는 방식으로 하나님의 나라이며, 하나
님의 나라는 은폐된 방식으로 일상과 연관됩니다. 그렇다고 해서 거룩한
일과 세속적인 일이 늘 같다는 말은 아닙니다. 단지 돈 버는 일에만 치우
치고, 자기 식구들만 끼고 이기적으로 살아가는 일은 비록 직접적으로
남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 것 같지만 아주 세속적입니다. 반면에 자기 일
보다도 장애인과 외국인 노동자들을 챙기는 일들은 거룩합니다. 그러나
이런 구별은 그가 장사하는가, 아니면 복지시설을 운영하는가, 그런 삶
의 형식에서가 아니라 그것을 수행해나가는 태도와 내용에서만 가능합
니다. 그러니까 붕어빵을 구워 팔거나 횟집을 운영하면서도 하나님의 나
라를 찾는 사람이 있고, 장애시설과 교회 일을 하면서도 세속적인 가치
를 추구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의 나라를 찾는다는 게 무엇을 의미하는지 좀
더 정확하게 이해해야 합니다. 이런 주제는 기독교의 모든 내용을 담고
있기 때문에 이 자리에서 충분할 정도로 이야기 할 수는 없습니다. 다만
오늘 본문과 연관된 부분만 다룰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일상의
필요가 해결될 수 있는 기본 원리라고 규정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그
렇게 약속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추구하기만 하면 그 이외의 일
상적인 필요가 채워질 것이라고 했습니다. 이 약속에 근거한 그 기본 원
리는 구체적으로 무엇입니까? 사실 원리라는 말은 그렇게 적당한 게 아
닙니다. 잘못하면 하나님을 그런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원리쯤으로 착
각할 수 있으니까 말입니다. 쉽게 이해하기 위해서 단지 그렇게 표현한
것뿐입니다. '나라'(kingdom)로 존재하는 하나님은 우리의 예상을 뛰어
넘어서 활동하시기 때문에 어떤 하나의 원칙만을 하나님의 나라라고, 또
는 그 원리라고 단정할 수는 없습니다. 시대와 상황에 따라서 다른 방식
으로 자신의 나라를 이 땅에 알리고 계시기 때문에 우리는 그렇게 자유
롭게 활동하시는 생명의 영을 우리의 정치, 경제 이데올로기에 한정시킬
수는 없습니다. 다만 우리는 조심스럽게, 소극적으로나마 몇 가지 원리
들을 말할 수는 있습니다.
우선 정의입니다. 오늘 본문의 병행구인 마태복음에는 좀더 자세하
게 서술되어 있습니다. 너희는 먼저 하느님의 나라와 하느님께서 의롭게
여기시는 것을 구하여라.(6:33).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께서 의롭게 여
기시는 것이 등치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곧 정의롭다는 뜻입
니다. 대한민국이 정치적으로만이 아니라 경제적으로도 정의로운 공동
체가 되는 것이 바로 하나님의 나라와 깊은 연관이 있습니다. 모두 부자
처럼 잘 살게 되어야 한다는 것보다는 의로운 질서가 지배하는 나라로
변화되는 게 중요합니다. 그런데 이게 참으로 풀기 어려운 일입니다. 대
한민국에 사는 대다수의 사람들은 평등하지만 약간 가난하게 사는 것보
다는 불평등하지만 그래도 잘 사는 쪽을 택하기 때문에 근본적인 문제가
해결되지 않습니다. 물론 다른 나라도 마찬가지입니다. 미국도 그렇고
프랑스도 그렇습니다. 물론 사회주의 전통이 살아있는 유럽 쪽이 미국보
다는 훨씬 평등 가치가 강조되고 있긴 합니다만 약간의 차이가 있을 뿐
이지 결정적으로 다른 것은 아닙니다. 소련이나 옛 동구권이 평등한 사
회를 꿈꾸다가 좌초한 역사적 경험이 있습니다. 다시 우리나라의 문제로
돌아와서, 요즘 경제가 나빠졌다고 모두들 걱정이 산더미 같습니다. 어
떻게 하면 이 안에 살아가는 사람들이 평등하고 정의롭게 살아가는가에
대한 걱정은 없고 단지 경제가 어렵다는 걱정뿐입니다. 그런데 살아가는
모습들을 보면 그런 걱정은 모두 엄살처럼 들립니다. 초등학생들까지 이
동전화를 갖고 다니고, 순전히 게임만을 위해서라도 인터넷에 가입합니
다. 요즘 신학대학교 학생들도 상당한 숫자가 승용차를 끌고 다닙니다.
영남신학대학교에도 차를 세울 데가 없을 정도입니다.
하나님이 의롭게 여기시는 것은 경제정의만이 아니라 생태계를 살리
는 일도 포함됩니다. 생태계를 훼손시키면서까지 그저 남보다 잘살아야
겠다는 이데올로기가 밀물처럼 우리의 삶을 밀고 들어왔습니다. 전라북
도 도민을 위해서 새만금 간척 사업을 추진한다고 하는데, 그 정도로 우
리의 경제적 생존이 위협받고 있습니까? 그러니까 오늘의 시대정신은
생명의 근원이시며 지금도 우리에게 먹을 것을 공급해주고 있는 하나님
의 의보다는 인간의 의지만을, 그것도 헬라 신화에 나오듯이 제우스의
벌을 받아서 아무리 먹어도 허기가 가시지 않는 어떤 신처럼, 또는 자기
의 외모에 도취되어 호수에 빠져죽은 나르시스처럼 자기 중심적인 인간
의 탐욕만을 채우는 쪽으로 진행되고 있습니다. 이런 상태에서는 인간은
다른 사람보다 많고 좋은 것을 걱정만 하다가 인생을 마치게 되겠지요.

두려움을 넘어서
물론 지나친 탐욕이 아니라 우리 서민들, 특히 경쟁력이 없는 사람들
에게는 최소한 먹을 것에 대한 걱정은 현실입니다. 나도 어렸을 때 어머
니의 심부름으로 봉지쌀을 자주 사러 다녔습니다. 아이들을 굶지 않게
하기 위해서 열심히 장사도 하고 공장에도 다녀야 합니다. 그렇긴 하지
만, 또는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을 믿고 사는 사람들에게는 이 시대정신
에 굴복하지 말고 근본적으로 인식을 전환해야 합니다.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 어린 양떼들아, 조금도 무서워하지
말라. 너희 아버지께서는 하늘 나라를 너희에게 기꺼이 주시기로 하셨
다.(32절). 이 말씀이 선포되던 그 시절에는 오늘 우리에게 비해서 이런
생존 조건이 훨씬 열악했을 것입니다. 까딱 잘못하면 가족이 뿔뿔이 흩
어지는 일이 흔했습니다. 최소한 굶지만 않게 하려고 아이들을 남의 집
하인으로 보내기도 하고, 아내를 파는 일도 있었습니다. 이런 상황이 얼
마나 큰 두려움이었겠습니까? 그러나 예수님은 두려워하지 말라고 말씀
하십니다. 그 현실을 몰라서가 아니라 그 현실이라는 것이 허상이기 때
문에 그렇게 말씀하십니다. 두려워해야 할 대상을 두려워하는 것은 어쩔
수 없지만 그렇지 않은 것을 두려워하는 것보다 더 억울한 일은 없습니
다.
예수님은 그 두려움의 출처가 무엇인지 아주 명확하게 꿰뚫어 보셨
습니다. 생명 조건이 위협받을 때 인간은 가장 극심한 두려움이 빠지게
됩니다. 그런데 먹을 것과 입을 것이 바로 하나님의 책임이라는 사실을
확신하기만 한다면 이런 두려움에서 벗어나게 될 것입니다. 오늘 현대인
들의 두려움은 이러한 최소한의 생명조건이 위협 당한다는 데에 있다기
보다는 지나친 소유욕에 있습니다. 이런 상태에서 인간은 죽을 때까지
두려움에서 벗어나지 못합니다. 어쩌면 북한 주민들보다 남한 주민들이
훨씬 상대적 발탈감에 빠져 있을지 모릅니다. 다신 한번 깊이 생각해봅
시다. 우리가 생명을 보존할 수 있는 최소한의 조건은 우리에게 반드시
필요한 것이기는 하지만 우리가 걱정할 일이 아닙니다. 오히려 하나님이
걱정하십니다. 우리가 추구해야 할 것은 하나님 나라와 그가 의롭다고
여기는 삶의 태도입니다. 이 사실을 진리로 믿고 사는 사람들은 이 세상
에서의 삶을 두려움 없이 살아갈 수 있습니다.  
                                                                   <7월6일>


누가복음 12:22-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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