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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강림절

믿음과 행함의 긴장관계

 

믿음과 행함의 긴장관계

(약 1:17-27)


예수 믿는 사람들이 믿음은 있지만 행함이 없다는 말을 자주 듣습니다. 기독교인들과 목사들이 사회에서 인정받지 못한다는 사실도 윤리적이고 도덕적인 행함이 없다는 사실과 연관됩니다. 세상에서 실제로 소금과 빛의 역할을 감당하지 못한다는 지적 앞에서 우리는 할 말이 별로 없습니다. 물론 우리가 사회의 판단에 일희일비 할 필요는 없습니다. 세상에서 무조건 인정받아야만 한다는 말씀도 아닙니다. 초기 기독교인들은 유대공동체와 로마제국에서 인정받지 못했습니다. 원칙적으로만 말한다면 기독교인들은 오히려 사회의 걸림돌로 살아야 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가 바로 시대 이념의 걸림돌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지금 한국교회가 비판받고 있는 대목은 이런 것과는 차원이 다릅니다. 믿음생활은 그럴듯하지만 거기에 상응하는 삶의 내용이 없다는 것입니다.

이런 문제는 굳이 교회 밖에서 따지고 들기 이전에 우리 공동체 안에서 경험되는 것입니다. 다른 건 접어두고 교회 일치만 해도 그렇습니다. 모든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는 하나의 지체입니다. 니케아-콘스탄티노플 신조에 따르면 교회는 그 보편성을 생명으로 합니다. 지금 한국교회는 분열의 극치를 향하고 있습니다. 같은 교파 안에서도 분열의 흔적은 곳곳에 자리하고 있습니다. 이런 문제들이 일반 신자들에게는 너무 거리가 먼 이야기로 들릴 겁니다. 지금 신앙생활을 성실하게 하는 것만도 힘에 부치는 마당에 교회의 일치와 보편성 문제를 생각할 겨를이 없겠지요. 일반 신자들에게 책임을 묻는 게 아닙니다. 예수를 그리스도로 동일하게 믿는 기독교인들이 분열을 아픔으로 느끼지 못한다면 믿음과 삶이 분열되어 있다는 증거이겠지요.

이런 문제가 멀게 느껴진다면 우리 자신을 돌아봅시다. 기독교인 개인들도 믿음과 삶의 불일치로 인해서 나름으로 고민합니다. 믿음은 어느 정도 깊이를 이룬 것 같지만 실제 삶에서는 그게 와 닿지 않습니다. 삶의 변화가 없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여기에는 개인의 차이가 많겠지요. 어떤 분은 믿음의 경륜에 따라서 삶의 변화도 따라옵니다. 정말 바람직한 믿음생활입니다. 어떤 분은 거꾸로 가기도 합니다. 신앙생활의 세월이 길수록 더 완고하고 일방적으로 변합니다. 대개는 어중간한 상태로 살아갈 겁니다.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닌 상태입니다. 믿음이 삶의 능력으로 나타나지 않습니다. 예수를 믿으나 믿지 않으나 아무런 차이가 없는 것처럼 살아갑니다. 도대체 내가 예수를 믿는 거야, 아니야 하고 자책합니다. 내게 뭐가 문제란 말인가, 믿음이 없어서 그런가, 하고 뭔가 불안해합니다.

여러분은 이런 문제가 없으신가요? 영적으로 늘 생명 충만감이 지속되고, 밖으로 그런 능력이 나타나고 있나요? 그렇다면 다행입니다. 그러나 엄밀하게 보면 이런 문제를 완전히 해결한 사람은 없습니다. 영성의 대가인 바울도 자신의 내면에 두 자아가 충돌하고 있다고 토로했는데, 우리 같은 평범한 사람들이야 오죽하겠습니까? 여기에 문제의식이 없는 이유는 다른 것에 한눈이 팔려서 이런 문제를 별로 진지하게 생각하지 않기 때문이겠지요.

신앙적으로 진지한 사람들은 이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애를 씁니다. 크게 봐서 두 가지 방법으로 대처합니다. 하나는 행함을 강조하는 율법주의이고, 다른 하나는 믿음을 강조하는 복음주의입니다. 전자의 특징은 주로 야고보에게서, 후자의 특징은 바울에게서 나타납니다. 어떤 쪽이 옳을까요? 단어로만 본다면, 특히 개신교회의 전통에 따른다면 율법주의는 틀렸고, 복음주의가 옳습니다. 그러나 야고보의 주장을 틀렸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이게 좀 까다로운 문제입니다. 서로 모순되는 말처럼 들립니다. 율법주의는 틀렸으나 야고보는 틀리지 않았다는 말이 성립되려면 야고보의 율법주의가 잘못된 율법주의가 아니라는 사실이 증명되어야 합니다. 복잡하게 들리시나요? 그렇지 않습니다. 이렇게 생각하시면 됩니다. 도대체 야고보가 말하는 행함에 대한 강조가 무슨 뜻인지를 알아야 합니다. 그 과정을 통해서 우리는 우리의 믿음과 삶이 왜 분열하는지, 그 긴장이 무엇인지, 기독교인다운 행함이 왜 없는지, 그런 문제가 어떻게 극복될 수 있는지를 알게 될 것입니다. 


말씀을 행하는 자

야고보는 오늘 본문에서 ‘행함’을 강조합니다. 암시적으로가 아니라 구체적으로 확실하게 강조합니다. 22절 말씀을 보십시오. “너희는 말씀을 행하는 자가 되고 듣기만 하여 자신을 속이는 자가 되지 말라.” 말씀을 듣기만 하는 사람은 자신을 속이는 자라고 합니다. 그런 사람은 거울로 자기 모습을 보는 것과 같아서 말씀을 곧 잊어버린다는 겁니다. 당시의 거울은 청동이었습니다. 희미합니다. 희미한 모습은 깊이 각인될 수 없습니다. 말씀을 행하지 않고 듣기만 하면 결국 말씀이 사라진다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약 2:17)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라는 야고보의 진술은 옳은가요? 마틴 루터의 ‘솔라 피데’ 개념을 아는 분이라고 한다면 야고보의 이 진술이 매우 불편하게 들릴 겁니다. 루터는 신자가 의로움을 얻는 길이 행위가 아니라 믿음에 있다고 말했습니다. 그걸 강조하여 ‘오직 믿음’이라고 했습니다. 신자가 의로움을 얻는 데에는 믿음과 더불어 행위가 필요하다는 당시 로마가톨릭교회의 가르침에 대한 강력한 비판입니다. 여기에는 두 가지 신학적인 이유가 있습니다. 하나는 인간의 행위가 상대적이라는 사실입니다. 이 문제는 여러분이 일상적으로 경험하는 것이기에 여기서 길게 설명하지 않겠습니다. 예컨대 여기 아들의 해외 유학을 보내려고 하는 사람이 같은 교회에 돈이 없어서 큰 수술을 받지 못하는 신자의 소식을 들었다고 합시다. 유학비용을 수술비용으로 내놓아야만 이 사람은 말씀대로 행하는 자일까요? 이와 비슷한 경우는 많습니다. 우리는 중간 어디쯤을 기준으로 살아가겠지요. 그런 행위들은 덕스럽기는 하지만 절대적이라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그걸 기준으로 하나님으로부터 의롭다는 인정을 받을 수는 없습니다. 다른 하나는 하나님의 칭의는 하나님의 배타적 사건이라는 사실입니다. 너는 내 딸이다, 내 아들이다, 할 때 딸과 아들의 행위를 보고 하는 게 아닌 것처럼 칭의는 하나님의 일방적인 행위입니다. 루터의 칭의론에 비쳐본다면 야고보의 행위 강조는 잘못입니다. 그래서 루터는 요한복음과 바울의 편지들, 즉 로마서와 갈라디아서와 에베소, 그리고 베드로전서를 야고보서와 비교하면서 야고보서를 가리켜 지푸라기와 같다고 혹평했습니다. 그것을 신약성서에서 제외시켜야 한다고까지 주장했습니다. 왜냐하면 거기에는 복음적인 요소가 전혀 내포되어 있지 않기 때문이라는 겁니다.

루터가 그렇게 말할만한 근거가 신약성서에 없지 않습니다. 야고보서와 로마서를 비교하면 근거가 적나라하게 나옵니다. 야고보는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라는 자신의 주장을 증명하기 위해서 아브라함을 예로 들었습니다. “우리 조상 아브라함이 그 아들 이삭을 제단에 바칠 때에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것이 아니냐?”(약 2:21) 물론 야고보가 행함만을 주장한 건 아닙니다. 믿음과 더불어 행함도 필요하다는 주장입니다. 바울도 로마서에서 아브라함을 예로 들었습니다. 그런데 야고보와는 정 반대의 논리를 위한 것입니다. “성경이 무엇을 말하느냐.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그것이 그에게 의로 여겨진 바 되었느니라.”(롬 4:3) 똑같이 아브라함을 예로 들면서 야고보는 행위의 중요성을, 바울은 믿음의 중요성을 강조합니다. 바울의 전통을 이어받는 루터에게 야고보는 율법을 추종하는 유대인 선생에 불과했습니다.

오늘 야고보의 편지와 바울의 편지를 동일하게 하나님의 말씀으로 읽는 우리는 당혹스럽습니다. 어느 쪽을 택해야 합니까? 행함인가요, 믿음인가요? 훗날 하나님 나라에 가서 야고보와 바울을 데려다 놓고 삼자대면 식으로 물어보면 해결이 나겠지요. 그들은 그 나라에서 이미 이 문제를 해결했겠지요. 그 두 분 때문에 아직 세상에 살고 있는 우리만 골치가 아프게 되었습니다. 다시 묻습니다. 누가 옳습니까?

우리가 개신교 신자라는 사실을 전제한다면 우리의 신앙은 야고보보다는 바울에게 기울어지는 게 분명합니다. 이것은 루터가 명확하게 분석한 뒤로는 더 이상의 논란의 여지가 없을 정도입니다. 바울과 루터의 칭의론적 전통을 소중하게 생각하는 개신교 목사로서 저의 개인적인 생각을 한 가지 더 첨가한다면 다음과 같습니다. 제 생각에 신앙은 수행이 그 기초입니다. 세상의 변화를 위한 행위보다는 자기 영혼의 존재론적 변화를 위한 수행이 우선적이라는 뜻입니다. 여기서 수행이라는 말을 단순히 도를 닦는다는 식으로만 이해하기면 곤란합니다. 하나님과의 관계에 몰두한다는 뜻입니다. 제가 보기에 한국교회가 세상으로부터 인정을 받지 못하는 이유는 선한 행위가 없어서라기보다는 수행의 능력을 상실했기 때문입니다. 어떻게 보면 행위는 넘쳐납니다. 교회 안에 말도 많고 행위도 너무 많습니다. 교회에 프로그램과 이벤트가 과잉이라는 사실을 여러분은 아실 겁니다. 그런 프로그램이 신자들의 영성을 진작시키기 위한 것이라고 합니다. 그런 경우도 적지 않겠지요. 그러나 더 많은 경우에는 행사를 위한 행사로 떨어집니다. 수행의 성격이 축소되고 행위의 성격이 강조된다는 뜻입니다.

이런 차이를 구분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이해를 돕기 위해서 예를 들겠습니다. 젊은이들의 결혼식을 생각해보십시오. 두 사람이 이제 한 가족을 이뤄 삶의 여정에 나서게 되었다는 생명 중심적 깊은 의미보다는 온갖 행사로 뒤범벅이 될 때가 많습니다. 결혼식 며칠 전에 사진 찍기에서 혼이 빠지고 결혼식 날도 친구들과 친척들에 휘둘립니다. 오해는 마십시오. 모든 결혼 이벤트를 부정하는 게 아닙니다. 결혼을 비롯한 삶 전체를 수행의 한 과정으로 받아들이지 못한 채 행위에 떨어지는 이 세태를 예로 든 것뿐입니다. 기독교 신앙은 결국 하나님과 ‘나’ 개인의 영적인 관계로 침잠해 들어가는 수행입니다. 수행은 믿음의 차원이지 행위의 차원은 아닙니다. 이런 점에서 저는 바울과 루터의 칭의론에 기본적으로 동의합니다.


행함이 없는 믿음

그렇다면 이제 야고보서를 어떻게 읽어야 할까요? 복음의 시대에는 율법의 행위를 강조하는 야고보서는 철지난 유행가와 같은 것인지요. 아닙니다. 야고보서는 폐기처분해야 할 지푸라기 문서가 아닙니다. 이 대목에서는 일단 저는 루터에게 양해를 구해야겠습니다. 그는 로마가톨릭교회와의 진리투쟁에 급급하여 야고보서를 오해한 것 같습니다. 위대한 신학자라도 완벽할 수는 없으니 이 문제로 루터의 교회사적 무게가 손상 받는 건 아닙니다. 우리는 루터보다 5백년 이후에 태어났기에 성서의 실체를 따라잡는데 루터보다 조금 더 유리한 입장에 있을 뿐입니다. 

야고보와 바울은 큰 틀에서 분명히 신학적인 차이를 보입니다. 그건 어쩔 수 없는 일입니다. 예수님의 동생인 야고보는 유대-기독교인들의 대표자였고, 바울은 이방-기독교인들의 대표자였습니다. 야고보는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지만 여전히 토라와 할례의 전통을 유지하는 유대 기독교인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사람이었으며, 바울은 그런 토라나 할례와 아무런 상관이 없는 이방 헬라 기독교인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들이 복음을 전해야 할 대상이 완전히 달랐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야고보의 행위를 부정한 것처럼, 야고보는 바울의 행위 없는 믿음을 부정한 것처럼 보입니다. 그것은 표면적인 것입니다. 신앙의 근본에서는 다르지 않았습니다. 그들이 그렇게 대립적인 입장에서 글을 쓸 수밖에 없는 속사정이 있었을 뿐입니다. 그 문제를 야고보의 입장에서 살펴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야고보는 지금 믿음 일원론에 극단적으로 치우친 이들을 앞에 두고 있습니다. 이들은 바울의 가르침을 극단적으로 몰고 간 사람들입니다. 믿음 일원론에 치우친 이들은 믿음만 있으면 다른 건 아무 필요가 없다고 주장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우리의 죄를 용서했으며, 부활이 우리를 생명으로 인도했기 때문에 지금 우리가 할 일은 아무 것도 없다는 주장입니다. 이런 극단적인 행위 배척주의는 복음적인 것 같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이들은 복음이라는 명분에 숨어서 인간의 구체적인 윤리적 책임을 송두리째 부정했습니다. 초기 기독교 시대의 니골라 당이 대표적입니다. 그들은 복음의 자유를 육체의 기회로 삼았습니다.(갈 5:13) 요한계시록에 따르면 니골라 당이 에베소 교회에도 침투할 정도로 당시에 오랫동안 광범위한 세력을 형성했었습니다.(계 2:6)

한국교회에도 니골라 당의 흔적이 있는데, 구원파가 그들입니다. 이들은 이미 하늘나라에서 구원이 완성되었기 때문에 신자들이 세상에서 그 어떤 죄를 짓는다고 해도 믿기만 하면 아무런 상관이 없다고 가르칩니다. 한번 회개했으면 다시 회개할 필요도 없다고 합니다. 그들은 구원의 확신만을 강조합니다. 그들은 “죄 사함의 비밀, 거듭남의 비밀”이라는 단순한 구호에 병적으로 매달립니다. 그들이 그럴 수밖에 없는 이유는 하나님이 창조한 세상과 역사의 모순과 신비를 감당하기에는 그들의 정신세계가 지나치게 미숙하다는 데에 있습니다. 마치 어머니 치마폭에 감싸인 채 세상과 대면하지 못하는 마마보이와 비슷한 심리적 상태입니다. 윤리 폐기론과 역사 허무주의가 지배하게 됩니다. 이것은 구원론의 왜곡이며 타락입니다.

오늘 우리에게 니골라 당이나 구원파의 위험성은 없습니까? 구원과 믿음이라는 자기만의 성채에 숨어서 하나님께서 창조한 세상과 역사에 대한 책임을 방기하지는 않았을까요? 교회에 나오는 것만 해도 감당하기 어려운데 무슨 역사적 책임이냐, 하고 난처하게 생각할 분들이 있을 겁니다. 오해는 마십시오. 지금 당장 집을 팔고, 은행의 저금을 꺼내서 노숙자를 위한 단체에 몽땅 기부해야 하며, 사회 혁명가가 되어야 한다는 말씀이 아닙니다. 그런 문제는 여러분이 각자 믿음의 분량에 따라서 결단하고 참여하면 됩니다. 핵심은 주님의 말씀에 있습니다. 열매로 그 나무가 좋은지 아닌지 알 수 있으며, 좋은 나무가 되어야 좋은 열매를 맺습니다.(마 7:20) 이 주님의 말씀은 믿음의 존재론적 깊이와 행함의 인격적 열정 사이에서 영적인 긴장의 끈을 놓치지 말고 살아야 한다는 강력한 요구입니다. 이럴 때 우리는 말씀을 행할 수 있습니다. 그럴 때만 살아 있는 믿음이 가능합니다.(2009.9.13.)

야고보서 1:17-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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