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들어가는 말
- 절망이란 무엇인가
20세기 가장 위대한 신학자로 불리는 칼 바르트의 유명한 명제 “하나님은 하늘에 있고, 인간은 땅에 있다.”가 있습니다. 이 말은 인간과 신 사이에 도저히 넘을 수 없는 간극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 어떠한 방법으로도 인간은 결코 신에게 다다를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인간의 모든 욕망의 근원에는 ‘신과 같이 되겠다.’ ‘하늘에 닿겠다’가 있습니다. 물질에 대한 욕망이든, 명예에 관한 것이든, 성적인 것에 관한 것이든 인간은 자신이 가진 한계를 넘고, 넘고, 또 넘어서 결국에서 무한, 영원, 신에 다다르겠다는 것이지요.
하지만 인간의 긴 역사를 통해서도, 우리 개인의 삶 속에서도 우리는 깨닫게 됩니다. 우리는 결코 영원에 다다를 수 없다는 것을요. 그리도 물질적 풍요를 위해 평생을 애써왔지만 언제나 부족합니다. 그놈의 돈은 다 어디에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사람들에게 근사하고 멋지게 보이고 싶어서 찍어 바르고, 이것저것 고치고, 좋은 옷을 입고, 온갖 장신구로 온몸을 감싸 보아도 늙어가는 세월을 막을 수 없고, 난쟁이 똥자루만한 키는 감출 수 없고, 타고난 신체적 한계를 넘을 수 없습니다. 무슨 말인지도 모르는 책을 읽어서 아는 체하고, 학위나 스펙으로 이력서를 빽빽이 채워보아도 지식의 한계와 어리석음을 어찌할 수 없지요.
그리고 무엇보다 스스로 너무 잘 압니다. 나는 그렇게 멋지고 훌륭한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요. 행복하기 위해 주변 사람들에게 웃음을 보이고, 도움을 주고 할 수 있는 일을 해보지만 내 맘 같은 사람을 찾을 수 없고, 찰나의 행복일 뿐 영원하지 못하다는 것을 압니다. 마치 블랙홀과 같은 인간의 욕망, 신과 같이 되려는 인간의 목마름은 채우고 채워도 결코 채워질 수 없다는 것을 압니다. 그리도 간절히 바라는 영원성, 완전함, 신과 같이 되는 것은 이처럼 육체와 시간과 필연성의 한계에 갇힌 우리 인간에게는 불가능하다는 것을 뼈저리게 배웁니다.
그러나 그런 깊은 깨달음 속에서도 인간은 결코 영원을 향한 우러름을 포기하지 못하지요. 왜 우리는 포기하지 못하는 걸까요. 왜 우리의 한계성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걸까요. 우리에겐 우리가 알지 못하는 무엇인가가, 영원을 갈망하는 ‘영혼’이 숨겨져 있기 때문일까요. 어쨌든 이러한 상황 속에서 인간은 깊은 절망을 경험합니다. 벗어날 수 없는 덫에 걸린 짐승과 같이 그 절망 속에서 인간은 몸부림칩니다.
- 키르케고어
위대한 사상가이자 신학자라 할 수 있는 키르케고어에 따르면, 모든 인간은 근원적으로 절망 속에 있고 그 누구도 예외는 없습니다. 모든 인간이 존재론적으로 처해있는 절망은 세 가지 단계가 있습니다.
첫째 단계는 가장 끔찍하고 위험한 단계인데, 깊은 절망 속에 있으면서도 자신이 절망 속에 있는지 알지 못하는 단계입니다. 직접적인 경험하는 세계, 눈에 보이는 세계, 육체적 쾌락 등에 빠져 돈과 명예와 성과 온갖 세상의 물질적 가치들을 추구하면서 진정한 인간의 가치를 망각하고 사는 것입니다. 절망하지 않는다고, 절망은 나약한 자들이나 하는 것이라며 완전히 물질적 세상 속에 사는 사람들입니다. 윤리적으로 타락했다는 뜻이 아닙니다. 이 세계의 가치들을 추구하며 그 너머의 세계, 자신의 본래성을 전혀 의식하지 못하고 오로지 현실성에 붙박여 있는 이들입니다. 자신을 망각하고 자신에게서 완전히 벗어나 있는 자입니다.
두 번째 단계는 자신이 절망에 빠져있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인간이 가진 절망이 얼마나 큰지 잘 압니다. 그 절망을 뛰어넘을 수 없기에 더욱더 절망합니다. 그래서 자기 자신이 되기를 거부하는 단계입니다. 너무나 깊은 절망에 빠져있는 모습을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자신의 초라함을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절망을 외면합니다. 그러나 결코 그 절망을 벗어날 수 없습니다. 부자가 아닌 자신의 모습을 인정하지 않는 가난한 이와 같은 모습입니다.
세 번째 단계의 절망은 절망 속에 있는 자신을 인식할 뿐 아니라, 그러면서도 자기 자신이길 바라는 단계입니다. 있는 그대로의 자신, 절망 속에 있는 자신, 인간의 한계적 실존을 받아들입니다. 그러면서 자기 자신 속에서 그 절망을 이겨낼 희망을 찾으려 합니다. 깊은 절망 속에서도 진정한 삶의 의미를 찾아보겠다는 것입니다. ‘피할 수 없다면 즐겨라’식의 삶의 방식이라 할까요. 이방인의 메르소와 같은 인물입니다. 결국 어떠한 인간도 절망에서 벗어날 수는 없습니다.
▣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
이러한 키르케고어의 관점을 빌어 아브라함의 이야기를 해석해 보려 합니다. 인간은 어떻게 절망에서 벗어날 수 있는지, 그 절망을 어떻게 견디며 살 수 있을지 등을 함께 고민해보려 합니다. 키르케고어는 인간의 실존을 세 가지 단계로 설명하는데, 그것은 심미적 실존, 윤리적 실존, 그리고 종교적 실존입니다.
- 우상의 신전에서(심미적 실존: 직접적 심미)
아브람은 기원전 20세기경(지금부터 약 4천 년 전) 오래된 수메르 도시인 우르에서 태어났습니다. 우르는 유프라테스 강과 티그리스 강 사이의 비옥한 땅에 건설된 수메르 문명 최고의 국제도시였습니다. 그곳에서 그는 아버지 데라의 보호 아래에서 풍요를 누렸습니다. 세계에서 가장 강력한 나라의 중심에서, 번화하고 화려한 도시에서, 사람들은 삶의 문제가 있을 때마다 찾아와 신의 뜻을 물었고, 신에 대한 해박한 지식을 가진 종교 전문가로서, 삶의 모든 문제를 난나 신이 해결해 줄 것이라 위로해 주고 축복을 빌며, 처방으로 자신들이 만든 난나의 신상을 팔며, 사람들의 부러움과 존경을 받으며 최고의 엘리트로서 지위를 한껏 누리며 살았을 테지요.
키르케고어의 관점에서 보면, 절망 속에서 살고 있으면서도 절망을 의식하지도 못하는 삶이었던 것이지요. 눈에 보이는 세계가 전부라고 믿으며, 그곳에서 자유롭고 행복하다 믿으며, 삶이 주는 풍요를 마음껏 누리고 있었습니다. 아브람에게 ‘절망’이라는 말은 어울리지 않았습니다. 그런 말은 인생의 패배자, ‘루저’에게나 어울리는 말입니다. 보이는 삶 너머에 보이지 않는 삶이 있다는 것. 삶의 의미가 있다는 것. 진정한 자신의 삶이 있다는 것 따위의 말은 성공을 질투하고 동경하는 패배자들이나 하는 말이지요. 그들이 만들어낸 헛소리에 불과한 것이었습니다. 심미적 실존의 단계에서도 직접적 심미의 단계에 머물러 있는 삶입니다.
- 위기 앞에서(심미적 실존: 반성적 심미)
그러나 영원할 것만 같았던 그의 번영과 풍요는 움켜잡은 모래 마냥 흔들리는 바람에 속절없이 빠져나가고 맙니다. 동쪽으로부터 미개한 이방인들 아모리인이 대규모로 몰려들어 찬란했던 자신들의 수메르 문명이 허망하게 무너져버립니다. 새로운 대제국 바빌로니아제국이 건설된 것입니다. 미개한 짐승들이라 여기던 아모리인이, 함무라비라는 위대한 군주를 앞세워 그들을 훨씬 능가하는 위대한 제국을 건설합니다. 그리고 새로운 도시 바빌론을 제국의 수도로 선택해 건설합니다. 위대한 수메르 문명 최고의 도시 우르는 황폐한 곳이 되어 갑니다. 사람들은 떠나가고 더 이상 찾는 사람도 없습니다. 국제도시 우르는 이제 버려진 도시가 되고 만 것입니다.
그에 따라 아브람 집안의 운명은 하루아침에 심각한 위기를 맞습니다. 그나마 다행스럽게 목숨은 구했으나 아모리인의 점령자들로서의 오만함과 온갖 약탈들. 그들이 누리던 모든 것들은 과거의 꿈같은 것이 되고 맙니다. 이제는 생존을 걱정해야 하는 처지가 되고 말았지요.
그러나 이러한 외적 조건의 변화뿐 아니라, 더 고통스러웠던 것은 정신적인 충격이었습니다. 삶이란 대체 무엇인가? 삶의 의미가 있을까? 신은 어떤 존재인가? 자신이 그리도 대단히 여기던 재물이나, 명예, 신에 대한 신앙, 사람들과의 관계, 자신에 대한 자부심, 존경했던 아버지, 최고의 문명을 누리고 있다는 오만함… 그 무엇 하나 그의 삶과 의미에 대해 답을 주지 못합니다.
깊은 절망 속에 빠져듭니다. 너무나 고통스럽습니다. 삶의 터전을 버리고 뜨내기들의 땅으로 흘러갑니다. 가는 길 내내 묻고, 묻고 또 묻습니다. 무엇이 잘못된 것일까. 왜 이렇게 되었을까. 하루아침에 바뀌어버린 자신의 처지와 상황을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세상의 이곳저곳을 다니며 장사를 하는 이들에게 난나 신상을 파는 일도 너무 고단합니다. 난나 신을 입으로 말하고 있지만, 이제 본인조차도 믿을 수가 없습니다. 최고의 신이라고 생각했었는데, 그 신이 큰 복을 내려주셔서 잘살고 있다고 확신했는데… 자신의 손으로 깎아 만든 난나 신은 정말 신이었을까. 이젠 뭐가 뭔지 모르겠습니다. 그 무엇도 확실한 것은 없습니다.
마침내 그들의 삶에 깊은 심연이 있음을 깨닫게 됩니다. 지금까지 알던 지식과 신념과 삶이 모두 허상이었음을 알게 됩니다. 아버지 데라마저 세상을 떠나고 이젠 오롯이 혼자서 서야 할 때입니다. 자신의 삶을 온전히 책임져야 합니다. 그가 마주한 심연, 절망은 너무나 깊고, 너무나 낯설기만 합니다. 어떻게 해야 할지 무엇을 해야 할지 알 수 없습니다. 고독과 불안과 절망 속에 서 있습니다. 자신의 나약함과 한계가 드러납니다. 그런 자신의 모습을 받아들일 수가 없습니다. 자신을 용서할 수 없습니다. 심미적 실존 가운데 반성적 심미의 단계입니다.
- 신의 부름을 좇아(윤리적 실존)
깊은 절망 속에 빠져있던 그는 자기 삶의 의미를 찾는 여정을 시작하려 합니다. 그에게 신의 부름이 임합니다. “너는 너의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네게 보여줄 땅으로 가라.” 성서에 쓰여 있는 것처럼 ‘신의 목소리’로 부름이 임한 것으로 볼 수 있지만, 깊은 고뇌와 절망 속에서 진정한 자신의 삶을 찾기 위한 아브람 개인의 결단을 이렇게 표현한 것으로 이해해 볼 수도 있지 않을까요. 이러한 신의 부름, 명령은 ‘사람은 누구나 자신만의 삶을 살아야 한다.’ ‘누구나 본래성이 있다’는 의미, 표현이 아닐까요. 사람은 누구나 진정한 자신의 삶을 찾아야 하고 살아야 한다는 성경의 깊은 통찰이 아닐까요.
어쨌든 아브람은 그 신의 부름에 응답하여 진정한 자신을 찾는 여정을 시작합니다. 신앙의 도약을 통해 그는 지금까지와는 다른 삶의 차원으로 들어갑니다. 직접 경험하고 눈앞에 보이는 것이 전부가 아닌, 그것을 넘어 더 깊은 의미가 있음을, 진정한 자신의 삶을 찾을 수 있는, 그 너머의 세계를 향해 나아갑니다. 고통스럽고 힘들지만 그 진정한 자신의 삶을 살아보려 합니다. 세상이나 부모에게서 주어진 자신이 아니라, 진짜 자기가 되려 합니다. 그러기에 데라가 고향을 떠난 것과는 전혀 다른 이유로, 자신을 찾는 또 다른 여정에 나섭니다. 육체적 욕망을 좇는 삶이 아닌, 거룩한 것을 좇는, 가지고 소유하는 방식이 아닌 존재하는 방식으로, 움켜잡고 빼앗는 방식이 아닌 내어주고 나누어주는 방식의 삶으로 살기로 합니다. 신을 따르려 합니다.
여전히 절망이 사라진 것은 아니지만, 치열한 몸부림과 인내와 기도, 경건함과 거룩한 열정으로 삶을 견뎌냅니다. 확실히 이전과는 전혀 다른 삶을 삽니다. 어렴풋하게나마 산다는 것이 무엇인지, 사람들을 아끼고 도우며, 추악한 욕심에 이끌리지 않으며, 사람들을 진실한 마음으로 존중하며, 자신과 삶을 이제 다른 눈으로 바라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주위의 가족들과 사람들도 그를 진심으로 따르며 존경합니다. 분명 그는 옛날의 그가 아닙니다. 궁극적인 것을 추구하는, 삶의 의미를 찾는, 사람들에게 존경받는 어른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여전히 그는 완전한 해방을 얻지 못했습니다. 진정한 자아가 되는 길을 찾아 나섰건만, 약속을 좇아 신의 명령을 따르려 애쓰며 살았지만, 여전히 온전한 구원과 해방, 자유에 다다르지 못했음을 압니다. 여전히 깊은 절망을 품고 살고 있습니다. 아무렇지 않은 척, 의연하고 품격 있는 모습으로 살고 있지만, 타인의 눈은 속일 수 있지만, 자신의 눈은 속일 수 없습니다. 여전히 깊은 절망과 불안 속에 있습니다. 그저 삶의 무게를 견디고 있을 뿐입니다. 신을 바라보며 기도하고 있을 뿐입니다(윤리적 단계, 절망하면서 자기 자신이 되려는 하는 단계).
- 모리아에서(신앙의 도약)
그러던 어느 날 ‘이삭을 바쳐라’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신의 명령 앞에 마주 섭니다. 절체절명의 순간입니다. 신의 부름을 좇아, 진정한 자기가 되기 위해 부단히 노력하며 살아왔습니다. 그러나 아직 잘 모르겠습니다. 진정한 구원에 이르렀는지. 왜 여전히 가슴 한구석에 깊은 절망과 의심과 불안을 품고 살고 있는지. 어떻게 이 삶의 불안과 절망을 극복하며 살 수 있는지.
그렇게 온 마음과 정성을 다해 살아왔는데, 길을 찾아서, 신의 음성을 좇아서 왔는데… 신의 약속으로 주어진 선물인 ‘이삭’이라는 아들. 자기 삶의 여정이 틀리지 않았음을 확증해주는 살아 있는 증거. 약속의 아들. 불가능한 가능성. 그 아이가 있어서 그나마 삶을 견디며 살 수 있었는데… 이제야 그 약속의 아들을 번제로 바치라는 신의 명령이라니!
그가 좇았던 여호와 역시 결국은 난나와 같은 허상이었던 것일까요. 모두가 거짓이었던 것일까요. 대체 어떤 신이 아들을 바치라고 할 수 있을까요. 그 어떤 이유도, 그 어떤 괴변도 말이 되지 않습니다. 삶의 근본인 인륜을 버리라고 하는 신은 악마가 아닐까요. 머릿속에서 온갖 의심과 회의와 분노와 억울함과 끔찍한 고통이 갈가리 마음을 찢습니다. 내가 좇았던 신은 결코 그런 신이 아니었다. 이건 환상이다. 악마의 농간이다. 이럴 수는 없다.
“아브라함은 시험을 받을 때에 믿음으로 이삭을 드렸으니, 그는 약속들을 받은 자로되 그 외아들을 드렸느니라. 그에게 이미 말씀하시기를 네 자손이라 칭할 자는 이삭으로 말미암으리라 하였으니, 그가 하나님이 능히 이삭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실 줄로 생각한지라, 비유컨대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도로 받은 것이니라”(히11:17~19)
신약성서 히브리서를 근거로 생각해 보면, 아브라함은 이삭을 통해 하나님이 믿음의 자손들을 이어가시겠다고 하셨으니, 지금은 비록 이삭을 죽이라 하시지만 결국 이삭을 다시 살리실 것이라고 믿었다는 것입니다. 키르케고어의 표현으로 하자면, “신앙의 도약”을 통해서 아브라함은 비로소 윤리적 단계에서 종교적 단계로 도약하게 됩니다.
키르케고어에 따르면, 이 윤리적 단계에서 종교적 단계로의 상승은 오직 신앙의 도약을 통해서만 가능합니다. 모든 인간은 절망 가운데 있고, 그 절망 속에 사는 인간이 심미적 단계와 윤리적 단계를 넘어 종교적 단계로 갈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바로 신앙의 도약을 통해서입니다. 윤리적 단계에 있는 인간은 인간의 한계성과 유한성을 깨닫습니다. 그래서 절망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그 절망을 끌어안고서 진정한 자신이 되려 합니다. 절망할 수밖에 없는 인간실존을 받아들입니다. 절망을 외면하지 않고, 도망치지 않고, 절망 속에서 절망과 함께 자기 삶의 의미를 찾으려 합니다. 얼핏 굉장히 멋지고 진취적으로 보이지만, 키르케고어는 이 단계를 반항과 저항의 단계로 봅니다. 반항하고 저항하고 있는 한, 인간은 절대로 종교적 실존으로 도약하지 못합니다. 결코 인간의 본래성에 다다르지 못합니다. 절망 가운데 있는 인간, 깊은 불안을 품고 있는 인간은 절대로 해결책을 찾을 수가 없습니다. 아무리 윤리적으로 바르게 살고, 진취적 기상과 불굴의 의지를 가지고 절망을 끌어안고 사는 것이 근사해보일지라도 그 삶에 진정한 안식을 찾을 수 없고, 온전한 자신이 될 수 없습니다.
오직 깊은 절망과 불안 속에 있는 자신의 모습을 완전히 받아들이고, 인간의 그 어떤 가능성도 온전히 포기할 때, 오직 신을 향한 절대적 신앙에 의지할 때, 모든 의심을 넘어 신에게 모든 것을 맡길 때, 그 순간 신앙의 도약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비로소 우리는 종교적 실존에 이르게 됩니다. “불가능의 가능성”에 다다릅니다.
▣ 나가는 말
오늘도 여전히 의심과 불안 속에 있는 저와 여러분 모두에게 이 불가능의 가능성의 세계가 열리기를 기도합니다. 위대한 극작가 윌리엄 셰익스피어의 비극 『리어왕』에 이런 구절이 나옵니다.
리어왕은 자신이 사랑하는 세 딸에게 자신을 얼마나 사랑하는지 말해달라고 요구합니다. 그러자 첫째 딸 고네릴과 둘째 딸 리건은 마음에도 없는 아부를 섞어서 세상 그 어떤 것보다 아버지를 사랑한다고 이야기하지요. 그러나 아버지를 진심으로 사랑하는 딸 코델리아는 아버지의 딸로써 마땅히 사랑한다고 대답합니다.
이런 담백한 대답에 실망한 리어왕은 딸에게 화를 내지요. ‘사랑을 보이라’는 왕의 요구와 ‘사랑은 보일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딸의 대답. 이것을 이해하지 못한 리어왕의 불행이 시작되지요. 사랑하는 딸 코딜리아의 “없습니다”라는 답에 리어왕은 “없음은 없음만 낳느니라”고 답합니다. 리어왕의 불행은 바로 여기서 비롯됩니다. "없음" 속에 있는 "있음"을 보지 못하는 인간의 비극이지요.
키르케고어의 종교적 실존, 신앙적으로 표현해보자면, ‘구원’ ‘하나님의 나라’는 신비에 감싸져 있습니다. “道可道 非常道”(도가도 비상도). ‘도를 도라고 부르는 순간, 이미 그것은 도가 아니다’ 노자의 『도덕경』의 핵심 개념이지요. 진정한 진리, 진정도 도는 언어에 담을 수 없는 것입니다. 정말로 소중하거나 장엄한 것은 어떤 말로도 표현하기 어려울 때가 있습니다. 오히려 말로 표현하는 순간 그 아름다움이 사라져버리는 경험 같은 것이지요.
사랑하는 딸에게 ‘너의 사랑을 보이라’는 리어의 요구. 사랑은 표현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코딜리아의 항변. ‘표현할 수 없는 진리는 진리가 아니다’라는 주장. ‘표현될 수 없는 그 무엇이 있다’라는 호소. 우리는 온통 보이는 세계에 살고 있습니다. 보이지 않는 것은 쉽게 무시되기 십상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살고 있는 또 하나의 세계. 눈에 보이지 않는 세계가 있습니다. 보이는 세계, 표현되는 세계, 합리의 세계… 보이지 않는 세계, 표현되지 않는 세계, 신비의 세계… 어느 한쪽만이 전부라고 믿는 순간 우리는 비극에 빠지고 맙니다. 하나의 세계를 잃어버리고 맙니다. 눈에 보이는 세계 속에서, 보이지 않는 세계를 볼 수 있는 눈을 갖기를 기도합니다. 신앙의 도약을 통해 불가능의 가능성의 세계를 경험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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