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의 주체, 말의 능력
(골 4:2-6)
(2009년 8월23일 주일은 수련회에서 맞았습니다. 그래서 주일 설교는 수련회 다섯 번째 강의로 대체합니다. 아래에 강의 요약문을 올립니다.)
본문 골 4:2-6절이 골로새의 마지막 결론이라고 할 수 있다. 기도와 예수 그리스도를 전하는 일과 교회 밖의 사람들과의 관계에 대해서 설명한다. 여기서 핵심은 ‘말’이다. 기도도 말로 하고, 복음 선포도 말로 하며, 교회 밖의 사람들과도 말로 관계를 맺는다. 이는 단순히 입에서 나오는 말만 가리키는 게 아니다. 우리의 영적 실존을 가리킨다. 언어는 바로 존재의 집이니 그렇게 말할 수 있다. 하나님이 ‘말씀’으로 세상을 창조하셨고, 예수님도 ‘로고스’로 그 창조사건에 개입하셨다. 그리고 하나님의 구원 통치와 사건은 ‘말’로 드러난다. 이 말의 능력은 바로 신적인 능력이라 할 수 있다.
언어의 존재론적 능력
현대인들은 언어의 홍수 속에 살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심심하지 않아도 좋긴 하지만, 문제는 그 언어가 기술의 차원을 넘어서지 못한다는 것이다. 오늘의 언어가 언어의 존재론적 힘을 보이지 못하고 도구로 전락했다는 말이다. 티브이나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말이나 청소년들의 말, 심지어 목회자들의 말도 말의 재주일 뿐이지 언어의 존재론적 능력으로 다가오지 못한다.
언어의 존재론적 능력이 무엇이기에 현대인들의 언어가 기술에 떨어져버렸다는 말인가? 이 질문은 성서 언어를 통해서 설교의 길을 가고 있는 설교자들에게 매우 엄중하다. 삼위일체라는 신학 언어가 어떻게 교회 공동체 안에 나타나게 되었는지 생각해보라. 혹은 로고스라는 헬라어가 신약성서 안에 들어오게 되었는지 생각해보라. 위대한 신학자가 기독교를 변증하기 위해서 그런 용어를 만들어 내거나 차용한 게 아니라 그 용어가 이미 존재론적으로 그런 세계를 담고 있었다는 게 그 대답이다. 신학자들은 스스로, 주체적으로 그 언어를 창안한 게 아니라 이미 언어가 존재론적으로 열어가는 그 세계에 참여한 것뿐이다. 마치 바람이 대금을 통과함으로써 음악이 되듯이 신앙 언어는 신학자들을 통해서 신학의 길을 간다. 바람, 또는 소리와 언어는 모두 존재론적인 능력을 갖고 있다는 말이다. 하나님이 ‘말씀’으로 세상을 창조했다지 않은가.
어떤 점에서 언어의 존재론적 능력에 참여한다는 것은 마술과 같은 현상이다. 그런 능력은 모든 사물과의 대화를 가능하게 하는 원초적 사건이기도 하다. 세 사람의 이야기를 인용한다. 한 사람은 소설가, 다른 한 사람은 영성가, 세 번째 사람은 시인이다.
1) 코엘료의 소설 <연금술사>는 목동 “산티아고”가 자기신화를 찾기 위해서 길을 떠난 다음에 겪게 된 사건들을 중심으로 전개되는 소설이다. 이집트 피라미드 부근에서 큰 보물을 발견하게 될 거라는 예언자의 신탁을 믿고 자신의 전 재산인 양을 팔아 바다를 건너 거상들과 함께 이집트로 간다. 긴 여행 끝에 그는 오아시스에서 연금술사를 만난다. 연금술사는 산티아고에게 말한다. 모든 물질은 자기의 시간이 있다. 금의 시간도 있고, 납의 시간도 있다. 모든 물질은 자기 시간을 채운 다음 다른 물질로 진화한다. 납이 금이 되기도 하고, 금이 납이 되기도 한다. 그래서 진정한 연금술사는 모든 사물을 거룩하게 본다. “한 알의 모래가 곧 우주다!” 산티아고가 연금술가에게서 배운 가장 중요한 것은 납으로 금을 만드는 기술이 아니라 모든 사물과 대화할 수 있는 보편‘언어’였다. 그는 사막과 대화할 수 있으며, 바람과도 대화할 수 있게 되었다. 이 세상의 작은 사물도 존재론적으로 우주와 같은 무게를 안고 있기 때문에 이런 일이 가능하다는 말이다.
2) 매튜 폭스는 말씀으로 번역된 구약성서의 “다바르”를 인간 언어를 뛰어넘는 창조능력으로 새롭게 해석하고 있다.
다바르는 단순히 우리가 지금 사용하는 “말”과 같은 뜻이 아니다. 인쇄술이 발명될 무렵에 일어난 종교개혁은 서양인 가운데 3분의 2가 완전히 문맹이던 당시에 현명하게도 하느님 말씀을 설교하는 신학을 되찾았다. 그러나 오늘의 상황은 다르다. 계몽주의 이래의 좌뇌 주도권이 우리를 말의 홍수에 빠뜨리는 문화를 낳았다. 광고, 신문, 연설, 문고, 전집, 또 이제는 워드 프로세서, 이 모두가 “말”의 의미를 함부로 바꾸고 싸구려로 만들기에 바쁘다. 우리 자신의 삶을, 우리가 성장하는 자양이 되는 영성적 뿌리를 다시 얻자면, 말 전의 원래 창조계로 돌아가야 한다. 인쇄 말, 방송 말, 워드 프로세서 전으로, 상당한 침묵이 있어야 말도 어떤 중요한 의미가 있던 그런 때로 돌아가야 한다. 발설하는 말, 이야기하는 말, 생명을 낳는 말, 따라서 신적 창조력인 그런 말로 돌아가야 한다.(창조영성 길라잡이 원복, 분도출판사, 36쪽)
어떻게 언어의 존재론적 능력 안으로 들어갈 수 있을까? 이건 배움이 아니라 깨우침의 차원에 가깝다. 수레의 바퀴를 만드는 능력은 배우는 게 아니라 스스로 느끼는 것이라는 장자의 말이 이에 해당된다. 득음이 필요한 창의 세계도 그렇고, 심지어는 테니스의 세계도 그렇다. 어떤 것의 결정적인 순간과 세계는 학습이 아니라 그 진리에 휩싸임으로써만 경험할 수 있는 그 무엇이다. 진리는 기술이 아니라 존재의 경험이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언어의 존재론적 능력에 이르는 최선의 방법은 우리가 그 언어의 길목에서 기다리는 것이다. 시인들은 바로 그런 기다림을 아는 사람들이다.
3) 오인태 시인의 “시가 내게 왔다”를 감상해보자.
한 번도 시를 쓴 일이 없다
시가 내게 왔다 늘
세상의 말은 실없다
하여 다 놓아버리고 토씨 하나
마저 죽여, 마침내
말의 무덤 같이 허망한 적요
위에 파르르 떤 달
빛 같이 내려서
시인의 몸 안에 들어와서
젖어오는 것이다.
거부할 수없이
시가 내게 왔다.
일종의 신탁사건인 “시가 내게 왔다”는 경험처럼 언어와 사유가 사람들에게 올 때만 대화는 즐거운 경험으로 다가온다. 거꾸로 우리에게 대화의 즐거움이 부족한 이유는 언어와 사유가 우리에게 올 수 있는 길이 무엇인지 모르거나 우리 스스로 그 길을 가로막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상태에서는 말은 많으나 진정한 대화는 없고, 관계는 많으나 참된 사귐은 불가능하다.
4:2 기도를 계속하고
우리는 기도할 수 있을까? 기도를 통해서 하나님의 뜻을 바꿀 수 있을까? 바꿀 수 없다면 기도할 필요도 없지 않은가. 판넨베르크는 기도에 대해서 아래와 같이 세 가지 항목으로 설교한 적이 있다.(시 143:1-12)
첫째, 우리가 오늘 이 시편 말씀에서 우선적으로 배워야 할 점은 우리가 어떤 토대에서 하나님께 기도를 드릴 수 있는가 하는 것이다. 기도는 자신의 소원을 성취하기 위한 수단이 결코 아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이 하나님의 부르심에 응답할 수 있다는 의미에서만 하나님께 요청할 수 있다.
둘째, 우리가 분명히 해야 할 사실은 오늘 본문에 따르면 시편 기자의 요청에 대해서 이상하게도 하나님이 대답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우리는 우리에게 들려오는 대답을 전혀 듣지 못한다. 하나님이 다르게 대답하시기 때문이다.
셋째, 우리는 우리의 기도에 대한 직접적인 하나님의 목소리를 듣지 못했기 때문에 우리 앞에 놓인 길은 어둡다. 대답해 달라는 우리의 요청에 분명한 대답이 없다. 그래서 시편 기자는 하나님의 가르침을 신탁에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영에게서 기다린다. 우리 모두는 성령의 축제를 준비하고 있으며, 그 성령을 받았다.
우리는 기도할 수 있는가? 하나님이 모든 걸 알아서 해주시는데 왜 우리가 기도해야 하는가? 늘 함께 하시는데도 함께 해 달라는 기도는 무의미한 게 아닌가? 하나님은 우리가 기도하기 전에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알고 계시지만 우리는 기도를 통해서 하나님의 섭리 안으로 들어갈 수 있다. 우리의 구체적인 기도 언어는 하나님과 깊은 관계로 들어가는 지름길이라는 뜻이다. 부모가 자녀의 필요를 잘 알고 채워주지만 양쪽에 대화가 필요한 것과 비슷하다.
4:2 기도에 감사함으로 깨어 있으라
깨어 있음은 임박한 하나님 나라를 명료한 의식으로 대면하는 것이다. 주인이 돌아올 때를 준비하기 위해서 깨어 있어야 할 종, 신랑이 올 때를 준비하는 처녀들의 비유가 이를 가리킨다. 이게 실제로 오늘의 일상에서 어떤 의미가 있는가? 어떻게 경험할 수 있는가? 우리는 노동과 소비라는 일상에 파묻혀서 살고 있는지 않는가?
4:3 전도할 문
기도는 자기만이 아니라 다른 이들을 위한 것이어야 한다. 중보기도가 필요하다. 이 중보기도는 복음 전파를 위한 기도이기도 하다. 전도할 문이 열린다는 것을 전문적인 선교활동으로만 생각할 수 없다. 우리의 삶 자체가 전도의 문이 되어야 한다. 그것은 곧 ‘그리스도의 비밀’을 말하는 것이다. 누가 그런 말을 할 수 있는가? 이 말의 주체는 누군가?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는 하나님이 바로 말의 능력이고, 주체이다. 그는 말로 세상을 창조하셨다. 우리가 말의 능력에 사로잡히려면 그리스도의 비밀이 무엇인가를 알아야 한다.
4:3 그리스도의 비밀
그리스도의 비밀은 이미 1:26,27절과 2:2절에 나온다.(*신학단상 ‘하나님의 은폐성’ 참조) 우리는 일반적으로 예수가 그리스도라는 사실을 명확하게 알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성서는 그것을 비밀이라고 말한다. 어떤 유대교 신학자는 예수가 그리스도라는 증거를 대보라고 했다. 예수 이후에서 이 세상에는 무죄한 자가 고난을 당하고, 어린아이들이 불치병으로 죽는다. 메시아가 다스리는 세상에서는 일어날 수 없는 일들이 일어난다. 이런 상황에서 어떻게 예수가 메시아라는 주장이 가능한가? 우리의 대답은 예수의 메시아 성은 비밀이라는 것이다.
이것은 예수의 십자가 사건에도 해당된다. 젊은 유대인의 십자가 처형이 어떻게 인류 구원의 길이 될 수 있는가? 그것은 바울이 말한 것처럼 모든 사람들에게 거리끼고 부끄러움의 대상이었는데 말이다. 그것은 비밀이다.
비밀은 불확실하다는 말이 아니라 아직 숨어 있으나 확실한 현실성을 말한다. 이 세상도 그렇다. 다층적이다. 두껍다. 묘하다. 여기 연필 한 자루가 있다. 이것이 어디서 어떤 경로를 거쳐 여기까지 왔는지를 생각하면 아득할 뿐이다. 사람과의 관계도 역시 그렇다. 아무런 상관이 없이 자란 사람이 우연한 기회에 만나서 부부가 되고, 친구가 되고, 동지가 되고, 때로는 원수가 된다.
근대의 현실 개념을 해체한 하이데거는 물의 본래적 의미를 통해서 이 세계의 존재 지평을 해명한다. 그에 의하면 물은 밝혀줌의 지평에서 일어나는 사건이다. 물들의 세계는 존재의 한 차원이다. 하나의 물은 하나의 사건이다. 바로 이 사건이 존재이다. 단순한 물(物) 속에서 존재가 본재하고 물의 사건으로서 구체적으로 인간에게 관여한다. “물이란 잔과 걸상, 오솔길과 쟁기 등이다. 그러나 물은 또한 그것의 방식에 따라 나무와 연못이고 냇물과 산이다. 물들은 그때마다 체재하면서 그들의 방식에 따라 물화하면서 왜가리와 노루, 말과 황소이다. 물들은 그때마다 체재하면서 그들의 방식에 따라 물화하면서 거울과 혁대 쇠, 책과 그림, 왕관과 십자가이다.” 그는 사물(Ding)을 사중자(Gevierte)가 회집하는 장소라고 했다. 사중자는 하늘, 땅, 신성들, 사멸할 자들을 가리킨다. 물의 영성화라 할 수 있다.
에버하르트 윙엘의 명저 <Gott als Geheimnis der Welt>는 하나님을 세상의 비밀이라고 말한다. 이상한 말이 아니다. 무로부터의 창조(creatio ex nihilo)를 우리는 알지 못한다. 창조 이전의 상태를 우리는 상상할 수 없다. 그 창조는 종말론적으로 완성된다는 사실도 역시 우리에게는 비밀이다.
셰익스피어의 <한여름 밤의 꿈>에 요정들이 등장한다. 그는 왜 요정의 조화를 통해서 남녀의 사랑을 묘사하는 걸까? 그이 작품에는 유령도 흔히 등장한다. 사람들의 삶을 그런 방식이 아니면 설명할 수 없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4:5 세월을 아끼라
세월을 아낀다는 말은 기회를 놓치지 말라는 뜻이다. 공동체 밖에 있는 사람들에게 윤리적으로 바르게 행하고, 그 관계를 맺을 때 기회를 잘 이용해야 한다. 이것이 곧 복음 선포의 기회이기도 하다.
4:6 마땅히 대답할 것
교회 밖의 사람들에게 복음을 증언할 책임이 기독교인들에게 주어졌다. 4-6절이 모두 그 사실을 염두에 둔 것이다. 언어와 그 해명의 주체는 하나님이다. 소금처럼 진리를 드러내는 말로 사람들을 대할 때 우리는 말의 힘에 이끌림을 받게 된다. 이런 경험이 있는가? 벧전 3:15도 우리의 희망에 대한 이유를 묻는 사람들에게 대답할 것을 준비하라고 권면한다.
오늘 기독교인들은 신앙 언어의 능력을 잃어버렸다. 하나님, 구원, 통치, 하나님 나라, 종말, 해방, 자유, 칭의 등, 모든 신앙 언어들이 존재론적 능력으로가 아니라 우리의 종교적 필요를 채우는 도구로 떨어졌다. 이런 상태를 넘어서려면 우리는 처음부터 기독교 언어를 새롭게 학습해야 할지 모른다. 언어의 주체는 바로 하나님이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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