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음의 길
히 11:1-3, 8-16, 성령강림후 열둘째 주일, 2016년 8월4일
1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니 2 선진들이 이로써 증거를 얻었느니라 3 믿음으로 모든 세계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어진 줄을 우리가 아나니 보이는 것은 나타난 것으로 말미암아 된 것이 아니니라 ... 8 믿음으로 아브라함은 부르심을 받았을 때에 순종하여 장래의 유업으로 받을 땅에 나아갈새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나아갔으며 9 믿음으로 그가 이방의 땅에 있는 것 같이 약속의 땅에 거류하여 동일한 약속을 유업으로 함께 받은 이삭 및 야곱과 더불어 장막에 거하였으니 10 이는 그가 하나님이 계획하시고 지으실 터가 있는 성을 바랐음이라 11 믿음으로 사라 자신도 나이가 많아 단산하였으나 잉태할 수 있는 힘을 얻었으니 이는 약속하신 이를 미쁘신 줄 알았음이라 12 이러므로 죽은 자와 같은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하늘의 허다한 별과 또 해변의 무수한 모래와 같이 많은 후손이 생육하였느니라 13 이 사람들은 다 믿음을 따라 죽었으며 약속을 받지 못하였으되 그것들을 멀리서 보고 환영하며 또 땅에서는 외국인과 나그네임을 증언하였으니 14 그들이 이같이 말하는 것은 자기들이 본향 찾는 자임을 나타냄이라 15 그들이 나온 바 본향을 생각하였더라면 돌아갈 기회가 있었으려니와 16 그들이 이제는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니 곧 하늘에 있는 것이라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들의 하나님이라 일컬음 받으심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시고 그들을 위하여 한 성을 예비하셨느니라.
교회에서 가장 많이 언급되는 단어 중에 하나가 믿음입니다. 모든 것이 믿음과 연결됩니다. 김 집사는 믿음이 좋다든가, 아무개 집사는 요즘 믿음 생활이 시원치 않다는 말이 자연스럽게 들립니다. 개인적으로 ‘나는 왜 이렇게 믿음이 없을까?’ 하고 간혹 반성하는 분들도 있을 겁니다. 믿음이 뭘까요? 오늘 우리는 히브리서가 말하는 믿음의 세계로 들어가려고 합니다. 우선 히 11장1절과 3절을 몇 가지 다른 번역으로 읽어보겠습니다. 본문 자체가 까다로워서 무슨 뜻인지 확 와 닿지 않을 때는 여러 번역본을 비교해서 읽는 게 좋습니다.
<개역개정>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니 ... 믿음으로 모든 세계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어진 줄을 우리가 아나니 보이는 것은 나타난 것으로 말미암아 된 것이 아니니라.
<공동번역> 믿음은 우리가 바라는 것들을 보증해 주고 볼 수 없는 것들을 확증해 줍니다. ... 우리는 믿음이 있으므로 이 세상이 하느님의 말씀으로 창조되었다는 것, 곧 우리의 눈에 보이는 것이 보이지 않는 것에서 나왔다는 것을 압니다.
<루터번역> 믿음은 희망하는 것에 대한 분명한 확신이고, 보이지 않는 것을 의심하지 않는 것입니다. ... 믿음을 통해서 우리는 세상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만들어졌다는 사실을, 따라서 보이는 모든 것들이 무(無)에서 나왔다는 사실을 인식할 수 있습니다.
흔들리지 않는 삶의 토대로서의 믿음
우리가 예배 때 사용하는 개역개정 성경은 믿음을 ‘실상’과 ‘증거’라고 번역했는데, 오해의 소지가 있습니다. 실상과 증거라고 한다면 손으로 확인할 수 있는 어떤 것처럼 보입니다. 예를 들면 은행통장입니다. 잔금이 5백만 원이 남아 있는 통장은 실상과 증거입니다. 그러나 믿음은 은행통장이 아니라 부모와 자식이나 친구 사이의 신용거래와 비슷합니다. 차용증서 없이 5백만 원을 빌렸다 하더라도 상대를 믿기 때문에 의심하지 않습니다. 공동번역의 ‘보증’과 ‘확증’이라는 표현이나 루터의 ‘확신’과 ‘의심하지 않는 것’이라는 표현이 더 적합합니다. 여기서 히브리서 기자는 믿음을 두 가지로 규정했습니다. 하나는 적극적인 관점이고, 다른 하나는 소극적인 관점입니다.
적극적인 관점은 바라는 것, 즉 희망하는 것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바라는 것에 대한 분명한 확신이 믿음이라고 했습니다. 이런 말씀에 근거해서 많은 이들이 하나님께 자신이 바라는 것을 간구합니다. 믿고 구하면 모든 것이 이루어질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렇게 되면 단순히 ‘꿈은 이루어진다.’는 차원으로 떨어집니다. 자기가 바라는 것이 실제로 이루어졌는지 아닌지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바라는 것에 대한 ‘확신’이 핵심입니다. 이런 확신이 있는 사람은 자기가 무엇을 바라는지에 대해서 깊이 성찰할 수밖에 없습니다. 왜냐하면 확신의 대상이 자기 삶의 중심이기 때문입니다. 조엘 오스틴 목사는 『긍정의 힘』에서 멋진 집을 바라면서 기도했더니 나중에 실현되었다고 말합니다. 그런 것을 인생의 목표로 생각하는 사람은 그렇게 살면 됩니다. 아브라함의 아내인 사라도 임신할 나이가 지났지만 믿음으로 임신할 수 있게 되었다고 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집과 결혼과 자식을 희망했지만 그게 다 이루어진 건 아닙니다. 자신이 인생을 걸고 확신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인지가 중요합니다. 성경은 그것이 하나님 나라라고 말합니다. 히브리서 기자도 그것을 전제하고 있습니다. 저도 그 하나님 나라를 바라고, 거기에 모든 삶을 맡깁니다.
소극적인 관점은 볼 수 없는 것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볼 수 없는 것을 의심하지 않는 게 믿음이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보통 볼 수 있는 것을 기준으로 살아갑니다. 그런 것을 확실하다고 여깁니다. 돈과 건강과 외모와 친구와 권력 등등입니다. 교회 공동체도 역시 보이는 것에 속합니다. 우리 기독교인들은 이런 보이는 것들을 개혁해 나가야 합니다. 이런 세계를 나 몰라라 하면서 살아갈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삶에는 보이는 것들만 있는 게 아니라 보이지 않는 것들이 있습니다. 두 가지가 결합되어 있습니다. 보이지 않는 것들이 더 중요할 수도 있습니다. 산소와 질소는 눈에 보이지 않지만 우리가 살아가는 데 없어서는 안 될 요소입니다. 사랑도 그것 자체는 눈에 보이지 않지만 우리가 세상을 살아가게 하는 참된 능력입니다. 노자와 장자가 말하는 도(道) 역시 보이지 않지만 세계를 가능하게 원천입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더 근원적인 것을 생각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바로 보이지 않는 존재이십니다. ‘가장 궁극적인 불가시적 현실성’인 하나님의 미래는 우리에게 아직 오지 않았지만 가장 확실합니다.
지금 당장 취업해야 하고, 대출금 이자 갚아야 하고, 말썽 피우는 자식 문제 해결해야 하고, 주식 시장을 살펴봐야 하고, 병든 몸을 추슬러야 하고, 재미있는 티브이 드라마를 보고 프로 올림픽 게임 보는 데 마음을 다 쏟아서 더 이상 여력이 없는 분들은 믿음 운운 하는 게 남의 나라 이야기로 들릴 겁니다. 젊은 사람들의 경우로 말하면 인터넷 게임과 노래 경연 등과 같은 연예 프로그램에만 몰두하면 보이지 않는 것을 의심하지 않는다는 말이 귀에 들리지 않을 겁니다. 지금 히브리서 기자가 하는 말이 ‘귀신 씨나락 까먹는 소리’가 아닙니다. 우리의 삶을 정확하게 뚫어보는 말입니다. 무엇을 희망하고 살아야 하는지, 보이지 않는 것들이 왜 정작 더 중요한지를 알아야만 인생을 인생답게 영위할 수 있습니다. 그렇지 못하면 홍수에 떠내려가는 돼지처럼, 또는 술이나 도박이나 마약에 찌들어 있는 사람처럼 자신의 인생을 살지 못합니다. 왜 그런지를, 그리고 이게 무슨 뜻인지를 히 11:3절 말씀에서 좀더 분명하게 확인할 수 있습니다.
세계 인식의 근거인 믿음
히브리서 기자는 3절에서 믿음을 통해서 우리가 두 가지 사실을 인식할 수 있다고 말했습니다. 첫째는 세상이 하나님 말씀으로 만들어졌다는 사실이고, 둘째는 ‘보이는 것은 나타난 것으로 말미암아 된 것이 아니다.’는 사실입니다. 둘째를 공동번역으로 읽으면 이렇습니다. ‘우리의 눈에 보이는 것은 보이지 않는 것에서 나왔다.’ 루터는 만물이 무(無)에서 나왔다고 번역했습니다. 세상이 하나님 말씀으로 만들어졌다는 말과 만물이 보이지 않는 것에서, 즉 무에서 나왔다는 말을 하나로 묶으면, 세상과 그 안의 만물은 보이지 않는 하나님에 의해서 창조되었다는 뜻입니다.
세상이 무엇일까요? 세상 안에 있는 만물이 무엇일까요? 하늘과 땅, 태양과 별과 달, 육지와 강과 바다, 그리고 그 안에 거하는 나무와 풀과 꽃, 그리고 사람을 비롯한 온갖 종류의 포유류와 세균 등등, 모든 것들을 가리킵니다. 성경은 세상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즉 하나님에 의해서 만들어졌다고 말하지만, 그 세상을 탐구하는 과학은 저절로 나왔다고 말합니다. 물리학은 빅뱅을 말하고, 생물학은 진화론을 말합니다. 그게 자연법칙이라는 겁니다. 저는 물리학의 빅뱅이론과 생물학의 진화론을 그대로 받아들입니다. 동시에 하나님이 세상을 만들었다는 성경의 주장도 믿습니다. 기독교의 주장과 자연과학의 주장이 제가 보기에는 충돌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빅뱅의 방식으로 세상을 창조하고 진화의 방식으로 세상을 보존한다고 보면 됩니다. 기독교인 과학자들은 그런 관점으로 세상 현상을 연구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 논란의 핵심은 세상이 스스로를 완성할 수 있느냐, 세상에 들어와 있는 인간이 자연과학의 방식으로 자신을 구원할 수 있느냐 하는 겁니다.
자연과학이 범람하는 21세기의 기독교인들은 여러 가지 점에서 세계관적인 혼란을 겪을 것입니다. 교회에서는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했다는 말을 듣지만 세상에서는 그것과 전혀 다른 말을 듣기 때문입니다. 교회의 말을 듣는 시간이 세상의 시간보다 비교할 수 없이 짧기 때문에 문제는 더 심각합니다. 예를 들어, 지난 연초에 있었던 알파고 해프닝 이후로 인공지능에 대한 관심이 높아졌습니다. 우리 삶의 전체 영역에서 인공지능이 힘을 발휘할 것으로 예측하는 학자들이 많습니다. 무인 자동차가 상용화될 날이 멀지 않았다는 말도 있습니다. 운전석에 가만히 앉아 있기만 해도 자동차 스스로 목적지까지 안전하게 운행하는 겁니다. 노인들이나 장애인들에게는 좋은 기회가 될 거 같습니다. 법조계와 교육계, 그리고 의료계도 인공지능의 영향을 광범위하게 받을 겁니다. 인공지능을 탑재한 로봇이 집안일을 다 처리해 줄 수도 있습니다. 그쯤 되면 집안 청소와 빨래널기와 마당정리와 텃밭 가꾸기 같은 저의 일도 로봇이 다 맡아주겠지요. 교회에 가장 적합한 설교도 대신 해주는 로봇이 나오지 말라는 법도 없습니다. 빨리 그런 날이 왔으면 좋겠습니다. 이렇게 세상이 완벽하게 작동되면 사람들은 세상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만들어졌다는 사실을 받아들이지 않게 될 것입니다. 이런 세상에서 기독교인들도 혼란을 겪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저는 인공지능보다 더할 정도로 과학기술이 발전된다고 하더라도 세상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만들어졌다는 사실은 부정될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두 가지 근거로 이렇게 생각합니다. 한 가지는 세상이 자연과학을 통해서 완전하게 해명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지금처럼 물리학이 발전했는데도 양자의 세계를 알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양자는 기계 관측을 불허하기 때문입니다. 과학은 실험을 통해서 똑같은 답을 얻을 수 있어야 하는데, 양자의 세계에서는 그게 통하지 않습니다. 우주가 얼마나 넓은지를 우리는 다 모릅니다. 천억 개의 별로 구성된 은하가 천억 개 모인 크기라고 추정할 뿐이지 정확하게는 모릅니다. 가깝게는 인간의 정신과 몸이 어떻게 결합되어 있는지도 모릅니다. 시간이 지나면 모든 게 밝혀질 거로 생각하시나요? 밝혀지는 건 많겠지요. 그러나 밝혀지는 것보다 더 많은 것이 숨겨 있다는 사실이 드러날 것입니다. 철학적인 관점에서 볼 때, 존재하는 것들은 왜 존재하고 무는 왜 없는지도 우리는 모릅니다. 지금 대구샘터교회 예배에 모인 분들이 무슨 과정을 통해서 이렇게 모이게 되었는지를 인공지능으로 알아낼 수는 없습니다. 태평양 한 섬에 사는 나비의 날갯짓이 태풍을 일으킬 수 있다는 이 세계의 신비 앞에서 자연과학이 어떻게 궁극의 세계를 완벽하게 밝혀낼 수 있겠습니까?
다른 한 가지는 자연과학을 통해서 세상이 얼마나 완벽하게 작동되는가와 인간의 행복과는 직접적으로 상관이 없다는 것입니다. 5백 년 전과 지금을 비교해보면 답이 나옵니다. 당시 사람들은 자연과학과는 정말 거리가 먼 상태에서 살았지만 오늘 우리보다 더 불행하지는 않았습니다. 인터넷과 핸드폰이 없으면 불편하기는 하겠지만 불행하지 않는 거와 같습니다. 오해는 마십시오. 저는 자연과학을 무시하거나 평가절하하지 않습니다. 과학은 이 세상을 인간답게 하는 데 큰 역할을 할 겁니다. 다만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했다는 사실, 그리고 그가 지금 비밀한 방식으로 보존하고 있으며, 종말에 완성할 것이라는 사실이 자연과학을 통해서 부정될 수 없다는 뜻입니다. 그러니 자연과학을 멀리할 필요도 없지만 두려워할 필요도 없습니다. 우리는 히브리서 기자와 더불어 이 사실을 믿음을 통해서 인식하고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믿음을 통한 의
히 11:4절 이하에는 구약의 여러 인물들이 열거됩니다. 아벨, 에녹, 노아, 아브라함, 사라, 이삭, 야곱, 요셉, 모세 등등입니다. 그들은 다 미래가 불확실한 가운데서도 믿음으로써 승리한 사람들입니다. 아브라함이 가장 중요하게 거론됩니다. 아브라함은 앞으로 정착해야 할 곳을 확실하게 알지 못한 상태에서 믿음으로 고향을 떠났습니다. 아브라함의 믿음을 바울은 롬 4장에서 신학적으로 자세하게 다룹니다. 바울은 아브라함이 하나님으로부터 의롭다는 인정을 받은 것이 행위가 아니라 믿음에 있다고 말합니다. 2,3절은 이렇습니다. “만일 아브라함이 행위로써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면 자랑할 것이 있으려니와 하나님 앞에서는 없느니라. 성경이 무엇을 말하느냐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그것이 그에게 의로 여겨진 바 되었느니라.” 하나님에게 인정받는 길은 유대인들이 자부심으로 삼는 율법이 아니라 믿음이라는 주장입니다. 당시 유대인들로서는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혁명적인 주장입니다. 유대인 기독교인들도 바울의 이런 주장을 극단적인 거로 여길 정도였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부활의 예수 그리스도를 경험한 후에 하나님 앞에서 인간이 어떤 태도를 취해야 하는지를 정확하게 알고 있었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기독교인들이 말하는 이런 믿음에 대해서 잘 모르거나, 오해합니다. 그런 오해를 살만한 경우가 우리에게 없지 않습니다. 하나님과의 존재론적 관계에서 발생하는 믿음을 율법으로 채우거나 값싸게 만듭니다. 믿음을 부르짖지만 믿음의 내용이 없거나 부실합니다. 그런 것만 보고 세상 사람들이 기독교를 오해합니다. 그들은 기독교 신앙을 잘 모르면서 비판할 뿐입니다. 그들은 믿음과 정반대의 삶에 떨어져 있습니다. 믿음과 반대되는 삶은 그들이 교회에 나오지 않는다는 것만 가리키는 게 아니라 더 근본적인 것을 가리킵니다. 그것은 죄와 죽음 지향적 삶입니다. 죄는 자기 스스로 자기를 완성해야 한다는 욕망과 유혹에 떨어지는 것입니다. 그들에게서는 아브라함과 같은 믿음을 볼 수 없고, 바울이 말하는 믿음을 볼 수 없습니다. 인생 전체를 통해서 뭔가를 성취하려고 애를 쓰고 있지만 다 헛수고입니다. 죽음에 대한 두려움도 현대인의 삶에 나타나는 특징입니다. 자기 소멸에 대한 두려움에 사로잡혀서 인간적인 방식으로 영생불사를 꿈꿉니다. 그게 재물일 수도 있고, 국가일 수도 있고, 가족일 수도 있습니다. 테러, 폭력, 살인, 전쟁 등등, 오늘날 국내외적으로 벌어지는 온갖 끔찍한 사건들이 대부분 죄와 죽음에 대한 두려움에서 파생됩니다.
우리 기독교인들은 세상 사람들과 전혀 다릅니다. 우리는 우리의 삶을 우리 스스로 완성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와의 일치에서 완성된다고 믿습니다. 우리는 자기 소멸인 죽음에 대한 두려움에서 벗어났습니다. 의학을 발전시키거나 복지를 향상시키는 방식에만 매달리는 게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에 참여함으로써 죽음의 두려움에서 벗어났습니다. 이런 설명을 듣고, 옳은 말이기는 하지만 실제로 그게 경험되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분들이 있을 겁니다. 예수를 믿어도 삶의 능력이 세상 사람들과 별로 다를 게 없다고 말입니다. 소위 말하는 성령의 충만을, 삶의 충만을 경험하지 못합니다. 안타깝게도 그런 분들은 기독교 신앙이 무언지 잘 모르거나, 안다고 하더라도 정보로만 아는 분들일 겁니다.
여러분은 하나님과의 존재론적 깊이로 들어가는 유일한 길이 바로 믿음이라는 사실을 알고 계십니까? 그래서 그 믿음의 길을 실제로 걷고 계십니까? 혹시 뭐가 뭔지 잘 모르는 건 아닙니까? 잊지 마십시오.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 여러분 인생의 현재와 미래는 그 어떤 상황에서도 결코 흔들리지 않을 것입니다. 히브리서 기자가 말한 것처럼 확신하게 될 것이고 의심하지 않게 될 것입니다. 그 믿음의 길을 도반처럼 우리 함께 가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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