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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강림절

믿음의 방패 (엡 6 : 10 - 18)

2025년 6월 15일 예배영상 https://www.youtube.com/live/p2QrDJTwR3o?si=QwpiFQXWQuwImPkD

▣ 들어가는 말

- 우리의 믿음은 왜 이다지도 허약한가?

오늘 우리는 에베소서 6장에서 사도 바울이 말한 “믿음의 방패”라는 말씀 앞에 섭니다. 그런데 이 말씀을 깊이 묵상할수록 한 가지 질문이 우리를 조용히 흔듭니다. “왜 오늘날 그리스도인의 믿음은 이토록 허약한가?”“믿음이란 것이 있기는 한 것인가?” 우리는 전보다 훨씬 많은 말씀을 접하고, 언제든지 예배에 참여할 수 있으며, 수많은 소위 영적 콘텐츠에 노출되어 살아갑니다. 그런데 정작 고난이 닥치고, 유혹이 다가오며, 세상이 거센 불화살을 날릴 때, 우리의 믿음은 너무 쉽게 무너지고 맙니다. 오늘날 많은 신앙의 메시지가 고통을 이기는 승리 신학, 성공과 치유를 위한 조건적 믿음, ‘잘 되는 삶’을 위한 신앙 기술로 변질되어 있습니다.

정보는 넘쳐나지만, 침묵은 사라졌고, 신앙의 언어는 많지만 깊이는 얕아졌으며, 교회는 많지만 진정한 공동체는 찾기가 어렵습니다. 깊은 묵상이나 말씀의 세계 속으로 들어가는 내적 침묵의 시간은 사라지고, 믿음은 깊이보다는 속도, 진실한 고백보다는 겉으로 보이는 이미지로 왜소해집니다. 믿음은 더 이상 하나님을 신뢰하는 고백이 아니라, 내가 원하는 결과를 얻기 위한 조건으로 바뀌고 있습니다. 성공하면 감사하고, 실패하면 낙심하는, 마치 거래와 같은 계약적 믿음, 고통이 닥치면 외면하고, 의문이 생기면 침묵하게 만드는 불편한 신앙 공동체구조 속에서, 우리의 믿음은 조용히 조용히 무너져내리고 있는 것 같습니다. 가장 본질적인 문제임에도 외면당하고 구석으로 밀려나 낯설고 먼 존재가 되어가고 있습니다.

하지만 참된 믿음은 하나님을 신뢰하기에, 고난 가운데서도 머물고, 부재 속에서도 하나님의 임재를 기다리며, 모순 속에서도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를 외치는 믿음입니다. 믿음은 절규 안에서도 여전히 기다리는 능력, 부재 속에서 여전히 붙드는 신뢰, 그리고 무너진 폐허 속에서 다시 부르는 이름입니다. 믿음은 결과를 조정하는 기술이 아니라, 존재의 기반이신 분에게 자신과 삶 전부를 내어 맡기는 신뢰의 과정이어야 하지 않을까요. …

믿음은 혼자서는 자라기 어렵습니다. 믿음은 질문 없이 깊어지기 어렵습니다. 믿음은 고난 없이 견고해지기 어렵습니다. 그래서 오늘, 바울은 우리에게 말합니다. “모든 것 위에 믿음의 방패를 가지고, 이로써 능히 악한 자의 모든 불화살을 소멸하라.”(엡 6:16) 오늘 이 말씀을 통해, 우리는 허약해진 믿음의 원인을 직시하고, 진정한 ‘방패로서의 믿음’이 무엇인지 되새기며, 마침내 하나님 안에서 다시 서는 믿음을 회복하는 시간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 진리 앞에 서는 일

- 진리 앞에 선 인간 : 돌이 된 사람들.

출애굽기 33장에서, “원하건대 주의 영광을 내게 보이소서” 모세는 여호와의 모습 보기를 간청합니다. 그러나 20절에, “너는 내 얼굴을 보지 못하리니 나를 보고 살 자가 없음이니라.” 여호와의 대답입니다. 왜 굳이 그분의 모습을 감추어야 하는 걸까요.

고대 그리스 신화에 괴물 메두사 이야기가 등장합니다. 머리카락은 뱀들이고 그 눈빛은 사람과 몸과 영혼을 얼어붙게 만드는 무시무시한 괴물이지요. 그래서 누구도 메두사를 바라볼 수 없고, 누구든지 메두사를 바라보는 자는 돌이 되고 맙니다. 흥미롭습니다. 성경은 누구도 하나님의 얼굴을 볼 수 없다고 기록하며, 누구든지 여호와의 얼굴을 본다면 죽을 것이라고 합니다. 그리스 신화에서는 누구도 괴물 메두사를 쳐다볼 수 없고 보는 자는 돌이 된다고 기록하고 있으니 말입니다.

메두사 이야기를 조금 더 해보면, 원래 메두사는 아름다운 여인이었습니다. 그 아름다움에 반한 바다의 신 포세이돈이 그녀를 유혹해 아테나 여신의 신전에서 사랑을 나누게 되지요. 그런데, 포세이돈을 짝사랑하고 있는 아테나 여신이 그 모습에 격분하여 메두사를 끔찍한 괴물로 만들어 버립니다. 그 누구도 메두사를 다시는 볼 수 없도록 만든 것이지요.

그런데 이 괴물로 변한 메두사를 물리친 영웅이 있습니다. 바로 페르세우스입니다. 그가 메두사의 목을 벨 수 있었던 것은 메두사의 얼굴을 응시하지 않고 청동 방패를 이용해, 방패에 비친 메두사를 보며 그녀의 목을 벤 것이지요.

이 이야기가 전하려고 하는 메시지는 무엇일까요. 왜 성경은 하나님의 얼굴을 볼 수 없다고 할까요. 신화는 끔찍하지만, 너무나 비극적인 메두사라는 여인을 통해 무엇을 전하려고 하는 걸까요. 분명 무엇인가 감추어진 메시지가 있는 것 같습니다.

- 신의 얼굴을 볼 수 없는 인간 : 진리와의 거리

하나님은 모세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는 내 얼굴을 보지 못하리니…”(출 33:20) 이는 단지 신비로운 능력의 문제가 아니라, 진리 앞에 선 인간 존재의 한계를 말해줍니다. 진리를 ‘직면’할 수 없는 인간, 하나님의 거룩 앞에 숨을 수밖에 없는 인간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 누구도 인간은 진리를 대면할 수 없습니다. 진리에 다다를 수 없습니다. 구원을 이룰 수 없지요. 어둠이 빛 앞에 설 수 없는 것 같이 말입니다. 그러니 스스로 구원에 다다르려는 오만을 깨뜨려야 하지요. 바벨탑을 아무리 높이 쌓아도 하늘에 닿을 수는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의 놀라운 진리가 여기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포기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구름 사이에서, 불꽃 가운데서, 그리고 마침내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을 통해 우리에게 자신의 모습을 드러내십니다. “본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나 아버지 품속에 있는 독생하신 하나님이 나타내셨느니라.”(요 1:18) 인간은 오로지 예수를 통해서만 신의 얼굴을 볼 수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가 직면할 수 없었던 진리를 우리에게 열어주기 위해 페르세우스의 방패와 같은 존재입니다. 인간의 한계성을 넘어서게 하신 분. 구원의 불가능을 가능으로 바꾸신 분. 우리의 두려움과 고통, 모든 죄를 대신 짊어지고 십자가 위에서 절규하는, 고통에 일그러진 얼굴로 하나님의 얼굴을 보여줍니다. 진리 앞에서 돌처럼 얼어붙을 수밖에 없는, 죽을 수밖에 없는 인간의 비극을, 괴물 메두사의 시선을 흡수하고, 그 시선 앞에 무너지지 않도록 자기 몸을 방패로 내어주신 분입니다.

 

▣ 응시가 아니라 응답이다.

- 시선의 폭력

장 폴 사르트르는 『존재와 무』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타인의 시선은 나를 사물로 만든다. 나는 더 이상 나 자신이 아니라, 타인의 의식 속에서 대상화된 존재가 된다.” 우리의 시선은 타인을 사물로 만들어 버립니다. 메두사의 시선처럼 타인을 돌로 만들어 버리고 말지요. 불완전한 인간의 시선, 차별적이고 계급의식에 젖은 오만한 시선, 이익의 차원에서 바라보는 장사치의 시선은 타인을, 세계를 사물로, 돌로 만듭니다. 연민과 사랑과 일치와 조화의 시선이 아닌, 폭력과 죽음의 시선이지요. 끊임없이 ‘정상’이라는 이름으로 타자를 배제해온 우리의 이야기입니다. 그런 시선으로는 절대로 진리를, 신을 바라볼 수 없습니다.

예수는 바로 이 시선, 이 구조를 뒤집습니다. 죄인, 병자, 창기, 세리… 그들을 응시하지 않고, 눈을 맞춥니다. 폭력과 죽음의 시선으로 그들을 돌로 만들고 죽이는 것이 아니라, 연민과 사랑으로 그들을 살리는 시선을 보여줍니다. 그들을 자신의 잣대로 판단하는 자들을 침묵 속에서 바라보셨습니다.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요8:7) 삶의 무게에 짓눌린 가련한 여인과 예수를 동시에 죽이려는 자들을 향한 예수의 말이지요. 그 순간 사람들은 들었던 돌을 내려놓고 물러갑니다. 자신들이 가진 죽음의 시선을 깨달았던 걸까요. 이것은 페르세우스의 방패와 같이 ‘거룩한 간접성’, 타자를 판단하고 파괴하지 않고 마주하는 방식입니다.

- 메두사를 보는 법 : 거울로서의 예술과 문학

릴케는 이렇게 썼습니다. “아름다움은 우리가 간신히 견뎌낼 수 있는 두려움의 시작이다.”(릴케, 『두이노의 비가』 중) 진실, 고통, 타자의 얼굴은 아름답지만 두렵습니다. 두려워해야 합니다. 그 두려움과 떨림 없는 시선은 폭력입니다. 우리는 그것을 직접 마주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방패, 거울, 시, 예배, 그림자, 고백 등을 통해 그 진실을 간접적으로, 돌아보며 대면합니다. 시를 통해 세상의 진실, 예배를 통해 신(하나님), 동굴 속에 비친 그림자를 통해 실체를, 진실한 고백을 통해 사랑을 보는 것이지요. 그래서 문학과 예술은 하나의 ‘방패’입니다. 우리에게 안전한 거리에서 진실을 반사해 주는 거울이지요. 기도는, 시는, 성경은, 고통받는 이의 이야기는 정면 응시가 아닌, 응시하지 않음으로써 진실을 바라보고 받아들일 수 있는 통로입니다.

방패는 도피가 아니라 사랑의 방식인 것입니다. 페르세우스는 메두사를 끝내 물리칩니다. 그러나 그가 가졌던 방패는 단지 싸움의 무기가 아니라, 자기를 지키는 지혜, 진실을 감당하는 거리, 그리고 타자를 파괴하지 않고 마주하는 윤리였습니다. 예수 역시 자기를 방패처럼 들고, 십자가에서 세상의 증오와 악한 시선을 감당하셨습니다. 그리하여 우리는 이제 하나님을, 진리를, 타자를 직면하지 않고도 깊이 바라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 응시 대신 응답

철학자 에마누엘 레비나스는 말합니다. “타자의 얼굴은 나에게 응답을 요구한다. 그것은 나를 윤리적 존재로 소환한다.” 레비나스는 우리가 타자를 바라볼 때, 그것이 판단이 아니라 책임이 되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페르세우스의 방패는 그 책임을 지는 방식입니다. 그는 단지 영웅이 아니며, 자기 파괴 없이 진실을 감당하고자 했던 자입니다.

우리 삶에도 메두사와 같은 존재들이 있습니다. 너무 무겁고, 고통스럽고, 감당하기 두려운 진실들. 때로는 자기 자신의 과거, 때로는 용서하지 못한 타인의 얼굴, 혹은 우리가 외면해온 고통과 불의. 이 진실을 정면으로 바라보려 할 때, 우리도 얼어붙고, 말을 잃고, 마음이 돌처럼 굳어집니다. 메두사는 두려움의 상징이 아니라, 억압받고 침묵을 강요당한 자의 상징 아닐까요. 그녀의 눈빛이 사람을 돌로 만든다는 것은, 그녀를 보는 자가 자신 안의 죄책과 공포를 직면할 수 없기 때문 아닐까요. 어쩌면 메두사를 보고 돌이 되는 사람은, 타자의 고통, 진정한 진실을 외면할 수 없기에 스스로 양심에 의해 응징당하는 자인지도 모릅니다.

정면으로 마주할 수 없는 상처와 기억들, 돌처럼 굳은 관계와 마음들, 외면하고 싶은 세상의 불의… 그 모든 것을 어떻게 바라보십니까? 예수님은 우리에게 말씀이라는 방패, 공동체라는 방패, 기도와 예배라는 거룩한 반사체를 주셨습니다. 우리도 이제는 폭력의 시선을 피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과 타자를 파괴하지 않기 위해 방패를 들어야 합니다. 타자를 응시하지 않고 응답하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 믿음의 방패

히브리서 11:1,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니” 믿음은 내 안의 욕망, 바라는 것들을 드러내 줍니다. 내가 무엇을 믿는지 살펴보면, 나의 존재의 실체가 드러납니다. 믿음이야말로 나의 참모습을 비춰내는 거울이라는 말이지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다” 믿음을 통해 보이지 않는 것을 볼 수 있다는 것 아닐까요. 믿음의 방패를 통해서만 우리는 하나님의 얼굴을 볼 수 있는 것 아닐까요.

자신의 모습을 깊이 성찰하는 믿음, 그 믿음을 통해 하나님을 바라보는 것. 이런 믿음이 있을 때, 외부로부터 오는 공격에도 흔들리지 않고 서 있을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바울은 이 ‘서 있음’을 에베소서 6장에서 반복적으로 강조합니다. “서기 위함이라”(13절) “서서…”(14절) 흥미롭게도 에베소서 6:16은 “모든 것 위에” 믿음의 방패를 가지라고 합니다. 즉, 방패는 전신 갑주의 다른 부분들을 보완하고 보호하는 핵심 역할을 한다는 뜻입니다. 진리도 믿음 없이 무력해질 수 있고, 의의 호심경(가슴을 보호하는 갑옷, 즉 심장 덮는 방어 도구)도 믿음이 없다면 자만이나 율법주의로 흐를 수 있으며, 복음도 믿음 없이는 참 기쁨이 되지 않습니다. 믿음은 모든 무기와 방어의 기초이자 연결점이 됩니다. 믿음이야말로 모든 것을 연결하고 우리를 온전히 설 수 있게 해 줍니다.

“믿음의 방패를 가지고 이로써 능히 악한 자의 모든 불화살을 소멸하고” 당시 로마 병사의 큰 방패는 전신을 덮을 정도로 컸으며, 적의 불화살(화전)을 막기 위해 물에 적시기도 했다고 합니다. 불화살은 단순한 공격이 아니라 공포, 혼란, 파괴를 유발하는 무기였습니다. 다시 말해서, 불화살은 의심, 유혹, 절망, 정죄, 미혹 등을 상징합니다. 이런 불화살을 가장 효과적으로 막아내는 것이 바로 ‘믿음’이라는 것이지요.

 

▣ 나가는 말: 진실을 감당하는 믿음의 방패

우리는 진리를 직시할 수 없는 존재입니다. 하나님을 알 수 있다, 구원에 이를 수 있다는 인간의 자만은 바벨탑처럼 높지만, 그 끝은 언제나 무너짐입니다. 우리는 너무 연약해서, 하나님 앞에, 때로는 고통 앞에, 불의 앞에, 타자의 고통 앞에 메두사를 만난 것처럼 돌이 되어버립니다. 그러나 메두사의 시선이 사람을 돌로 만든 것이 아니라, 그 시선을 감당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은 인간의 양심이 스스로 굳게 만든 것은 아닐까요?

그래서 우리에게는 ‘믿음의 방패’가 필요합니다. 믿음은 회피의 도구가 아니라, 진실을 감당할 수 있도록 돕는 은혜의 거리, 사랑의 방식입니다. 페르세우스는 메두사를 거울로 응시했습니다. 우리 또한 진실을 정면으로 마주하기보다, 시와 기도, 예배와 고백, 말씀과 공동체라는 거룩한 반사체를 통해 깊고 안전하게 바라볼 수 있습니다. 그것이 믿음의 방패입니다.

믿음은 외부의 불화살을 막을 뿐 아니라, 내면의 오만과 두려움을 꺾고, 타자의 고통과 마주할 용기를 주는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믿음은 기술이 아니라 관계입니다. 믿음은 결과를 조정하는 수단이 아니라, 신실하신 분께 나를 맡기는 고백입니다. 히브리서 11장 1절은 말합니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니…” 믿음은 내가 바라는 것이 무엇인지 드러내는 거울이며, 내가 누구인지 알게 하며, 그 거울 속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얼굴, 곧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을 비추어 봅니다.

- 예수, 우리의 방패

예수는 메두사의 시선을 감당하신 분입니다. 그분은 돌처럼 굳은 이 땅을 껴안고, 십자가 위에서 우리 대신 세상의 정죄와 시선을 흡수하셨습니다. 그분은 죽음에 이르기까지 진실을 응시하셨고, 그 십자가의 상처를 지닌 채 부활하셨습니다. 그 상처난 손으로 도마의 의심을 맞이하셨고, 우리의 두려움을 껴안으셨습니다. 예수께서 친히 방패가 되어주심으로 우리는 이제 진실을 응답할 수 있는 사람, 타자의 얼굴을 돌지 않은 얼굴로 마주할 수 있는 존재가 되었습니다.

- 믿음의 방패를 든 사람

믿음의 방패는 거울이자 무기입니다. 그 방패는 나를 보호할 뿐 아니라, 나 자신을 비추게 합니다. 진정한 싸움은 외부의 괴물이 아니라, 내 안의 메두사를 마주하는 일입니다. 에베소서 6장은 말합니다. “모든 것 위에 믿음의 방패를 가지라. 이로써 능히 악한 자의 모든 불화살을 소멸하리라.” 그 방패는 우리를 서게 합니다. “서기 위함이라.”(13절) “서서…”(14절) 믿음이 바로 모든 영적 무장을 연결하고 중심을 세우는 힘입니다. 불화살은 단순한 공격이 아니라, 의심과 유혹, 정죄와 낙심, 미혹과 두려움입니다. 그러나 믿음은 이 모든 불화살을 소멸시킵니다. 믿음은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붙드는 고백입니다.

믿음의 방패를 든 여정은, 결국 사랑을 향한 여정입니다. 진실을 직면할 수 없기에 우리는 방패를 들고, 그 진실을 감당하기 위해 응답하는 존재로 살아갑니다. 성경은 말합니다. “아브람아, 두려워하지 말라. 나는 네 방패요, 너의 지극히 큰 상급이니라.”(창세기 15:1) 이 약속은 오늘도 우리에게 주어져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방패이십니다. 오늘도 두려움 앞에서, 세상의 시선 앞에서, 고통 앞에서 믿음의 방패를 들고 서는 사람이 되기를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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