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려워하지 말라!
학 1:15-2:9, 창조절 열한째 주일, 2019년 11월 10일
1.그 때는 다리오 왕 제이년 여섯째 달 이십사일이었더라 일곱째 달 곧 그 달 이십일일에 여호와의 말씀이 선지자 학개에게 임하니라 이르시되 2.너는 스알디엘의 아들 유다 총독 스룹바벨과 여호사닥의 아들 대제사장 여호수아와 남은 백성에게 말하여 이르라 3.너희 가운데에 남아 있는 자 중에서 이 성전의 이전 영광을 본 자가 누구냐 이제 이것이 너희에게 어떻게 보이느냐 이것이 너희 눈에 보잘것없지 아니하냐 4.그러나 여호와가 이르노라 스룹바벨아 스스로 굳세게 할지어다 여호사닥의 아들 대제사장 여호수아야 스스로 굳세게 할지어다 여호와의 말이니라 이 땅 모든 백성아 스스로 굳세게 하여 일할지어다 내가 너희와 함께 하노라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 5.너희가 애굽에서 나올 때에 내가 너희와 언약한 말과 나의 영이 계속하여 너희 가운데에 머물러 있나니 너희는 두려워하지 말지어다 6.만군의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노라 조금 있으면 내가 하늘과 땅과 바다와 육지를 진동시킬 것이요 7.또한 모든 나라를 진동시킬 것이며 모든 나라의 보배가 이르리니 내가 이 성전에 영광이 충만하게 하리라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 8.은도 내 것이요 금도 내 것이니라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 9.이 성전의 나중 영광이 이전 영광보다 크리라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 내가 이 곳에 평강을 주리라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
예루살렘 성전
오늘 설교 본문인 학 1:15절에는 특이하게도 하나님의 말씀이 선지자 학개에게 임한 햇수와 달과 날짜가 나옵니다. “다리오 왕 제 2년 여섯째 달 이십사일”입니다. 다리오는 페르시아 왕입니다. 그의 재위 2년이면 기원전 520년입니다. 페르시아의 고레스 칙령에 따라서 유대인들이 예루살렘 성전을 재건할 수 있도록 재가를 받은 지 거의 20년이 흘렀습니다. 바벨론 포로에서 돌아오기 시작한 기원전 538년에 이미 성전 재건 시도가 한차례 있긴 했으나 그걸 추진할만한 능력이 유대인들에게 없었습니다. 주민들의 숫자도 부족했고, 당장 먹고사는 문제도 시급했으며, 정치적으로 불안한 요소도 많았습니다. 이제 학개가 나서서 성전 재건을 독려합니다. 학 2:3절 말씀을 들어보십시오.
너희 가운데에 남아 있는 자 중에서 이 성전의 이전 영광을 본 자가 누구냐 이제 이것이 너희에게 어떻게 보이느냐 이것이 너희 눈에 보잘것없지 아니하냐.
예루살렘 성전은 세 번에 걸쳐서 건축되거나 재건되었습니다. 첫 성전은 다윗의 아들 솔로몬에 의해서 기원전 10세기에 처음으로 세워졌습니다. 두 번째 성전은 스룹바벨에 의해서 기원전 6세기 초에 재건되었고, 세 번째 성전은 유대 왕인 헤롯에 의해서 예수님이 활동하던 시기에 건축되었습니다. 세 번에 걸친 예루살렘 성전은 다 붕괴했습니다. 첫 성전은 기원전 587년에 바벨론 제국에 의해서, 두 번째 성전은 기원전 63년경 로마 폼페이우스 장군에 의해서, 세 번째 성전은 완공된 지 얼마 지나지 않은 기원후 70년에 로마 티투스 장군에 의해서 파괴되었습니다. 지금은 성전의 서편 벽의 잔해만 남았습니다. 학개가 말하는 “이 성전의 이전 영광”은 첫 성전인 솔로몬 성전을 가리킵니다. 그 성전은 60년 전에 이미 무너졌기에 그 영광을 직접 눈으로 본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학개가 말씀을 선포하는 지금은 그 성전의 잔해만 돌무더기로 남았습니다.
학개 선지자는 성전 재건이 매우 시급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여기에는 두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하나는 성전을 하나님이 임하시는 집으로 생각했다는 사실입니다. 다른 하나는 첫 번째 성전을 건축할 때 이스라엘의 국력이 가장 강력했다는 사실입니다. 바벨론 포로에서 돌아온 이스라엘 백성들은 학개의 마음과는 달리 성전 재건에 힘을 쏟지 못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마음과 형편을 잘 알고 있던 총독 스룹바벨과 대제사장 여호수아도 성전 재건을 서두르지 않았습니다. 이를 안타깝게 여긴 학개는 당시 이스라엘의 지도자인 이 두 사람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합니다. 이들 지도자가 변해야만 백성들의 마음도 변한다고 생각했겠지요. 학개는 오늘 본문에서 구약의 가장 중요한 신앙을 몇 단계로 나눠서 선포합니다. 이런 선포는 스룹바벨과 여호수아, 그리고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만이 아니라 오늘 우리에게까지 중요합니다. 설교자로서 저도 이 말씀에 귀를 기울이면서 삶의 방향을 다시 정확하게 잡을 수 있었습니다.
두려움
학개는 4절에서 스룹바벨과 여호수아에게 “스스로 굳세게 하라.”라고 반복해서 말합니다. 그리고 모든 백성에게도 “스스로 굳세게 하여 일하라.”라고 격려합니다. 그들의 마음이 약할 대로 약해졌다는 의미입니다. 5절에는 좀더 직접 “너희는 두려워하지 말라.”라고 선포합니다.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은 두려움에 사로잡혀 있었습니다. 바로 얼마 전까지 바벨론 포로 신세였습니다. 우리의 일본 식민 지배 직후와 비교하면 됩니다. 바벨론은 근동에서 최고 막강한 나라였습니다. 페르시아가 바벨론을 함락시켜서 겨우 포로 신세는 면하고 50년 만에 예루살렘으로 돌아왔지만, 마음이 여전히 피폐해진 상태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자처하던 자신들이 왜 이런 신세에 떨어졌는지도 이해하기 힘들었습니다. 성전을 재건할만한 힘도 없었고, 그런 의지도 없었습니다. 패배주의가 밤안개처럼 그들의 영혼을 사로잡고 있었습니다. 한반도의 분단체제가 너무 오래 계속되어서 다시 통일에 관한 열망이 웬만해서는 살아나기 힘든 지금의 우리와 비슷합니다.
학개도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는 이스라엘의 지도자들과 백성들을 무조건 밀어붙일 수는 없습니다. 신앙에 호소했습니다. 인간적인 두려움을 극복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여호와 하나님이 함께하신다는 사실을 중심에서 받아들이는 데에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입니다. 4(후)절을 보십시오. “이 땅 모든 백성아 스스로 굳세게 하여 일할지어다 내가 너희와 함께하노라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 하나님이 함께하신다는 사실을 알면 좋은데, 그게 쉽지 않습니다. 그래서 학개는 역사적인 한 사건을 예로 듭니다. 그것은 출애굽입니다. 5절 말씀을 읽겠습니다.
너희가 애굽에서 나올 때에 내가 너희와 언약한 말과 나의 영이 계속하여 너희 가운데에 머물러있나니 너희는 두려워하지 말지어다.
이스라엘의 조상은 애굽에서 소수민족으로 각종 불이익을 당하면서 살았던 적이 있습니다. 북아프리카에서 가장 막강했던 애굽 제국의 손아귀에서 벗어나는 일은 불가능했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에게는 애굽을 벗어난다는 사실에 대한 두려움도 컸습니다. 일종의 노예 심리상태에 떨어졌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자유인이 될 기회가 있어도 그냥 노예로 살려고 합니다. 일종의 ‘미션 임파시블’인 출애굽 사건이 고대 이스라엘 역사에서 실제로 벌어졌습니다. 열 가지 재앙이 애굽에 임했고, 홍해가 갈라졌으며, 추격전을 펼치던 애굽 기마병은 홍해에 수장되었습니다. 이런 일들은 여호와 하나님이 이스라엘과 함께하시는 생생한 증거입니다.
하나님이 함께하신다는 학개의 설교를 들었다고 해서 이스라엘 사람들이 두려움을 쉽게 떨쳐낼 수는 없었을 겁니다. 하나님이 함께하신다는 사실은 들어서 깨닫는 게 아니라 영혼에 공명이 되어야만 깨달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무엇을 먹고 마시고 입을까 염려하지 말고 하나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 나라와 그의 의에 집중해서 살면 생존에 필요한 것을 하나님이 제공해주신다고까지 말씀했습니다(마 6장). 두려워하지 말라는 학개의 말이나 무엇을 먹고 마실까 염려하지 말라는 예수님의 말씀은 사람들의 귀에 잘 들어오지 않습니다. 두려워할 조건들과 먹고사는 데 필요한 것에 관한 염려가 우리를 완벽하게 지배하기 때문입니다. 어떻게 해야 할까요?
삶을, 인생을 관념으로가 아니라 실질적으로 이해하고 연습하는 게 그 해결의 첫걸음입니다. 우선 관념적인 삶이 무엇인지 생각해보십시오. 세상이 강요하는 인생살이의 여러 조건이 바로 관념입니다. 가장 분명한 조건은 많은 소유와 높은 사회적 지위입니다. 소유와 지위가 우리를 행복하게 만든다는 관념이 마귀처럼 우리의 삶을 지배합니다. 소유와 지위는 실재(reality)가 아닙니다. 따라서 그것으로 우리의 행복이 보장되지 않습니다. 인생살이의 실재는 생명 자체입니다. 물을 시원하게 마실 줄 알거나 향기를 느끼고, 사물과의 접촉을 황홀하게 받아들이는 것이 바로 실질적인 생명 경험입니다. 꽃을 보거나 가꾸면서 경험하는 기쁨이 실재의 생명입니다. 사람 관계도 그렇습니다. 사람들을 이용해서 자신의 이익을 확보하려는 생각은 관념입니다. 그것으로는 우리가 행복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단지 행복하다고 착각하는 겁니다. 사람을 실제의 사람으로, 즉 자기와 똑같이 하나님의 피조물로 느끼고 대하는 삶이 바로 실질적인 겁니다. 이런 실질적인 삶에는 비용이 많이 들지 않습니다. 조금만 노력하면 그런 비용은 누구나 준비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무엇을 먹을까 마실까 입을까 염려하지 말고, 즉 두려워하지 말고 하나님 나라와 의를 구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은과 금
학개는 출애굽 사건에서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하신다는 사실을 선포한 뒤에 한 차원 더 나아가는 말씀을 이어서 전합니다. 출애굽은 인류 역사의 차원에 속한다면, 6절의 내용은 우주론적인 차원의 말씀입니다.
만군의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노라 조금 있으면 내가 하늘과 땅과 바다와 육지를 진동시킬 것이요.
학개의 설교를 듣는 이스라엘 지도자들과 백성들이 두려움에 떨어진 이유는 자신들이 다시 바벨론 포로 신세로 떨어지지 않을까, 세상의 막강한 힘에 견줘서 자신들의 모습이 너무 초라한 게 아닌가 걱정했다는 데에 있습니다. 주변의 제국은 이스라엘이 겁먹는 게 당연할 정도로 막강합니다. 그러나 학개가 볼 때 하나님의 능력에 비해서 그런 제국은, 또는 대기업이나 재벌은 별것 아닙니다. 제국은 작은 나라를 식민지로 만들 뿐이지만 하나님 여호와는 하늘과 땅을 진동시킵니다. 모든 제국은 하나님의 손안에 놓여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학개의 이런 말씀을 아주 실질적으로 들어야 합니다. 두 가지 관점이 여기서 필요합니다.
첫째, 지난 인류 역사에서 등장했던 모든 제국은 멸망했습니다. 지금 당장은 어마어마한 힘을 행사하기에 사람들이 두려워하지만 조금만 멀리 내다보면 그들은 사실 아무것도 아닙니다. 하나님이 하늘과 땅과 바다와 육지를 진동시키면 그들은 맥없이 흔들립니다. 학개를 비롯하여 구약의 선지자들은 하나님만이 우주론적인 능력자라는 사실을 확실히 알았기에 왕과 제국을 향한 하나님의 심판을 경고할 수 있었습니다. 둘째, 하나님의 우주론적 능력 앞에서 모든 인간은 피조물이라는 실존으로 떨어집니다. 우리는 우리 생명을 스스로 유지하거나 완성할 수 없습니다. 생명에 필요한 일체가 밖에서 공급되어야만 합니다. 1분만 숨을 못 쉬어도 죽겠다고 고함칠 겁니다. 우리는 피조물이고, 하나님은 창조주이시면서 명실공히 세상의 주인이십니다. 그 사실을 안다면 하나님을 믿는 우리가 그 누구를, 그 어떤 세력을 두려워하겠습니까.
학개는 바로 이 사실, 즉 하나님이 역사와 우주의 주관자라는 사실을 8절에서 매우 재미있는 한 문장으로 표현했습니다. “은도 내 것이요 금도 내 것이니라.” 사람에게 소유는 없습니다. 다 아는 이야기지요? 그런데도 우리는 끊임없이 저 학개의 경구를 자기 것으로 삼으려고 합니다. “은도 내 것이요 금도 내 것이며, 집도 내 것이고 자식도 내 것이며, 내 인생도 내 것이고, 교회도 내 것이다.” 어처구니없는 주장을 마음에 새기면서 삽니다. 이런 주장이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의 작동원리라는 사실을 부정할 수는 없습니다. 이런 현실에서 우리가 벗어나는 과정이 인생살이가 아닐는지요. 인생의 연륜이 깊어지면서 은과 금이 내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절감합니다. 젊어서부터 미리 깨닫고 사는 사람이 있고, 나이가 들면서 조금씩 더 절실하게 깨닫는 사람이 있고, 간혹 나이가 들어도 전혀 낌새를 눈치채지 못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런 사람도 마지막 순간에는 어쩔 수 없이 두 손을 들겠지만요. 은과 금이 다 하나님 것이라는 사실을 분명하게 안다면 은과 금을 잃을까 염려하거나 두려워하는 일은 없지 않겠습니까.
영광과 평화
본문에서 반복되는 어떤 한 문장을 여러분이 눈치챘을 겁니다.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라는 문장입니다. 학개 선지자는 자기의 좁은 생각을 청중들에게 강요하는 게 아니라 여호와의 말씀을 전하는 겁니다. 이 문장이 4절부터 시작해서 9절까지 여섯 번이나 반복됩니다. 9절에는 두 번 나옵니다. 9절이 학개 선지자가 말하려는 결론에 해당합니다. 들어보십시오.
이 성전의 나중 영광이 이전 영광보다 크리라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 내가 이곳에 평강을 주리라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
‘만군’은 고대 유대인들의 하나님 명칭입니다. 히브리어로 ‘스바요트’입니다. 하나님의 강력한 능력을 강조할 때 사용하는 명칭입니다. 루터 성경은 원어인 스바요트를 그대로 사용했습니다. 독일어로 번역하기 어렵기 때문입니다. KJV은 재미있게도 ‘the LORD of hosts’로 표기했습니다. host는 손님을 초대한 주인, 또는 군대라는 뜻입니다. 우리말 성경 번역인 만군의 하나님과 비슷합니다. 출애굽 당시에 홍해를 가르셨으며, 하늘과 땅을 진동시키는 하나님이 바로 스바요트 여호와이십니다. 학개는 바로 그 스바요트 여호와께서 말씀하신다고 대담하게 외쳤습니다.
9절에서 두 가지 사실이 언급되었습니다. 하나는 성전의 나중 영광이 이전 영광보다 크리라는 사실이고, 다른 하나는 이 성전에 평화를 주신다는 사실입니다. 영광과 평화는 다른 개념처럼 들리지만 서로 깊이 연관됩니다. 영광은 하나님의 생명이 충만하게 나타나는 사건이나 그런 순간을 가리킵니다. 더 줄여서 말하면 영광은 하나님의 생명입니다. 성전에 영광이 가득하다는 말은 성전에 하나님의 생명이 가득하다는 뜻입니다. 고대인들은 그 하나님의 생명을 주로 평화에서 찾았습니다. 특히 고대 이스라엘 사람들에게는 이 평화가 구원이었습니다. 늘 전쟁의 위협을 받았기에 평화를 갈망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이 하나님의 영광과 평화를 알 때 인간 실존의 가장 깊은 곳에 자리한 두려움에서 벗어날 수 있는 사실을 학개 선지자는 이스라엘 지도자와 백성들에게 외쳤습니다.
저는 학개의 메시지가 선지자의 설교로서는 최선이라고 생각합니다. 대부분 내용에 동의합니다. 그러나 학개 선지자의 주장에 끝까지 함께할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의 영광과 평화는 그가 말하는 예루살렘 성전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나타났기 때문입니다. 요한복음 기자는 예수의 성전 정화 이야기를 전하면서 예수의 육체가 참된 의미에서 예루살렘 성전이라고 말했습니다.(요 2:21). 저는 옳다고 생각합니다. 누가복음은 예수 탄생 이야기에서 천사들의 합창을 이렇게 전합니다.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하나님이 기뻐하신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눅 2:14). 바울은 고후 4:6절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났다고 말했습니다. 예수에게서 하나님의 생명이 발현되었다는 뜻입니다.
학개가 살던 시대만이 아니라 오늘도 사람들은 크고 작은 염려와 두려움을 떨치지 못합니다. 삶 자체가 전쟁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한편으로는 염려와 두려움을 숙명으로 받아들이는 사람들이 있고, 그걸 피하려고 다른 일에 심취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여러분은 어떤 길을 찾았습니까? 제가 찾은 길을 여러분에게 말씀드릴 수밖에 없습니다. 성전 자체이신 예수님을 진실하게 믿으십시오. 예수에게 일어난 일에 형식적으로가 아니라 진정성 있게 집중해보십시오. 여러분은 두려움이 아니라 하나님의 크신 영광을 볼 것이며, 기대하지 못했던 놀라운 평화를 얻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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