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리아의 좋은 선택
눅 10:38-42, 성령강림후 아홉째 주일, 2016년 7월17일
복음서에는 예수님과 관계된 많은 사람들이 등장합니다. 가깝게는 열두 제자들이고, 또 예수님에게 도움을 받은 병자들과 장애인들도 나오고, 예수님과 논쟁하거나 질문한 사람들도 있습니다. 이들 중에서 마르다와 마리아는 여러 가지 점에서 특별합니다. 예수님과 이 두 자매가 어떤 관계였는지에 대해서 성경은 별로 말이 없습니다. 니코스카잔치키스의 『최후의 유혹』이라는 소설에는 이 두 자매가 예수님과 결혼한 것으로 나옵니다. 소설가의 상상력에서만 가능한 이야기입니다. 마르다와 마리아에게는 나사로라 이름 하는 오빠도 있습니다. 죽었던 나사로를 예수님이 살린 이야기는 요 11장에 나옵니다. 이들 세 남매 이야기는 요 12장에 다시 나옵니다. 이들은 예수님을 위해서 잔치를 베풀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을 비롯해서 많은 사람들이 모인 것 같습니다. 마르다는 주방에서 열심히 일을 하고 마리아는 고급 향유를 예수님의 발에 붓고 자기 머리털로 예수님의 발을 닦았다고 합니다. 병행구로 나오는 마태복음과 마가복음은 마리아라는 이름을 밝히지 않고 그냥 한 여자라고만 합니다(마 26:7, 막 14:3).
오늘 제3독서인 눅 10:38-42절에 마르다와 마리아 이야기가 나옵니다. 예수님 일행이 한 마을에 들어가셨습니다. 앞에서 말씀드린 몇몇 구절을 근거로 보면 이곳은 베다니로 보입니다. 마르다가 예수님을 자기 집으로 모셨습니다. 젊은 여자가 낯선 남자를 자기 집으로 들이는 건 자연스럽지 않습니다. 평소에 예수님과 허물없을 정도로 가깝게 지냈기에 가능한 것으로 보입니다. 동생 마리아는 예수님의 발치에 앉아있었고, 언니 마르다는 예수님을 대접하기 위해서 음식을 장만하느라 마음이 분주했다고 합니다. 마르다는 일하다 말고 예수님에게 와서 이렇게 도움을 청합니다.
주여, 내 동생이 나 혼자 일하게 두는 것을 생각하지 아니하시나이까 그를 명하사 나를 도와주라 하소서.
이 상황이 눈에 선하게 그려집니다. 예수님을 집에 모신 마르다와 마리아 자매는 기쁨이 넘쳤을 겁니다. 예수님이 어디 보통 손님입니까? 앞에서 인용한 요한복음 11장이 밝히고 있듯이 예수님은 죽었던 오빠 나사로를 살린 생명의 은인입니다. 그런 일이 없었다고 하더라도 평소에 아주 가깝게 지낸 분이었으니 최상의 대접을 해야 합니다. 마르다는 며칠 전부터 시장을 보고 오늘 일찍 온갖 만난 음식을 만드느라 정신이 없었을 겁니다. 이웃집의 도움도 받았겠지요. 그런데 동생 마리아는 도울 생각을 하지 않고 예수님의 발치에 앉아있습니다. 마르다는 그런 동생이 귀엽기도 하지만 지금은 그럴 때가 아니라고 생각했습니다. 예수님이 여행 중이라 피곤하기도 하고, 말씀 듣는 건 천천히 해도 되니 일단 예수님 혼자 쉬게 하고 언니를 도와서 부엌일을 하는 게 당연합니다. 그래도 예수님이 좋아 저러는가 보다 하고 조금 기다려보았지만 예수님 발치를 떠날 기미를 전혀 보이지 않자, 마르다는 어쩔 수 없이 예수님에게 가서 말씀을 드린 겁니다.
마르다를 일에 욕심이 많은 여자라고, 영성이 없는 여자라고 보면 곤란합니다. 그녀도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싶었습니다만 지금은 일단 예수님 일행을 위해서 먹을 걸 준비하는 때라는 걸 알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자기가 맡은 일을 성실하게 감당하는 중입니다. 이런 사람은 교회에 꼭 필요합니다. 교회만이 아니라 사회에서도 이런 사람은 필요합니다. 제가 예수님의 입장이었다면 당연히 마르다의 의견을 받아들여서 ‘마리아야, 이제 그만 일어나 부엌에 나가 언니를 도와주는 게 어떻겠니? 언니가 지금 아주 바쁘단다.’ 하고 마리아를 일으켜 세웠을 겁니다. 마르다의 기대와 달리 예수님은 전혀 다른 말씀을 하셨습니다. 듣기에 따라서 말한 사람이 민망할 정도의 말씀입니다. 본문 41,42절은 이렇습니다.
마르다야 마르다야 네가 많은 일로 염려하고 근심하나 몇 가지만 하든지 혹은 한 가지만이라도 족하니라 마리아는 이 좋은 편을 택하였으니 빼앗기지 아니하리라.
이 말씀의 대상은 마르다와 마리아 두 사람입니다. 이 두 사람은 단순히 자연인으로서의 마르다와 마리아만이 아니라 기독교인의 두 유형을 가리킵니다. 먼저 마르다는 많은 일로 염려하고 근심하는 사람입니다. 실제로 바쁩니다. 바쁘면 염려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우리도 살아가면서 감당해야 할 일이 많습니다. 아무도 여기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현대인들은 훨씬 더 바쁘게 살고, 쫓기며 염려합니다. 삶이라는 게 이상해서 걱정하고 염려하던 것들이 해결되면 다른 염려 없이 소박하게 삶에 집중하면서 살 거로 생각하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습니다. 생활의 여유가 생기면 해야 할 일이 더 많아집니다. 교회도 그렇습니다. 개척교회는 최소한 자립할 정도만 되면 신앙 자체에 더 집중할 수 있으려니 하지만 어느 정도 교회의 몸집이 커지면 일이 더 많아지면서 신앙에 집중하지 못합니다.
나쁜 일이라면 모르지만 좋은 일이라면 가능한 많이 하면서 더 열심히 사는 게 행복한 거라고 사람들이 생각합니다. 오래 전 어떤 재벌 총수는 ‘세상은 넓고 할 일은 많다.’는 말을 남겼습니다. 세상에는 정말 좋은 일을 많이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아프리카나 동남아시아 오지에 들어가서 자기의 삶을 전적으로 헌신하는 사람들도 많습니다. 정치와 경제 부분에서도 해야 할 일은 많고, 그렇게 살아가는 사람들도 많습니다. 목사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자신이 맡은 교회에서 목회하는 것만도 시간이 모자랄 텐데, 굳이 총회장이 되겠다고 선거 운동을 하는 목사들이 있습니다. 대학교 교수면 충분한데도 총장을 하겠다는 사람들도 적지 않습니다. 뭔가 이웃과 세상을 위해서 바쁘게 일을 하겠다는 겁니다. 그런 마음으로 국회의원이 되고, 시장과 군수가 되고, 대통령이 되고, 유엔 사무총장이 됩니다. 그런 자리에 서면 그들은 많은 염려와 걱정을 안고 삽니다. 마르다와 비슷한 사람들입니다. 그들의 일이 아무리 선하고 옳다고 하더라도 사람은 그것으로 구원받지 못합니다. 구원받지 못한다는 말은 행복하지 않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높은 지위를 사적으로, 이기적으로, 폭력적으로 이용하는 사람들은 아예 제쳐놓고 드리는 말씀입니다.
‘설마, 그렇겠어? 할 일이 많은 사람이 행복한 거잖아.’ 하고 생각할 분들이 여기 계실까요? 제 말을 믿지 못하겠으면 예수님의 말씀을 믿으십시오. 마르다가 많은 일로 염려하고 걱정하지만 ‘몇 가지만 하든지, 혹은 한 가지만이라도’ 충분하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무슨 말씀인가요? 모든 일이 질적으로 똑같다는 뜻입니다. 대통령이 하는 일이나 가정주부가 하는 일이나 근본적으로 똑같습니다. ‘한 가지’일 뿐입니다. 재벌 총수가 하는 일이나 청소부가 하는 일이나 똑같습니다. 대학교수가 하는 일이나 유치원 선생이 하는 일이나 똑같습니다. 그 모든 일은 다 지구라는 행성에서 인간이 하는 일이지 그 이상도 아니고 이하도 아닙니다. 사람들은 그 사실을 눈여겨보지 않기 때문에 삶을 오해합니다. 권력을 행사할 수 있는 자리에 올라가면 행복할 것으로 여깁니다. 수백억 원의 재산을 소유했다고 해도 삶이 행복하지 않은데 그게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세상에서 한 가지만 선택해서 살면 됩니다. 각각의 역할이 다를 뿐이지 모든 일이 질적으로는 똑같기 때문입니다.
다른 사람들의 경우는 제가 몰라도 목사들의 삶에 대해서는 압니다. 1만 명 교인이 모이는 교회의 목사와 1백 명 모이는 교회의 목사 사이에 어떤 차이가 있을지 생각해보십시오. 그걸 제가 일일이 짚지 않겠습니다. 보는 관점에 따라서 그 차이가 클 수도 있고, 거꾸로 아주 작을 수도 있습니다. 저는 후자가 옳다고 보는 사람입니다. 둘 다 목사로 산다는 사실에서 똑같습니다. 큰 교회 목사는 구조적으로 많은 일로 염려하고 근심하지만, 작은 교회 목사는 상대적으로 그런 염려와 근심이 적거나 없습니다. 그렇다면 어느 쪽을 선택할지는 답이 나옵니다. 제 설명이 너무 이상적이어서 현실성이 떨어진다고 생각하는 분들도 있을 겁니다. 그래서 많은 목사들이 큰 교회를 맡으려고 줄을 섰고, 큰 교회 목사들은 교회를 자기 자녀에게 물려주기도 하고, 작은 교회 목사들은 교회를 키우는 것에 목을 맵니다. 교회와 목회도 세상을 사는 방식과 거의 똑같이 돌아갑니다. 이게 우리가 사는 세상의 작동원리입니다. 비록 많은 일로 염려하고 근심하더라도 가능하면 높은 자리, 권력, 소유에 마음을 두고 살아가도록 강요하는 세상에서 삽니다. 신자들에게 ‘그게 아니야, 그렇게 많은 것으로 염려하고 근심하는 삶을 선택하면 안 돼.’ 하고 설교해봐야 큰 반향을 얻지 못할 겁니다. 그래도 어쩔 수 없습니다. 성경을 통해서 제가 배워서 알고 있는 것이 그것이기 때문에, 그리고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이 분명히 말씀하신 것이기 때문에 그것을 전할 뿐입니다.
예수님은 마리아가 좋은 한 가지를 선택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마리아는 그 선택한 것을 빼앗기지 않을 것입니다. 마리아가 부엌일로 바쁜 사람들 아랑곳하지 않고 그 자리에 앉아 있을 수 있었던 이유는 철이 없어서가 아니라 자기에게 정말 좋은 것이 무엇인지를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 마리아는 누굴까요? 이 이름은 당시에 흔했습니다. 예수님의 어머니도 마리아였고, 그 외에도 예수님을 따르던 여자들 중에서 마리아라는 이름의 여자들이 몇 명 됩니다. 설교 앞부분에서 확인한 것처럼 마 26장과 막 14장, 그리고 요 12장에 따르면 마리아는 예수님의 발에, 또는 머리에 향유를 부은 여자입니다. 복음서 기자들은 이 여자의 행위가 예수님의 장례를 위한 거룩한 세리머니였다는 코멘트를 달았습니다. 이런 거룩한 의식을 자발적으로 행한 사람은 마리아가 유일합니다. 그녀는 제자들을 비롯해서 모든 예수 추종자들을 중에서 예수님의 운명에 가장 가까이 다가갔던 인물이라고 봐야 합니다.
오늘 본문에서 마리아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예수님의 발치에 앉아서 말씀을 듣고 있을 뿐입니다. 대화의 주도권은 마르다와 예수님에게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제가 화가라면 마리아를 돋보이게 그릴 겁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풀어서 재구성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네 동생 마리아를 봐라. 부엌일을 도와주지 않는다고 해서 네가 못마땅하게 생각하고 있다만 사람이 인생에서 그렇게 많은 것을 하면서 사는 게 아니란다. 사실은 많은 걸 하든지 한 가지만 하든지 아무런 차이가 없는 거다. 네 동생 마리아는 정말 좋은 한 가지를 선택했단다. 그러니 아무도 그녀의 삶을 간섭할 수 없는 거야.’ 마리아는 주님의 말씀을 대면하는 삶을 선택했습니다. 그녀에게 이것보다 더 좋은 삶은 없기 때문이었습니다.
우리도 마리아처럼 부엌일은 팽개치고 오직 예배와 말씀과 찬송과 기도만 하면서 살아야 하는 건가, 그렇게 살려면 수도원에 들어가야 하는 건가, 하고 질문하고 싶으실 겁니다. 원칙적으로만 본다면 수도원 중심의 삶이 최선입니다. 수도원의 삶은 가장 소박한 방식으로 운용됩니다. 기도와 노동입니다. 여기서 기도는 영적인 노동이고, 노동은 몸의 기도입니다. 인간이 인간답게 살아가는 데 가장 핵심적인 요소가 바로 이것입니다. 누구나 마음만 먹으면 이렇게 살아갈 수 있는 사회라고 한다면 그 사회는 건강한 사회입니다. 그러나 이런 게 보장된 사회는 찾아보기 쉽지 않습니다. 대한민국에서 진실한 기도와 창조적 노동은 보장받지 못합니다. 모든 것이 돈을 버는 것에만 집중되어 있습니다. 이런 반(反)수도원적인 세상에서 마리아처럼 사는 게 실제로 가능할까요?
마리아가 ‘주의 발치에 앉아 주의 말씀을 들었다.’는 사실을 다시 보십시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아들로서 구원자이십니다. 마리아가 오로지 주의 말씀에 집중했다는 것은 자신의 구원에 집중했다는 뜻입니다. 자기 구원에 집중하는 사람은 다른 것에 신경을 쓸 겨를이 없습니다. 구원 문제가 자기 영혼을 가득 채우기 때문입니다. 이게 신앙의 출발이자 과정이며 목표입니다. 이 문제는 초기 기독교에서 논란이 되는 현안이기도 했습니다. 교회의 기능을 보통 네 가지로 말합니다. 케리그마, 디다케, 코이노니아, 디아코니아입니다. 차례대로 번역하면 말씀선포, 교육, 친교, 봉사입니다. 이 네 가지는 교회가 취해야 할 기능들입니다. 핵심은 케리그마, 즉 말씀선포입니다. 말씀선포보다는 교육을 더 중요한 것으로 말하기도 하고, 친교와 봉사가 더 중요하다고도 말합니다. 심지어 요즘은 교육목회나 상담목회라는 말도 있습니다. 스스로 수준이 높다고 생각하는 교회일수록 교육과 봉사, 그리고 교회개혁과 세상개혁을 강조합니다. 다 필요한 것들입니다. 그러나 교회는 기본적으로 말씀 중심의 공동체라는 사실은 부정될 수 없습니다.
마리아처럼 말씀에 집중하는 사람이 되고, 그런 교회가 되는 건 어렵습니다. 아무나 마리아를 흉내 낼 수 없습니다. 말씀만으로 만족하면서 신앙생활을 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이는 하나님만으로 만족하지 못한다는 말과 똑같습니다. 개별 기독교인들도 그렇고, 교회도 역시 그렇습니다. 삶의 깊이에서 기쁨과 의미를 느끼지 못할 때 다른 소일거리를, 좀더 심하게는 여흥이나 유흥을 찾는 것처럼 신앙의 깊이가 없을 때 뭔가 신앙적인 소일거리를 찾습니다. 그런 많은 일을 하는 것으로 자기의 신앙을 확인하려고 합니다. 교회가 일거리를 많이 벌이는 이유도 그런 종교적 욕망에 부응하는 것입니다. 기독교 신앙은 그런 것으로 유지되지 못합니다. 그래도 그런 방식으로 살고 싶은 분들은 그렇게 살면 됩니다. 마르다의 길입니다. 나쁜 선택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좋은 선택은 결코 아닙니다.
저는 여러분들의 실제 삶에서 가장 좋은 선택이 무엇인지 구체적으로 말씀드릴 수는 없습니다. 각자 삶의 형편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에 근거해서 방향만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하나는 소극적인 것이고, 다른 하나는 적극적인 것입니다. 먼저 소극적인 방향은 여러 가지 일로 염려하고 근심하는 것을 선택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아무 것도 하지 않을 수는 없으니, 무슨 일을 하든지 염려하지 말고, 근심하지 않으면 됩니다. 염려하고 근심할 거면 하지 말아야 합니다. 적극적인 방향은 자신에게 정말 좋은 것을 선택하라는 것입니다. 자신에게 정말 좋은 것이 무엇인지 분간하기가 쉽지 않을 겁니다. 현대처럼 복잡한 사회에서는 더욱 어렵습니다.
그렇습니다. 여러분은 스스로 선택하는 게 아니라 선택당할 수밖에 없는 살벌한 세상에서 살고 있어서, 마리아처럼 살아야 한다는 말이 공허하게 들릴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래도 저는 말씀을 선포하는 목사로서 그 사실을 전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유일회적인 인생살이에서 여러분에게 정말 좋은 것이 무엇인지 분간하여 그것을 용감하게 선택해야 합니다. 아무에게도 빼앗기지 않는 그것, 세상의 강력한 세력 앞에서도 흔들리지 않을 수 있는 그것 말입니다. 최선의 선택은 마리아처럼 예수 그리스도의 발치에 앉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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