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는 자는 성전이다
(엡 2:11-22)
예수님의 십자가 처형과 부활, 승천 이후에 교회가 시작했다고 볼 때 교회의 역사는 대략 2천년이 되었습니다. 까마득한 세월입니다. 우리 고대역사로 치자면 초기 삼국시대입니다. 2천 년 전의 사람들이 살아가던 모습과 오늘 우리의 모습은 상상할 수 없을 만큼 다릅니다. 그러나 밥을 먹고 배설하고 공기로 호흡하고 아기를 낳고 살아가는 건 똑같습니다. 2천 년 전 기독교인들의 신앙생활과 오늘 우리와도 비교가 불가능할 정도로 다르지만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신앙의 본질에서는 다를 게 하나도 없습니다. 우리가 성서를 읽고 공부하고, 설교를 들어야 할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성서가 말하는 신앙의 본질을 놓치지 않기 위해서입니다.
엡 2:21절은 아주 특이한 단어를 통해서 신앙의 본질을, 기독교인의 정체성을 전합니다. 우리가 ‘성전’이 되어간다는 것입니다. 22절에서는 하나님이 거하실 ‘처소’가 되기 위해서 지어져간다고도 했습니다. 이 말의 의미를 모두 알고 계시겠지요. 우리가 예수님을 잘 믿으면 예수님이 우리 안에 거하시는 것이고, 그것이 바로 하나님이 거하시는 성전이 된다는 뜻입니다. 옳습니다. 그것은 정답입니다. 그러나 정답을 아는 것으로 모든 문제가 끝나는 게 아닙니다. 정답보다도 그 정답에 이르는 길이 더 중요합니다. 그 길을 모르면 우리는 정답을 모르는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또 그 길을 알아야만 정답의 깊이로 들어갈 수 있습니다. 수학 공식을 외우는 것보다 그 공식에 이르는 길을 아는 게 중요한 것과 비슷합니다. 단도직입적으로 이런 질문부터 시작하는 게 좋겠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이 거하실 성전이라는 확신이 있나요? 광신자가 아니라면 이 질문에 좀 망설여질 겁니다. 그런 같기도 하고, 아닌 거 같기도 할 겁니다. 거룩한 성전이라고 하는 우리에게는 거룩하지 못한 일들이 많이 일어나니까요. 우리는 에베소를 쓴 바울에게서 대답을 듣고 싶습니다. 그는 왜 에베소 교우들을 성전이라고, 더 정확하게는 성전이 되어간다고 말했을까요?
‘밖’의 사람들
바울이 말하는 성전은 원래 유대인들의 예루살렘 성전과 직간접적으로 연관됩니다. 역사적으로 볼 때 예루살렘 성전은 다윗이 준비하고 솔로몬이 완성한 유대교의 건축물입니다. 솔로몬이 지은 성전은 기원전 587년에 바벨론 제국의 느브갓네살에 의해서 파괴되었고, 그 뒤로 몇 번에 걸쳐서 파괴와 개축과 증축이 반복되었습니다. 유대인들은 유월절이나 오순절 등 중요한 절기 때마다 예루살렘 성전에 와서 제사에 참여했습니다. 다른 나라에 살고 있는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에게도 예루살렘 성전은 성지 순례의 가장 중요한 장소였습니다. 모든 유대인들에게 예루살렘 성전은 하나님이 거하시는 가장 거룩한 장소였습니다.
거룩한 장소였던 예루살렘 성전은 구역이 철저하게 구분되었습니다. 이방인의 뜰, 여인의 뜰, 유대인의 뜰, 제사장의 뜰이 그것입니다. 이방인은 이방인의 뜰에만 머물 수 있을 뿐이지 더 안으로는 들어가지 못합니다. 가장 깊은 곳에는 가장 거룩한 곳이라는 뜻의 지성소가 있습니다. 거기에는 십계명을 새긴 돌판과 아론의 싹난 지팡이가 들어있는 법궤가 모셔져 있습니다. 이처럼 성전에는 거룩한 것과 거룩하지 못한 것이 완전히 구별되어야만 했습니다. 하나님에게 드려지는 제물도 거룩한 것이어야만 했습니다. 예루살렘 성전 공동체 정신이 유대인들의 모든 삶을 규정했습니다. 이들이 볼 때 이방인들은 하나님에게서 완전히 배척받아야 할 사람들이었습니다. 어떤 랍비의 문헌에는 하나님이 지옥의 불쏘시개로 사용하기 위해서 이방인들을 만드셨다는 말이 있을 정도입니다.
에베소에 살던 사람들도 이방인입니다. 11절은 그들의 영적인 형편을 정확하게 표현합니다. 이들은 할례를 받은 유대인들에게서 무(無)할례자들이라는 말을 들어야만 했습니다. 그 말은 모멸적인 의미입니다. 일제 치하에서 일본에서 공부하거나 돈을 벌던 조선의 재일 교포들이 일본 사람들에게서 듣던 ‘조센징’이라는 말과 비슷합니다. 본문은 12절에서 그 의미를 더 자세하게 설명합니다. 에베소 사람들은 그리스도 ‘밖’에 있었으며, 이스라엘 나라 ‘밖’의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이방인은 이방인의 뜰에서 한 발자국도 안으로 들어갈 수 없는 성전 전통과 똑같은 대접을 받은 것입니다. 그들은 ‘밖’의 사람들이었습니다. 구원에서 소외된 사람들이었습니다.
인간 삶과 종교적인 삶에서 소외가 일어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또는 어떻게 하면 이 소외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까요? 개인의 도덕성이 문제라고 생각하는 분들이 있을 겁니다. 유대인들이 이방인을 밖으로 내몬 것은 도덕성이 없기 때문이라고 말입니다. 아닙니다. 그들은 아주 도덕적인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철저하게 율법을 지켰습니다. 가난한 사람과 과부와 나그네를 잘 돌보아주었습니다. 유대인들의 이런 전통은 이 세계 어느 민족보다 탁월했습니다. 개인적으로 도덕적인 사람들이었지만 그들은 이방인들을 한 형제로 받아들일 수 없었습니다. 왜 그럴까요? 자신들은 그들과 다르다는 생각에서 벗어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저 사람들은 종자가 달라 하는 방식의 생각이 그것입니다. 유대인들은 자신들과 이방인들을 완전히 다른 품종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렇다면 제도를 바꾸면 소외가 일어나지 않을까요? 이방인을 유대인의 뜰에까지, 유대인을 제사장의 뜰에까지 들어오게 하거나, 할례 유무로 아무런 차별을 받지 않도록 제도를 개혁하는 것 말입니다. 그것이 하나의 방법이 될 수는 있겠지요. 그러나 그 제도만으로 인간 소외가 해결되리라는 건 너무 낭만적인 생각입니다. 제도도 역시 도덕성과 비슷한 한계를 지닙니다. 남의 나라 예를 들어서 미안하지만, 어쩔 수 없군요. 지금 미국 제도는 인종차별을 두지 않습니다. 오버마라는 흑인이 대통령이 될 정도라고 한다면 모든 인종 문제가 완전히 해결된 듯이 보입니다. 그러나 백인들의 의식에 유색인종에 대한 차별이 없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도덕성과 제도의 개혁이 무의미하다는 말씀이 아닙니다. 근원적인 변화 없이는, 본질적인 변화 없이는, 존재론적인 변화 없이는 사람들을 ‘밖’에 세우는 일이, 즉 소외시키는 일이 해결될 수 없다는 말씀입니다. 유대인과 이방인 사이의 구별, 차별, 소외의 극복은 본질적인 변화에서만 가능했습니다. 그것이 구체적으로 무엇일까요?
담을 허물다
바울은 예수님이 자기 몸으로 유대인과 이방인 사이에 막힌 담이 허물었다고 말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율법을 폐기함으로써 유대인과 이방인을 하나가 되게 하셨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이 무슨 이유로 십자가에 처형당했는지를 생각해보십시오. 예수님을 빌라로 총독에게 고발한 이들은 율법의 최고 집행기관인 산헤드린 의원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신성을 모독했다고 판단했습니다. 그들은 광신자들을 몰고 다니는 사이비 이단의 교주를 간단하게 처리해서 율법의 권위를 잘 지켜냈다고 생각했겠지요.
여기까지만 보면 예수님은 유대인과 이방인 사이의 담을 허물지 못한 겁니다. 그는 하나님 나라를 철저하게 신뢰했다가 철저하게 실패한 사람입니다. 그러나 기독교 신앙은 바로 이 실패의 자리에서 시작되었습니다. 율법의 일방적인 승리라고 보이는 십자가 사건에서 전혀 새로운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입니다. 하나님은 예수님을 죽은 자 가운데서 일으켜 세웠습니다. 이 부활은 죽음을 넘어서는 생명 사건입니다. 죽음을 넘어서는 생명 사건이라는 말을 그냥 그러려니 하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이것만이 참된 생명입니다. 이것만이 참된 승리입니다. 세상의 모든 정치, 종교 권력을 손에 넣었다고 하더라도 죽음 너머의 생명을 얻지 못했다면 그것은 궁극적으로 실패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부활로 인해서 이제 구원과 생명을 얻는 길이 완전히 달라졌습니다. 그 이전에는 율법을 실천하는 길이었습니다. 종교적 업적을 내는 길이었습니다. 다른 사람과 비교해서 더 거룩하게 사는 길이었습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자신들이 이방인들보다 얼마나 더 거룩한지를 증명하려고 부단히 애를 썼습니다. 거기서 끝나는 게 아니라 그런 방식으로 율법이 없는 이방인들을 소외시켰습니다. 결국 그들은 예수님을 율법의 이름으로 십자가에 처형했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그런 길을 모두 상대화합니다. 예수님의 부활 이후로 유대인과 이방인의 차이는 무의미해졌습니다. 할례 유무도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법조문으로 된 계명의 율법”은 폐기되었습니다.(엡 2:15) 구원의 근본이 달라졌습니다. 더 이상 인종 차별도, 남녀 차별도, 문명인과 야만인의 차별도, 성직과 세속직의 차별도 불가능해졌습니다. 이것보다 더 근본적이고, 더 본질적이고, 더 존재론적인 변화는 없습니다. 그것만이 소외를 극복할 수 있는 진정한 화평의 길입니다.
유대인들은 이런 길을 받아들일 수 없었습니다. 자신들이 절대적인 것으로 여겼던 할례와 율법이 폐기되는 걸 용납하기 어려웠습니다. 당시에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 중에서도 할례와 율법을 포기하지 않은 이들이 많을 정도로 유대인들에게 할례와 율법은 절대적이었습니다. 그들이 할례와 율법을 포기하지 못한 이유는 다른 사람과 구별하는 것으로 삶을 확인하려는 사람의 본성과 연관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다른 이들과 구별된다는 사실을 강조하고 싶어 합니다. 그걸 인정받지 못하면 견디지 못합니다. 예를 들어보지요. 수능 점수가 평균 1등급인 학생과 5등급인 학생이 아무런 차별 없이 아무 학교나 원하는 대로 들어갈 수 있다고 생각해보십시오. 1등급인 학생과 부모들은 억울하다고 아우성일 겁니다. 또한 평생 교회에 잘 다닌 사람과 다니지 않은 사람이 모두 똑같이 구원을 받는다고 생각해보십시오. 평생 교회에 다닌 사람은 하나님을 향해서 왜 이렇게 불공평하냐고 투덜댈 겁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이 율법을 폐기했다는 사실을 유대인이 받아들이지 못한 것은 당연합니다. 그들은 지금도 여전히 예루살렘 성전만을 거룩하게 생각하고, 유대인들만 하나님의 선민이라고 생각합니다. 지금도 그런 실정인데, 2천 년 전 초기 기독교 당시에는 어땠을지 상상이 갑니다.
새로운 성전
유대인과 이방인 사이에 놓인 담이 허물어지고, 율법이 폐기되었다면 이제 성전에 대한 개념도 완전히 달라져야만 합니다. 당연한 일입니다. 예루살렘 한 가운데 자리하고 있는 건축물인 성전은 율법의 폐기와 더불어 의미를 잃었습니다. 바울은 다음과 같이 과감하게 선포합니다. 에베소 교우들이 바로 성전이라고 말입니다. 보이는 건물이 아니라 믿는 사람들의 모임이 바로 성전이라는 뜻입니다. 우리말 성경에서 교회로 번역된 헬라어 ‘에클레시아’는 믿는 사람들의 모임을 가리킵니다. 원래는 정치적인 용어였습니다. 영주가 소집한 모임에 사람들이 모이는 것을 가리킵니다. 이 에클레시아가 신약적인 의미에서의 성전, 즉 교회입니다.
예루살렘 성전과 믿는 자들의 모임인 교회 사이에는 큰 차이가 있습니다. 전자에는 거룩한 공간이 정해져 있지만 후자에는 그것이 없습니다. 전자는 성속구별이 뚜렷하지만 후자에는 그것이 없습니다. 유대인들에게 성전은 예루살렘 한 곳에만 있습니다. 그러나 기독교인들에게 교회는 곳곳에 있습니다. 왜냐하면 믿는 사람들의 모임 자체가 교회이기 때문입니다.
한국 기독교인들에게 이런 차이가 별 것 아닌 것처럼 보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우리는 신약성서와 2천년 기독교 신학의 역사가 말하는 에크레시아 개념보다는 오히려 예루살렘 성전의 개념이 더 친숙합니다. 모든 교회들이 교회당 건축에 매달리는 것도 이런 데에 연유합니다. 하나님이 거하실 거룩한 공간을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교회당에 나와서 기도해야만 기도의 응답이 더 잘 된다고도 믿습니다. 그런 탓인지 새벽에 수천 명, 수만 명이 모여서 기도합니다. 절기별로 행해지는 그런 종교행사가 한국교회의 트레이드마크로 자리 잡고 있습니다. 한국교회만의 특별한 현상입니다. 함께 모여 기도하는 것 자체가 잘못되었다는 뜻이 아닙니다. 교회를 유대인들의 성전 개념으로 받아들이는 오류에 대한 지적일 뿐입니다.
앞의 설교로 사도 바울이 전하는 성전의 의미가 분명해졌을까요? 보충되어야 할 대목이 있습니다. 그 내용은 세 가지입니다. 첫째, 21절에서 바울은 “주 안에서” 성전이 되어간다고 말합니다. 주는 바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는 ‘모퉁잇돌’입니다.(20b) 그는 성전의 주춧돌입니다. 그 위에 많은 돌들이 놓여야 합니다. 예수님 안에서 서로 연결되어야 합니다. 영적인 친교를 말합니다. 예수님 안에서 영적으로 친교를 나누는 사람들의 모임이 바로 교회입니다. 영적인 친교는 성만찬 공동체를 말합니다. 우리가 예수와 함께 죽고 함께 산다는 사실을 공유할 때만 영적인 친교가 가능합니다. 이런 영적인 친교 없이도 인간적으로 친하게 지낼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친교는 쉽게 허물어집니다. 인간은 상대방과의 차이를 그런 방식으로 극복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둘째, 22절에서 바울은 에베소 교우들이 ‘성령 안에서’ 하나님이 거하실 처소가 된다고 했습니다. 이건 신비로운 진술입니다. 성령 ‘안에서’라니, 이게 도대체 무슨 뜻인가요? 성령은 생명의 영이십니다. 가장 궁극적인 생명은 부활입니다. 부활의 영 안에서 믿는 자들의 모임인 교회는 하나님이 거하실 처소입니다.
셋째, 21절과 22절이 중요한 사실을 똑같이 지적하는 게 있습니다. 교회는 과정 중(독: Kirche im Werden, 영: church in becoming)에 있다는 것입니다. 성전이 되어가고, 함께 지어져 가고 있습니다. 무슨 말인가요? 교회는 아직 완성되지 못했습니다. 이 말은 교회가 뭔가 부족하다는 뜻이라기보다는 종말론적으로 열려 있다는 뜻입니다. 오히려 희망적입니다. 지금 우리의 이 모습이 이미 완성된 교회라고 한다면 얼마나 실망스러운 일일는지요.
여러분, 믿는 자들의 모임이 교회이며, 성전입니다. 우리는 지금 예수님을 모퉁잇돌로 하여 하나님이 거하실 처소가 되기 위해서 지어져가고 있습니다. 우리의 모임이 하나님의 존재방식입니다. 얼마나 놀라운 소식입니까? 얼마나 기대가 큰 소식입니까? 얼마나 신비롭습니까? 그리고 우리의 책임이 얼마나 무겁습니까? (2009.8.2.)
0개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