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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현절

무죄한 피 흘림에 대해

 

무죄한 피 흘림에 대해

(신 19:1-13)


사람과 다른 동물의 비슷한 점은 서로 싸운다는 겁니다. 동물들의 싸움은 주로 먹이와 짝짓기에 집중된다면 사람의 싸움은 훨씬 광범위하게 일어납니다. 사람이 동물보다 더 자주, 더 심하게 싸웁니다. 일례로 동물은 배가 부르면 다른 동물을 공격하지 않지만 사람은 배가 불러도 여전히 다른 사람을 공격합니다. 아이들도 싸우고, 어른도 싸웁니다. 지식의 유무에 상관없이, 종교의 유무나, 종교 차이에 상관없이 싸웁니다. 에릭 프롬의 <인간은 파괴적인 동물인가?>에 따르면 문명이 발달한 곳일수록 인간의 파괴적 경향이 더 심하게 나타난다고 합니다.  

이런 싸움 중의 하나는 원수를 갚는 데서 일어납니다. 이건 보통의 치고 박는 정도의 싸움이 아니라 사람을 죽이는 싸움입니다. 자기 가족이나 동족이 다른 이들에게 살해당했을 때 똑같은 방법으로 앙갚음을 합니다. 제가 어렸을 때 유행하던 무협영화의 소재는, 예컨대 <돌아온 외팔이> 같은 영화의 소재는 몽땅 이런 원수 갚기입니다. 아마존 원시림에 사는 원주민들에게도 이런 관행이 있었다고 합니다. 9.11테러와 미국의 아프가니스탄 공격과 이라크 전쟁, 그리고 지금 벌어지고 있는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의 전쟁도 이와 다를 게 하나도 없습니다. 원수 갚기의 악순환은 직접 피해를 당한 사람들만이 아니라 가해자까지 포함해서 모든 이들의 삶을 근본적으로 파괴합니다. 밖으로 드러나는 문제는 말할 것도 없지만 내면적인 문제도 심각합니다. 증오, 분노, 불안, 절망에 사로잡히는 삶을 생각해보십시오. 그것은 육체적인 죽음 못지않을 정도로 사람들의 삶을 파괴합니다. 


도피성

이런 일들은 고대 이스라엘에서도 일어났습니다. 그들은 원수 갚기의 악순환을 끊기 위해서 독특한 제도를 도입했습니다. 그것이 바로 도피성입니다. 물론 이와 비슷한 제도는 근동이나 다른 나라에도 있었으며, 지금은 국가의 법이 이를 대신합니다. 오늘 본문인 신 19: 1-13절에는 그 제도를 자세하게 설명합니다. 모세를 통해서 주신 하나님의 명령이라는 형식으로 선포된 그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이스라엘은 앞으로 가나안 땅에 정착하게 될 경우에 전국을 세 지역으로 나눠 그 중심에 각각 특별한 성읍을 세워야 했습니다. ‘모든 길은 로마로’라는 말이 있듯이 지역의 길들은 모두 그 성읍에 쉽게 갈 수 있도록 뚫려야 합니다. 땅이 더 커지면 이런 성읍을 세 개나 더 만들라고 했습니다. 이 성읍은 살인자의 도피성입니다. 살인을 저지른 사람이 이 성읍으로 피하면 일단 생명을 건질 수 있었습니다. 물론 도피성으로 피한다고 해서 모든 살인자가 생명을 부지할 수 있는 건 아닙니다. 실수로 살인한 경우에만 해당됩니다. 본문은 구체적인 예를 들어서 이를 설명합니다. 이웃이 함께 나무를 하러 갔다가 도끼날이 빠져서 상대방을 죽이게 되는 경우가 그렇습니다. 이런 사람은 가능한 빨리 도피성으로 피신해야 합니다. 반면에 의도적으로 살인한 사람은 도피성에 피해도 살아남을 수 없었습니다. 성읍 장로들이 이 사람을 끌어내서 원수 갚을 사람들에게 넘겨주어야 했습니다.

이스라엘의 도피성 제도는 현실적이고 합리적으로 보입니다. 사고로 사람을 죽였다고 하더라도 빨리 도피성으로 피해야 한다는 것이 그렇습니다. 고의가 아니니까 죽은 사람의 가족에게 잘 설명하면 괜찮겠지, 하다가는 피의 보복을 당할 수 있습니다. 생각해보십시오. 가족이 죽었을 경우에 눈에 보이는 것이 없습니다. 죽은 사람의 가족은 앞뒤 사정을 가릴 것 없이 가해자를 무조건 죽이겠다고 달려들 것입니다. 본문 신 19:6절은 이런 사람의 심리를 정확하게 묘사했습니다. “그 피를 보복하는 자의 마음이 복수심에 불타서 살인자를 뒤쫓는데 그 가는 길이 멀면 그를 따라 잡아 죽일까 하노라.” 도피성까지의 거리를 가능한 짧게 만들라는 것입니다.

이 도피성 제도가 이스라엘 역사에서 언제 어느 지역에서 실행되었는지는 학자들도 정확하게 말하지 못합니다. 아마 한시적으로, 지엽적으로 실행되었을 수도 있지만 광범위하게 지속적으로 실행되지는 못했을 겁니다. 그 이유는 도피성에 피한 사람의 살인 행위가 고의인지 실수인지를 판단하기가 쉽지 않았다는 데에 있었겠지요. 실제는 고의적이었지만 겉으로만 실수인 것처럼 위장할 수도 있었구요. 그걸 판단해야 할 성읍의 장로들이 자기와 가까운 사람의 편을 들 수도 있었습니다.

보다 더 큰 이유는 이 제도가 권력자의 손에서 무기력해질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요즘도 그렇지 않습니까? 법은 힘 있는 사람들의 자기 편리에 따라서 적용될 때가 많습니다. 똑같은 사안인데도 어떤 때는 법에 따라서, 또 어떤 때는 정치에 따라서, 속된 표현으로 엿장수 마음대로 달라진다는 것입니다. 그 예를 우리는 이스라엘의 역사를 피로 물들였던 전제 군주 솔로몬에게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권력 투쟁에서 솔로몬이 승리한 후 배다른 형 아도니야는 솔로몬의 두려워하여 제단 뿔을 붙잡고 버텼습니다.(왕상 1:51) 그 당시에는 제단 뿔이 바로 도피성 역할을 했습니다. 아도니야는 그걸로 겨우 목숨을 건졌지만, 후에 다른 문제를 빌미로 솔로몬에게 죽습니다. 아도니야를 지지하던 장군 요압도 제단 뿔을 잡았습니다. 솔로몬은 브나야 장군을 시켜서 제단 뿔을 잡고 있던 요압을 현장에서 죽였습니다. 아무리 좋은 법과 제도라고 하더라도 독재 권력자들 앞에서는 쉽게 무용지물이 되기도 합니다.

그렇지만 신명기 기자가 선포하는 도피성의 중심 사상은 여전히 유효합니다. 우리는 거기서 하나님이 누구인지, 그 하나님이 사람들에게 무엇을 요구하는지 배울 수 있습니다. 신명기 기자는 도피성의 설립과 그 기능에 대해서 설명한 다음에 결론적으로 이렇게 말합니다.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기업으로 주시는 땅에서 무죄한 피를 흘리지 말라.”(10, 13절) 도피성의 핵심은 무죄한 피를 흘리지 말라는 것입니다.  


피는 생명이다

무죄한 피를 흘리지 말라는 명령은 그런 일이 흔히 일어날 수 있다는 사실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인류 역사는 이런 피 흘림의 역사라고 해도 좋습니다. 개인 사이에도 그렇고, 종족 사이에도 그렇고, 국가 사이에도 그렇습니다. 앞에서 저는 인간이 왜 싸우는가, 하고 어리석은 질문을 드렸습니다. 싸움이 인간의 본질이니 어떻게 싸우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다시 어리석은 질문을 드립니다. 인간이 왜 무죄한 피를 흘립니까? 너무 비관적인 생각인지 모르지만 어쩌면 무죄한 피를 흘리는 것이 인간의 본질일지 모릅니다. 오죽했으면 창세기 기자는 형 카인이 동생 아벨을 들판에서 돌로 쳐 죽인 참사를 창세기 앞부분에 보도했겠습니까? 카인이 아벨을 죽일 특별한 이유는 없었습니다. 하나님이 아벨의 제사만 받고 자신의 제사는 받지 않았다는 것으로 안색이 변할 정도로 분해했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 따질 일이지 동생을 죽입니까? 이게 바로 우리의 현실입니다.

우리는 지난주에 끔직한 소식을 또 접했습니다. 군포에서 여대생을 살해한 강 아무개 씨에 대한 소식입니다. 그는 2006년 12월부터 2008년 12월까지 2년간 경기서남부지역에서 실종된 부녀자 일곱 명을 모두 살해해 암매장한 것으로 드러났습니다. 그에 의해서 살해당한 여성들은 그와 원수진 일이 없었습니다. 정말 무죄한 피 흘림이었습니다.

이런 일들은 독재자들과 사회 부적응자들을 통해서만 일어나는 게 아닙니다. 우리 주변에서 일상적으로 일어납니다. 이주노동자들의 월급을 제대로 주지 않거나 그들이 사고를 당했을 때 적절한 치료를 해주지 않는 행위는 무죄한 피를 흘린 행위입니다. 여러분이 잘 알고 있듯이 한국에 돈 벌러 왔다가 신세를 망친 이주노동자들의 숫자가 적지 않습니다. 그들의 눈물을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뉴타운을 위한 재개발 지역에서 강제로 쫓겨나는 세입자들의 눈물도 기억해야 합니다. 그런 눈물은 피와 똑같습니다. 초국가 기업 중에서도 동남아 어린이의 노동력에 기대서 돈벌이를 하는 기업들이 있다고 합니다. 비인간적인 노동을 통해서라도 먹고 살아야 할 가난한 사람들의 약점을 이용하는 행위는 무죄한 피 흘림입니다.   

성서가 무죄한 피를 흘리지 말라고 명령하는 이유는 피가 곧 생명이며, 그 생명은 하나님의 것이기 때문입니다. 무죄한 피를 흘리는 것은 곧 하나님의 것을 파괴하는 행위입니다. 이 세상에 하나님의 것이 아닌 것은 없습니다. 그러나 그 중에서도 사람의 생명은 특별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할 때 사람을 특별하게 만드셨습니다. 하나님의 형상(창 1:27)과 생기(창 2:7)가 그것입니다. 무죄한 피를 흘린다는 것은 하나님의 형상을 파괴하는 것이며, 그의 생기를 말살하는 것입니다. 무죄한 이의 눈물을 흘리게 한다는 것은 곧 하나님의 창조사건을 부정하는 행위입니다. 이런 점에서 사회적 책임이 있는 사람들의 행동은 우주와 맞먹는 무게가 있습니다. 자칫하면 무죄한 피를 흘리고, 무죄한 눈물을 흘리게 할 수 있으니까요.   

이런 말은 사람들에게 잘 통하지 않습니다. 그런 말을 공자 왈 정도로 받아들입니다. 그 이유는 사람이 자기를 변명하고 합리화하는 데 아주 익숙하기 때문입니다. 앞에서 말씀드린 카인의 예를 보십시오. 하나님이 카인에게 일찌감치 주의를 주었습니다. 죄가 너를 이용하려고 하는데, 너는 죄를 다스려야 한다고 말입니다. 카인은 그 말을 못 알아들었는지, 아니면 분노의 노예가 되었는지 아벨을 들판에서 쳐 죽입니다. 하나님이 그에게 “네 아우 아벨이 어디 있느냐?” 하고 물었습니다. 카인의 대답은 이렇습니다. “내가 알지 못하나이다. 내가 내 아우를 지키는 자니이까?”(창 4:9) 사건의 내막을 모르는 사람이 이 말을 들었다면 그럴 수 있겠다, 하고 생각할 겁니다. 아무리 형이라고 하지만 동생의 모든 걸 책임지라는 건 심한 게 아니냐 하고 말입니다.

창세기 기자의 지적은 사람의 본성에 대한 정확한 진술입니다. 자기가 저지른 일을 입에 침도 바르지 않고 모른 척 합니다. 지난 용산 참사에서 여섯의 생사람이 죽었는데도 책임을 지겠다는 사람이 하나도 없습니다. 법적 책임은 둘째 치고 정치적, 도의적 책임을 지겠다는 말도 들리지 않습니다. 내가 그들을 지키는 자인가, 하는 변명만 난무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카인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네 아우의 핏소리가 땅에서부터 내게 호소하느니라.”(창 4:10) 그리고 이렇게 심판하십니다. 아우의 피를 받았으니 땅에서 저주를 받을 것이라고 말입니다. 내용은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땅을 갈아도 별 소득이 없다는 것이며, 다른 하나는 땅에서 방랑하면 살게 된다는 것입니다. 창세기 기자는 아담과 이브의 실낙원 사건을 기록한 뒤에 즉시 이 카인 이야기를 기록했습니다. 두 사건은 똑같은 이야기입니다. 전자는 하나님의 명령을 어긴 것이며, 후자는 하나님의 형상을 파괴한 것입니다. 전자의 결과로 땅이 저주를 받았으며, 후자의 결과로 사람이 땅의 저주를 받았습니다. 모두 생명의 훼손입니다. 이것은 무죄한 피를 흘리고 눈물을 흘린 인류가 감당해야 할 삶의 질고이고 시련입니다.  


무죄한 예수 그리스도의 피 흘림 

우리는 무죄한 피 흘림의 역사 한 가운데 서 있는 분을 알고 있습니다. 우리가 그리스도로 믿는 예수님입니다. 그는 죄 없이 죄인으로 죽었습니다. 그의 죽음에는 예루살렘 성전의 제사장들을 비롯한 여러 종교 지도자들, 로마의 정치권력, 그리고 그들에게 쉽게 세뇌당한 민중들이 연루되어 있습니다. 사도행전 기자는 이렇게 전합니다. “너희가 거룩하고 의로운 이를 거부하고 도리어 살인한 사람을 놓아 주기를 구하여 생명의 주를 죽였도다.”(행 3:14,15a)

예수에게 일어난 무죄한 피 흘림의 역사에서 우리도 예외가 아닙니다. 우리는 물론 그렇게 난폭하거나 파렴치하게 사는 사람들이 아닐지 모릅니다. 가능한 대로 도덕적으로 살려고 애를 쓰는 사람들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근본적인 차원에서 우리도 역시 다른 이들의 무죄한 피를 흘리는 사람들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기억하십시오. 친구를 향해서 ‘라가’, 즉 이 놈 하고 욕을 한다면 이미 살인을 한 거나 진배가 없다고 했습니다. 바라바를 살려주고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외친 민중들의 함성이 바로 우리의 목소리가 아닐는지요. 이런 점에서 본다면 우리 자신과 인류 역사는 절망적입니다. 우리는 도대체 생명과는 관계없는 일만, 아니 생명을 파괴하는 일에만 정신을 팔고 있으니 말입니다.  

절망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은 우리가 예상하지 못한 방식으로 생명을 구원하셨습니다. 역설적으로, 무죄한 피가 구원의 길이 되었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처형이 인류 구원의 유일한 길이 되었습니다.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이를 우리를 대신하여 죄로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그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고후 5:21) 하나님은 십자가에서 죄 없이 피를 흘린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셨습니다. 사람의 머리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고, 사람의 능력으로는 도저히 이룰 수 없는 한 사건이 일어난 것입니다. 죄 없이 죄를 뒤집어쓰고 죽은 예수님의 부활은 예수님을 향한 그 피 흘림의 역사 자체를 말소시켰습니다. 죽음과 저주에서 생명과 은총으로 바뀐 것입니다. 

여러분 중에서는 이 사건이 절실하게 다가오지 않는 분들도 있을 겁니다. 한 유대 남자의 피 흘림이 어떻게 인류가 구원받는 유일한 길이 될 수 있느냐, 그가 부활했다는 사실을 어떻게 믿을 수 있느냐, 하는 근본적인 질문이 가능합니다. 이런 근본적인 질문을 넘어선다고 해도, 그것이 오늘 내 삶과 무슨 상관이 있냐, 하는 현실적인 질문이 따라옵니다. 이에 대해서 제가 딱 부러지는 대답을 드릴 수는 없습니다. 여러분이 생명의 영인 성령과의 소통을 통해서 얻어야 합니다. 다만 이렇게 방향만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두 가지입니다.

첫째는 무죄한 피 흘림의 역사에 맞서는 것입니다. 그 현장이 어디인지는 여러분이 찾아보십시오. 둘째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그 피 흘림의 역사가 이미 극복되었다는 사실을 우리의 전체 실존으로 온전히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앞의 것은 믿음의 실천이고, 뒤의 것은 믿음의 근거입니다. 앞의 것은 고난이고, 뒤의 것은 기쁨입니다. 주님, 저희를 불쌍히 여기시어 용기를 주소서. 아멘! (2009.2.1.)

신명기 19: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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