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려움의 대상
막 4:35-41, 성령강림 후 다섯째 주일, 2018년 6월24일
35.그 날 저물 때에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우리가 저편으로 건너가자 하시니 36.그들이 무리를 떠나 예수를 배에 계신 그대로 모시고 가매 다른 배들도 함께 하더니 37.큰 광풍이 일어나며 물결이 배에 부딪쳐 들어와 배에 가득하게 되었더라 38.예수께서는 고물에서 베개를 베고 주무시더니 제자들이 깨우며 이르되 선생님이여 우리가 죽게 된 것을 돌보지 아니하시나이까 하니 39.예수께서 깨어 바람을 꾸짖으시며 바다더러 이르시되 잠잠하라 고요하라 하시니 바람이 그치고 아주 잔잔하여지더라 40.이에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어찌하여 이렇게 무서워하느냐 너희가 어찌 믿음이 없느냐 하시니 41.그들이 심히 두려워하여 서로 말하되 그가 누구이기에 바람과 바다도 순종하는가 하였더라.
광풍 이야기
오늘 설교 본문인 막 4:35-41절에 나오는 이야기는 주일학교 어린이들에게 대단한 상상력을 불러일으키겠지만 어느 정도 세상 이치를 아는 사람들에게는 허황되게 읽힐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갈릴리 호수를 건너가자고 말씀하시자 제자들은 배를 빌렸습니다. 베드로와 안드레 형제, 그리고 야고보와 요한 형제는 원래 갈릴리 호수에서 어부로 살다가 예수님의 부르심을 받은 이들이니까 그곳에 여전히 배를 모는 친구들이 많았을 겁니다. 예수님 일행이 탄 배만 있었던 게 아니라 다른 배들도 뒤따랐다고 합니다. 다른 배에는 예수님 소문을 듣고 찾아온 사람들이 탔겠지요. 항해하는 도중에 돌풍을 만났습니다. 갈릴리 호수에서는 인근의 헬몬 산에서 내려온 찬 기류가 호수의 따뜻한 기류와 만나서 종종 이런 현상이 일어난다고 합니다. 물결이 높아지고 물이 갑판으로 밀려들어왔습니다. 비상사태입니다. 이런 일들은 지금도 우리가 흔하게 보는 것들입니다. 지하 룸살롱에 불이 나거나 관광버스가 다리 아래로 추락하는 일들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사람들은 대개 패닉 상태에 떨어집니다. 그래서 피해를 더 키우기도 합니다. 오늘 본문에 따르면 목숨이 경각에 달린 이 엄중한 상황에서 예수님은 배의 고물(뒷부분)에서 베개를 베고 잠들었다고 합니다. 피곤해서 잠시 존 것인지, 그냥 누워만 있었던 것인지는 우리가 정확하게 알 수 없습니다. 제자들의 눈에 예수님의 그런 모습이 이상하게 보였습니다. 그 상황을 38절이 이렇게 묘사합니다.
예수께서는 고물에서 베개를 베고 주무시더니 제자들이 깨우며 이르되 선생님이여 우리가 죽게 된 것을 돌보지 아니하시나이까 하니...
갈릴리 호수를 항해하는 중이라면 예수님은 고물이 아니라 이물에 앉거나 서서 폼 나게 수평선을 바라보면서 뭔가 깊은 생각을 하셨어야만 합니다. 성경을 읽거나 기도를 했었어도 좋았습니다. 그런데 배 뒷자리에서 잠에 떨어졌다는 겁니다. 뭔가 밸런스가 깨진 광경입니다. 이는 요나 이야기를 연상시킵니다. 요나는 니느웨로 가서 하나님의 구원을 선포하라는 신탁을 받았지만 나름 다른 생각이 있어서, 그것은 하나님의 낯을 피하려는 것이었는데, 니느웨와는 완전히 다른 지역인 다시스로 가는 배를 탔다가 광풍으로 배가 비상사태에 빠졌을 때 배의 가장 아래층 선실에서 잠을 자고 있었습니다.
잠든 예수를 본 제자들은 예수를 깨우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선생님, 죽게 된 우리를 왜 도와주지 않으십니까?’ 이런 표현도 자연스럽지는 않습니다. 배를 다루는 기술은 예수에게 없습니다. 제자들이 훨씬 더 전문가입니다. 제가 그 자리에 있었다면 예수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을 겁니다. ‘선생님, 지금 상황이 좋지 않으니까 그만 주무시고 일단 빨리 일어나세요. 너무 걱정하지는 마세요. 우리는 예전에 이런 일들을 많이 경험해본 터라 해결할 수 있습니다.’ 이런 태도가 상식적인 것이고 합리적인 것입니다. 지금 우리가 예배를 드리는 지하 건물이 무너지거나 불이 났다고 합시다. 그러면 제가 나서서 해결할 수는 없습니다. 이런 문제에서 나보다 더 전문가인 집사들이 나서고, 제가 그분들의 말을 따를 겁니다. 오늘 이야기는 일반적인 게 아니라 뭔가 다른 메시지를 전하고 있다는 뜻이 아니겠습니까. 그게 무엇일까요? 39절을 읽어보십시오.
예수께서 깨어 바람을 꾸짖으시며 바다더러 이르시되 잠잠하라 고요하라 하시니 바람이 그치고 아주 잔잔하여지더라.
바람과 바다를 꾸짖고 잔잔하게 만들었다는 이야기는 다른 고대 문헌에서도 찾아볼 수 있습니다. 헬라 신화에는 바다를 다스리는 신 포세이돈이 나옵니다. 포세이돈은 바다의 바람과 파도를 일으키기도 하고 없애기도 하는 신입니다. 본문이 말하려는 것은 예수가 자연의 악한 능력까지 제어할 수 있는 초능력적인 존재라는 뜻입니다. 이런 경우는 복음서에 흔하지는 않지만 종종 나옵니다. 간질병에 걸린 아이를 고칠 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말 못하고 못 듣는 귀신아 내가 네게 명하노니 그 아이에게서 나오고 다시 들어가지 말라.’(막 9:25). 오늘 이야기에 이어지는 막 5장에는 정신질환자를 고치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더러운 귀신아, 그 사람에게서 나오라.’(막 5:8). 귀신이 2천 마리 이상의 돼지 떼에게 들어가자 돼지 떼가 몽땅 호수에 빠져 죽었다고 합니다. 이런 이야기에 대한 신자들의 반응은 크게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저런 놀라운 초능력이 있는 걸 보니 예수야말로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게 분명한 거라는 생각이고, 다른 하나는 이 이야기가 헬라 신화나 여러 나라의 영웅 설화에 불과하니 큰 의미가 없다는 생각입니다. 여러분의 생각은 어느 쪽입니까?
만약 예수가 바람과 파도까지 초자연적인 능력으로 통제할 수 있다면 예수의 운명에서 가장 중요한 십자가 처형 사건은 성립이 안 됩니다. 예수는 자신에게 다가오는 십자가 죽음 앞에서 힘들어했습니다. 기도 중에 흘린 땀방울이 핏방울로 보일 정도로 고통스러워했습니다. 십자가에 달렸을 때 사람들은 예수를 당해서 ‘당신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면 십자가에서 내려와 봐라.’고 조롱했습니다. 예수는 ‘하나님, 왜 나를 버리십니까?’라고 외치면서 십자가에서 숨을 거두었습니다. 신적인 능력이 아니라 인간의 무능력을 그대로 보이신 것입니다. 자연현상까지 통제할 수 있는 기세라고 한다면 예수는 하늘의 불을 내려서 자신을 십자가형으로 몰고 간 산헤드린 의원들과 빌라도 총독과 사형집행인들을 압도했었어야만합니다.
저는 이 이야기를 문학적 상상력으로 다시 읽어보았습니다. 갈릴리 호수는 예수의 주요 활동 무대였던 가버나움을 끼고 있어서 예수에게는 친근한 장소입니다. 가버나움에서 예수는 호수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들었습니다. 돌풍에 대해서도 들었고, 직접 그런 경험도 하셨을 것으로 보입니다. 그는 강행군으로 인해서 피곤했습니다. 예수에게는 휴식이 필요했습니다. 군중들과 거리를 둘 필요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많이 살지 않는 갈릴리 호수 건너편 거라사 지역으로 가는 중입니다. 어부들이 돛을 올리고 배를 모는 사이에 예수는 고물에 누워서 잠시 눈을 붙였습니다. 배가 크게 흔들렸지만 깊은 잠에 취했기에 일어날 수 없었습니다. 비몽사몽 중에 제자들이 자신을 흔들어 깨우는 걸 느꼈습니다. 잠에서 빠져나오면서 상황을 파악했습니다. 예수는 돌풍이 곧 잠잠해지리라는 사실을 직감할 수 있었습니다.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했겠지요. ‘여러분, 괜찮습니다. 곧 좋아집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지키십니다. 내가 기도드리겠습니다.’ 일정한 시간이 흐른 뒤에 돌풍이 그치자 제자들은 예수가 바람과 파도를 꾸짖은 것으로 판단했습니다.
예수의 구원 능력
이 이야기에서 중요한 것은 바람과 파도를 예수가 다스렸다는 사실 자체가 아니라 하나님에게만 가능한 구원 능력이 예수님에게서 나온다는 사실입니다. 예수의 구원 능력을 경험한 사람의 눈에는 바람과 바다도 예수에 의해서 제어되는 것으로 보였습니다. 이게 이상한 이야기가 아닙니다. 성경의 관점에서 바람과 파도 역시 아무리 막강하더라도 하나님의 피조물이기 때문입니다. 피조물로서의 한계를 벗어날 수 없습니다. 그게 성경의 자연관입니다. 이런 성경의 자연관을 믿는 저는 자연을 연구하는 자연과학에 대한 거부감도 없고, 지나친 기대감도 없습니다. 자연과학의 결과는 그대로 수용하면서 자연과학으로 인간과 세계가 구원받지는 못한다는 사실을 견지합니다. 제자들은 예수에게서 구원의 능력을 경험했습니다. 구원은 하나님에게만 가능한 것이니 예수님이 곧 하나님의 아들, 즉 하나님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예수가 바람과 바다를 꾸짖었으며, 곧 바람과 바다가 잔잔해졌다고 과감하게 주장할 수 있었습니다. 저는 오늘 이야기를 읽으면서 제자들이 경험한 예수로부터의 구원이 당시에 실제로 무엇인가에 대한 궁금증이 더 많아졌습니다.
어떤 성서주석학자들은 오늘 이야기를 초기 교회가 처한 영적인 실존에 대한 설명으로 읽습니다. 일리가 있습니다. 배는 교회입니다. 갈릴리 호수는 세상입니다. 교회는 세상에서 폭풍을 만난 배처럼 온갖 세력에 의해서 흔들리고 난파의 위험에 떨어지곤 합니다. 마가복음은 기원후 70년경에 완성되었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예루살렘이 로마에 의해서 함락된 해가 70년입니다. 그 이전부터 유대와 로마와의 전쟁은 계속되었습니다. 교회는 로마 제국에 의해서 박해를 받았습니다. 풍전등화와 같은 위기에 봉착하기도 했습니다. 그 상황은 공포입니다. 오늘 제자들이 잠에 떨어진 예수에게 했던 말이 바로 당시 교회의 실존을 그대로 보여줍니다. ‘선생님이여, 우리가 죽게 된 것을 돌보지 아니하시나이까?’
이 호소는 오늘 우리에게 그대로 적용됩니다.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우리가 죽게 되었다는 사실입니다. 난파선의 승객과 다를 게 없습니다. 이런 호소도 개인에 따라서 다르게 받아들여질 겁니다. 어떤 사람들은 실제로 죽음과 비슷한 재난과 고난에 종종 떨어집니다. 그게 무엇인지는 제가 굳이 설명할 필요도 없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인생이 잘 풀려서 난파선이 아니라 에덴동산에서 산다고 생각합니다. 전반적으로 행복한 조건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죽게 되었다’는 말을 피해갈 수는 없습니다. 언젠가는 실제로 죽는 날이 오기도 하고, 자신에게 매몰되지 않고 주변과 세계를 바라보는 사람이라고 한다면 ‘죽게 되었다’는 사실을 실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지금도 여전히 주변에 난파선과 같은 상황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이 많기 때문입니다. 제가 일일이 거론할 필요는 없겠지요. 난민들이 세계 곳곳에서 생기고 국내에서도 난민처럼 사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의학이 크게 발전했어도 선천적인 장애인들이 여전해 태어납니다. 많은 사람들이 삶의 허무에 떨어져서 죽게 되었다고 외치곤 합니다.
다른 하나는 도움의 손길이 없다는 사실입니다. 예수님이 잠에 떨어졌습니다. 하나님의 침묵입니다. 이유 없는 재앙과 고난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침묵을 경험합니다. 이게 우리의 실존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이 자신의 기도에 일일이 응답하신다고 주장하면서 행복한 듯이 살아가겠지만, 바닥이 보이지 않는 어두운 심연을 들여다볼 줄 아는 사람은 하나님의 침묵을 경험할 것입니다. 정확하게 말하면 하나님의 침묵이 아니라 하나님이 침묵하시는 것처럼 보이는 상황에 직면합니다. 한국교회에는 이런 현상이 더 적나라하게 나타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선포되는 교회 안에서 오히려 하나님의 침묵 현상이 일어납니다. 종교적 감수성과 교회 이기주의와 물신숭배가 만연하다면 그것이 곧 하나님의 침묵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어찌하여 믿음이 없느냐
이 어려운 상황에 처한 초기 교회는 어디에서 문제 해결의 답을 찾았을까요? 믿음입니다. 잠에서 깬 예수는 바람과 바다를 잔잔하게 한 뒤에 제자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어찌하여 이렇게 무서워하느냐 너희가 어찌 믿음이 없느냐
초기 교회가 놓인 상황만 본다면 무서워할 수밖에 없습니다. 마가복음 공동체는 상황이 아니라 믿음 없는 것이 근본 문제라고 보았습니다. 예수님은 믿음에 대해서 여러 번 말씀하셨습니다. 앞에서 인용했던 ‘간질병 아이’에 과한 이야기에서 ‘믿는 자에게는 능히 하지 못할 일이 없다.’(막 9:23)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런 구절들이 주로 기도와 연관해서 오용되는 경우가 흔합니다. 신앙생활과 성경에서 이해하기 힘든 부분이 있을 때 무조건 믿으면 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인간의 이기심을 믿음으로 치장하기도 합니다. 희화적인 사건들도 한국교회에서는 자주 벌어집니다. 집 장만해달라는 기도를 믿음으로 구하라고 부추깁니다. 어느 유명한 목사는 해외 선교사들이 모인 집회에서 선교용 승합차를 장만하는 기도를 드리라고 하면서 구체적으로 몇 년 식과 색깔까지 밝히라고, 또는 결혼 대상자의 조건을 구체적으로 밝히라고 선동합니다. 믿음과 기도의 전형적인 오용이자 왜곡입니다.
믿음은 하나님을 향한 전적인 신뢰입니다. 신뢰는 저절로 생기는 게 아닙니다. 하나님이 누군지를 아는 게 중요합니다. 하나님은 창조주이며 완성자이십니다. 이는 생명의 근원이 하나님이라는 뜻입니다. 믿음은 다른 게 아니라 바로 하나님이 생명의 근원이라는 사실을 전적으로 신뢰하는 것입니다. 당연하다고 생각하겠지만 이런 믿음은 오히려 드뭅니다. 입으로는 하나님을 창조주라고 하지만 실제로는 사람이 만들어놓은 어떤 것들을 하나님으로 착각합니다. 그런 것들이 자기가 원하는 대로 작동이 안 되면 사람들은 무서워하고 불안해합니다. 현대 문명은 모두 인간의 이런 심리에 뿌리를 내리고 있을지 모릅니다. 가장 전형적인 것은 상품판매 전략입니다. 사람의 불안에 호소합니다. 정수기를 사용하지 않으면 건강을 잃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배우들과 같은 외모를 갖추기 위해서 성형도 많이 합니다. 우리나라처럼 젊은이들이, 특히 젊은 여성들이 외모지상주의에 빠진 경우가 드물다고 합니다. 최근에는 탈(脫)코르셋 운동이 벌어지긴 합니다. 교회생활도 이런 불안에 기초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목사들은 신자들을 심리적으로 불안하게 만들어서 교회에 노예처럼 의존하게 만듭니다. 알량한 믿음으로 천국 갈 수 있다는 사탕발림도 실제로는 이런 불안 심리에 기댄 겁니다. 믿음이라는 말은 많은데 실제로 믿는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너희가 어찌 믿음이 없느냐?’는 말씀은 하나님을 향한 절대적인 신뢰만이 우리를 무서움과 불안으로부터 해방시킨다는 뜻입니다. 저는 이 말씀이 단순히 신앙생활에서만이 아니라 우리의 삶 전체에서 옳다고 생각합니다.
오늘 이야기에서 제자들의 마지막 반응이 흥미롭습니다. ‘그들이 심히 두려워하여 서로 말하되 그가 누구이기에 바람과 바다도 순종하는가 하였더라.’(막 4:41). 제자들은 예수님의 말씀과 그의 행위를 통해서 두려워해야 할 대상이 누군지를 확실히 알게 되었습니다. 믿음을 회복한 것입니다. 큰 광풍과 물결로 표현된 세상살이의 어려운 상황이 아니라 창조주 하나님이며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야말로 두려움의 대상입니다. 여기서의 두려움은 앞서의 무서움과 다릅니다. 앞서의 무서움은 ‘우리가 죽게 된 것을 왜 돌보지 않느냐?’는 원망이나 하소연으로 나아가지만 여기서의 두려움은 창조와 생명의 능력을 향한 찬양으로 나아갑니다. 앞서의 무서움은 우리로 하여금 자신에게 점점 더 매달리게 하지만 여기서의 두려움은 자기에게서 해방시킵니다. 그 해방의 마지막 차원은 죽음으로부터의 해방입니다. 그것이 곧 생명을 얻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눈앞에서 벌어지는 광풍과 물결을 보고 너무 무서워하지 마십시오. 정말 두려워해야할 대상은 창조주 하나님, 그리고 참된 믿음이 무엇인지를 말과 실제 삶으로 보여주신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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