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10월 6일 예배영상 https://www.youtube.com/live/vCznuY6OiPg?si=Afvnh06FyojmBUVZ
▣ 들어가는 말
- 없음은 없음만 낳느니라
윌리엄 셰익스피어의 『리어왕』에는 이런 장면이 나옵니다. 리어왕이 가장 사랑하는 막내딸 코딜리아에게 묻습니다. “언니들 것보다 더 비옥한 삼분 일을 위해 네가 할 수 있는 말은? 말하라.” “없습니다. 전하.” “없습니다?” “없습니다” 이 대답에 화가 난 리어왕은 “없음은 없음만 낳느니라.”(Nothing will come of nothing) 리어왕의 이 말은 아첨하지 않는다면(없음), 결국 아무것도 얻지 못할 것이라는 뜻입니다. “전 전하를 도리에 따라서 사랑하고 있을 뿐, 더도 덜도 아닙니다.”
“그래도 전하께 간청컨대, 의도 없이 말로만 기름 치는 기술이 제게 없기 때문에 - 좋은 뜻이 있으면 전 말에 앞서 실천하니까요 - 이건 밝혀주십시오.
전하의 은총을 제게서 앗아간 건
사악한 오점이나 살인 혹은 추잡함, 부정한 행위나 천한 짓이 아니라
그것이 없기에 제가 더욱 부자인, 늘 조르는 눈빛과
못 가져서 전하의 사랑을 잃었지만 안 가져서 저는 기쁜, 혀라는 사실을.”
코딜리아는 아버지 리어왕의 요구를 외면합니다. 사랑은 실천이지 말에 있지 않다는 뜻을 굽히지 않습니다. 말로만 하는 사랑은 사랑이 아니라는 것이지요. 그리고 그녀의 말처럼 그녀는 사랑하는 딸로서 아버지를 진실하게 사랑하는 길을 가지요. 그런데 리어왕의 선언이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 비수처럼 꽂힙니다. 네가 원하는 것을 얻으려면 거짓이라도, 없는 것이라도 있는 것처럼 보이라는 말입니다. 그것이 이 세상을 잘사는 지혜인 것처럼 말이지요.
▣ 타자의 얼굴에서 하나님의 얼굴을 보다
- 여인의 얼굴
오늘 성경 본문에는 너무나 불행한 한 여인이 등장합니다. ‘선지자의 제자들’이란 표현으로 볼 때, 선지자를 따르며 가르침을 받고 선지자가 되려는 사람들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일종의 신학교가 있었던 것이지요. 그 신학생 가운데 한 사람이 자신의 꿈도 펼쳐보지 못한 채 목숨을 잃고 맙니다. 자신을 던져 시대를 깨울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하는 자가 되겠다던, 비록 가난하고 고단한 삶이지만, 자신을 통해 하나님의 말씀이 세상에 선포될 수 있다면 행복하겠다고 여기던 사람입니다.
그러던 어느 날 남편은 시름시름 앓더니 기도한 보람도 없이 죽고 말았습니다.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았습니다. 도대체 하나님은 무엇을 하고 계시는 것일까요? 그분이 살아 계신다면 어찌 이런 일이 일어날 수가 있을까요. 이제껏 어떻게 살아왔는데… 오로지 하나님 한 분만을 바라보며 그렇게 살아왔는데… 돌아온 것은 깊은 절망과 지독스러운 가난뿐입니다. 하루아침에 그동안 꿈꾸어 왔던 모든 희망이 물거품이 되고 말았습니다. 마음에 품었던 하나님 나라, 말씀의 대언자, 사람들에게 진정한 희망을 선사하며 살겠다는 다짐… 이 모든 것들이 한순간에 무너져 내리고 맙니다. 얼마나 허망하고 얼마나 비통했을까요. 대체 신의 뜻은 무엇일까요.
설상가상(雪上加霜)이라고 했던가요? 남편이 죽은 지 얼마 되지도 않아 빚쟁이들이 찾아옵니다. 몽둥이에 얻어맞은 듯. 아직 상처도 아물지 않았는데. 어찌 살아야 할지, 무엇을 해야 하는지. 아무것도 모르는 채 그저 멍하니 하늘만 쳐다보고 있는 불쌍한 여인에게, 마치 죽기를 기다리는 까마귀 떼와 같이 욕망에 물든 추악한 인간들이 찾아옵니다. 막무가내로 빚을 갚으라고 윽박지릅니다. 이제 남편도 죽었으니 더는 기다려줄 수도 없고, 빚을 받아낼 방법도 없으니, 두 아들을 내놓으라 합니다. 이게 도대체 무슨 날벼락 같은 소리입니까. 이제 그에게 남은 것은 이 두 아들밖에 없는데, 그의 삶의 의미, 희망이라고는 아이들밖에 없는데… 대체 어쩌라는 말입니까? 더 살아야 할 이유를 찾을 수 없습니다.
그 순간 그녀는 하나님을 생각합니다. 남편과 함께 그리도 꿈꾸며 매달리던 살아 계시다 믿었던, 역사의 주관자라고 믿었던 그 하나님을 생각합니다. 그리고 남편의 스승이었던 엘리사를 찾아갑니다. 지친 몸과 마음을 이끌고 찾아와 엘리사에게 그간의 사정을 이야기합니다. 당신도 아시지 않냐고, 신랑과 자신이 얼마나 신실하게 하나님을 섬겼는지, 오직 하나님만 바라보고 살았는데 이제는 어떻게 해야겠냐고, 마지막 남은 두 아들마저 종으로 팔려가게 생겼다고… 그녀는 엘리사에게 하소연합니다. 눈물을 흘립니다.
- 타자의 얼굴
20세기 중요한 철학자 중 하나인 에마뉘엘 레비나스(Emmanuel Levinas, 1906–1995)는 인간 존재의 본질을 “타자(the Other)”와의 관계에서 파악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타자는 나와 다른 존재로서, 나의 이해나 인식에 의해 완전히 파악될 수 없는 존재입니다. 그는 우리가 타자와 대면할 때, 그 타자의 얼굴에서 윤리적 책임을 느끼게 된다고 말합니다. 이 책임은 타자를 도구화하거나 나의 욕망에 따라 조작하는 것이 아닌, 타자를 존중하고 그에게 응답해야 하는 절대적인 의무라는 것이지요. 레비나스의 주요 개념 중 하나는 “얼굴(face)”인데, 그는 타자의 얼굴이 윤리적 명령을 담고 있으며, 이를 통해 우리는 타자의 존재와 고통에 대한 책임감을 느끼게 된다고 봅니다. 얼굴은 단순한 신체적 이미지가 아닌, 나에게 다가와 나를 윤리적으로 호출하는 타자의 존재를 상징하는 것입니다. 레비나스는 이러한 타자와의 관계를 “윤리적 관계”라고 하며, 이는 인간 존재의 가장 근본적인 경험이라고 주장합니다.
본문의 과부는 남편을 잃었고, 이제는 두 아들마저 잃을 위기에 처해 있습니다. 그녀의 고통은 사회적, 경제적, 감정적으로 깊습니다. 그녀는 절박함 가운데 엘리사에게 도움을 청합니다. 이는 레비나스의 관점으로 보면, 우리가 타자의 고통을 마주할 때 갖는 윤리적 책임을 보여주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타자는 우리에게 손을 내밀며, 우리는 그 손을 외면할 수 없습니다. 레비나스가 말하는 “타자의 얼굴”은 그 고통을 통해 우리에게 무언가를 요구합니다.
엘리사는 과부의 절망에 무관심하지 않습니다. 그녀의 얼굴에서 하나님의 얼굴을 봅니다. 도움을 구하는 그녀 눈빛에서 하나님의 거룩한 요청을 봅니다. 사명을 인식합니다. 그는 곧바로 그녀의 문제에 귀를 기울이고, 그 고통에 대한 응답으로 행동을 시작합니다. 우리는 타자의 얼굴을 외면하지 않고 마주 대할 때, 그의 아픔과 고통에 대해 응답할 때, 비로소 신의 얼굴을 보는 것 아닐까요. 그것이 우리의 신앙이고, 성숙이고 사명이 아닐까요.
▣ 유한과 무한
- 무엇을 가졌는가?
엘리사는 대뜸 너희 집에 무엇이 있느냐고, 가진 것이 무엇이냐고 묻습니다. 집에 가진 것이 있었다면 당신을 찾아왔겠습니까? 무엇을 숨겨놓고서 이렇게 하소연하고 있겠습니까? 솔직하게 이야기합니다. 아무것도 없다고 가진 것이 없다고 털어봐야 먼지밖에 안 난다고… 집구석에 있는 것이라곤 기름 한 병밖에 없다고 말입니다.
그러자 엘리사는 아랑곳하지 않고 이웃집에 가서 그릇들을 빌려오라고 말합니다. 가능한 한 많이 빌려오라고 합니다. 그리고는 그 그릇들에 기름을 부으라고 합니다. 너무나 황당한 말씀을 합니다. 도무지 뭘 하란 말인지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그릇들은 왜 빌리라는 것인지, 한 병밖에 없는 기름을 어떻게 그 많은 그릇에 부으라는 것인지, 차라리 빚이나 갚을 수 있도록 돈을 좀 주시던가, 먹을 곡식이라도 주실 일이지 도무지 뜬금없는 소리만 늘어놓습니다. 허탈한 마음으로 집으로 돌아옵니다.
아무튼, 빌릴 수 있을 만큼의 그릇을 빌려서는 안에 들어가 문을 닫습니다. 그리고 집안에 유일하게 남아 있는 기름병을 가져다가 그릇 하나에 붓기 시작합니다. 어떤 일이 일어날지 궁금해하면서 말입니다. 그런데 이게 어찌 된 일입니까? 그름은 그치지 않고 계속해서 나옵니다. 기름병보다 훨씬 큰 그릇에 기름이 가득하도록 기름은 그치지 않습니다. 그릇에 기름이 가득 차고 다른 그릇에 기름을 붓자 또 역시 기름은 쉬지 않고 나옵니다. 너무 신이 납니다. 하나님께 감사가 흘러나옵니다. 눈물이 납니다. 두 아들과 어머니는 너무나 신이 나서 기름을 붓고 또 붓습니다. 그러다 아들이 말합니다. 어머니, 그릇이 다 떨어졌어요. 더 빌려올까요? 그러자 기름은 곧 멈추고 병에는 기름이 남아 있지 않습니다.
맨 먼저 그녀는 어린 두 아들을 데리고 엘리사에게 갑니다. 그에게 무릎을 꿇고 감사의 눈물을 흘립니다.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상세히 고합니다. 엘리사는 빙그레 웃으며 말합니다. 기름을 팔아서 빚도 갚고 두 아들과 행복하게 사시오. 하나님을 신뢰하시오.
- 유한에서 무한으로
영화 『설국열차』에서 송강호가 연기한 남궁민수라고 하는 인물이 등장합니다. 그가 하는 역할은 하층민들이 열차의 앞쪽 칸으로 나아갈 수 있도록 문을 열어주는 일입니다. 안내자인 셈이지요. 그런데 그가 열차의 마지막 문 앞에 왔을 때, 하층민들의 지도자 커티스에게 묻습니다. “내가 정말 하고 싶은 게 무엇인지 알아? 문을 여는 거야. 이런 문이 아니라, 이쪽 문을 여는거야. 이 바깥으로 나가는 문들 말이야.” “그래서 다들 얼어 죽자고? 완전히 미쳤군.”
여기서 남궁민수는 예언자입니다. 모든 사람이 열차의 앞으로, 앞쪽에 있는 칸만을 바라보고 나아갈 때, 오직 그만이 앞칸이 아니라 열차의 바깥을 봅니다. 오로지 경쟁하고 이기고 성공을 위해 달려갈 때, 성공하고 이기는 방법이 아니라, 그런 사회 구조를 무너뜨릴 발칙한 꿈을 꾸는 사람입니다.
가난한 과부가 본 것은 “아무것도 없나이다”입니다. 그녀는 없음을 봅니다. 저는 없습니다. 능력이 없습니다. 가난합니다. 힘이 없습니다. 반면, 엘리사는 “네 집에 무엇이 있는지 말하라” ‘있음’을 보지요. 그 없음 속에 감추어져 있는 있음. 유한 속에 숨어 있는 무한을 봅니다. 신을 믿는다는 것은 바로 이런 것 아닐까요. 세상 그 어디에도 보이지 않고 찾아지지 않은 신, ‘무’ 속에서 ‘유’ 있음을 믿는 것 말입니다. 여인의 절망적 상황에서도 희망을 보는 것 말입니다.
- 기름이 흘러 넘치다
기름이 의미하는 것은 무엇일까요. 기름은 상징적으로 생명, 자원, 에너지, 존재 등을 나타낼 수 있습니다. 이는 인간의 삶에서 결핍된 상태, 그것이 생명이든, 영혼이든, 심리적이든, 존재론적이든 그런 결핍의 상태에서 풍족한 상태로의 전환을 의미합니다. 이 사건은 절망과 공허 속에서도 존재의 근원인 하나님이 생명과 존재를 창조해낼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 아닐까요. 그것이 창조주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 아닐까요. 과부는 아무것도 없다고 생각하지만, 실제로는 하나의 가능성(기름)이 존재하고 있으며, 이는 행동과 신뢰를 통해 실현됩니다. 이것이 감추어져 있는 진리, 존재, 구원이 드러나는 방식이 아닐까요. 우리의 삶 속에서 숨어 있는, 놀라운 구원, 하나님 나라가 실현되는 과정이 아닐까요.
▣ 나가는 말
- 타인의 얼굴에서 무엇을 보는가.
우리는 어디에서 신을 찾고 경험하고 있을까요. 우리가 신의 얼굴을 볼 수 있는 곳은 다름 아닌 타인의 얼굴 아닐까요. “너는 이방 나그네를 압제하지 말며 그들을 학대하지 말라. 너희도 애굽 땅에서 나그네였음이라. 너는 과부나 고아를 해롭게 하지 말라. 네가 만일 그들을 해롭게 하므로 그들이 내게 부르짖으면 내가 반드시 그 부르짖음을 들으리라. 나의 노가 맹렬하므로 내가 칼로 너희를 죽이리니 너희의 아내는 과부가 되고 너희 자녀는 고아가 되리라”(출22:21-24) 성경은 분명 가난한 자와 이 세계의 약자들의 부르짖음 속에 신의 마음이 있다고 선언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고통받고 있는 타인의 얼굴에서 하나님의 눈물을 보지 못한다면, 어디에서도 그분의 얼굴을 보지 못할지도 모릅니다.
- ‘없음’ 속에서 ‘있음’을 보는가
신앙생활을 한다는 것, 그리스도의 길을 따른다는 것은, 나의 부족함 속에서도 감추어져 있는 가능성을 보는 것, 믿는 것 아닐까요. 자신의 나약함과 마음속에 가득한 추악함과 비겁함을 보면서도 절망하거나 좌절하거나 도피하지 않고, 그곳에서조차 아름다움과 용기와 사랑과 고귀함이 담겨 있음을 보아야 하지 않을까요. 유한 속에, 없음 속에 갇혀 있는 것이야말로 불신 아닐까요. 그 무한한 신의 은총, 신의 사랑으로 자신과 세계를 볼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 그릇이 차기 전까지 멈추지 말라
“모든 이웃에게 그릇을 빌리라” 그릇을 빌리는 것은 잔치를 준비하는 것입니다. 혼자만의 욕망 충족이 아닙니다. 모두가 함께 기뻐하고 함께 행복한 잔치를 준비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삶의 지향입니다. 유한 속에 무한을 품는 방식입니다. 서로의 얼굴에서 신의 얼굴을 보며, 서로에게 기꺼이 손을 내밀어, 초라하고 보잘것없는 것에서 가득 차고 흘러넘치는 풍요를 가져오는 삶. 유한 속에서 무한을 살아내는 방식. 잔치의 삶. 그 세계 그 삶이 우리 앞에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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