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다툼과 진리의 말씀
딤후 2:8-15, 창조절 일곱째 주일, 2019년 10월13일
8.내가 전한 복음대로 다윗의 씨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신 예수 그리스도를 기억하라 9.복음으로 말미암아 내가 죄인과 같이 매이는 데까지 고난을 받았으나 하나님의 말씀은 매이지 아니하니라 10.그러므로 내가 택함 받은 자들을 위하여 모든 것을 참음은 그들도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원을 영원한 영광과 함께 받게 하려 함이라 11.미쁘다 이 말이여 우리가 주와 함께 죽었으면 또한 함께 살 것이요 12.참으면 또한 함께 왕 노릇 할 것이요 우리가 주를 부인하면 주도 우리를 부인하실 것이라 13.우리는 미쁨이 없을지라도 주는 항상 미쁘시니 자기를 부인하실 수 없으시리라 14.너는 그들로 이 일을 기억하게 하여 말다툼을 하지 말라고 하나님 앞에서 엄히 명하라 이는 유익이 하나도 없고 도리어 듣는 자들을 망하게 함이라 15.너는 진리의 말씀을 옳게 분별하며 부끄러울 것이 없는 일꾼으로 인정된 자로 자신을 하나님 앞에 드리기를 힘쓰라.
신약성경은 전체가 27권입니다. 그 내용과 형식에서 차이가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설교 본문으로 삼은 디모데후서는 디모데전서와 디도서를 포함하여 신학계에서 목회 서신으로 분류하는 성경입니다. 바울이, 혹은 바울에게서 큰 영향을 받은 기독교 저술가가 목회자로 활동하는 제자에게 쓴 목회 신학 저술이라고 보면 됩니다. 하나님의 일꾼으로서의 정체성을 확실히 하고 실제로 목회 과정에서 벌어지는 문제를 지혜롭게 해결할 수 있도록 돕기 위해서 쓴 글입니다. 바울은 오늘 본문에서, 특히 14절과 15절에서 경계해야 할 문제 하나와 붙들어야 할 문제 하나를 각각 말합니다.
말다툼
우선 경계해야 할 문제는 말다툼입니다. 14절 말씀을 다시 읽어보겠습니다. 오늘의 교회 현장에서 벌어지는 일을 그대로 묘사한다고 봐도 크게 틀리지 않습니다.
너는 그들로 이 일을 기억하게 하여 말다툼을 하지 말라고 하나님 앞에서 엄히 명하라 이는 유익이 하나도 없고 도리어 듣는 자들을 망하게 함이라.
신자들에게 말다툼하지 말라고 단단히 일러두라는 충고입니다. 말다툼은 누구에게도 유익이 없고 오히려 듣는 사람을 망하게 한다고 설명합니다. 당시 디모데가 목회하던 교회에도 말다툼이 벌어졌다는 말이냐, 하고 약간 이상한 생각이 들 수도 있습니다. 디모데가 아니라 바울이 직접 설립한 교회에서도 다툼은 많았습니다. 사람들이 모이는 곳은 어디서나 크고 작은 다툼이 벌어지기 마련입니다. 대학교에도 말다툼이 있고, 법원과 검찰에도 다툼이 있고, 가정에도 다툼이 있습니다. 우리와 일본도 다투고 세계에서 다투지 않는 나라는 찾아보기 힘듭니다. 일인 지배가 확실한 체제에서나 다툼이 없겠지요. 더 궁극적으로는 이런 다툼을 통해서 역사가 진보합니다. 왕정체제가 극복되고 민주주의가 자리를 잡은 인류 역사과정에서도 다툼과 투쟁은 중요한 요인이었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왜 말다툼을 하지 말라고 충고할까요?
디모데가 목회하던 당시의 가장 핵심적인 말다툼의 주제는 이단 논쟁이었습니다. 즉 신학적인 문제였다는 뜻입니다. 바울은 오늘 설교 본문에 앞선 딤전 6:20절에서도 이미 이를 짚었습니다. “디모데야 망령되고 헛된 말과 거짓된 지식의 반론을 피함으로 네게 부탁한 것을 지키라.” 오늘 설교 본문에 이어지는 16절에서도 역시 이를 강조합니다. “망령되고 헛된 말을 버리라 그들은 경건하지 아니함에 점점 나아가나니.” 이단 논쟁에 떨어지면 경건성, 즉 참된 신앙의 모습을 놓친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17절에서는 이단들의 주장을 ‘악성 종양’과 같다고 했습니다. 거기에 이름이 거론된 후메내오와 빌레도가 이런 이단 논쟁에 떨어져서 교회를 멀리한 것으로 보입니다.
1세기 교회의 가장 큰 이단은 영지주의였습니다. 영적인 지식을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사상입니다. 그것 자체만으로는 큰 문제가 없습니다. 기독교 신앙도 기본적으로 영적이기 때문입니다. 문제는 그들이 영육 이원론에 떨어졌다는 사실입니다. 영을 강조하다 보니 육을 낮춰볼 수밖에 없었습니다. 죽음은 육에만 해당하고 영에는 해당하지 않습니다. 사람이 죽어도 영은 영원한 세상으로 올라갑니다. 이런 주장도 보기에 따라서 그럴듯했기에 초기 기독교에서 영지주의가 큰 세력을 떨쳤습니다. 그러나 바울에 의하면 영육 이원론은 옳은 신앙이 아닙니다. 거기에는 부활이 부정되기 때문입니다. 딤후 2:18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진리에 관하여는 그들이 그릇되었도다 부활이 이미 지나갔다 함으로 어떤 사람들의 믿음을 무너뜨리느니라.” 고후 15:12절에서도 그 사실을 짚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셨다 전파되었거늘 너희 중에서 어떤 사람들은 어찌하여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이 없다 하느냐.”
오늘의 한국교회도 이단 문제로 인한 말다툼이 벌어집니다. 보통 신천지를 이단이라고 비난하지만, 신천지 문제는 별로 심각한 게 아닙니다. 이단이라는 사실이 확연하게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초기 기독교의 영지주의처럼 분간하기 어려운 세력이 실제로는 더 큰 문제입니다. 기복주의가 바로 오늘날의 이단입니다. 기복주의 신앙은 정통 신앙이라는 외피에 싸여 있습니다. 기도의 형식을 빌려서 복 받기를 원합니다. 헌금마저 물질적인 축복의 수단으로 오용되었습니다. 기복주의는 세속의 자본주의와 결탁해 있습니다. 자본주의가 인간 삶과 자연까지 파괴하듯이 기복주의 신앙은 기독교 신앙을 파괴합니다.
얼마 전 예장 통합 총회에서 대의원들이 지난 2년간 기독교계와 한국 사회에서 뜨거운 이슈였던 명성교회 건을 아무도 예상하지 못한 방식으로 처리했습니다. 명성교회의 세습을 초법적으로, 좋은 게 좋다는 식으로 통과시켰습니다. 저간의 사정을 제가 설명하지 않겠습니다. 이 사건이 어떻게 한국교회를 왜곡시킬지도 언급하지 않겠습니다. 이런 결정이 기복주의의 결과라는 사실만은 분명합니다. 기복주의는 일종의 바알숭배로서 교회 성장을 최고의 가치로 여깁니다. 예장 통합에서 가장 큰 교회인 명성교회의 불법을 총회가 막아내지 못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명성교회의 세습처럼 밖으로 확연하게 드러난 대형사건만이 아니라 한국교회 전반에서 기복주의가 끼치는 해악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오늘 모인 우리도 부분적으로 거기에 해당할지 모릅니다. 기독교의 복음을 삶의 중심으로 받아들이지 않는다는 사실이 그것입니다. 본인은 전혀 그렇지 않다고 여길 수 있습니다. 이렇게 예배에 참석하고, 성경도 꾸준히 읽고, 교회 봉사도 나름으로 하니까 말입니다. 그런 성실한 교회 생활이 곧 복음을 중심으로 하는 삶과 그대로 일치하는 건 아닙니다.
오늘 설교 본문의 앞 대목인 딤후 2:8-13절을 보십시오. 바울은 목회에 필요한 조언을 디모데에게 하면서 구체적으로 처리해야 할 사안만을 말하지 않고 그 모든 일의 근원에 관해서 말합니다. 그게 복음입니다. 8절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내가 전한 복음대로 다윗의 씨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신 예수 그리스도를 기억하라.” 9절도 복음을 이렇게 말합니다. “복음으로 말미암아 내가 죄인과 같이 매이는 데까지 고난을 받았으나 하나님의 말씀은 매이지 아니하니라.” 이 두 구절만 보더라도 복음이 무엇인지를 알 수 있습니다. 다시 살아나신 예수 그리스도가 복음입니다. 바울은 디모데에게 이 복음을 기억하라고 권면했습니다. 거기서만 기독교인으로서의 정체성이 확보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자신에게 질문해보십시오. 바울이 말하는 이 복음이 여러분에게 삶의 실재(reality)로 느껴지십니까? 개인에 따라서 다를 겁니다. 거기에 조금씩이라도 가까이 가는 사람이 있고, 너무 멀게만 느끼는 사람이 있습니다. 저는 전업 목사로 사는 사람이지만 완전히 복음에 묶여서 산다고 말씀드릴 수 없습니다. 그렇게 살아가려고 노력할 뿐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셨다는 사실이 무슨 뜻인지 깊이 생각하고, 내가 그 말씀대로 사는지를 영적인 화두로 삼는 겁니다.
이 문제를 너무 종교적인 쪽으로만 제쳐놓지 마십시오. 이것은 우리 인생의 궁극적인 목적과 관계됩니다. 우리는 왜 사는지를 물어야 합니다. 무엇을 위해서 사는지 생각해야 합니다. 생각하지 않고 살아도 먹고 사는 데는 아무 지장이 없을 겁니다. 거꾸로, 세상이 우리에게 알려준 삶의 수준을 성취하는 것에만 신경을 쓰고 살겠다면 이런 근본적인 생각은 아예 하지 않는 게 더 편안할지 모르겠습니다. 과연 그럴까요? 다시 묻겠습니다. 여러분은 나이를 먹으면서 삶이 완성되어간다고 생각하십니까? 안식과 평화가 더 풍성해지십니까? 구원에 더 가까이 간다고 느끼십니까? 복음의 내용 안으로 더 깊이 들어가야겠다는 생각이 간절해지십니까? 그래서 말다툼이 대폭 줄어드십니까?
저는 앞에서 기복주의가 우리의 신앙 전반을 파괴한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기복주의에 기울어지면 세상의 일에서나 신앙의 일에서 네가 옳으니 내가 옳으니, 말다툼만 많아집니다. 기독교 복음을 진지하게 대할 수가 없습니다. 복음의 삶, 구원의 삶, 영원한 삶은 아예 관심의 대상이 아닙니다. 목사도 마찬가지입니다. 교회 성장만을 목표로 한다면 복음을 설교할 수가 없습니다. 이 대목에서 저를 본받으라고 말씀드릴 자신이 저에게도 없습니다. 그래도 어쩌겠습니까. 아니 그렇기 때문에라도 저는 성경 말씀에 의지해서 여러분에게 설교할 뿐입니다. 나머지 일들은 성령께 맡기고.
진리의 말씀
바울은 하나님의 일꾼으로서 경계해야 할 말다툼에 관해서 언급하고 이어서 붙들어야 할 것을 15절에서 짚었습니다. 15절 말씀을 읽을 테니 귀 기울여보십시오.
너는 진리의 말씀을 옳게 분별하며 부끄러울 것이 없는 일꾼으로 인정된 자로 자신을 하나님 앞에 드리기를 힘쓰라.
약간 복잡한 문장입니다. 핵심적으로만 설명하면, 하나님의 일꾼은 하나님 앞에 자신을 드려야 한다는 권면입니다. 이런 일꾼에게 가장 중요한 일은 ‘진리의 말씀’을 분별하는 것입니다. 진리는 헬라어 알레테이아의 번역입니다. 진리의 말씀이 헬라어 성경에 ‘톤 로곤 테스 알레테이아스’로 나옵니다. 진리의 말씀은 복음을 가리킵니다.(엡 1:13) 앞에서 설명한 말다툼과 여기서 말하게 될 진리의 말씀은 서로 연결됩니다. 한쪽이 과도해지면 다른 쪽이 위축되고, 이쪽이 활성화하면 저쪽이 힘을 잃습니다. 진리의 말씀이 활성화하면 자연스럽게 말다툼은 시들해집니다. 일상적인 생활에서도 비슷한 일이 벌어집니다. 독서를 정말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막장으로 내려가는 티브이 일일 드라마를 시시하게 느낍니다.
바울은 진리의 말씀을 단순히 전하라고 한 게 아니라 ‘옳게 분별하라.’라고 했습니다. 당시 상황이 이단 논쟁인 진리와 비진리의 차원에서 매우 엄중했다는 사실은 앞에서 말씀드렸습니다. 영지주의만이 아니라 유대교의 회당 신앙도 기독교 관점에서는 신경 써야 합니다. 바울을 태두로 하는 이방인 기독교는 예수의 동생 야고보를 수장으로 하는 유대인 기독교와 갈등을 겪었습니다. 바울이 설립한 교회 신자들도 많이 흔들렸습니다. 교회 안과 밖의 여러 사상과 전통들이 서로 경쟁을 벌이는 상황이었습니다. 이럴 때는 기독교 신앙의 정체성을 정확하게 붙들어야 합니다. 그게 바로 복음을 옳게 분별하는 일입니다.
복음을 옳게 분별하는 일은 신학자와 목사들의 몫이지 일반 신자들에게는 해당하지 않는다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일리가 있긴 하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습니다. 진리의 말씀을 옳게 분별하는 일은 일반 신자들에게도 해당합니다. 복음 선포가 옳은지 아닌지를 분간해야만 신앙이 바로 설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한국교회 신자들의 특징은 설교를 분별하지 않고 듣는다는 사실입니다. 진리에 관한 생각이 아예 없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입니다. 무조건 아멘과 할렐루야를 외치거나 거꾸로 무조건 비난할 뿐입니다. 늘 들었던 내용을 반복해서 듣는 것으로 만족합니다. 한 걸음만 더 들어가면 어렵다거나 자신이 알고 있는 사실과 약간만 달라도 낯설다 하여 당황해합니다. 성경을 문자적으로 믿을 뿐이지 그게 무슨 뜻인지를 진지하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한편으로 먹고사는 문제가 심각하기에 어쩔 수 없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기는 합니다. 영혼이 예민한 소수의 사람에게만 바울의 권면이 실질적인 것으로 들리겠지요.
옳게 분별하는 일은 ‘진리의 말씀’만이 아니라 우리의 삶 전체에 해당합니다. 그런 분별력이 없으면 자신도 알지 못하는 힘에 떠밀려가는 인생을 면치 못합니다. 노골적으로 질문하는 저를 이해하십시오. 지금 여러분은 실제로 살아있다고 생각하십니까? 물론 여러분과 저는 아직은 살아있습니다. 다만 아직이지 앞으로도 살아있는 건 아닙니다. 저는 매일 밤 잠자리에 들면서 잠시 기도를 드립니다. 그럴 때의 느낌이 정말 이상합니다. 어제와 그제, 그리고 일주일 전과 한 달 전이 한순간으로 느껴집니다. 일 년 전과 십 년 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청년 시절이 엊그제 같은데 벌써 칠십이 내일 모래입니다. 저만이 아니라 여러분도 칠십이 내일 모래입니다. 저는 곧 구십이 내일 모래라는 말을 하게 될 겁니다. 이렇게 한순간에 지나가는 인생살이에서 무엇이 중요하고 아닌지를 옳게 분별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영혼이 없는 동물로 사는 겁니다. 이런 정도의 생각은 여기 모인 여러분은 다 할 겁니다. 다만 아무리 옳게 분별해도 삶이 무엇인지 손에 잡히지 않으니까 어쩔 수 없이 발등의 불을 끄느라 바쁘게 사는 거라고 대답하실지 모르겠습니다. 그렇기 때문이라도 우리는 삶을 옳게 분별하도록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인생을 말다툼하면서 보낼 겁니다. 나이가 들수록 그런 경향은 더 강해집니다.
삶을 옳게 분별하면 삶이 어떻게 달라지는데, 하고 질문하고 싶은 분들이 계시나요? 답이 쉽지는 않습니다. 어떤 사람에게는 그 달라진 삶이 확연하게 경험되지만 어떤 사람에게는 눈에 잘 들어오지 않기 때문입니다. 결론적으로 말씀드리면 완전히 달라집니다. 달라지는 속도가 너무 느리기에 달라지는 게 없는 것처럼 느낄 뿐입니다. 그래서 대다수 사람은 옳게 분별하는 노력을 중간에 포기합니다. 그런 노력을 하지 않아도 자본주의 체제가 제공하는 경제적인 여유만 있으면 그런대로 쾌적하게 살만합니다. 그걸 행복한 삶이라고 여깁니다. 그래서 더더욱 노력하지 않습니다. 그렇게 늙고 죽습니다.
복음을 통해서 삶이 어떻게 달라지는지에 대해서 파울로 코엘료의 <연금술사>를 소개하면 잘 전달될 것 같습니다. 목동인 산티아고는 연금술사를 찾아가는 순례길을 떠납니다. 우여곡절 끝에 그는 이집트 피라미드 근처에서 연금술사를 드디어 만났습니다. 연금술사는 산티아고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연금술은 납을 금으로 만드는 비술(祕術)이 아니라 세상의 모든 것을 금으로 볼 줄 아는 영적인 시각이라고 말입니다. 모래 한 알이 바로 우주라고 말합니다. 이런 말을 실재가 아니라 환상이라고 말하는 사람은 세상을 모르는 사람입니다. 세상을 옳게 분별할 줄 아는 사람은 씨앗 한 알에서 생명의 신비를 봅니다. 한순간에서 영원한 시간을 경험합니다. 기독교적으로 말하면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영원한 생명을 발견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기독교인으로 살려고 결심한 사람입니다. 그렇다면 기독교 신앙의 중심으로 깊이 들어가야 하지 않겠습니까. 다른 할 일이 많아서 힘들다고 생각할지 모르겠으나 기독교 신앙의 중심으로 들어가는 일보다 여러분에게 더 중요한 일이 무엇일까요? 바울의 말을 저의 버전으로 드립니다. 여러분의 인생에서 말다툼에 속하는 일들은 대폭 줄이고, 진리의 말씀을 옳게 분별하는 일은 대폭 늘리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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