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엇을 기다리는가?
시편70:1-5
구약의 시편은 가장 엄선된 단어를 통해서 자신의 실존적인 상태를 하나님에게 고백하고 있다는 점에서 오늘 우리가 소중하게 여겨야할 말씀입니다. 물론 다른 성서 말씀도 마찬가지입니다만 시편은 시(詩)라는 고유한 특색을 갖고 있기 때문에 더욱 그렇습니다. 요즘도 소설보다는 시 읽기가 훨씬 어렵다는 사실과 비슷합니다. 물론 여기서 어렵다는 말은 매우 모호한 표현이기는 합니다. 시 읽기가 어려운 게 아니라 그걸 읽어낼만한 삶의 깊이가 없다는 말이 맞겠지요. 어떤 점에서 시 읽기는 삶 읽기와 격을 같이 하는 것 같습니다. (이런 문제에 관심이 있는 분들은 하이덱거가 훨더린의 시에 대해서 해설한 책을 읽어보십시오.). 그렇지만 좋은 시를 이해했을 때는 소설이나 수필에 비해서 훨씬 많은 감동을 받을 수 있을 겁니다. 어쨌든지 오늘 우리는 고대 이스라엘 어느 시인이 쓴 시를 우리에게 열려지는 것만큼 들여다 볼 생각입니다.
이 시인은 "하나님이여, 속히 나를 건지소서. 여호와여, 속히 나를 도우소서."라는 말로 이 시를 시작합니다. 시편에는 이런 형식의 기도와 호소가 흔합니다. 69편의 시도 역시 그렇게 호소하고 있으며, 약간 형식을 달리 하지만 여러 곳에 이런 도움의 기도가 등장합니다. 도움을 청한다는 것은 이 사람의 처지가 매우 어렵다는 말인데, 그의 처지가 어떠했는지 우리가 정확하게 알 수는 없습니다만, 다음과 같은 2절 말씀을 통해서 대충 그 분위기를 읽어낼 수 있습니다.
1) 내 영혼을 찾는 자: 이 시인의 가장 진실하고 가장 깊은 정신적 세계를 위협하고 있던 사람이 주변에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저 물질적인 손해를 끼치거나 말다툼을 하는 정도가 아니라 자신의 궁극적 존재 근거인 하나님을 신뢰하지 못하게 하는 그 어떤 사람이나 사건이나 사상이 그를 둘러 싸고 있었습니다.
2) 나의 상함을 기뻐하는 자: 자기가 파멸되는 것을 기뻐하는 자가 자기 주변에 있다는 것은 참으로 견디기 힘든 일입니다. 이런 게 바로 인간 세상이기도 합니다.
3) 아하, 아하, 하는 자: 약간 표현을 달리한 것입니다만 이 시인이 이렇게 표현하고 있는 사람들은 앞의 사람들과 같은 종류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옆에서 남의 불행을 그럴듯한 말로 합리화 하고 단정해버립니다. 그러면 그렇지, 자기가 별 수 있나! 하나님의 저주를 받아서 그렇게 되었구나!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들입니다. 이런 상황 속에 놓여 있던 이 시인은 하나님을 향해서 "나를 건지소서. 나를 도우소서."라는 기도를 드리지 않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별로 이런 기도를 드리지 않습니다. 실제로 우리 에게는 이런 시편기자의 위기나 불안이 없기 때문인지 모릅니다. 오히려 친구들이 많을 수 있습니다. 즐거운 일이 넘쳐날 수도 있습니다. 온통 우리의 주변이 먹고 마시고 노는, 즐거운 일들이 깔려 있는 마당에 "나를 건지소서"라고 기도할 사람이 있을 리 만무합니다. 기껏해야 장사가 잘 안 된다거나 자식들이 말썽을 피운다거나, 사랑의 배신을 당했다는 아쉬움은 있지만 어떤 절대적인 것을 필요로 하지는 않습니다. 흡사 왕의 초청을 받았지만 소를 사거나 밭을 사거나 결혼 문제 때문에 응하지 않은 사람들처럼(눅14장) 말입니다.
우리가 오늘 그 어떤 구체적인 시련과 고통을 당하지 않는다는 것은 감사해야할 일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런 기도를 드리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하면 큰 착각이 아닐까요? 왜냐하면 우리가 행복하다고 느끼는 그런 조건들의 이면에 놓여 있는 더 근본적인 궁핍과 불안과 무상성을, 그런 위기를 알아채지 못하는 것이기 때문에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그냥 모르고 살 뿐입니다. 대개의 사람들은 거의 무의식적으로 내일 죽을지 모르니까 먹고 마시며 즐겁게 살면 된다고 생각합니다. 이미 사도 바울도 그런 징후를 2천년 전에 보았습니다(고전15:32). 왜 그렇게 살까요?
우리는 오늘의 이런 복지 사회, 그런 국가, 공부, 직장, 가정생활과 같은 일들이 잘되기만 하면 만사가 형통이라고 생각합니다. 설교자들도 기껏해야 복지 향상이라는 눈높이에 서 있을 뿐입니다. 그런데 역설적이지만, 이런 요소들이 바로 우리의 원수가 되는 경우가 참으로 많습니다. 우리의 영혼을 찾는 자는 누구입니까? 우리의 영혼으로 하여금 하나님을 바르게 믿지 못하고 단지 피조적인 것을 의지하게 만드는 세력이 무엇입니까? 잘 먹고 잘 살자는 환상이, "부자 되세요."라는 유혹이 우리로 하여금 "나를 건지소서"라는 기도를 드리지 못하게 하는 악한 힘이 아닐까요?
정말 오늘 우리에게 필요한 일은 "나를 건지소서. 나를 도우소서."라는 기도를 드리는 일이며, 그런 절박한 정신을 갖는 것입니다. 그게 그냥은 되지 않습니다. 절박한 사람만이 하나님에게 이런 기도를 드립니다. 우리의 삶에 숨어 들어온 무감각과 무의미를 눈여겨볼 수 있는 사람은 하나님께 이런 기도를 드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시편 기자는 하나님에게 자기의 영혼을 찾는 자가, 나의 상함을 기뻐하는 자가, 아하, 하는 자가 무안을 당하며 물러가게 해 달라도 기도합니다(2후). 아마 자신이 견딜 수 없는 상태이기 때문에 이 시련을 극복할 수 있도록 악한 세력을 제거해 달라고 기도한 것이겠지요. 이것은 당연한 기도입니다. 그 누가 자기의 시련을 달게 받으려고 할 것이며, 그것을 물리쳐 달라고 기도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우리도 이런 기도를 드릴 수 있으며, 당연히 그래야만 합니다.
그러나 정작 문제는 위에서 잠시 언급했듯이 누가, 또는 무엇이 우리의 영혼을 찾는 자인지 구별하지 못하고 살아간다는 데에 있습니다. 어쩌면 우리는 매일 소꿉놀이를 하면서 정작 필요한 가족과의 대화나 독서를 게을리 하는 어린 아이처럼 이 세상을 살아가는지도 모릅니다. 이렇게 사는 게 최선이라고 생각하면서 가능한대로 다른 사람과의 경쟁에서 우월한 위치에 서는 것만을 목표로 해서 말입니다. 우리가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그것 자체가 우리의 원수는 아닐까요? 사실 종교생활은 우리에게서 제거해야할 악한 세력이 무엇인지 아주 예민하게 통찰하고 구별할 수 있는 영적 혜안의 준비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기독교인이라고 하더라도 실제로 사는 것은 그 반대라는 게 비극입니다. 영적인 세계가 무뎌지고 일상성에만 매달려 사는 것 말입니다. 우리의 가장 내면적인 세계를 무뎌지게 만드는 요소가 무언인지 깨달을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시편 기자는 그렇게 견디기 힘든 상황에 놓여 있었지만 그 어려움을 제거하는 것으로만 끝나지 않고 더 근본적으로 "주를 인하여 기뻐한다"는 사실에 마음을 두었습니다(4). 도대체가 지금 온갖 어려움과 원수들로 인해서 정신 차릴 수 없는 상태인데, 기뻐한다는 말이 타당한 합니까? 이 시인은 한 걸음 더 나아가서 "하나님을 광대하시다" 하게 하소서라고 기도합니다. 이 사람은 인생의 핵심을 꿰뚫어보고 있습니다. 무엇이 우리의 삶의 핵심인지 정수를 이해하고 있다는 말이다. 자기 주변에 많은 문제들과 원수들이 진을 치고 있었지만 이런 현안에만 매달려 있는 게 아니라 시야를 다른 곳으로 돌렸습니다. 기쁨의 근원을 찾았습니다. 주님으로 인해서 기뻐하는 데에 인생의 해답이, 시련을 극복할 수 있는 열쇠가 있다고 말입니다. 인간의 삶에는 언제 어디서도 문제가 없을 수 없으며, 또한 그 문제가 해결되었다고 하더라도 또 다시 힘든 문제들이 발생하기 마련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생명의 근원이신 하나님을 바라볼 수 있고 그의 뜻을 확실하게 깨달을 수만 있다면 기쁘게 살아갈 수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생명의 신비입니다. 이런 기쁨을 아는 사람만이 시련을 진정으로 극복해 나갈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안다는 것은 생명의 신비와 능력을 안다는 말인데, 우리는 지금 대개 그것을 놓치고 살아갑니다. 그냥 무언가를 무작정 할 뿐이지 무엇 때문에 하는지 생각하지 않습니다. 즉 삶 자체에 대해서는 생각하지 않고, 무엇을 전공할 것인가, 어떤 집을 살 것인가, 자식들 교육은 어떻게 시킬 것인가만을 생각합니다. 그러다가 늙고 죽겠지요. 예컨대 자녀교육 문제만 해도 그렇습니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평생동안 자식 교육에만 온갖 정성과 노력을 기울입니다. 그런데 자녀들이 무엇에 가치를 두고 살게 할 것인가, 어떻게 삶 자체를 생각하면서 살게할 것인가에 대해서는 별로 생각하지 않습니다. 조금 곁길로 나가는 말이지만, 독일의 경우에 어린이들과 청소년의 교육문제는 국가에서 완전히 책임을 집니다. 제가 경험한바로는 자식 교육 때문에 고민하는 독일 부모들은 하나도 없습니다. 그 아이의 능력에 따라서 국가에서 모든 것을 떠맡습니다. 물론 부모들이 세금을 많이 내기는 하지만, 우리나라처럼 생사를 걸듯 자식 교육에 매달리지 않고 살 수 있다는 것은 좋은 사회 체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 그냥 사는 것과 삶 자체를 생각하며 사는 것은 같을 수도 있고 다를 수도 있습니다. 돈 벌고 학교 다니고 취미 생활하는 것은 삶의 수단이고 과정일 뿐이고 생명은 그런 과정 안에 깃들어 있는 그 무엇입니다. 그것을 놓치지 말아야 합니다. 인간은 돈을 적게 벌어도 행복할 수 있고, 반대로 많이 벌어도 불행할 수 있게 됩니다. 그 돈은 수단에 불과하니까 말입니다. 심지어는 돈보다 더 중요한 인간의 육체도 역시 그렇습니다. 장애가 불편하기는 하지만 그것 자체만으로는 불행하지는 않습니다. 그 형편을 받아들이고 삶 자체에 집중할 수 있으면 그는 얼마든지 행복한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이미 오래 전에 장자는 그런 말을 많이 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모두 가난해도 좋고, 장애자가 되거나 중병에 걸려도 좋다는 말은 아닙니다. 다만 그런 것, 혹은 삶의 좋은 조건들이 우리의 인생을 결정하는 요소가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이 절대조건이라는 사실을 강조하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시편 기자는 "하나님은 광대하시다 하게 하소서"라고 기도합니다. 그 분 말고는 이 세상에 광대한 분이 없다는 뜻입니다. 이런 자세를 가질 때만, 그것이 진리이기 때문에, 늘 우리 곁을 그림자처럼 따라다니는 시련과 고난을 극복할 수 있습니다.
오늘 시편 기자의 기도는 이렇게 끝납니다. "여호와여, 지체치 마소서."(5). 얼마나 간절한 기도인가요? 얼마나 신앙적인 기도인가요? 이 시편 기자는 그저 자기의 힘든 인생을 활짝 펼칠 날만 기다리는 마음으로 원수를 물리쳐 달라고 기도한 것은 아닙니다. 위에서 보았듯이 그는 그것보다 기쁨에 대해서 기도했습니다. 하나님의 광대함을 깨닫게 해달라고 기도했습니다. 이제 지체치 말라고 마무리를 하고 있습니다. 이 사람의 기도는 구약으로 끝나는 게 아니라 사실상 신약의 기도로 이어지는 셈입니다. "주께서 임하시느니라."(고전16:22). 그 날을 기다리는 신앙적인 기도입니다. 예수의 재림을 기다리는 우리 기독교인들은 이런 심정으로 구약을 읽습니다. 이 땅에서의 복지 국가를 최종 목표로 삼는 게 아니라 그것과 전혀 다른 새 하늘과 새 땅을 기다리며 살아가는 우리들은 이런 자세로 기도를 드리며, 성서를 읽습니다. 왜냐하면 이런 기다림이 아니고서는 그 어디에서도 참된 구원이 임하지 않는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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