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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타

메시아적 행위와 교회


메시아적 행위와 교회
마 4:23-25

교육
마태복음 기자는 본문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모든 가르침과 행위를 요약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앞으
로의 진행 과정을 요약하는 일은 마태복음만이 아니라 마태가 자기 글의 원래 자료로 삼은 마가복음에
도 있습니다. 마가나 마태 모두 약간씩 다른 구조를 보이고 있지만 기본적으로는 예수에게서 메시아의
사건이 발생했다는 사실을 전하고 있습니다. 마가는 1장39절에서 이렇게 진술했습니다. "이렇게 갈래래
아 지방을 두루 찾아 여러 회당에서 전도하시며 마귀를 쫓아내셨다." 이와 약간 달리 마태복음 4장23절
은 다음과 같습니다. "예수께서 온 갈릴래아를 두로 다니시며 회당에서 가르치시고 하늘나라의 복음을
선포하시며 백성 가운에서 병자와 허약한 사람들을 모두 고쳐 주셨다." 마가복음은 회당에서 전도하신
다고 줄여 말했지만, 마태복음은 회당에서 가르치시고 하늘 나라의 복음을 선포하신다고 구분했습니다.
양측 모두 예수님의 활동 무대가 주로 회당이었다는 사실에서는 비슷합니다. 아마 예수님의 활동 기간
중에서 초기나 중반까지는 이 회당 출입이 어느 정도 자유로웠다고 볼 수 있지만 안식일 논쟁과 율법을
해석하는 과정에서 갈등이 일어나면서부터 그 출입이 극히 제한되었습니다. 오늘 우리는 마태가 메시아
의 일로 요약한 본문에 따라서 우선 예수님이 회당에서 하신 일로부터 말씀을 나누겠습니다.
마태는 예수님이 회당에서 가르치셨다고 진술합니다. 마가는 예수님이 회당에서 전도하셨다고 설명
하는데 반해서 마태가 굳이 가르치셨다고 바꿔 말한 이유를 정확하게 파악하기는 힘듭니다. 마태의 이
런 진술에는 어떤 특별한 뜻이 있다기보다는 그 당시 모든 랍비들이 그랬던 것처럼 예수님도 회당에서
사람들에게 구약을 알기 쉽게 가르치신 것에 대한 표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 당시에는 아직 지금
과 같은 구약성서가 완성되지 않았고 단지 양피지에 기록된 여러 거룩한 문서들이 회당에 보관되어 있
었습니다. 매번 안식일마다 예루살렘 성전에 갈 수 없었던 이스라엘 사람들은 대신 곳곳에 마련되어 있
던 회당에 모여서 랍비들에게 말씀을 들었습니다. 제사를 드릴 수 있는 성전은 예루살렘 한 곳에 있지
만 말씀을 들을 수 있는 회당은 세계 곳곳에 있는데, 이스라엘 사람들은 나라 없이 지내던 지난 2천년
의 세월 동안 이 회당을 중심으로 종교적이고 민족적인 전통을 유지할 수 있었습니다. 이곳은 참된 정
신 교육이 일어나는 곳이었습니다.
예수님이 회당에서 가르치셨다는 말씀에서 우리는 메시아의 일에는 교육이 포함된다는 사실을 발견
할 수 있습니다. 이 세상의 이치를 바르게 깨닫고 살아가도록 돕는 일이 곧 교육입니다. 이 말은 곧 교
육이 구원론적 사건이라는 뜻이기도 합니다. 만약에 우리나라의 모든 선생님들이 자기들의 행위가 이렇
듯 인간을 구원하는 행위라는 사실을 인식한다면 우리의 교육이 근본적으로 달라질 것입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오늘 우리에게 교육은 구원의 차원이 아니라 상업의 차원으로 떨어졌습니다. 물론 교육만이
아니라 정치, 문화, 예술 등, 모든 인간의 삶이 돈을 중심으로 돌아가고 있지만 그런 시류에서 벗어나
야 할 교육 마저 그런 상태에 머물러 있다는 사실은 우리의 삶에서 매우 심각한 문제입니다.
우리는 언젠가 예배 후 친교 시간에 독일의 교육 제도에 대해서 함께 말씀을 나눈 적이 있습니다.
독일의 교육 제도가 인간을 완벽하게 만들어내는 만능은 아니지만 최소한 구원 지향적 목표만은 어느
정도 갖추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들에게서는 모든 젊은이들을 대학 입시라는 틀 안으로 강제적으로 몰
아넣는 일은 있을 수 없습니다. 학생 스스로에게도 그렇지만 부모들에게도 그런 요구를 하지 않습니다.
젊은이들의 교육을 사적인 영역으로 분류한 채 무한의 경쟁 구조로 만들어가지 않고 공동체 전체가 감
당해야 할 공공의 영역으로 간주하고 있습니다. 가능한 대로 모든 이들이 인간답게 살아갈 수 있는 최
소한의 교육이 보장된 제도라는 말입니다. 이런 부분들을 우리가 배우고 실천하려면 교육을 메시아적
구원의 차원에서 인식하는 게 우선적으로 필요합니다.

설교
마태는 예수님이 "하늘나라의 복음을 선포하셨다"고 설명합니다. 앞에서도 말했듯이 마태는 예수님
이 하신 일을 이렇게 요약한 것입니다. 일종의 설교라고 할 수 있는 이런 요소는 가르치는 교육과 약간
다릅니다. 교육은 인간의 내면에 있는 가능성들을 발현시키는 작업이지만 하늘나라의 복음을 선포하는
일은 외부의 힘을 받아들이는 사건입니다. 교육은 이성의 작용이라고 한다면 설교는 의지의 작용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런 점에서 교육에서는 가르치는 사람과 가르침을 받는 사람의 지적인 능력이 중요하
게 작용하지만 설교에서는 그것이 그렇게 결정적으로 작용하지 않습니다. 그것보다는 오히려 영적인 통
찰력과 의지적 결단이 더 중요합니다. 물론 인간의 이성, 지성, 의지, 결단, 영성 같은 요소들이 늘 또
렷하게 구별되는 게 아니기도 하고, 상당한 부분에서 서로 맞물려 작용하기 때문에 완전하게 대립적인
것으로 볼 수는 없지만 근본적으로는 차이가 있습니다.
얼마 전부터 교회에서 교육목회라는 말이 자주 등장했습니다. 교육목회라는 것은 그 이전에 가부장
적 권위에 의해서 일방적으로 이끌어가던 방식에서 민주적이고 합리적으로, 또는 인간학적 이해를 바탕
에 두고 교회를 이끌어가자는 목소리입니다. 이런 면에서는 목회가 한 단계 업그레이드 된 것으로 볼
수 있긴 하지만 이런 목소리에 내재된 함정도 눈여겨보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교육목회가 기본적으로
교육 방법론에 치우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학생 중심의 교육이라든가, 학생의 발달 심리를 살펴야 한
다든가, 학생의 능력을 제고하는 많은 방식들이 여기에 동원될 수 있습니다. 교육의 목표를 효과적으로
달성하기 위해서 마련된 여러 교육 방법론은 그 나름의 타당성이 있기 때문에 교회가 그것을 효과적으
로 사용하는 그것 자체를 여기서 문제삼을 필요는 없습니다. 그러나 기독교의 복음이 인간의 잠재 능력
을 발굴하고 고취시키기 위한 방법론으로 떨어질 위험성은 지적되어야 합니다. 일례로 언제부터인가 한
국교회의 지도자들이 '목회상담학'에 관심을 많이 기울이기 시작했는데, 이것도 역시 교육목회의 일환
입니다. 목회상담은 인간의 영성을 인간의 심리 작용으로 간주하고 그렇게 기계적으로 접근할 가능성이
있습니다. 또한 '열린예배'라는 것도 역시 교육목회, 또는 상담학의 차원에서 인간의 종교심을 발현시
켜내려는 방법론입니다. 이렇게 복음이 방법론으로 떨어져버린다는 것은 청중들의 즉각적인 반응을 불
러일으킬 수 있다는 점에서 매우 유혹적이긴 하지만 결국 인간학에 머무는 결정적인 우를 범하는 일입
니다.
예수님은 하늘나라의 복음을 선포하셨습니다. 예수님의 모든 비유가 하나님 나라입니다. 이 나라는
곧 하나님의 통치입니다. 우리가 만들어가는 민주주의, 복지사회, 평등사회가 아니라 그런 모든 요소들
을 포함하면서 동시에 뛰어넘는 하나님의 통치입니다. 그런 나라는 아무리 말로 설명하려고 해도 가능
하지 않으며, 동시에 아무리 잘 가르쳐도 그대로 전달되지는 않습니다. 수학은 어느 정도의 지능만 있
으면 알아먹을 수 있지만 하나님의 통치는 '귀 있는 사람'에게만 들을 수 있습니다.
오늘도 많은 기독교인들이 하나님의 나라의 선포와 인간을 인간답게 만드는 교육을 구분하지 못함으
로써 혼란에 빠지곤 합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어떤 개념 안에 들어오지 않으며, 그런 방식으로 전달될
수도 없습니다. 이는 흡사 동양의 스승들이 제자들에게 '화두'를 주고 스스로 깨닫게 하는 것과 비슷합
니다. 하나님의 통치가 이렇듯 신비이기 때문에 이를 인식하기 힘든 사람들은 교회조직, 봉사, 업적 등
등의 방식으로 이것을 경험하려고 애를 씁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통치가 이런 틀 안에 담기지 않기 때
문에 이런 노력으로는 아무런 경험을 할 수 없습니다. 그렇게 세련된 교육 체제 안에서 살았던 바리새
인들에게 예수님이 무의미하게 비쳤지만 평범한 제자들과 세리와 창녀들, 또는 무식했던 사람들에게는
자신들의 삶을 던질만한 분으로 다가온 것과 같습니다. 우리의 생각과 계획을 뛰어넘어 자유롭게 그 세
계를 펼쳐 가는 하나님의 통치를 선포하는 일이 바로 메시아인 예수님의 가장 중요한 일이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치유
마태는 예수님이 백성 가운데서 병자와 허약한 사람들을 모두 고쳐 주셨다고 전합니다. 우리가 복음
서에서 예수님 주변에 수많은 병자들이 모였고 그들이 고침 받았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말씀
에 대한 가르침과 하나님 나라에 대한 선포가 메시아의 일이라는 사실은 이해하는 데 큰 어려움은 없지
만 온갖 질병을 고친 일까지 그렇다는 사실은 쉽지 않습니다. 예수님이 병을 고쳤다는 것은 의학적인
방식이 아니라 무당처럼 영적인 방식을 사용했다는 말인데, 우리가 예수님을 그런 영매자처럼 생각할
수는 없지 않습니까? 어쨌든지 예수님이 공생애를 거치면서 얼마나 많은 병자를 고쳤는지 모르겠지만
그런 치유 행위가 예수님의 행위 중에서 매우 중요했던 것은 사실입니다. 그렇지 않았다면 마태가 예수
님의 일을 요약하면서 이 부분을 명시하지 않았을 테니까요. 과연 예수님은 특별한 능력으로 그 당시의
불치병을 치유하신 걸까요? 아니면 매우 자연스러운 치유 행위였을까요. 사실 인간에 대한 비상한 통찰
력을 갖춘 사람들은 인간의 마음과 육체가 연결되어 있다는 점을 충분히 헤아리고 그 두 부분을 함께
치료할 수 있습니다. 극한의 외로움 때문에 정신병을 얻은 사람이 예수님을 통해서 특별한 사랑을 경험
했다면 당연히 그 정신병은 자연스럽게 치료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복음서에 나오는 치유 사
건들을 보면 예수님이 이런 심리치료나 기 치료, 또는 마술적 방식으로 병을 낫게 하지 않았다는 사실
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당신 죄가 용서받았다"라든지, "당신 믿음대로 될 것입니다"라는 말
씀을 통해서, 또는 눈에 흙을 바르는 특별한 방식으로 치료하셨습니다. 이런 일들은 매우 다양하게 일
어났기 때문에 우리는 이런 일정한 유형을 발견할 수 없습니다. 성서 기자들은 병자들이 치유되는 방식
에 관심을 둔 것이 아니라 치유 사건 자체에 관심을 두었습니다. 메시아인 예수님에게서 이런 치유 사
건이 발생했다는 것입니다. 거꾸로 이런 치유 사건이 곧 예수님의 메시아 성을 증언하는 징표로 제시되
고 있습니다.
마태가 치유 행위를 예수님의 메시아적 사건으로 제시하는 데서 알 수 있듯이 메시아의 일은 인간의
육체를 포함한 구체적인 삶의 치유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자칫 기독교 신앙이 구원의 역사적 차원을 포
기함으로써 삶의 리얼리티를 상실할 염려가 있는데 반해서 예수님은 삶 자체의 구원에 들어오셨습니다.
선천성 면역결핍증에 걸린 아이들을 고치는 일은 당연히 메시아의 일에 포함됩니다. 집이 없는 사람들
에게 집을 마련해준다거나 먹을 게 없는 사람들에게 그것을 제공하는 일도 역시 메시아의 일입니다. 이
런 일을 열거하자면 끝이 없기 때문에 여기서 접겠습니다만 기독교의 구원이 인간의 고난 문제를 실제
적으로 감당해야 한다는 사실만은 분명히 해야겠습니다.
그렇다면 휴머니즘과 기독교 신앙의 차이점이 없는 게 아닌가, 하고 질문할 수 있습니다. 여기에는
매우 미묘한 긴장이 있습니다. 인간에게 불을 가져야 줌으로써 제우스에게 영원한 형벌을 받고 있다는
프로메테우스와 인간을 구원하기 위해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 예수님 사이에는 유사성이 없지 않습
니다. 극한의 인간애와 그로 인한 자기 희생이라는 점에서 모습이 비슷합니다. 그러나 프로메테우스적
인 휴머니즘은 그것 자체가 목적이지만 기독교의 휴머니즘은 다른 그 어떤 것의 결과라는 점에서 차이
가 있습니다. 즉 기독교 신앙의 휴머니즘은 영원한 생명이라 할 부활을 목표로 해서 살아가는 사람이
기쁨과 자유에 근거해서 감당하는 희생이기 때문에 그것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이런 차
이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인간의 인간다운 삶을 위한 우리의 행위에는 메시아적 의미가 담겨 있는 것만
은 분명합니다.

교회의 메시아적 사명
많은 경우에 오늘 교회가 메시아이신 예수님의 일을 이어받아서 감당해야 한다고 말을 하지만 그것
은 좀 오해의 소지가 있습니다. 교회가 메시아적 공동체이긴 하지만 메시아는 아닙니다. 메시아는 오직
예수님뿐이십니다. 교회를 포함해서 모든 인류의 구원은 예수님에 의해서만 가능하지 우리 교회에 의해
가능한 게 아닙니다. 우리 교회는 구원받아야 할 사람들이지 구원의 주체자들이 결코 아니라는 말입니
다. 우리에게 근본적으로 그런 능력이 없기도 하지만, 우리는 아직 구원의 실체를 파악하지 못하고 있
기 때문에 결코 메시아의 일을 할 수는 없습니다. 간혹 교회가 메시아의 일을 독점하려고 해서 문제가
일어납니다. 이런 일은 단지 박태선이나 문선명 같은 이단들만이 아니라 정통 교회에서도 일어납니다.
교회가 이미 구원을 담지하고 있기나 한 것처럼, 더 나아가서 구원을 베풀어 줄 수 있을 것처럼 행동할
때가 참으로 많습니다. 이런 일들은 메시아를 기다리는 사람들이 자신을 메시아로 착각하기 때문에 벌
어집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회가 메시아적인 공동체라는 말은 맞습니다. 우리가 직접 이 세계를 구원하는
것은 아니지만 메시아이신 예수님의 가르침과 선포와 치유 사건에서 배운 대로 메시아적 징표를 실천함
으로써 메시아적 공동체로 자리를 잡습니다. 우리는 구원의 리얼리티 자체가 아니라 그것의 징표
(symbol)로서 교육(teachung)과 선포(preaching)와 치유(healing)에 참여합니다. 우리는 아직 구원의
차원에서 실현되어야 할 교육과 그런 선포와 그런 치유를 직접적으로는 알지 못하기 때문에 그런 것의
징표라고 할 수 있는 것들을 행할 뿐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문제는 이 세 가지 메시아적 징표를 교회가 독점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교육
과 치유는 전적으로 이 사회가 감당해야 할 일들이고, 교회는 단지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는 일에 제한
해야 합니다. 이런 태도는 교회의 능력을 제한시킨다기보다는 오히려 훨씬 강화시킬 것입니다. 우선 교
육과 치유의 문제는 교회가 감당할 수 없을 만큼의 물적 토대가 필요한 부분이기도 하지만 이런 것들은
결국 하나님 나라의 지평에 그 궁극적 토대를 두고 있다는 점에서 교회의 선포는 고유하면서도 동시에
결정적인 의미가 있습니다. 교회가 공연히 다른 일까지 욕심을 내다가 결국 자기 일도 바르게 수행하지
못할 뿐만 아니라 사회와 공연한 경쟁과 대립의 각을 세우는 일이 많습니다. 예를 들자면 교회가 학교,
병원, 복지시설을 운영하는 것은 겉으로는 그럴듯하게 보일지 모르지만 교회의 본질이라는 관점에서는
별로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그런 일에 교회의 힘을 소진시키지 말고 하나님 나라의 깊이와 신비를 해명
하는 일에 힘을 집중시킴으로써 교회는 이 사회로 하여금 교육과 치유의 영적인 힘을 받을 수 있도록
도울 수 있습니다.
교회의 이런 기능이 곧 예언자의 전통입니다. 이 사회가 하나님 나라의 차원에서 바른 길을 갈 수
있도록 예언자적 목소리를 내는 것이야말로 교회의 메시아적 사명입니다. 인간성과 생태계를 파괴하는
자본주의의 위험성과, 청소년들의 생명력을 앗아가는 경쟁 위주의 교육 체제에 담긴 위기도 제기해야
합니다. 이런 문제들은 한 두 가지가 아닙니다. 이스라엘의 우상숭배를 날카롭게 비판한 구약의 예언자
들처럼 오늘 유한한 인간의 생산물을 절대화함으로써 참된 생명의 힘이 고갈되는 이 시대의 우상숭배를
비판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런 점에서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선포할 수 있는 영적인 통찰력을 갖추는
일이야말로 오늘 메시아적 공동체인 교회에게 맡겨진 가장 시급하고 절대적인 사명입니다.
2004. 6.23.              
마태복음 4:23-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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