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음의 실체 (롬 4:13-25)
아브라함
우리가 보통 아브라함은 믿음의 조상이라고 부릅니다. 그 이유는 그에게서 믿음의 모범이 발견되기 때문입니다. 창세기 12-25장에 서술되어 있는 아브라함은 고대 이스라엘의 네 명 족장 중의 한 사람입니다. 네 명의 족장은 곧 아브라함, 이삭, 야곱, 요셉입니다. 이스라엘의 첫 조상인 아브라함에 관한 이야기 중에서 믿음과 관계된 사건은 대략 세 가지입니다. 첫째,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서 원래의 고향인, 바벨론 문면의 발생지인 갈대아 우르를 떠나 가나안으로 이주했습니다. 둘째, 아브라함은 100세에 아내 사라를 통해서 아들 이삭을 낳았습니다. 셋째,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서 이삭을 하나님께 바치려고 했습니다. 그 이외에도 크고 작은 여러 사건들이 있지만 핵심적으로 이런 정도입니다. 어떻게 보면 아브라함은 고대 족장들과 별반 다를 게 없이 살았습니다. 우리가 그에게 믿음의 조상이라는 큰 타이틀을 붙여주었지만 그가 영웅처럼 살았던 것은 아닙니다. 흉년이 들어 이집트로 피신했을 때는 용모가 뛰어났던 아내 사라로 인해서 어려움을 당할지 모른다는 염려 때문에 아내를 누이라고 속인 일도 있습니다. 아내의 말을 듣고 아내의 몸종이었던 하갈을 내어 쫓을 정도로 성격이 좀 우유부단한 사람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이 살아온 그런 삶으로만 본다면 그는 그렇게 대단한 사람은 아닙니다.
그러한 사람이 이스라엘의 가장 위대한 조상이 된 이유는 무엇일까요? 물론 그는 이스라엘만이 아니라 이슬람 사람들의 조상이기도 합니다. 지금 바울이 언급하고 있는 주제와 연결시켜서 이렇게 질문할 수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무슨 이유로 하나님으로부터 의롭다고 인정받았을까요? 하나님은 무슨 이유로 아브라함과 그의 후손들에게 세상을 물려주겠다고 약속하셨습니까? 여러분은 이런 질문과 이런 주제를 너무 종교적인 의미로만 새기지 말아야 합니다. 좀 더 실제적으로 생각해야 합니다. 세상을 물려받는다는 말과, 의롭다고 인정받는다는 것은 우리의 구체적인 삶과 직결됩니다.
세상을 물려받는다는 것은 우리의 삶이 역사적으로 보장된다는 의미이고, 의롭다고 인정받는다는 것은 생명의 실체와 연결된다는 의미입니다. 역사 문제는 접어두고 생명 문제만 조금 더 생각해보세요. 성서 기자들은 하나님을 생명의 근원자라고 생각했습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 태어나고, 이 생명이 유지되는 그 모든 것이 바로 하나님의 행위라는 것입니다. 아마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의 창조가 아니라 진화가 바로 생명의 요체라고 말할지 모르겠군요. 여기서 창조론과 진화론의 논쟁은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이건 서로 같은 자리에 놓고 논쟁을 벌어야 할 문제들이 아닙니다. 이건 흡사 어떤 축구 선수가 어떤 여자를 사랑한다는 것과 축구대회에 나가서 이기기 위해 시합한다는 것이 별개인 것처럼 서로 다른 범주에 속하는 문제입니다.
율법의 한계
어쨌든지 성서 기자들은 인간의 생명이 유지되기 위해서 필수불가결의 요소는 생명을 시작하신 분과의 연결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 연결이 떨어지면 생명을 잃어버리는 것입니다. 연결이 떨어지는 것이 곧 죄입니다. 기독교에서 죄를 인정하고 회개하라고 가르치는 이유는 곧 생명의 근원자인 하나님과 연결되는 길이 바로 그것이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죄의 반대는 무엇일까요? 의입니다. 하나님과의 연결은 바로 의에 의해서 일어납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이 의를 획득하기 위해서 ‘율법’을 지키기 시작했습니다. 모세가 시내산에서 하나님으로부터 부여받았다고 하는 그 율법을 지킴으로써 그들은 의로운 백성들이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구약성서는 의로워지기 위해 지켜야 할 율법입니다. 율법은 무엇일까요? 물론 겉으로만 본다면 십계명을 비롯해서 온갖 종교적 규칙과 규범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안식일에 행할 수 있는 것과 없는 것을 상세하게 규정한 규칙을 말입니다. 사실 이스라엘의 율법은 고대의 많은 법전 중에서 가장 탁월한 것인지 모릅니다. 예컨대 안식일이 그렇습니다. 일주일에 하루를 무조건 쉬게 하는 법보다 더 철저하게 인간을 해방시키는 법이 어디 있겠습니까? 안식일 법에 의하면 노예, 외국인 노동자, 심지어는 가축까지 쉬어야 했습니다.
인간의 의로움을 확보하기 위한 율법이 수천 년 동안 이스라엘을 지탱하는 기준으로 지켜졌지만 그 결과는 별로 바람직한 게 아니었습니다. 오늘 말씀인 15절을 보십시오. “법이 없으면 법을 어기는 일도 없게 됩니다. 법이 있으면 법을 어기게 되어 하느님의 진노를 사게 마련입니다.” 법은 그것이 아무리 선한 것이라고 하더라도 인간의 삶을 파괴하게 됩니다. 이게 곧 율법의 근본적인 한계입니다. 율법은 우리의 실정법과도 비슷합니다. 하나는 종교법이고 다른 하나는 세속법인데, 이것은 ‘법’이라는 점에서 인간 삶에 똑같이 작용합니다. 우리나라에게도 헌법을 비롯해서 형사소송법, 가족법, 노동법 등등, 많은 법이 있습니다. 법은 그 사회가 요청하는 강제규정입니다. 그런 데 그게 과연 인간 개인과 사회를 바르게 세워나갈 수 있을까요? 국가보안법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의 생명을 죽음으로 몰아갔습니까? 물론 저는 법 무용론자는 아닙니다. 다만 법은 이질적인 집단으로 구성된 한 사회를 지켜내기 위한 최소한의 안정장치일 뿐이지 개인과 사회의 의를 창출해내는 데는 근본적으로 한계가 있다는 것입니다.
이신칭의(以信稱義)
바울은 이제 의로움의 문제를 법이 아니라 믿음의 차원에서 접근합니다. 오늘 본문에서 바울은 여러 번에 걸쳐 이 사실을 언급합니다. 13b절은 이렇습니다. “그것은 아브라함이 율법을 지켰다 해서가 아니라 하느님께서 그의 믿음을 보시고 그를 올바른 사람으로 인정하셨기 때문에 하신 약속이었습니다.” 또한 16a을 보십시오. “그러므로 하느님께서는 사람의 믿음을 보시고 그를 상속자로 삼으십니다.” 22절 말씀은 이렇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이런 믿음을 보시고 아브라함을 올바른 사람으로 인정하셨습니다.”
인간의 행위는 인간을 구원할만한 근거가 될 수 없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일상에서 뼈저리게 느끼고 있는 사실입니다. 우리의 생각, 우리의 말, 우리의 실제적인 행동을 보십시오. 여기에는 파렴치한 것으로 확실하게 드러난 것만이 아니라 속으로 감춰진 것까지, 아니 겉으로 선한 것처럼 보이는 것까지 포함됩니다. 우리는 대개 그럴듯하게 보이기 위해서 선하게 살아갑니다. 그런 선한 행위들은 어느 순간에 독한 냄새를 피울 수도 있고, 사람들의 삶을 파괴할 수도 있습니다. <키다리 아저씨>라는 동화에 나오는 장면인 것 같습니다. 고아원에서 살던 소녀의 이야기입니다. 공휴일마다 고아원을 찾아와 선물을 주고 가는 지방의원들에게서 이 소녀는 위선을 발견했습니다. 불쌍한 어린이들을 돕는다는 사실이 선거에 도움이 되기 때문에 그런 자선을 행하고 있는 그런 태도를 말입니다. 우리의 살아가는 모습도 약간의 차이가 있긴 하겠지만 여기서 크게 다를 건 없습니다. 인간의 행위는 절대적인 생명 사건인 구원을 일으킬 수 없습니다. 아브라함의 행위도 여기서 예외가 아닙니다. 만약 그의 행위만 보았다고 한다면 하나님이 그를 의로운 사람으로 인정할 수 없었을 겁니다.
바울에 의하면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믿음을 보시고 그를 의롭다고 인정하셨습니다. 도대체 행위는 뭐고, 믿음은 무엇입니까? 인간의 행위로 의로워질 수 없다는 건 앞에서 설명한 대로 옳은 이야기이지만 믿음으로 의로워진다는 건 그렇게 간단한 말이 아닙니다. 물론 표면적으로만 본다면 믿음이 무엇인지 아주 간단하게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메시야라는 사실을 인정하고 그대로 따르는 것이겠지요. 이런 말이 기본적으로는 옳습니다. 그렇지만 그 믿음의 세계 안으로 들어가면 그렇게 간단한 문제는 아닙니다. 어떤 사람은 죽어서 천당간다는 욕망으로, 어떤 사람은 병이 낫는다는 기대로, 어떤 사람은 사업이 잘되거나 자식이 잘된다는 욕망으로 예수님을 믿는다고 합니다. 어떤 사람은 착하게 살려고, 불안한 마음에 위로를 받으려고 믿는다고 합니다. 도대체 믿음이 무언가요? 믿음의 본질이, 그 실체가 무엇인가요? 우리는 오늘 본문의 설명에 좀 더 귀를 기울여야하겠습니다.
창조의 하나님
아브라함은 하나님을 믿었습니다. 그런데 그 하나님은 창조자이십니다. 아브라함은 창조자 하나님을 믿었습니다. 답이 너무 간단해서 실망하셨습니까? 이 답이 너무 간단하다고 단정하지 마시고, 미리 실망하지도 말아야합니다. 17b절을 보십시오. “그는 죽은 자를 살리시고 없는 것을 있게 만드시는 하느님을 믿었던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믿은 하나님은 죽은 자를 살리시고 없는 것을 있게 만드시는 분이십니다. 죽음에서 살림으로, 무에서 유를 창조하시는 분이십니다. 아마 여러분은 속으로 이렇게 말하겠지요. “나도 아브라함과 마찬가지로 그런 창조자 하나님을 믿는다.” 예, 그렇게 믿으면 좋습니다. 그렇게 믿고 사십시오. 그러나 이런 믿음이 무엇인지 막연하게 생각하지 말아야 합니다.
우선 여러분 자신에게 이렇게 질문해보십시오. “나는 생명의 근원에 대해서 깊이 생각하고 사는가? 나는 생명의 근원에 나를 맡기고 사는가?” 오늘 우리는 생명에 대한 관심이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손에 의해서만 가능한 그 생명에 대해서 생각하지 않습니다. 대신 우리는 우리 자신이 무엇을 생산할 것인가에 대해서만 마음을 쏟고 삽니다. 이는 흡사 음악가들이 음악 자체에 대해서 생각하지 않고 그 음악을 이용한 자신의 성취에만 마음을 두는 것과 비슷합니다. 어린생명을 키우는 어머니들이 과연 생명 현상의 근원에 심취하고 있나요? 교회도 생명보다는 자기를 확장시키는 일에만 마음을 소비하고 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오늘의 기독교인들이 창조의 하나님을 믿는다고 말하는 것은 거짓말입니다. 그런 믿음은 율법입니다. 자기의 믿음이 좋다는 사실을 확인하기 위한 율법입니다.
바울은 이 아브라함의 믿음을 이삭 출생과 연결해서 설명합니다. 아브라함과 아내 사라는 생물학적으로 이미 아기를 낳을 수 없는 늙은이들이었습니다. 19절의 표현을 빌리자만 아브라함의 몸은 죽은 사람이나 다름없이 되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희망’을 잃지 않았으며, 하나님의 약속을 ‘의심’하지 않았습니다. 21,22절 말씀은 이렇습니다. “그리고 그는 하느님께서 약속하신 것을 능히 이루어 주시리라고 확신하였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이런 믿음을 보시고 아브라함을 올바른 사람으로 인정하셨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이런 성서 이야기를 문자적으로 받아들입니다. 불임부부가 아기를 갖게 될 것에 관한 희망을 잃지 않는 것이 곧 믿음이라거나, 사업의 가능성이 보이지 않지만 밀고 나가는 게 믿음이라고 말입니다. 물론 아브라함은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자기 후손들이 이어지리라는 걸 믿었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중요한 건 후손 자체가 아니라 하나님의 행위입니다. 하나님이 그분만의 고유한 방식으로 생명을 가능하게 하리라는 희망의 끈을 놓치지 않았다는 사실이 핵심입니다. 이게 곧 의로움의 초석입니다. 자기 삶과 운명과 미래를 자기의 행위가 아니라 하나님의 행위에 맡기는 것 말입니다.
예수의 부활
바울에 의하면 이런 아브라함의 믿음은 예수 그리스도를 죽은 자들 가운데서 살리신 하나님을 향한 우리의 믿음과 동일합니다. ‘없는 것을 있게 만드시는’ 그 하나님은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셨습니다. 죽은 몸 같았던 아브라함과 사라의 몸을 통해서 이삭이 태어난 것처럼 실제로 죽어서 실제로 땅에 묻혔던 예수가 궁극적인 생명을 얻은 것은 하나님의 행위입니다. 이 대목에서 어떻게 죽은 사람이 살아날 수 있는가, 하는 질문은 무의합니다. 당연히 죽었던 사람은 다시 살아나지 못합니다. 죽어서 천당을 갔다 왔다는 사람들의 간증은 그렇게 신뢰할만한 것이 아닙니다. 기독교는 과학의 역사를 파괴하는 광신이 아닙니다. 우리는 아브라함이 그랬던 것처럼 이 세상의 참된 생명을 전혀 새로운 시각으로 바라보는 사람들입니다. 새로운 시각은 곧 하나님의 행위, 즉 생명의 주인이신 하나님의 구원 행위에서 시작합니다. 창조자 하나님이 이 세상을 완성하실 그 종말에 일어날 생명 사건이 예수에게 일어났다고 우리는 믿습니다.
바울은 24절에서 이렇게 선포합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만이 아니라 이 사실을 믿는 오늘 우리까지 올바른 사람으로 인정해주신다고 말입니다. 우리 삶에서 그 이외의 것들은 부수적인 일들입니다. 바울은 그것을 배설물이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어떤 방식으로 살아가든지 예수님을 다시 살리신 하나님에게 온 영혼을 집중하면서 살아가십시오. 그게 믿음의 실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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