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음과 사랑
요일 3:16-24, 부활절 넷째 주일, 2018년 4월22일
16.그가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셨으니 우리가 이로써 사랑을 알고 우리도 형제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것이 마땅하니라 17.누가 이 세상의 재물을 가지고 형제의 궁핍함을 보고도 도와 줄 마음을 닫으면 하나님의 사랑이 어찌 그 속에 거하겠느냐 18.자녀들아 우리가 말과 혀로만 사랑하지 말고 행함과 진실함으로 하자 19.이로써 우리가 진리에 속한 줄을 알고 또 우리 마음을 주 앞에서 굳세게 하리니 20.이는 우리 마음이 혹 우리를 책망할 일이 있어도 하나님은 우리 마음보다 크시고 모든 것을 아시기 때문이라 21.사랑하는 자들아 만일 우리 마음이 우리를 책망할 것이 없으면 하나님 앞에서 담대함을 얻고 22.무엇이든지 구하는 바를 그에게서 받나니 이는 우리가 그의 계명을 지키고 그 앞에서 기뻐하시는 것을 행함이라 23.그의 계명은 이것이니 곧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믿고 그가 우리에게 주신 계명대로 서로 사랑할 것이니라 24.그의 계명을 지키는 자는 주 안에 거하고 주는 그의 안에 거하시나니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그가 우리 안에 거하시는 줄을 우리가 아느니라.
세속화 문제
21세기 대한민국에서 기독교인으로 산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교회 안에서만 기독교인이라는 정체성이 실감 나지 세상에서는 전혀 그렇지 못합니다. 여기서 가장 큰 이유는 세상의 세속화 현상입니다. 이 문제를 가장 적극적으로 분석한 책은 1965년에 발간된 하비 콕스의 『세속 도시』(the secular city)입니다. 현대인들은 더 이상 초월적인 저 세상을 찾지 않고 세속적인 이 세상에서 자신의 삶을 완성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전통적인 의미에서의 종교성이 사라졌습니다. 이 문제를 콕스보다 먼저 신학적인 주제로 삼은 인물은 본회퍼입니다. 그는 히틀러 제거 단체에 가입했다가 체포되어 2차 세계대전이 끝나기 직전에 사형 당했습니다. 감옥에서 몇 년 동안 쓴 편지를 훗날 그의 친구가 편집해서 『옥중서간』이라는 제목으로 출판했습니다. 원래 독일 원서 제목은 Widerstand und Urgebung(저항과 순종)입니다. 이 편지 묶음의 저변에 흐르는 본회퍼의 사상은 ‘비종교화’입니다. 현대인들이 더 이상 늙음, 죽음, 고독 등등이 두려워서 교회에 나오는 시대가 지났다는 겁니다. 그 비종교화는 곧 세속화입니다.
요즘 한국교회 신자들에게 두드러진 현상의 하나는 ‘가나안 교인’들이 대폭적으로 증가한다는 사실입니다. 교회에 나갈 필요를 별로 느끼지 않습니다. 기독교 신앙이 자신들에게 큰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의 영혼을 사로잡는 것은 이 세상에서의 역동적인 삶입니다. 돈벌이로부터 시작해서 전문적인 직업을 갖고 살아가는 것에서 궁극적인 의미를 찾습니다. 취미생활도 다양하게 합니다. 국내외 여행도 자주 다니고, 적극적으로 사회참여도 합니다. 이들의 눈에는 세상에서 즐길만한 일들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습니다. 세상에서 얻는 삶의 의미가 교회에서 얻는 것보다 더 가치가 있고, 또 여러 가지 일로 바쁘게 살아가기에 굳이 교회에 나갈 마음이 생기지 않습니다. 세속사회에서의 자기 성취를 통해서 행복하게 사는 것이 그들에게는 종교입니다. 이런 것만 본다면 한국교회의 미래는 어둡습니다.
저는 이런 현상에 대해서 별로 비관적으로 생각하지 않습니다. 기독교인의 숫자가 십분의 일로 줄어도 걱정할 일이 아닙니다. 두 가지 점에서 그렇습니다. 하나님이 현실 교회에 한정되어 일하시는 게 아니라 지구 전체와 우주 전체, 그리고 인류 역사 전체를 통해서 일하신다는 게 첫 번째 이유이고, 하나님은 많은 사람들이 아니라 오히려 소수의 ‘남은 자’를 통해서 일하신다는 게 둘째 이유입니다. 이 사실을 전제한다면 우리는 세속화로 인해서 벌어지는 교회의 어려움은 일단 하나님께 맡겨놓고 복음의 본질에 충실히 살면 됩니다. 여러분들은 복음에 충실하게 산다는 것이 무엇인지 알고 있으며, 그런 생각으로 세속화된 세상에 휘둘리지 않고 기독교인으로서의 정체성을 확실하게 유지한 채 담대하게 살고 있으신가요? 이 질문에 시원스레 ‘그렇다.’고 대답하기는 쉽지 않을 겁니다. 질문을 바꿔서 ‘그렇게 살고 싶으신가?’ 하면 아마 모두 ‘그렇다.’고 대답할 겁니다. 복음에 충실하게 살고 싶기는 하지만 그게 잘 안 되기에 대략 기독교인의 정체성을 어정쩡하게 유지하고 있으며, 그런 세월이 늘어나면서는 신앙의 상투성에 떨어집니다.
하나님의 계명은 생명이다
21세기 우리만이 아니라 2천 년 전 초기 기독교인들도 같은 문제를 안고 살았습니다. 기독교 신앙을 올곧게 유지하기가 어려웠습니다. 교회 지도자들은 그들을 책망하고 권면하고 격려하기 위해서 글을 썼습니다. 그것이 신약성경입니다. 오늘 설교 본문인 요일 3:16절 이하에서 요한은 어떻게 하면 기독교인으로서의 정체성을 놓치지 않을 수 있는지에 대해서 말합니다. 그는 우선 말로만 사랑하지 말고 ‘행함과 진실함’으로 사랑하자고 권면합니다. 진실하게 실천하자, 진리에 바로 서서 행동을 보이자는 겁니다. 그래야만 우리가 진리에, 즉 하나님에게 속한 사람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고, 하나님 앞에서 우리의 마음이 확실해지기 때문입니다(18,19절). 우리가 세상살이에서 다 경험하듯이 아무리 많은 것을 소유하거나 사회적인 지위를 얻는다고 해도 마음이 확실해질 수 없습니다. 요한은 21절에서도 ‘하나님 앞에서 담대해진다.’고 반복해서 말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마음보다 크시기 때문에 우리가 불안하게 생각하는 부분이 있다고 하더라도 하나님에게 속했다는 사실을 알면 흔들리지 않는다는 겁니다. 우리가 하나님에게 속했다는 사실을 어떻게 확신할 수 있을까요? 요한은 그 사실을 23절에서 이렇게 설명합니다.
그의 계명은 이것이니 곧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믿고 그가 우리에게 주신 계명대로 서로 사랑할 것이니라.
계명을 지키라는 말은 별로 기분 좋게 들리지 않습니다. 우리의 자유를 억압하는 것으로, 즉 복음주의와 반대되는 것으로 들립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계명은 비유적으로 테니스의 기본자세나 바둑의 정석과 같습니다. 테니스 초보자가 있다고 합시다. 자기의 운동신경만 믿고 기본 동작을 익히는 레슨을 받지 않고 무조건 게임만 한다면 실력이 늘지 않을 겁니다. 레슨을 받는 일은 지루하고 힘들지만 그런 과정을 잘 거치면 그 사람은 테니스의 세계로 들어갈 수 있습니다. 테니스 초보자만이 아니라 어느 정도 숙달된 사람도 기본기는 반복해서 훈련해야 합니다. 프로 선수들도 그런 연습을 게을리 하지 않습니다.
요한이 하나님의 계명을 언급하는 이유는 기독교인들의 삶을 간섭하거나 힘들게 하려는 게 아니라 생명 충만을, 더 정확하게는 생명 구원을 얻게 하려는 데에 있습니다. 그 생명 충만한 세계를 맛본 사람은 당연히 계명에 충실할 것이고, 그걸 맛보지 못했다 하더라도 그걸 기대하는 사람도 계명에 충실합니다.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닌 사람에게 하나님의 계명은 공허하고 귀찮은 것으로, 그래서 종교적인 잔소리처럼 들릴 겁니다. 요한에 따르면 계명은 두 가지입니다.
예수를 믿으라
첫째,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믿는 것입니다. 너무 당연한 말로 들리겠지요. 어머니가 고향집을 떠나는 자녀들에게 밥을 잘 챙겨 먹으라고 말하는 것과 비슷하게 들립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예수를 믿는다는 건 여러분들이 생각하듯이 그렇게 당연하지 않습니다. 밥 먹는 것과 비교해서 생각해보십시오. 사람들은 습관적으로 밥을 먹습니다. 맛있게 먹으려고 노력하기도 합니다. 요즘 품질 높은 먹을거리를 찾기도 합니다만 근본적으로는 먹는 행위에 집중하지 못합니다. 밥 먹는 것도 도(道)로 받아들여야만 그게 실제로 먹는 것입니다. 밥이 어떻게 그 자리까지 왔는지를 생각하고, 거기에 관련된 대상을 향해서 감사하는 마음도 갖고, 먹는 그 순간의 모든 것들을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합니다. 절간 승려들이 밥 먹듯이, 기독교인들이 성찬예식에 참여하듯이 먹을거리와 존재론적으로 일치되는 경험이 그것입니다. 이런 자세를 갖춘 사람은 자기 혼자 먹는 것에 머물지 않고 먹지 못하는 사람을 생각하게 됩니다. 이런 밥 먹기의 내공에 들어가려면 어떤 훈련이 필요합니다. 그런 내공이 있는 사람과 없는 사람이 경험하는 삶의 질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큽니다.
예수 믿는다는 것은 예수의 운명과 하나가 됨으로써 하나님이 선물로 주시는 구원에 참여하겠다는 삶의 태도입니다. 그런 삶의 태도는 한 번의 생각이나 결단으로 완성되는 게 아니기에 ‘나는 아직 내가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달려가노라.’(빌 3:13,14)고 고백한 바울처럼 구도정진을 게을리 하지 않습니다. 예수를 믿으려면 우선 예수가 누군지를 알아야 합니다. 본문에는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라는 세 가지 표현이 나옵니다. 이 세 가지 단어도 우리의 일상에서 자주 접하는 게 아니라 실질적인 무게로 받아들이기가 어렵습니다. 이것보다는 연봉과 인간관계와 취미활동과 건강 챙기기 등이 더 현실적으로 다가옵니다.
‘그 아들’은 하나님의 아들을 가리킵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말은 예수님이 생명의 원천이자 생명의 능력이라는 뜻입니다. 사람들은 생명, 또는 삶에 대해서 선입견을 갖고 대하기에 생명의 원천과 능력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여기서 말하는 선입견은 거칠게 말해서 잘 먹고 잘 사는 것을 가리킵니다. 여러 가지 방식으로 자신을 성취하는 것입니다. 이를 위해서 돈도 많이 벌어야 하고, 다른 사람에게 인정도 받으면서 멋진 인생을 펼쳐야 합니다. 화끈하고 열정적으로 사는 게 대단한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그래봤자 별 것 없습니다. 왜냐하면 자신을 성취하려는 모든 것들은 결국 무상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1년 반 전에 저와 아내는 안식월 여행을 한 달 동안 유럽으로 다녀왔습니다. 우리 교인들 중에서도 그런 여행을 다녀본 분들이 있을 겁니다. 그 순간이 즐거웠다고 해도 순식간에 다 사라지고, 그 순간 자체도 사실은 대단한 게 아닙니다. 원당에 머물러 있는 것과 유럽 여행 다닌 것 사이에 큰 차이가 없다는 뜻입니다. 제가 무슨 말씀을 드리는 건지 아실 겁니다. 우리 스스로 자신의 삶을 완성해보려는 모든 노력들은 성공하지 못합니다. 겉으로 그럴듯해 보일 뿐이지 피조물로서의 한계를 벗어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복음서를 비롯해서 신약성경은 예수님이 바로 생명이라고 말합니다. 우리가 생각하는 생명과 전혀 다른 차원의 생명을 가리킵니다. 이 생명은 우리가 애를 써서 만들어내는 게 아니라 하나님이 선물로 주시는 겁니다. 그러기에 그것은 복음입니다. 당시 사람들은 율법을 완성해야만 하나님의 생명을 얻는다고 생각했습니다. 율법은 우리가 율법적으로 죄인이라는 사실만 확인시킬 뿐이지 생명을 허락하지는 못합니다. 예수님은 율법을 뛰어넘는 하나님의 은총과 자비를 사람들에게 알려주었고, 그것에 일치해서 살았고, 자신의 운명에서 그것을 나타내셨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을 통해서 율법과는 전혀 다른 차원의 생명을, 즉 구원을 경험할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이 아니었다면 알지 못했을 그 생명을 알았기에 그들은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믿을 수 있었고, 주변 사람들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라고 담대하게 전했습니다. 요한도 그런 전통에 따라서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믿으라고 말하는 중입니다.
서로 사랑하라
둘째, 요한은 하나님의 두 번째 계명을 ‘서로 사랑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말이 사랑이지 이게 어디 쉽습니까? 사랑이 어려운 이유는 그것이 하나님의 존재방식이기 때문입니다. 요일 4:8b에서 요한은 이렇게 과감하게 말했습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니라.’ 우리가 세상살이에서 일반적으로 경험하는 사랑의 원리는 소위 ‘밀당’, 즉 ‘기브 앤 태이크’입니다. 특히 요즘 젊은이들은 계산상으로 조금이라도 손해가 나는 거 같으면 모든 관계를 외면합니다. 본문은 사랑에 관해서 두 가지로 설명합니다.
하나는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을 먼저 받았다는 사실입니다. 요일 3:16절이 이를 이렇게 말합니다. ‘그가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셨으니 우리가 이로써 사랑을 알고 우리도 형제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것이 마땅하니라.’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를 위해서 목숨을 버리셨다는 사실은 기독교 신앙의 가장 중요한 대목인데도 현대 기독교인들에게는 별로 실감 있게 다가오지 않습니다. 사랑의 능력을 경험하지 못합니다. 우리를 위해서 목숨을 버리셨다는 말은 다음과 같은 뜻입니다. 예수님은 종교적으로 자신의 생명을 완성하려는 유대의 율법과 정치적으로 완성하려는 로마의 실정법에 의해서 십자가에 처형당했습니다. 율법과 정치에서 소외된 사람들의 운명을 받아들인 것입니다. 당시에 주변 사람들은 예수님을 가장 불행한 인생으로 평가했습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예수님의 운명이야말로 생명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라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생명을 얻게 하는 것이야말로 가장 큰 사랑입니다. 그 사실을 아는 사람은 형제를 위해서 살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다른 하나는 사랑을 말로만(교언영색) 하는 게 아니라 행위로 하는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그 예를 17절이 이렇게 말합니다. ‘누가 이 세상의 재물을 가지고 형제의 궁핍함을 보고도 도와 줄 마음을 닫으면 하나님의 사랑이 어찌 그 속에 거하겠느냐.’ 이것도 그렇게 간단한 게 아닙니다. 가난한 형제를 어느 정도까지 도와야하는지를 수치화하기는 어렵습니다. 성경은 어떤 기준이 아니라 방향을 말합니다. 이런 방향성을 아는 사람은 자신의 삶에서 이 문제로 고민도 하고, 구체적인 대안도 찾아나섭니다. 두 가지 예를 들겠습니다. 하나는 교회 밖의 일입니다. 정규직 노동자로 사는 기독교인들이라면 함께 일하고 있는 비정규직 노동자들과 상생하기 위해서 연봉이 줄어드는 것을 기꺼이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다른 하나는 교회 안의 일입니다. 우리교회는 일 년 경상비의 40% 정도는 교회 밖의 일을 위해서 사용하려고 애를 쓰는 중입니다. 전체 재정이 소규모라서 아직 거리가 멉니다만, 말로만이 아니라 실천을 고민한다는 점에서는 괜찮은 모습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믿음과 사랑, 이 두 가지는 긴밀히 결탁되어 있습니다. 우리를 위해서 목숨을 버리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때만 사랑 실천의 진정성이 확보됩니다. 기독교인이 아니라고 하더라도 휴머니즘으로 사랑을 실천하는 사람들이 많을 걸 보면 기독교 믿음이 절대적인 게 아닌 게 아닌가, 하고 생각하는 분들이 있을 겁니다. 그들의 마음이 그렇게 흘러간다면 그건 좋은 일입니다. 그것도 그들에게 주신 하나님의 은총일지도 모릅니다. 그렇게 사는 사람들을 우리는 인정해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으로 사랑을 경험하고, 또 사랑을 실천하려는 용기를 얻은 사람들입니다. 우리가 알고 경험한 방식으로 최선을 다하면 됩니다. 그것으로 우리는 충분히 기쁘고 의미 충만한 인생을 살기 때문입니다. 이런 인생을 가리켜 요한은 ‘성령으로 말미암아 그가 우리 안에 거하신다.’고(요 3:24) 표현했습니다.
여러분은 실제로 그런 기쁨과 의미 충만한 삶에 대한 경험이 있습니까? 죄와 죽음으로부터의 해방을 통해서 얻어지는 참된 자유와 안식을 경험하셨습니까? 여기에 이르는 최선의 길은 오늘 본문이 말하는 믿음과 사랑의 세계로 점점 더 깊이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렇게 노력했는데도 잘 안 된다고는 말씀하지 마십시오. 우리가 과연 예수 그리스도를 실제로 영혼의 깊이에서 믿은 적이 한 번이라도 있었을까요? 서로 사랑한 적이 한 번이라도 있었을까요?
설교듣기: https://youtu.be/ld1H4kFEHEM
설교보기는 예배실황 아프리카티브이를 참조하세요. http://afreecatv.com/nfermata 이 영상은 한 달 뒤에 사라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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