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11.30.(막 13:28-37)
오늘은 대림절 첫 주일입니다. 대림절은 주님의 재림을 기다리는 교회 절기인데, 성탄절 전 네 번째 주일인 11월 마지막 주일이나 12월 첫 주일부터 시작됩니다. 지난 2천년 기독교 역사는 바로 이 하나의 사실에 매달려 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만약 대림절 신앙이 부정된다면, 또는 그것이 진리가 아니라는 사실이 확인된다면 기독교는 한때 부흥했지만 역사에서 사라진 많은 종교와 똑같은 운명에 처할지도 모릅니다. 지금 제가 대림절 신앙이 중요하다는 사실을 강조하기 위해서 과장하는 게 아니라 기독교 진리의 성격을 사실대로 말씀드리는 겁니다.
어떤 기독교인들은 대림절 신앙을 별로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신앙의 이유를 다른 데서 찾습니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습니다. 그들은 이 세상에서 윤리적으로 살기 위해서 기독교 신앙을 유지합니다. 예수 믿는 게 별 거냐, 세상에서 착하게 살기 위한 거지, 하고 생각합니다. 그렇다면 굳이 기독교 신앙을 선택할 필요 없이 동서양의 성현들에게서 윤리 공부를 받는 것으로 충분합니다. 또 어떤 이들은 복을 받으려고 예수를 믿는다고 생각합니다. 더 노골적으로는 죽어서 천당가기 위해서 믿는다는 주장도 있습니다. 윤리, 복, 천당에 초점을 둔 이 세 종류의 신앙은 조금씩 차이가 있지만 대림절 신앙을 별로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는다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윤리에 신앙의 목표를 두는 사람들은 주로 지성적인 실천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기독교인들입니다. 그들은 ‘지금 여기서’ 이웃을 위한 박애주의적 삶을 실천하는데 집중합니다. 이런 사람들에 의해서 이 세상은 그런 정도나마 유지되고 있는 게 아닐는지요. 그들의 그런 모범적인 실천은 아무리 강조되어도 부족하지만, 이들의 신앙에는 예수의 재림이 큰 비중을 차지하지 않습니다. 기복적인 데만 관심을 두는 분들도 현재 자기와 가족의 건강과 재물에 치우쳐 있기 때문에 예수의 재림을 현실적으로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예수 천당을 외치는 분들이 앞서의 분들과 비교해서 대림절 신앙에 가장 가까이 가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말하는 천당은 이 땅의 욕망이 투사되는 것이기 때문에 대림절 신앙과는 거리가 멉니다.
위에서 설명한 세 유형의 신앙이 기독교 신앙에서 가장 중요한 대림절 신앙과 거리가 멀다는 사실을 오늘 한국교회의 신앙현상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우리 기독교인의 궁극적인 관심이 어디에 있는지를 보면 됩니다. 거의 자기 자신에게만 관심을 보입니다. 겉으로는 예수 그리스도를 향한 열정과 순수성을 보이는 것 같지만 실제로는 자기에게 몰입하고 있습니다. 설교의 주제도 한결같이 믿음을 통해서 세상 사람들보다 잘 되는 것입니다. 이런 생각에 머물러 있는 한 예수 그리스도에게 일어난 하나님의 종말론적 구원 사건에 관심을 기울 수가 없습니다. 자기 미모에만 온통 정신을 파는 사람은 그것 너머의 현실과의 만남을 통해서 가능한 시인도 될 수 없고, 음악가도 될 수 없는 것과 비슷합니다. 오해는 마세요. 외모에 관심을 기울이는 것을 매도하는 게 아닙니다. 삶의 관심이 어디에 있느냐 하는 걸 말씀드리는 겁니다. 우리 기독교인들이 자기와 자기 교회에만 매몰되어서 정작 중요한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관심을 놓쳤다는 것 말입니다.
이렇게 질문해보세요. 나는 예수의 재림을 기다리고 있는가? 그것이 무엇인지 알고 싶은 열망이 강한가? 거꾸로 그런 것에 아무런 마음이 움직이지 않는다면, 불행하게도 여러분은 아직 기독교 신앙의 중심에 들어온 게 아닙니다. 구경꾼인지도 모르지요. 그렇다고 너무 걱정은 마세요. 하나님의 은총은 구경꾼에게도 임하니까요. 그래도 가능하면 구경꾼으로 남지 말고 그 신앙의 중심으로 깊숙이 들어가도록 하십시오.
변증법적 긴장
초기 기독교 공동체는 예수님의 재림을 열망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다시 오겠다는 약속을 철썩 같이 믿고 기다렸습니다. 오늘 읽은 마태복음 본문의 바로 앞 구절에 따르면 초기 기독교인들 중에서 예수님의 재림을 생전에 경험할 수 있을 것으로 믿는 이들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예수의 재림은 그때까지 실현되지 않았습니다. 예수의 제자들과 예수를 직접 만났던 이들이 죽기 시작했습니다. 기원 후 70년에는 예루살렘이 로마군에 의해서 점령당했습니다. 그래서 어떤 이들은 이 전쟁이 바로 예수 재림의 징조가 아닌가 하고 생각했습니다. 신앙적 긴장이 이완되고 어수선해진 상황에서 마가복음이 기록되었습니다. 본문은 그 재림에 관한 두 가지 이야기를 담고 있습니다.
첫 이야기는 무화과나무의 비유입니다. 모습이 변하는 무화과나무를 보고 계절을 살피듯이 세태를 보고 주님이 오실 때를 살피라는 것입니다. 29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이와 같이 너희가 이런 일이 일어나는 것을 보거든 인자가 가까이 곧 문 앞에 이른 줄 알라.” 이런 일은 막 13:14 이하에서 묘사되어 있는 전쟁이나 대기근과 같은 환난을 가리킵니다. 마가복음 기자는 그 환난을 앞에서 언급한 유대전쟁이라고 보았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렇다면 마지막 때는 임박한 것입니다. 마가는 천지가 없어지는 한이 있더라도 이 말은 없어지지 않는다고 이 사실을 강조했습니다.(31절) 그러나 그 때가 언제인지는 아무도 모른다고 했습니다. “하늘의 천사들도, 아들도” 모릅니다. 아버지만 아십니다.(32절)
둘째 이야기는 멀리 떠난 집주인의 비유입니다. 어떤 사람이 먼 나라로 나가면서 종들에게 각각 일거리를 맡겼습니다. 주인이 돌아오는 건 분명하지만 그 때가 언제인지는 모릅니다. 마가복음은 밤을 세 경점으로 구분하는 유대인의 계산과는 달리 네 경점으로 구분하는 로마인의 계산을 따라서 이렇게 설명합니다. “혹 저물 때일는지, 밤중일는지, 닭 울 때일는지, 새벽일는지” 모른다고 말입니다.(35절) 집주인이 돌아와서 종들이 자고 있는 걸 보면 책임을 추궁 당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니 깨어 있으라는 겁니다.
본문에 나오는 두 이야기에서 강조되고 있는 것은 마지막 ‘때’입니다. 처음부터 끝까지 이 ‘때’가 키워드로 작동됩니다. 직접적으로 그 날과 그 때를 말하기도 하고, 또는 간접적으로 그 때를 강조하기도 합니다. 이 이야기가 말하는 ‘때’가 무엇을 가리키는지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겁니다. 재림의 때이고, 심판의 때입니다. 종말이면서 시작입니다. 부활의 생명이 완성되는 때입니다. 신앙생활의 경력이 어느 정도 되는 사람들이라고 한다면 이 사실을 잘 알고 있을 겁니다. 저는 여러분과 함께 이런 생각에 머물지 않고 한 걸음 더 안으로 들어가려고 합니다. 이를 위해서는 본문을 피상적으로 읽지 말고 깊이, 실질적으로 읽어야 합니다.
이미 여러분이 눈치 채고 있겠지만, 그리고 제가 앞에서 이미 언급한 바이지만 마가복음 기자는 이 ‘때’의 성격을 두 가지로 설명합니다. 하나는 그 때가 분명히 온다는 것, 특히 임박했다는 것이며, 다른 하나는 그 때를 아무도 모른다는 것입니다. 대림절 신앙은 바로 이 두 사실의 틈바구니에 놓여 있습니다. 하나만으로는 진리가 아닙니다. 둘이 더불어서 기독교 신앙의 진리를 드러냅니다. 이 말씀을 읽는 사람들은 한쪽으로만 치우치지 말아야 하고, 그렇다고 해서 어중간한 중간에 자리를 잡아서도 안 됩니다. 이 두 사실이 변증법적인 긴장을 이룬다고 보아야 합니다. 주님의 재림이 분명하기 때문에 우리는 아직 정확한 때를 모르며, 거꾸로 그 ‘때’를 모르기 때문에 그 때는 임박해 있다고 말입니다. 마가는 재림의 지체와 유대전쟁으로 신앙적인 위기를 경험하던 초기 기독교 공동체를 향해서 바로 이 사실을 전하고 있는 중입니다. 그것이 기독교 신앙의 본질이며 정체성이기 때문입니다.
그 날과 그 때
기독교 신앙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은 예수의 재림이 임박했다는 사실과 그 때를 모른다는 사실을 모순이라고 생각할 겁니다. 더 노골적으로는 속임수라고 생각할지도 모릅니다. 이런 생각은 그렇게 터무니없는 게 아닙니다. 예수님은 분명히 2천년이 지난 지금까지 재림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렇다면 언제까지 기다려야 합니까? 혹시 예수님의 생각을 제자들이 오해해서 재림을 선포한 것은 아닐까요? 이런 문제는 오늘 우리에게도 심각합니다. 예수님은 정말 오시기는 오시는 겁니까? 오신다면 어떻게 오시는 겁니까? 손오공처럼 구름을 타고 오시는 건 아니겠지요. 우리의 마음에 오시는 것도 아니겠지요. 오신다면 2천 년 전 유대인으로 살다가 서른세 살에 십자가 처형을 당한 바로 그 유대 청년의 모습으로 오시는 걸까요?
이런 질문은 우리를 막다른 골목으로 몰아가는 것 같습니다. 이런 질문에 정확한 대답을 찾기는 힘듭니다. 그래서 그런지 많은 이들이 이런 문제를 막연하게 생각하고 지나갑니다. 대림절 신앙이 우리의 삶에서 역동적으로 다가오지 못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그러다 보니 신앙과 삶이 분리되었습니다. 재림은 예수의 문제이고 세상살이만이 우리의 문제가 되고 말았습니다. 그것에 관해서 질문하지도 않습니다. 우리가 지금 당장 대답을 찾지 못하는 한이 있더라도, 또는 더 헤매는 한이 있더라도 질문 안으로 파고 들어가야 합니다. 일반적인 공부도 질문에서 시작하는 것처럼 신앙에서도 그렇습니다.
지금 우리가 직면하고 있는 질문은 그 날과 그 때를 왜 모르는가 하는 것입니다. 앞에서 인용한 막 13:32절에 의하면 그 때는 아버지만 아십니다. 천사도 모르고 아들인 예수님도 모릅니다. 여기서 핵심은 그 때의 결정이 아버지에게 독점되었다는 사실입니다. 두 번째 이야기에 따르면 집주인이 ‘홀연히’ 오기 때문에 종들은 그 때를 모릅니다. 여기서도 핵심은 그 때가 집주인의 독단적인 결정이라는 것입니다. 아버지와 집주인만이 그 날과 그 때를 결정할 수 있는 권한이 있습니다.
이 권한이 아버지에게만 배타적으로 주어졌다는 말은 그분이 창조자이고 우리는 피조물이라는 사실을, 그분이 집주인이고 우리가 종이라는 사실을 가리킵니다. 이런 사실을 기분 나쁘게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인간이 왜 종이냐, 인간은 자기에게 주인이다, 인간은 정말 위대하다 하고 말입니다. 그들의 주장처럼 기독교 신앙이 자칫하면 인간을 열등감에 빠지게 하는 경우도 없지 않습니다. 지난 역사에서, 그리고 지금도 인간에게 심리적인 죄책감을 불어 넣는 일도 많습니다. 그런 가르침은 물론 잘못입니다. 그러나 인간이 피조물이라는 사실은 명백한 사실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미래를 우리 스스로 결정할 수 없습니다. 우리의 의지와 능력으로 우리의 생명을 연장시킬 수가 없습니다.
앞으로 여러분이 몇 년을 더 사는지 계산해보십시오. 30년, 50년, 100년일까요? 그게 얼마나 빨리 지나가는지 우리는 놀랄 수밖에 없습니다. 2007년 대림절이 일 년 전에 지나갔는데, 우리는 지금 한 해를 훌쩍 지나치고 2008년 대림절을 맞았습니다. 일 년이 짧다면 10년도 똑같이 짧은 겁니다. 10년이 짧다면 100년도 짧은 겁니다. 우리가 우리의 일상에 휘둘려서 그 사실을 놓치는 게 문제이지, 영적인 눈으로 바라볼 수 있다면 놀라워서 입을 다물 수 없을 정도입니다. 아무도 이런 시간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이 시간과 더불어 우리 모두는 이렇게 나이를 먹고 늙고, 이제 이 세상의 삶을 거두게 될 것입니다. 그것이 피조성입니다.
여러분, 시간과 더불어 쏜살같이 흘러가는 우리의 인생이 허무하다는 걸 말씀드리려는 게 아닙니다. 오히려 그 반대입니다. 우리의 인생이 이렇게 흘러간다는 것은 허무가 아니라 은총입니다. 우리의 인생이 한 자리에 멈춰버린다면, 그래서 늙지도 않는다면 그것이야말로 저주이겠지요. 우리가 지금 이렇게 나이가 들고 늙어간다는 것은 하나님의 생명에 가까이 이른다는 의미입니다. 이게 실감이 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대개는 늙는 걸 서럽게 생각하겠지요. 그런 생각은 생명에 대한 우리의 선입견과 편견이 너무 강하기 때문에 나오는 오해입니다.
성서는 우리의 생명이 하나님 안에서 완성된다고, 하나님의 손에 달려 있다고 가르칩니다. 우리의 생명이 완성되는 때가 바로 주님이 재림하는 때입니다. 그 때가 바로 완전히 변화된 생명인 부활의 때입니다. 문제는 그 때를 모른다는 데에 있습니다.
왜 모르는지 그 대답을 드릴 때가 왔습니다. 하나님의 생명은 ‘전체’로서만 주어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가 지금은 거울로 보는 것같이 희미하나 그 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볼 것이요, 지금은 내가 부분적으로 아나 그 때에는 주께서 나를 아신 것 같이 내가 온전히 알리라.”(고전 13:12) 피조물인 우리의 인식은 늘 부분적입니다. 그런 존재가 전체를 볼 수는 없습니다. 전체를 보려면 생명이 완전히 드러날 때를 기다려야 합니다.
위의 설명으로 주님의 재림이 늦어지는 이유가 충분히 해결됐습니까? 그렇다면 다행이지만, 여전히 뭔가 부족하다고 생각하는 분들도 있을 겁니다. 비유를 하나 들겠습니다. 제가 아마 다른 설교에서도 이 비유를 말씀드렸을 겁니다. 대형 퍼즐이 여기 있습니다. 우리는 모두 하나의 퍼즐 조각을 붙들고 전체 그림이 무엇인지를 보려고 애를 쓰고 있습니다. 전체 그림이 완성되는 순간이 바로 생명의 완성인 재림의 때입니다. 퍼즐 조각이 점점 자리를 찾아가고 있지만 우리 눈에는 그게 보이지 않을 뿐입니다.
여기서 더 중요한 사실이 있습니다. 지금 우리가 모르고 있는 바로 그 순간에 이미 마지막 생명이 선취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삶이 부분적이지만 우리가 모르는 방식으로 전체와 연결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모르는 방식으로, 우리가 모르고 있는 순간에 우리의 제한적 삶 안에 궁극적이고 절대적인 생명이 이미 들어왔습니다. 그 생명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에게서 이미 종말에 일어나게 될 생명이 완성되었습니다. 그를 통해서 우리는 참된 생명에 접붙임을 받았습니다. 이런 사람은 깨어 있지 않을 수 없습니다. 역사의 한 순간에 머물고 있지만, 여전히 잠정적인 생명 안에 머물러 있지만 그는 이미 종말의 생명을 삽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마지막 ‘때’가 이미 현재의 ‘때’가 되었습니다. 그것을 가능하게 한 주님을 찬양하십시오. 이것이 대림절 첫 주일에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아멘!
0개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