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음과 희망
벧전 3:13-22, 부활절 여섯째 주일, 2017년 5월21일
13 또 너희가 열심으로 선을 행하면 누가 너희를 해하리요 14 그러나 의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면 복 있는 자니 그들이 두려워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며 근심하지 말고 15 너희 마음에 그리스도를 주로 삼아 거룩하게 하고 너희 속에 있는 소망에 관한 이유를 묻는 자에게는 대답할 것을 항상 준비하되 온유와 두려움으로 하고 16 선한 양심을 가지라 이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너희의 선행을 욕하는 자들로 그 비방하는 일에 부끄러움을 당하게 하려 함이라 17 선을 행함으로 고난 받는 것이 하나님의 뜻일진대 악을 행함으로 고난 받는 것보다 나으니라 18 그리스도께서도 단번에 죄를 위하여 죽으사 의인으로서 불의한 자를 대신하셨으니 이는 우리를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려 하심이라 육체로는 죽임을 당하시고 영으로는 살리심을 받으셨으니 19 그가 또한 영으로 가서 옥에 있는 영들에게 선포하시니라 20 그들은 전에 노아의 날 방주를 준비할 동안 하나님이 오래 참고 기다리실 때에 복종하지 아니하던 자들이라 방주에서 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은 자가 몇 명뿐이니 겨우 여덟 명이라 21 물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이제 너희를 구원하는 표니 곧 세례라 이는 육체의 더러운 것을 제하여 버림이 아니요 하나님을 향한 선한 양심의 간구니라 22 그는 하늘에 오르사 하나님 우편에 계시니 천사들과 권세들과 능력들이 그에게 복종하느니라.
정의와 고난
오늘 설교 본문인 벧전 3:13-22절의 주제는 큰 틀에서 볼 때 고난입니다. 우리말 성경에는 ‘선을 위한 고난’이라는 소제목이 달려 있습니다. 설교 본문 바로 앞에 나오는 벧전 3:9절은 다음과 같습니다. ‘악을 악으로, 욕을 욕으로 갚지 말고 도리어 복을 빌라 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받았으니 이는 복을 이어받게 하려 하심이라.’ 우리교회 예배 순서 마지막인 ‘위탁의 말씀’에 종종 나오는 내용이 이걸 인용한 겁니다. ‘각자 삶의 자리로 돌아가서 악을 악으로 갚지 않도록 최선을 다 하십시오.’ 14절과 17절에도 고난이 언급되었고, 다시 고난의 정점이라 할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이 18절에서 언급되었습니다. 고난은 이곳만이 아니라 신약성경 전체에 깔려 있습니다. 본문의 이런 권고가 그들과 전혀 다른 시대에 살고 있는 오늘 우리에게는 실감 있게 전달되지 않습니다. 당시의 체제가 오늘에 비해서 더 악한 것도 아니었습니다. 다만 기독교가 아직 로마에 합법 종교로 인정받지 못했기 때문에 요즘 군대를 거부하는 ‘여호와의 증인’ 교도들이 대한민국 체제에 적응하기 불편한 것처럼 크고 작은 어려움을 겪긴 했지만, 그래도 살아가는 데는 크게 지장이 없었습니다. 그런데도 베드로전서는 당시 기독교인들이 늘 고난을 당하는 것처럼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 이유를 우리는 본문에서 좀더 세밀하게 살펴봐야 합니다.
벧전 3:13절을 보십시오. ‘선을 행하면 누가 너희를 해하리요.’라고 했습니다. 당시 세상 사람들이 선한 게 무엇인지를 전혀 분간하지 못하고 기독교인들을 무조건 박해한 것은 아닙니다. 구제, 희생, 봉사의 삶은 누구에게나 칭찬받습니다. 실제로 당시 교회는 이런 일에 힘을 썼습니다. 도덕성과 휴머니즘이라는 특징이 초기 교회에 분명했습니다. 이런 특징으로 인해서 기독교로 개종하는 사람들이 주변에 많았습니다. 문제는 의로 인해서 벌어지는 고난입니다. 14절의 ‘의’(디카이오수네)는 13절의 ‘선’(아가토스)과 차이가 있습니다. 선한 일은 누구나 인정합니다. 그러나 의는 그렇지 않습니다. 디카이오수네를 현대적인 언어로 바꾸면 정의입니다. 정의는 모든 사람들에게 인정받지는 못합니다. 예를 들어서 교회가 결식자들에게 밥을 제공하는 일은 모든 사람들에게 칭찬받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북한 주민들을 위한 약품이나 쌀 보내는 일은 일부 사람들을 불편하게 합니다. 정규직 직원과 비정규직 노동자 문제도 비슷합니다. 비정규직을 정규직화하기 위해서 정규직 직원의 월급을 10% 깎을 수밖에 없다고 한다면 난리가 날 겁니다. 정의는 어쩔 수 없이 반대에 봉착하게 되고, 그 반대가 많으면 정의를 추구하는 사람은 고난을 당할 수밖에 없습니다.
본문은 이런 고난, 즉 정의를 실행하기 때문에 고난당하는 것이 오히려 복이 있다고 말합니다. 팔복의 한 구절인 마 5:10절도 정의(디카이오수네)를 위해서 박해를 받은 자가 복이 있다고 말했습니다. 이런 말씀을 받아들이기는 쉽지 않습니다. 그래서 대다수 교회와 신자들은 13절이 말하는 선은 행하지만 14절이 말하는 정의는 행하지 않습니다. 고난을 당하더라도 무조건 정의를 추구하라고 말하기도 어렵습니다. 가장 좋은 것은 정의롭게 살아도 고난을 당하지 않는 사회를 만드는 것입니다. 얼마 전 ‘5.18 광주 민주항쟁’ 기념식이 있었습니다. 당시 많은 사람들은 1980년 5월에 광주에서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잘 몰랐습니다. 깡패들과 넝마주이들이 무법천지로 만들었다거나, 북한군이 개입했다는 말들이 떠돌아다녔습니다. 아무도 그 실체적 진실을 말할 수 없었습니다. 일부 사람들은 당시 외국 특파원 기자들이나 선교사들이 찍은 사진과 동영상을 돌려가면서 보기도 했습니다. 저는 1983년 독일 유학을 가서 유학생들과 함께 동영상을 보았습니다. 이제는 대부분의 역사적 사실이 밝혀졌기 때문에 이에 관해 말해도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어느 정도 세상이 밝아진 것은 분명합니다. 세상이 밝아졌다 해도 우리는 여전히 정의롭게 살지 못합니다. 초기 기독교인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자신에게 다가올 개인적인 불이익과 고난을 감수하면서까지 정의롭게 살기는 두렵기 때문입니다.
희망에 대한 답변
베드로전서는 그런 형편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14절에서 고난을 가하는 이들을 두려워하지 말라고 권고했습니다. 두렵지만 두려워하지 말아야 합니다. 어떻게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을까요? 베드로전서는 몇 가지 근거를 제시합니다. 그중의 가장 중요한 것이 희망에 대한 것입니다. 15절을 공동번역으로 읽겠습니다.
여러분의 마음속에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우러러 모시고 여러분이 간직하고 있는 희망에 대해서 설명을 듣고 싶어 하는 사람들에게는 언제라도 답변할 수 있도록 준비해 두십시오.
이 구절만이 아니라 신약성경에는 희망에 대한 가르침이 많이 나옵니다. ‘우리가 소망으로 구원을 얻었으니 보이는 소망이 소망이 아니니 보는 것을 누가 바라리요.’(롬 8:24, 골 1:27 참조). 기독교 믿음은 자신의 희망을 답변할 줄 아는 데서 시작하고 성숙해집니다. 대상에게 무조건 집착하는 광신이 아니고, 유아적인 자기 연민도 아닙니다. 답변한다는 것은 설명한다는 뜻입니다. 이성적으로 생각하고 보편적인 언어로 설명할 수 있어야만 답변다운 답변이 될 수 있습니다. 다른 분야도 비슷합니다. 자신이 왜 어떤 시인을 특별히 좋아하는지, 어떤 음악가에 열광하는지, 어떤 화가를 좋아하는지 설명할 수 있어야 합니다. 남북문제도 그렇고, 정치문제도 그렇습니다. 우리 편인지 아닌지만 중요하게 생각하고 왜 그 사람이나 그 정당을 지지하거나 또는 지지하지 않는지를 충분하게 설명할 수 없다면 그의 대답은 궁색해질 것입니다. 초기 기독교는 자기의 믿음과 희망을 세상 사람들에게 설명하는 데에 최선을 다했습니다. 신약성경 전체가 바로 이런 설명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베드로도 역시 ‘언제라도 답변할 수 있도록 준비’하라고 권고했습니다.
15절 말씀을 다시 읽을 테니 집중해서 들어보십시오. ‘여러분의 마음속에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우러러 모시고 여러분이 간직하고 있는 희망에 대해서 설명을 듣고 싶어 하는 사람들에게는 언제라도 답변할 수 있도록 준비해 두십시오.’(벧전 1:3,21 참조) 외워둬야 할 정도로 귀하고 멋진 문장입니다. 답변해야 할 내용은 기독교인들이 간직하고 있는 희망입니다. 그 희망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생명의 완성입니다. 그 내용이 22절에 상징적으로 표현되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늘에 오르사 하나님 우편에 계시니 천사들과 권세들과 능력들이 그에게 복종하느니라.’ 이것이 무슨 뜻인지, 그리고 실제로 이런 것을 희망하고 있는지를 답변할 준비를 하라는 것입니다.
희망은 기독교 신앙에만 해당되는 게 아니라 인류 전체의 문제입니다. 헬라 신화에 판도라의 상자 이야기가 있습니다. 헬라 신들에 의해 완벽하게 만들어진 판도라라는 여자는 뚜껑을 열지 말라는 제우스의 명령을 어기고 호기심을 억제하지 못해서 상자의 뚜껑을 열었습니다. 죽음, 질병, 질투, 고독 등등의 여러 재앙이 튀어나왔습니다. 깜짝 놀란 판도라는 상자의 뚜껑을 닫았지만 모든 재앙이 튀어나온 뒤였고, 마지막으로 희망 하나만 남았습니다. 아무리 어려운 재앙이 닥쳐도 희망만 있으면 견딜 수 있다는 뜻으로 해석됩니다. 저는 다른 해석이 가능하다고 봅니다. 희망 역시 재앙의 목록에 들어 있는 겁니다. 희망은 자칫 재앙으로 작용할 수 있다는 의미입니다. 삶을 파괴하는 헛된 희망입니다. 나쁜 정치인들은 대중들을 헛된 희망에 빠지게 합니다. 포퓰리스트의 특징이 그것입니다. 그들은 주로 전체주의 국가에서 나왔습니다. 히틀러가 그렇고 무솔리니가 그렇습니다. 오늘의 북한 정권도 그런 종류에 속합니다. 북한 주민들로 하여금 북조선을 세계에서 가장 행복한 나라라고 착각하게 만드는 겁니다. 그들의 희망은 유토피아(Utopia), 즉 없는-장소에 대한 망상입니다.
정치인들만이 아니라 더 근본적으로는 종교인들에게서 그런 헛된 희망이 자주 언급됩니다. 박태선과 문선명을 재림주로 여긴 전도관이나 통일교회는 삶을 파괴하는 헛된 희망을 마약처럼 그들 교도들에게 투약했습니다. 정통 기독교에도 그런 위성성은 늘 따라다닙니다. 죽어서 천당 간다는 말이 그런 위험입니다. 그 천당은 잘 먹고 잘 사는 복지사회에 불과합니다. 이 땅에서 누리지 못한 것을 천당에서 보상받을 수 있다거나, 여기서 누리던 것을 천당에서 더 많이 누리자는 욕망의 투사입니다. 그들의 천당 개념에는 똑같은 삶이 양적으로만 좀더 많아질 뿐이지 아무 것도 변화된 것은 없습니다. 왜곡된 희망입니다. 그런 희망의 목소리에 자주 노출되는 기독교인들은 역사 앞에서 무책임한 사람이 되고 맙니다. 그런 이들을 마르크스는 아편에 중독되는 것으로 묘사했습니다. 저는 죽은 다음에 이곳보다 더 맛있는 거 배부르게 많이 먹고 더 좋은 집에서 더 쾌적하게 지낼 수 있는 나라에 가고 싶은 생각이 없습니다. 그런 나라를 희망하지 않습니다. 저 대신에 그런 곳에 가고 싶은 분이 있으면 예배 후에 개인적으로 저에게 오십시오. 자리를 양보하겠습니다.
절대 권력으로부터의 해방
그렇다면 ‘기독교인으로서 당신의 희망은 구체적으로 무엇인가?’ 하고 질문하고 싶겠지요? 하나님의 통치에 받아들여지는 것이 저의 궁극적인 희망입니다. 하나님의 통치를 부드러운 말로 바꾸면 하나님의 품입니다. 오늘 본문 벧전 3:22절의 말을 빌리면 ‘천사들과 권세자들과 능력들이’ 십자가에 달리셨으나 삼일 만에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에게 복종하는 세상입니다. 공동번역은 ‘천사들과 세력과 능력의 천신들’이라고 했습니다. 비슷한 구절은 신약성경에 자주 나옵니다. 빌 2:10을 읽겠습니다.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에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골 2:15절입니다. ‘통치자들과 권세들을 무력화하여 드러내어 구경거리로 삼으시고 십자가로 그들을 이기셨느니라.’ 당시 사람들은 어떤 절대적인 힘이, 특히 악한 힘이 사람들의 삶을 파괴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것들로부터의 해방이 곧 구원이었습니다. 하나님 나라였습니다. 지금도 그런 절대적인 힘들은 여전히 우리 삶을 지배하고 있습니다. 요즘 젊은이들은 희망이 아니라 절망에 휩싸여 있습니다. 3포, 4포 시대라고 합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어떻게 대항해볼 수 없는 힘에 포획되어 있습니다. 결혼도 늦고, 결혼해도 자녀 낳는 일에 신경을 쓰지 못합니다. 저는 베드로전서의 신앙고백에 근거해서 오늘의 젊은이들을 비롯한 모든 사람들이 신적인 능력이라 할 만큼 거대한 세상 권력으로부터 해방되는 세상을 희망하고 있습니다.
이런 세상은 역사적이고 정치적 상황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습니다. 앞에서 말한 3포, 4포 시대의 젊은이들 문제는 정치적으로 풀어야 합니다. 교회 문제도 마찬가지입니다. 요즘처럼 과하게 개교회주의에 떨어진 적은, 그래서 교회의 빈부격차가 심해진 적은 지난 2천 기독교 역사에서 없었습니다. 젊은 목사들은 일할 곳이 없습니다. 목사 공급은 넘치는데 수요가 없습니다. 현대 기독교인들은 작은 교회를 찾지 않습니다. 대형매장에 가서 카트에 상품을 골라 넣는 편리성을 포기할 수 없는 것처럼 여러 가지 부대시설과 종교상품이 잘 갖춰진 대형교회를 찾습니다. 쇼핑하듯이 신앙생활을 합니다. 그러니 작은 교회 신자들은 큰 교회로 흡수됩니다. 이걸 억지로 막을 수가 없습니다. 정치적인 해결책을 찾는 게 최선입니다. 그걸 한 마디로 하면 로마가톨릭교회처럼 교구제도를 실현해야 합니다. 말만 이렇게 할 뿐이지 개신교회에서 교구제도는 사실상 불가능합니다. 시간이 가면서 대형교회와 작지만 대안적인 특수한 교회만 살아남을 겁니다. 대구샘터교회의 미래도 어떻게 될지 모르겠습니다. 이런 것만 생각하면 한국교회의 미래는 절망적입니다. 더구나 인공지능과 같은 거대한 자연과학의 힘이 저 앞에서 태풍처럼 몰려오기 때문에 기독교의 생존 자체가 위태로울 수 있습니다. 그럴수록 우리는 성경의 외침에 더 진지한 자세로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우리의 희망이 무엇인지에 대해서 똑바른 정신으로 대답할 준비를 해야만 합니다.
저는 앞에서 악한 세력이 예수 그리스도에게 복종하는 세상이 희망의 내용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여기서 두 가지 반론이 가능합니다. 첫째, 그것은 사회운동이나 정치운동과 다를 게 없다는 반론입니다. 정의로운 사회운동이나 정치운동과 우리는 같은 길을 갑니다. 하나님이 창조한 세상과 역사는 그 방식으로 작동되기 때문에 우리는 ‘정의’를 사회 정치적으로 추구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사회운동가들이나 정치인들과 늘 같은 길을 가는 게 아닙니다. 그들은 정의롭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기독교는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님의 아들로 믿는 사람들이기에 전혀 새로운 정의를 외칠 수 있습니다. 예를 들면, 정치인은 국가와 민족을 뛰어넘지 못하지만 기독교는 뛰어넘습니다. 예수는 모든 이들을 위해서 십자가에 달리셨고, 모든 이들을 위해서 부활하셨기 때문입니다.
둘째, 그런 정의로운 세계 변화만이 희망의 내용이라면 죽음 이후에 기독교인 개개인들의 미래는 전혀 없다는 말이냐, 죽음으로 모든 게 끝이라는 말이냐, 하는 반론이 가능합니다. 이것은 곧 죽어야 할 운명으로 살아가는 제가 적극적으로 말할 수 있는 범위를 넘어섭니다. 소극적으로만 대답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자유로운 통치 안에서 새로운 생명을 얻게 될 것입니다. 그것이 우리의 궁극적인 희망입니다. 부활 신앙의 핵심이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그것의 구체적인 내용은 창조의 능력이신 하나님 안에 있는 비밀입니다. 이런 대답으로 만족할 수 없는 분들이 있을 겁니다. 그런 분들은 다른 노력이 필요합니다. 기독교 신앙을 미리 경험한 선배들의 설명을 듣는 공부가 필요합니다. 성악가가 되려면 성악 전문가에게 레슨을 받아야 하는 것과 같습니다. 현대 기독교인들에게 가장 큰 문제는 세상공부는 상대적으로 많은데 반해서 기독교 공부는 턱없이 부족하다는 것입니다. 물리학 박사도 신학은 전혀 모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성경문자주의와 요행주의와 내세주의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죽어 천당 갔다가 살아왔다는 사람의 간증에 휘둘립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베드로는 본문에서 분명히 말합니다. 희망에 대해서 사람들에게 설명할 준비를 하라고 말입니다. 그것도 ‘언제라도’ 준비하라고 했습니다. 모든 신자들이 신학교에 가야 한다는 말씀이 아닙니다. 직장 다니는 시간 외에는 몽땅 신학공부에 투자해야 한다는 말씀도 아닙니다. 기독교 신앙 앞에서 최대한의 진지한 태도를 유지하는 게 최선입니다. 기독교 신앙을 일종의 교양으로 여기지 말고 자신의 가장 궁극적인 실존으로 대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그게 바로 영적으로 깨어 있는 것이고, 쉬지 않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그런 분들은 기독교 신앙이 말하는 희망이 무엇인지 눈에 들어올 것이며, 그 희망으로 영혼이 불붙을 것이며, 그 희망에 대한 설명을 듣고 싶어 하는 사람들에게 대답하고 싶은 거룩한 갈망을 품게 될 것입니다.
* 설교보기는 아프리카 티브이 파일을 참조하세요.
수요일 오전까지 가능. http://afreecatv.com/nfermat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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