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리아를 가만 두라!
요 12:1-8, 사순절 다섯째 주일, 2016년 3월13일
1 유월절 엿새 전에 예수께서 베다니에 이르시니 이 곳은 예수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나사로가 있는 곳이라 2 거기서 예수를 위하여 잔치할새 마르다는 일을 하고 나사로는 예수와 함께 앉은 자 중에 있더라 3 마리아는 지극히 비싼 향유 곧 순전한 나드 한 근을 가져다가 예수의 발에 붓고 자기 머리털로 그의 발을 닦으니 향유 냄새가 집에 가득하더라 4 제자 중 하나로서 예수를 잡아 줄 가룟 유다가 말하되 5 이 향유를 어찌하여 삼백 데나리온에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지 아니하였느냐 하니 6 이렇게 말함은 가난한 자들을 생각함이 아니요 그는 도둑이라 돈궤를 맡고 거기 넣는 것을 훔쳐 감이러라 7 예수께서 이르시되 그를 가만 두어 나의 장례할 날을 위하여 그것을 간직하게 하라 8 가난한 자들은 항상 너희와 함께 있거니와 나는 항상 있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
베다니에서
오늘 제3독서인 요 12:1-8절에는 한편으로는 가장 아름답거나 거룩한, 다른 한편으로는 가장 세속적인 이야기가, 또는 기쁨이 넘치거나 슬픔이 가득한 한편의 삽화처럼 보이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 이야기는 예루살렘에 가까운 베다니에서 벌어졌습니다. 한 집에서 예수님을 위한 잔치가 벌어졌습니다. 그곳은 아마 마리아와 마르다, 그리고 오빠인 나사로가 사는 집으로 보입니다. 마르다는 잔치 준비에 여념이 없었고 나사로는 여러 사람들과 함께 예수님 곁에 앉아 있었습니다. 그때 마리아가 비싼 향유 나드 한 근을 들고 예수님 발앞에 무릎 꿇고 앉아 향유를 예수님 발에 붓고 머리털로 발을 닦았다고 합니다. 뜻밖의 행동입니다.
예수님의 제자인 가룟 유다가 마리아의 행동을 못마땅하게 여겼습니다. 이 향유를 팔아서 가난한 사람들을 구제하는 게 낫지 않느냐고 꾸짖었습니다. 일리가 있는 주장입니다. 이 향유는 삼백 데나리온의 가치가 있습니다. 삼백 데나리온은 노동자들의 일년 연봉에 해당되니까, 지금의 가치로 따지면 대략 3천만 원이나 4천만 원쯤 됩니다. 이 향유는 마리아의 혼수품이었겠지요. 그 비싼 물건을 한 순간에 다 써버린 겁니다. 요한복음 기자는 가룟 유다가 가난한 사람을 구제하는데 마음이 있는 게 아니라 돈에 욕심이 난 거라고 비판적으로 코멘트를 달았습니다. 유다는 예수 공동체의 회계 책임을 맡고 있었는데, 요즘으로 하면 교회의 재정 부장입니다.
여러분은 이 마리아의 행동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각자 생각이 다르겠지만 일반적인 관점으로만 본다면 우리도 유다처럼 마리아의 행동을 못마땅하거나 어리석은 것으로 여길 겁니다. 일년 연봉을 한 순간에 날려버린 마리아의 행위는 사리분별을 못하는 광신자의 행위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좋게 봐서 예수님을 향한 끔찍한 사랑이 재물을 포기하게 했다 해도, 방법이 이상했습니다. 향유를 통째로 예수님께 드리면서, 이걸 좋은 데 쓰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제자들과 유랑 공동체를 꾸리던 예수님에게 돈이 필요한 것은 당연했으니까요. 그런데 향유를 발에 쏟은 겁니다. 누가 보더라도 마리아의 행위는 정상적인 것으로 보이지 않습니다. 가난한 사람을 돕는데 쓰는 게 옳다는 주장이 더 설득력이 있어 보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예수님이 보이신 반응은 예상 외였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공동번역으로 읽겠습니다.
이것은 내 장례일(日)을 위하여 하는 일이니 이 여자 일에 참견하지 말라. 가난한 사람들은 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겠지만 나는 언제나 함께 있지는 않을 것이다.
무슨 말씀인지 알듯 말듯합니다. 선(禪)문답처럼 들립니다. 평소 예수님의 생각과 행동에 근거해서 본다면 마리아를 꾸중하는 게 옳아 보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유다에게 마리아를 가만 두라고, 이 여자의 일에 참견하지 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렇게 말씀하시는 근거는 두 가지입니다. 1) 마리아의 행위는 예수님 당신의 장례를 미리 준비하는 것입니다. 2) 가난한 사람을 도울 수 있는 기회는 다시 오지만 예수님은 곧 세상에서 떠납니다. 근거가 두 가지이긴 하지만 실제로는 한 가지입니다. 마리아의 행위는 예수님의 장례 의식에 해당됩니다. 이것보다 더 엄청난 일, 더 본질적인 일, 더 위대한 일은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이 여자를 가만 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마리아는 누굴까요? 본문에서는 마리아를 마르다, 나사로와 남매지간으로 설명합니다. 본문 바로 앞의 요 11장에 예수님이 죽었던 나사로를 살린 이야기가 나옵니다. 눅 10:38-42절에는 그 유명한 마르다와 마리아 이야기가 나옵니다. 예수님이 자기 집에 들어오자 마르다는 음식 준비에 바쁘고 마리아는 예수님 발치에 앉아서 말씀을 듣고 있었습니다. 마르다는 예수님에게 가서 음식 준비에 바쁜 언니를 도울 생각을 하지 않는 마리아를 좀 타일러 달라고 부탁합니다. 예수님은 대략 다음과 같은 뜻으로 마르다에게 대답하셨습니다. ‘마르다, 그대는 너무 많은 일로 마음이 분산되어 있는데, 사람이 한 가지만 잘해도 됩니다. 그대의 동생 마리아는 좋은 걸 선택한 거니까 뭐라 할 거 없습니다.’ 말씀에 귀를 기울이고 있던 마리아가 바로 예수님 발에 향유를 부은 마리아와 동일 인물일까요? 그렇다면 마리아가 한번은 예수님 발치에서 말씀만 들었고, 다른 한번은 오늘 본문이 말하는 것처럼 향유를 부었다는 말이 됩니다. 동일한 사건을 누가와 요한이 약간 다르게 설명한 것인지도 모릅니다.
예수님에게 향유를 부은 여자 이야기는 오늘 본문의 병행구인 마 26:6-13과 막 14:3-9만이 아니라 눅 7:36절 이하에도 나옵니다. 누가복음의 설명에 따르면, 죄를 지은 한 여자가(이름을 나오지 않습니다.) 바리새인 집에서 식사를 하고 있던 예수님에게 와서 울면서 예수님 발에 입을 맞추고 향유를 부었습니다. 아주 극진한 예의를 갖춘 겁니다. 바리새인들은 소문이 좋지 못한 여자를 가까이 오게 허락한 예수님을 못마땅하게 생각했습니다. 이 바리새인들에게 예수님은 이 죄 많은 여자야말로 사랑이 많은 여자라고 말씀하시고, 이어서 이 여자에게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셨으니 평안히 가라.’고(눅 7:50) 말씀하셨습니다. 복음서에 따라서 약간 씩 사실관계가 다르기는 하지만 한 여자가 예수님에게 고가의 향유를 부었다는 사실, 그리고 이로 인해서 논란이 벌어졌으며, 이 논란을 예수님이 일언지하에 물리쳤다는 사실만은 분명합니다. 예수님이 이렇게 단호하게 말씀하신 이유는 이 향유 사건이 바로 기독교 신앙의 본질에 해당되기 때문입니다.
유월절 어린양
이 사건이 일어난 때는 유월절 엿새 전입니다. 유월절은 출애굽을 기념하는 유대인의 절기입니다. 출애굽은 유대인들이 소수 민족으로 고통당하던 이집트로부터 탈출한 사건입니다. 이집트의 파라오는 유대인들의 탈출을 끝까지 막아보려고 했습니다. 아홉 가지 재앙이 임할 때까지 버텼습니다. 죽음의 천사가 이집트 사람들의 장자와 짐승의 맏배를 다 죽이는 열 번째 재앙이 일어난 다음에야 손을 들고 항복했습니다. 마지막 재앙 때 그 죽음의 천사가 유대인들의 집은 그냥 지나쳤다 해서, 이 절기를 유월절(踰越節, Passover)이라고 합니다. 유대인들은 유월절 축제 때 가정 마다 양을 잡습니다. 양이 자신들의 죄를 대신해서 죽는다고 생각한 겁니다. 요한복음 기자는 예수님이 바로 유월절에 바쳐질 어린 양이라고 보았습니다. 세례를 받으러오는 예수님을 보고 세례 요한은 주변 사람들에게 요 1:29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Agnus Dei)이로다.’
이런 신앙에서만 철없는 행위로 보이는 마리아의 향유 사건이 이해될 수 있습니다. 인류 구원을 위한 예수의 죽음에 최선의 예를 바치기 위해서 일 년치 연봉에 해당되는 향유를 붓는 일은 전혀 이상한 행동이 아닙니다. 예컨대 자기 가족이 난치병에 걸렸다고 합시다. 그런데 새로운 의학 기술이 나와서 치료될 길이 열렸습니다. 다만 돈이 문제였습니다. 집 한 채 값이 필요합니다. 사람을 살리는 길이라면 집이 아니라 더 큰 재산이라도 포기할 겁니다. 마리아의 행동은 인류 구원과 연관된 것이기에 더 할 나위 없이 가치 있는 것이며 본질적인 것이었습니다. 가난한 사람을 구제하는 것보다 더 중요했습니다. 간혹 교회의 존재 이유를 구제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구제 행위 자체는 소홀히 할 수 없지만, 그것이 교회의 존재 이유는 되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기독교 신앙은 인류 구원이 구제를 통해서가 아니라 예수의 십자가 죽음을 통해서만 가능하다고 가르치기 때문입니다. 이런 점에서 어린 양이신 예수의 장례를 준비한 마리아의 행위는 그 어떤 것에 의해서도 부정될 수 없습니다. 절대적인 행위입니다.
예수님이 유월절 어린 양이라는 사실은 두 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1)하나는 사람이 죄로 인해서 파멸당할 수밖에 없는 운명에 처해있다는 엄중한 사실입니다. 죄는 단순히 파렴치하고 부도덕한 행위를 가리키는 게 아닙니다. 그런 일이 일어나는 더 근본적인 사태를 가리킵니다. 자기중심성이 죄입니다. 여기서 많은 충돌이 일어납니다. 자기를 중심으로 판단하다보면 파괴적인 행동을 할 수밖에 없습니다. 더 나가서 세상에서 자기를 성취해도 만족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그런 일에 더 매달립니다. 성경이 인간을 죄인이라고 하는 것은 바로 이 사실을 가리킵니다. (2)유월절 어린 양이 가리키는 다른 하나는 예수의 십자가 죽음을 통해서 인류의 죄가 용서받는다는 사실입니다. 교회에 나오지 않는 사람들은 이런 설명을 허무맹랑하다고 여길 수 있습니다. 교회 나오는 분들도 이런 말이 실질적으로 와 닿지 않을 수 있습니다. 이걸 관념적인 기독교 교리로 치부해버리고 맙니다. 이 문제는 제가 설교할 때마다 반복해서 설명한 것이기 때문에 오늘은 더 이상 말씀드리지 않겠습니다. 대신 마리아의 향유 사건이 오늘 우리에게 실제로 무엇을 가리키는지를, 예수의 장례를 준비한다는 게 무엇을 가리키는지를 설명하겠습니다. 이런 설명이 간접적으로 예수를 통한 죄의 용서가 무엇인지를 알게 해 줄 것으로 기대합니다.
거룩한 낭비
나드 한 근을 예수의 발에 붓고 자기 머리털로 발을 닦는 마리아를 다시 생각해보십시오. 다른 사람들의 눈에 그것은 분명히 낭비로 비쳤을 것입니다. 합리성과 실용성을 최대 가치로 여기는 현대인들에게는 말도 되지 않는 행동이었습니다. 현대인들은 낭비를 딱 질색합니다. 촌음을 아껴서 삽니다. 일찍 일어나서 늦게 잡니다. 요즘 젊은이들은 취업이 힘듭니다. 취업했다고 해도 견뎌내기가 보통 일이 아닙니다. 대기업에 취업한 젊은이들을 보니, 모든 삶을 포기하면서 회사 일에 매달립니다. 우리나라 노동 시간이 OECD 국가 중에서 가장 길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입니다. 학생들도 삶에 대해서 생각할 틈이 없이 입시에 매달립니다. 유치원 아이들부터 청장년에 이르기까지 모두가 바쁘게 삽니다. 교회도 바쁘게 돌아가기는 마찬가지입니다. 그런 방식으로 경쟁력을 끌어올리는 것을 가치 있는 삶이라고 모두들 생각합니다. 시대정신이 이러하니 어쩔 수 없는 거 아니냐, 혼자만 정신적으로 고상한 것처럼 유유자적하면서 이 세상에서 살아갈 수는 없는 거 아니냐, 하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조금만 생각을 돌려보십시오. 우리가 분초를 다투듯이 분주하게 살면서 이룬 것이 실제로 무엇일까요?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결국 돈이라고 해도 틀린 말이 아닐 겁니다. 열심히 노력한 사람은 그만한 보상을 받을 겁니다. 잘 안 될 때도 있지만 일반적으로만 보면 노력한 것만큼 보상이 따릅니다. 그 돈이 우리 삶을 얼마나 풍요롭게 해줄는지를 생각해보십시오. 흔한 말로 죽을 때 돈을 싸들고 가지 못합니다. 자식에게 물려줄 수도 있고, 자선단체나 교육단체에 기증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어떤 경우든지 자기의 삶을 몽땅 쏟을만한 가치가 돈에 없다는 것만은 분명합니다. 자기 집을 장만한다는 생각만 하지 않아도 우리가 이렇게 바동거리면서 살지는 않을 겁니다. 저는 이런 말씀을 드리면서도 정 목사가 세상이 얼마나 각박한지 물정을 모르고 저런다는 말을 듣지 않을까 염려스럽습니다. 그래도 어쩔 수 없습니다. 돈으로 우리의 생명이 풍요로워지지 않는다는 사실이 너무 명백하기 때문입니다. 교회가 크다고 해서 신자들이 영적으로 행복하거나 건강한 게 아니라는 사실에서도 이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마리아의 행위는 단순한 낭비가 아니라 ‘거룩한 낭비’입니다. 그런 낭비는 많을수록 좋습니다. 거룩한 낭비는 생명을 얻는 사건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시간은 거룩한 두려움을 경험하는 순간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자신의 삶을 잘 생각해보십시오. 거룩한 경험이 얼마나 있으신가요? 기쁨과 평화로 영혼이 충만한 순간들 말입니다. 그래서 영혼이 떨리는 경험 말입니다. 우리의 인생에서 이런 순간이 그렇게 많지 않습니다. 매개는 무미건조하거나 자극적인 일상에만 떨어집니다. 하이데거 표현으로 일상으로의 퇴락입니다. 사람은 이런 상태에서는 결코 영적인 만족을 얻지 못합니다. 아무리 좋은 일상이라도 마찬가지입니다. 좋은 집에서, 맛있는 걸 먹고, 건강한 가운데서 온갖 취미생활을 즐긴다고 생각해보십시오. 결국 그 모든 것이 지루해집니다. 저는 3년 전에 전원주택으로 이사를 했습니다. 생활 조건이 쾌적합니다. 그러나 내 영혼이 새로운 시각을 유지하지 않으면 그런 조건이 더 이상 매력적인 게 아닙니다.
자신의 재산 전체를 쏟아 부을 정도로 마리아의 영혼을 뒤흔든 것은 도대체 무엇일까요? 나중에 천국에 가서 한번 물어봐야겠습니다. 지금 내가 말할 수 있는 것은 마리아가 행한 거룩한 낭비는 자기 존재 전체에 걸린 문제라는 사실입니다. 그런 관점이 없으면 영혼이 흔들리고 공명되는 경험을 할 수 없습니다. 존재 전체는 연봉이 얼마인가, 연금을 얼마나 받느냐, 하는 게 아니라 영혼 구원과 연관됩니다. 그런 시각이 열릴 때 자기 삶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판단할 수 있습니다. 그럴 때 예수님이 바로 유월절 어린 양이라는 사실에 영혼 전체를 기울일 수 있습니다. 마리아에게는 그런 경험이 있었기에 다른 것은 다 상대적인 차원으로 떨어집니다. 그렇습니다. 죄를 용서받고 하나님에게 의롭다고 인정받는다는 사실을 예수님에게서 경험한 사람이라고 한다면 그 외의 다른 것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워집니다. 이게 구원 경험입니다. 마리아와 같은 영적인 태도로 오늘 우리는 예배를 드리고 있습니다.
그러나 마리아의 영적인 태도가 그렇게 낭만적인 것은 아닙니다. 주변에서 비판을 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구제가 낫다고 비판한 가룟 유다처럼 세상 사람들은 우리를 향해서 왜 그렇게 어리석냐, 예수 믿으면 밥이 나오냐 떡이 나오냐, 인생을 그런 일에 낭비하지 말라고 충고합니다. 예배드리는 시간에 차라리 땅을 파라고 합니다. 교양 있는 사람들은 하나님을 믿는 것보다는 사회봉사에 힘을 쏟는 게 옳다고 비판합니다. 신자로 사는 것보다 휴머니스트로 사는 게 더 가치 있다는 주장입니다. 그들에게 여러분들은 딱히 반론을 펼치기 힘들 겁니다. 우리가 말을 해도 그들은 인정하지 않으려고 할 겁니다. 이런 세상 앞에서 두려우신가요?
여러분에게 다시 말씀드립니다. ‘마리아를 가만 두라.’는 예수님의 말씀이 우리를 위로하고, 우리에게 용기를 줍니다. 이 말씀에는 두 가지 뜻이 있습니다. 첫째, 마리아는 예수님을 절대 생명으로 경험했습니다. 예수님은 이미 그 사실을 알아보았기 때문에 그녀를 가만 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둘째, 진리는 예수님의 말씀에 의해서만 결정됩니다. 예수님이 바로 길, 진리, 생명이기 때문입니다. ‘가만 두라.’는 말씀은 동생 마리아를 타일러 자기를 돕게 해달라는 마르다에게 마리아는 좋은 걸 택했으니 ‘빼앗기지 않을 것’이라는 예수님의 말씀과 동일 차원입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에게 영적으로 몰입하는 우리의 선택은 예수님에 의해서 보장받았으니, 굳이 그럴듯해 보이지만 생명을 주지는 못하는 세상으로부터 인정받아야 한다는 생각에서 자유로워져도 좋습니다. 걱정하지 말고 예수님의 말씀에 굳게 서서 가던 길을 계속 가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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