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의 장애를 넘어
안식일에 얽힌 두 이야기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은 그 유명한 안식일 논쟁에 관한 것입니다. 약간 상황이 다르지만 결국은 한 가지 주제를 다루고 있는 두 이야기가 연속적으로 등장합니다. 마가는 앞의 이야기에서 바리새인들과 예수님 사이에 안식일 논쟁으로 인해서 문제가 발생하게 되었다는 사실을 넌지시 암시한 다음, 뒤의 이야기에서 그 논쟁이 심각한 갈등으로 비화되었다는 사실을 전합니다. 마태복음과 누가복음도 똑같은 구조로 되어 있습니다. 우선 각각의 이야기를 간추려봅시다.
막 2:23-28절 이야기의 시작은 목가적 분위기를 자아냅니다. “어느 안식일에 예수께서 밀밭 사이를 지나가시게 되었다.”는 구절은 “보리밭 사이길로 걸어가면”이라는 우리의 가곡에서 느낄 수 있는 그런 분위기와 똑같습니다. 제자들은 밀이삭을 잘라 먹었습니다. 이런 일들은 흔한 것이며, 율법적으로도 큰 문제는 아니었습니다. 문제는 공교롭게도 그날이 안식일이었다는 겁니다. 안식일에는 모든 노동이 금지되었습니다. 바리새인의 눈에 제자들의 행위는 노동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시비를 거는 바리새인들에게 다윗과 관련된 이야기를(삼상 21:1-10) 해주었습니다. 그것은 다윗이 소수의 부하들과 함께 망명생활을 시작하던 시절의 이야기입니다. 굶주린 다윗은 제사장만 먹을 수 있는 거룩한 빵을 먹었습니다. 예수님은 특별한 경우에 율법을 넘어서는 일들이 벌어진다는 의미로 이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그런 생각이 바로 다음과 같은 구절에 담겨 있습니다.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있는 것이지,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있는 것은 아니다. 따라서 사람의 아들은 또한 안식일의 주인이다.”(27,28절)
두 번째 이야기는 회당에서 일어났습니다. 첫 번째 이야기의 배경인 전원과 비교할 때 회당은 율법적인 분위기가 훨씬 강하게 느껴집니다. 그 회당에 한쪽 손이 오그라든 사람이 있었고, 다른 한쪽에는 예수를 고발하려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그 장애인을 앞으로 불러내셨습니다. 사람들에게 이렇게 물었습니다. “안식일에 착한 일을 하는 것이 옳으냐? 악한 일을 하는 것이 옳으냐? 사람을 살리는 것이 옳으냐? 죽이는 것이 옳으냐?” 그들은 말문이 막혔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의 마음이 완고하다는 사실을 확인하고 탄식하시며 노기 띤 얼굴로 그들을 한번 둘러보시고 보란 듯이 장애인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손을 펴라.” 그의 손은 멀쩡해졌습니다. 그러자 바리새인들은 밖으로 나가서 헤로데 당원들과 만나 예수를 없애버린 방도를 모의했습니다.
밀이삭으로 촉발된 안식일 논쟁이 이제는 살해모의까지 이르게 되었습니다. 도대체 여기서 무엇이 문제입니까? 유대인들 중에서 가장 경건하고 모범적인 바리새인들이 무슨 이유로 예수님을 없애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을까요? 웬만하면 바리새인들과의 관계를 시끄럽게 만들지 말고 우호적으로 만드는 게 좋았을 텐데, 예수님은 왜 상황을 이렇게 어렵게 만들고 있을까요? 과연 안식일 문제가 목숨을 걸어둘 만큼 예수님에게 절실한 것이었을까요?
논리의 타당성
오늘 본문의 두 사건을 표면적으로만 본다면 바리새인들에게는 큰 잘못이 없습니다. 제자들이 밀이삭을 잘라먹지 않으면 굶어죽을 정도로 절박한 상황이 아니었다면 가능한대로 유대인들의 전통인 안식일 규정을 지키는 게 옳습니다. 그렇다면 제자들을 꾸중하는 게 도리일 텐데 예수님은 별로 직접적으로 연관되지 않는 다윗 이야기를 거론하면서 제자들을 변호했습니다. 다윗 이야기가 제자들 행동과 직접적으로 연관되는 게 아니라는 말은 제자들의 상황이 다윗처럼 위태롭지 않았다는 뜻입니다. 더구나 예수님은 “안식일이 사람을 위해서 있는 것이다.”는 말씀까지 하셨습니다. 이런 말씀은 보기에 따라서 예수님이 좀 ‘오버’하신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을 들게 합니다. 유대교 격언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너희들이 안식일에 맡겨진 게 아니라 안식일이 너희에게 맡겨졌다.” 이것에 근거한다면 바리새인들도 이런 예수님의 말씀을 익히 들어서 알고 있었다고 보아야겠지요.
두 번째 이야기도 역시 그렇습니다. 회당에서 만난 이 장애인은 지금 당장 죽을 사람은 아닙니다. 그렇다면 안식일이 지난 다음날 고치는 게 원칙적이기도 하고, 합리적이기도 합니다. 원칙이라는 말은 그것이 안식일 규정에 맞는다는 것이며, 합리적이라는 말은 그것이 장애인이나 바리새인, 그리고 예수님 공동체 모두에게 덕스럽다는 뜻입니다. 아무리 옳은 일이라고 하더라도 가능하다면 어느 한쪽에 상처를 입히지 않는 쪽으로 해결하는 게 바람직하겠지요. 제가 그 자리에 있었다 하더라도 어쩌면 바리새인과 비슷하게 행동했을지 모릅니다. 왜냐하면 과격한 건 사람들의 마음을 불편하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바리새인들에게 던진 다음과 같은 질문도 어떻게 보면 그 상황에 적합한 건 아닙니다. “안식일에 사람을 살리는 것이 옳으냐? 죽이는 것이 옳으냐?” 죽이는 게 옳다고 말할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율법도 역시 사람의 생명에 관한한 안식일에 예외 규정을 두고 있습니다. 논리성으로만 따지만 예수님의 이런 질문은 무의한 것입니다. 그런 탓인지 바리새인들의 말문이 막혔다고(4b) 합니다. 이건 단순히 예수님의 질문에 논리적으로 밀렸다는 뜻이라기보다는 질문이 질문 같지 않다는 뜻일 수도 있습니다. 어쨌든지 오늘 본문에서 바리새인들의 문제 제기는 논리적으로 잘못이 아닙니다.
바로 이 대목에서 우리는 오늘 본문을 해석하는데 어려움이 있습니다. 예수님의 행동은 분명히 평상심을 잃은 것 같고, 대신 바리새인들의 행동은 논리적인 것처럼 보인다는 말씀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는 바리새인들을 무조건 기본이 돼먹지 못한 인간으로 폄훼하고 성서를 읽는 잘못을 범하기도 합니다. 그래야만 오늘과 같은 긴장을 쉽게 빠져나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런 선입견에 사로잡히면 바른 해석이 불가능합니다. 좀 힘들더라도 가능한 대로 상황을 객관적으로 이해하는 게 바른 해석의 초석입니다.
완고한 바리새인
여러분, 바리새인들의 논리가 우리의 삶을 해석하는 매우 중요한 토대이기는 하지만 논리가 진리를 무조건 담보하는 건 결코 아닙니다. 언어를 통한 논리는 자칫 교언영색(巧言令色)으로 빠져들 위험성이 높습니다. 말은 그럴듯하게 하는데 실제 삶의 능력이 담기지 않은 경우도 있고, 신학적으로 논리를 담고 있긴 하지만 영적인 현실을 담아내지 못하는 경우도 많습니다. 우리의 현실에도 그런 일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대법관들이 내리는 선고는 나름으로 법적인 논리를 갖고 있지만 실제로는 구차한 경우가 많습니다. 오랜 전 박정희 독재 시절에 대법원이 법의 이름으로 내린 인혁당 사건이 그 한 예입니다. 정부는 사형선고가 내려진지 몇 시간 만에 사형을 집행했습니다.
장애인을 안식일이 지난 다음에 고쳐야 한다는 바리새인들의 주장이 비논리적이지는 않지만 기본적으로 생명 지향적이지 못했다는 데에 문제가 있습니다. 일반 실정법이나 종교법이나 그 기본은 생명을 살리는 일인데, 법자체가 절대적인 이데올로기가 되면 형식적으로는 논리이지만 실제로는 반(反)생명으로 작용합니다. 아무리 좋은 법도 거기에 생명 지향성이 사라지면 역시 인간을 죽입니다. 결국 법이 아니라 그 법을 다루는 인간이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사람에 대한 바른 태도를 가진 사람이 법을 다뤄야 그 법은 생명을 담아낼 수 있지, 그렇지 못할 경우에는 죽음을 생산합니다.
예수님이 손 오그라든 사람을 고친 그 현장을 돌아보십시오. 외경인 히에로니무스의 히브리 복음서에 따르면 이 장애인은 미장이였다고 합니다. “저는 미장이였습니다. 제 손으로 생계를 마련했지요. 예수님, 부디 수치스럽게 먹을 것을 구걸하지 않도록 제 건강을 회복시켜 주십시오.”이 사람의 장애는 생존에 관계됩니다. 생존보다 더 가치 있는 일은 이 세상에 하나도 없습니다. 착하게 사는 것보다 생존이 우선입니다. 생존을 위해서 악도 받아들여야 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우리 사회의 모든 구조가 바로 최소한 생존이 보장되는 쪽으로, 일용할 양식이 보장되는 쪽으로 개혁되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그건 그 무엇과 비교될 수 없을 정도로 절박한 문제이니까요.
예수님은 지금이 안식일이라는 사실조차 망각할 정도로 이 장애인의 생존과 하나가 되셨습니다. 그러나 바리새인들은 여전히 안식일이 걸림돌이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장애인을 당장 고치셔야했고, 바리새인들은 다음날로 미뤄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여기서 안식일 자체가 문제는 아닙니다. 그건 유대인들의 소중한 종교전통이기 때문에 존중받아야 합니다. 예수님도 그걸 모르셨겠습니까? 여기서 문제는 인간의 완고한 마음입니다. 5절 말씀을 보십시오. “예수께서는 그들의 마음이 완고한 것을 탄식하시며 노기 띤 얼굴로 그들을 둘러보시고” 예수님이 화를 내신 장면이 복음서 그렇게 자주 있지 않습니다. 자신을 빌라도에게 내준 제사장들과 그에게 십자가 처형을 선고한 빌라도에게도 예수님은 화를 내지 않았습니다. 성전 청결 장면을 비롯해서 예수님이 화를 내신 몇 번의 경우는 대개 인간이 구조적으로 완고해졌을 때입니다. 왜 그런 상황에서 예수님답지 않게 화를 내셨는지 아시겠지요? 인간의 완고성은 불신앙의 뿌리입니다. 마음이 완고하면 하나님을 믿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제가 이렇게 말하는 걸 이해하고 들으십시오. 북한을 향해서 완고한 마음으로 대하는 그리스도인들을 볼 때마다 저는 안타깝습니다. 기독교를 박해하고, 육이오를 일으킨 그들을 절대로 용서할 수 없다는 그 완고성은 흡사 오늘 장면처럼 예수님에게 시비를 거는 바리새인들의 그것과 비슷합니다.
“손을 펴라!”
마음이 완고한 바리새인들을 노기 띤 얼굴로 둘러보신 예수님은 장애인에게 다짜고짜로 이렇게 명령합니다. 손을 펴라! 그 명령대로 손을 펴자 이 사람은 옛날처럼 비장애인으로 돌아갔습니다. 안식일에도 생명을 살리는 일이 옳다고 한 자신의 말을 이 명령으로 증명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생명을 살리는 일에서는 좌고우면이 없었습니다. 생명 자체이신 예수님은 생명이 위협당하는 그 상황과 투쟁하셨습니다. 그중의 하나가 바로 난치병과 장애인의 치료입니다. 그런 일들이 어떻게 일어났는지는 지금 우리가 정확하게 이해할 수 없습니다. 다만 우리는 예수님에게서 생명 위협의 상황이 생명 일치의 상황으로 변화되었다는 사실은 믿을 수 있습니다. 손을 펴라! 이런 명령은 생명의 주인이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의 배타적 권위입니다. 죄도 사람들의 삶을 파괴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네 죄가 용서받았다.”고 감히 선언할 수 있었습니다. 병과 죄, 장애와 귀신들림은 모두 생명을 파괴하는 힘들입니다. 복음서 기자들은 이런 힘들이 예수님에게 굴복 당했다는 사실을 전하고 있습니다.
저는 교회가 세상을 향해서 “손을 펴라!” 하고 선포할 자격이 있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생명의 주인이신 하나님의 고유한 명령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교회가 그 명령에 따라서 이 세상의 손을 펴는 일에 매진해야 한다는 점만은 분명하다고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그 말은 곧 교회는 생명 지향적인 공동체라는 말씀입니다. 더 정확하게 말하면 교회는 종말론적 생명 공동체입니다. 종말의 차원에서 생명을 외치고 그 현실화를 위해서 투쟁하는 공동체라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어떤 점에서 오늘의 교회는 바리새인처럼 안식일 논리에만 치우쳐 있는지 모르겠군요. 한기총이 사학법 반대 투쟁에 나서겠다고 하며, 여호와의 증인들이 요구하는 군대체 복무에 반대하겠다고 하네요. 물론 실정법이 종교의 자유를 근본적으로 훼손하는 경우에 반대 투쟁을 벌일 수밖에 없지만, 위의 것들은 안식일 규정에 목숨을 걸었던 바리새인처럼 공소한 논리로 종교적 기득권을 지키려는 안간힘처럼 보이는군요.
오늘 본문은 손이 정상으로 돌아온 사람과 예수를 없애버릴 모의를 꾸민 바리새인을 대비시키고 있습니다. 육체의 장애는 치료되었지만 마음의 장애는 그럴 기미를 전혀 보이지 않았습니다. 이것은 몸의 장애보다 마음의 장애가 고치기 더 어렵다는, 마음의 장애가 훨씬 불행하다는 뜻인지 모르겠습니다.
우리는 바래새인처럼 마음의 장애인들은 아닐까요? 그것을 구분할 수 있는 기준은 법을 절대적인 가치로 받아들이는지 생명을 그렇게 받아들이는지에 있습니다. 안식일인가, 손 마른 사람 치료인가, 국가보안법인가, 인권지킴인가? 법인가, 생명인가? 어디에 우리의 마음이 담겨 있습니까? 마음의 손을 폅시다. 마음의 장애를 넘어섭시다. 예수님의 명령이십니다. “손을 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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