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음이 구원이다
눅 17:11-19, 창조절 열두 번째 주일, 추수감사절, 2017년 11월19일
11.예수께서 예루살렘으로 가실 때에 사마리아와 갈릴리 사이로 지나가시다가 12.한 마을에 들어가시니 나병환자 열 명이 예수를 만나 멀리 서서 13.소리를 높여 이르되 예수 선생님이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거늘 14.보시고 이르시되 가서 제사장들에게 너희 몸을 보이라 하셨더니 그들이 가다가 깨끗함을 받은지라 15.그 중의 한 사람이 자기가 나은 것을 보고 큰 소리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돌아와 16.예수의 발 아래에 엎드리어 감사하니 그는 사마리아 사람이라 17.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열 사람이 다 깨끗함을 받지 아니하였느냐 그 아홉은 어디 있느냐 18.이 이방인 외에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러 돌아온 자가 없느냐 하시고 19.그에게 이르시되 일어나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하시더라.
이스라엘 땅은 남쪽에서 북쪽으로 길게 늘어진 타원형 모양입니다. 남쪽은 사해와 접해있고 북쪽은 갈릴리 호수와 접해 있습니다. 중간에 사마리아가 있습니다. 이스라엘의 수도라 할 수 있는 예루살렘은 남쪽 지역에 자리하고 있습니다. 그 인근 지역을 유대라고 합니다. 그곳에 소위 이스라엘 주류가 삽니다. 예수님의 고향은 그곳에서 북쪽으로 멀리 떨어진 나사렛입니다. 나사렛은 갈릴리 지역에 속한 작은 마을입니다. 예수님은 갈릴리에서 주로 활동하셨고 이따금 성지 순례 차 예루살렘으로 가셨습니다. 눅 17:11,12절에 따르면 예수님은 예루살렘에 가기 위해서 사마리아와 갈릴리 사이를 지나가다가 어느 마을에 들어가셨다고 합니다. 먼 길을 왔고, 앞으로도 가야 하니 마을에 들어가서 쉬기도 하고 밥도 먹어야했을 겁니다.
불쌍히 여기소서!
나병환자 열 명이 예수님을 보고 멀리서 소리를 질렀습니다. “예수 선생님이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이 광경이 눈에 그려집니다. 나병환자들은 마을로부터 격리된 채 자기들끼리 모여 살아야만 했습니다. 가족들이나 친구들과도 자유롭게 만날 수 없습니다. 마을에 내려와야 할 경우에는 ‘나는 부정한 사람입니다.’는 고함을 쳐서 사람들과의 접촉을 멀리해야만 했습니다. 고대인들에게 전염성이 강한 나병은 치명적인 거라서 이런 조치를 취할 수밖에 없습니다. 열 명의 나병환자들은 예수가 환자들이나 장애인들을 고쳤다는 소문을 들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자신들의 병도 고칠 수 있을지 모른다는 희망에 부풀었겠지요. 실제로 병을 고치지 못한다고 해도 예수에게 가까이 갈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그들에게는 큰 위로가 되었을 겁니다.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는 절체절명의 상황에 떨어진 사람에게서 나오는 영혼의 절규입니다. 하나님 앞에서는 모두가 그런 경험을 하게 됩니다. 지난 2천년동안 기독교 예배에서 ‘키리에 엘레이송’ 노래가 불린 것은 바로 이런 이유입니다. 불쌍히 여겨달라는 절규는 하나님의 은총과 자비만이 자신을 구원할 수 있다는 고백입니다. 현대인들은 이런 절규를 외면하고 무시합니다. 자신들이 기댈 곳이 많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착각입니다. 기댈 곳, 기댈 대상은 지금 우리 눈에 아무리 대단하게 보여도 실제로는 모두 하찮은 것입니다. 정치나 경제적인 대상은 접어두고, 자연과학만 해도 그렇습니다. 과학이 인간을 구원할 수 없습니다. 과학 발전이 우리에게 말하는 것은 알면 알수록 모르는 것이 더 많아진다는 사실입니다.
사람들은 나병환자들의 실존을 가능하면 피하고 싶은 운명이라고 생각합니다. 나병만이 아니라 그것으로 상징되는 모든 불행한 삶을 저주스럽게 생각합니다. 보이는 보이지 않는 모든 병을 치료하고 싶어 합니다. 당연히 그래야만 합니다. 우리 자신과 다른 이들의 고통스러운 상황을 고쳐야 합니다. 예수님이 열 명의 나병환자들을 치료한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그러나 나병환자의 실존에 떨어지지 않으면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라는 영혼의 절규를 외면하면서 살게 된다는 게 문제입니다. 이게 우리의 근본적인 모순이고 역설입니다. 나병환자로서의 삶을 거부하면 거부할수록 우리는 하나님과의 깊은 관계로부터 점점 더 멀어집니다. 거꾸로 나병환자와 같은 상황에 가까이 가면 갈수록 우리는 하나님과의 관계에 더 깊이 들어갈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열 명의 나병환자들에게 ‘가서 제사장들에게 너희 몸을 보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런 경우는 예수님에게 일반적인 게 아닙니다. 환자에게 손을 얹어 기도하지도 않고, ‘나를 믿느냐?’는 질문도 없습니다. 당시 율법에 따르면 병이 치료되었는지의 여부는 제사장이 내립니다. 예수님은 이미 병이 나을 줄로 생각하고 제사장에게 가서 인증을 받으라고 말씀하신 것으로 보입니다. 그들은 무슨 뜻인지 모르고 예수님 말씀에 따라서 제사장에게 가다가 보니 피부가 깨끗이 된 것을 확인했습니다. 이들은 환호성을 질렀을 겁니다. 천형의 운명에서 벗어났으니 그 기쁨을 어떻게 말로 다 표현할 수 있겠습니까. 가족들에게 달려가고 싶었겠지요. 이들이 제사장에게 갔는지 아닌지에 대해서 성경 본문은 말하지 않습니다. 그게 별로 중요한 게 아니기 때문입니다. 중요한 것은 열 명 중에 한 사람의 행동이었습니다. 이것을 본문 15,16절이 이렇게 말합니다.
그 중의 한 사람이 자기가 나은 것을 보고 큰 소리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돌아와 예수의 발아래에 엎드리어 감사하니 그는 사마리아 사람이라.
영광과 감사
열 사람 중에서 이제 한 사람에게 이야기의 초점이 좁혀졌습니다. 이 사람은 자기 몸이 나은 걸 확인하고 두 가지 행동을 했습니다. 하나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 것이며, 다른 하나는 예수에게 돌아와서 예수의 발아래 엎드려 감사한 것입니다. 영광을 돌린다는 것은 자신의 영혼이 온전히 하나님에게만 쏠리는 것을 가리킵니다. 여기에는 다른 인간적인 이해타산이 개입되지 않습니다. 자랑과 부끄러움도 사라집니다. 하나님이 허락하시는 생명의 능력에 휩싸임으로써 기쁨과 평화를 충만하게 경험합니다. 예배를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거룩한 행위라고 하는 것도 바로 이런 이유입니다. 영광과 감사는 서로 통합니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사람은 감사하는 사람이고, 감사하는 마음이 생길 때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습니다. 이런 점에서 영광과 감사는 기독교 영성의 절정입니다. 영성의 절정은 곧 생명의 절정입니다.
사람들은 영광과 감사의 조건을 찾으려고 합니다. 인생살이의 모든 힘을 거기에 쏟습니다. 그건 성숙한 신앙인의 자세가 아닙니다. 영광과 감사는 어떤 조건에서 나오는 게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나오기 때문입니다. 본문에서 나병이 나은 사람은 열 명이었지만 영광과 감사의 영성에 들어간 사람은 한 사람뿐이었습니다. 어떤 특별한 조건이 주어져야만 영광과 감사의 영성에 들어가게 하는 게 아니라는 증거입니다. 본문에 나오는 이 사람은 나병이 낫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예수에게 감사했을 겁니다. 나병이 치료되었다는 사실을 너무 중요하게 생각하지 마십시오. 성경 본문은 그것에 관심이 있는 게 아닙니다. 궁극적으로 보면 우리는 모두 잠재적 나병환자입니다. 지금 피부 건강이 아무리 좋아도 얼마가지 않아 탄력을 읽고 조금 더 지나면 피부는 썩습니다. 죽음 앞에서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예수에게 감사할 수 있다면 지금 살아가는 삶의 형편이 어떠하든지 우리는 영광과 감사, 즉 영광과 찬송의 삶을 누릴 수 있습니다.
오늘은 2017년 추수감사절입니다. 대부분 도시생활을 하는 현대 기독교인들은 추수감사절의 의미를 절감하지 못합니다. 영적인 감수성이 예민한 사람들은 다른 사람보다는 더 느끼긴 하겠지만 전체적으로 보면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먹을거리를 모두 돈으로 손쉽게 구입할 수 있으니 어쩔 수 없는 현상이긴 합니다. 옛날에 비해서 우리가 풍요롭게 살아간다고 하더라도 추수감사에 대한 감동이 없다는 건 불행한 일입니다. 먹고 마실 것을 내려주신 하나님의 은총을 기뻐하고 찬송하고 감사하는 추수감사절의 전통이 의례적인 것으로 떨어지는 걸 조심해야 합니다. 추수감사절 절기가 말하려는 핵심은 우리의 생존을 하나님이 책임지신다는 사실에 대한 신뢰입니다. 우리의 능력이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을 신뢰하는 것입니다. 자기 능력을 과시하는 소유 방식의 삶에 철저히 물들어 있으면서 입으로만 추수감사절 노래를 부른다면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지난 수요일(11월15일) 성경공부 시간에 추수감사절 찬송인 588장을 불렀습니다. 저는 3절 가사를 설명했습니다. ‘너희들은 세상에서 무엇 먹고 마시며 무슨 옷을 입고 살까 염려하지 말아라 이는 이방사람들이 간구하는 것이요 너희 하늘 아버지는 너희 쓸 것 아신다.’ 이 세상에서 살아가는 인간의 삶은 아주 단순하고 소박합니다. 가장 원초적인 모습은 유아에게서 볼 수 있습니다. 유아들은 먹고 마시고 배설하고 자고 놀면서 자랍니다. 어른이 되어도 삶의 방식은 유아와 똑같습니다. 먹고 노는 걸 좀더 다양하게 할 뿐입니다. 그런 것이 보장된다면 생명을 유지하는 데는 아무 지장이 없습니다. 무슨 말인가요? 이것 이외의 것들은 다 부차적이라는 뜻입니다. 사회적인 신분도 별 게 없습니다. 제가 자주 말하는 거지만 대법관이나 초등학교 교사나 전업주부나 인간의 본질에서는 아무런 차이가 없습니다. 사회적인 차이는 포장일 뿐입니다. 정말 의미 있게 살고 싶다면 포장에 집중하지 말고 생명 자체에 몰두해야 합니다. 우리가 생명으로부터 자꾸 소외되는 이유는, 즉 생명 충만감을 잃어버리는 이유는 포장하는 일에 마음을 빼앗기기 때문입니다. 추수감사절을 지킨다는 것은 곧 하나님이 창조하신 생명의 근본으로 돌아가겠다는 고백이고 결단입니다. 이럴 때 나병환자였다가 나음을 얻고 영광과 감사를 드린 사람과 같은 길을 갈 수 있습니다.
믿음과 구원
예수님은 자신에게 돌아와서 감사하는 사마리아 사람을 본 뒤에 제자들에게 다음과 같이 세 가지 질문을 하셨습니다. 1) 열 사람이 다 깨끗함을 받지 않았는가? 2) 아홉은 어디 있는가? 3) 이 이방인 외에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러 온 사람이 없는가? 심각한 질문입니다. 그걸 다음과 같이 풀어서 생각해보십시오. 1) 하나님의 은혜는 보편적입니다. 2) 그걸 받아드리지 못하는 사람들이 대부분입니다. 3) 하나님의 은혜는 소외된 이들에게서 더 드러납니다. 예수님은 이어서 이 사마리아 사람에게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일어나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믿음이 구원하였다는 예수님의 말씀은 우리에게 익숙합니다. 이와 비슷한 표현들이 성경에 자주 나옵니다. 이 사마리아 사람의 경우에는 좀 특이합니다. 이 사람의 믿음이라는 게 무엇인지 본문에 명시적으로 나오지는 않습니다. 그가 예수님을 믿는다는 말을 한 것도 아닙니다. 우리는 이렇게 추정할 수 있습니다. 이 사람은 나병 치유사건 앞에서 아홉 사람과 다른 태도를 취했습니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예수에게 감사했습니다. 그의 행동은 하나님을 향한 믿음이 없는 사람에게서는 나올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너를 구원하였다.’는 말은 일단 그의 나병이 치료되었다는 뜻으로 들립니다. 우리가 세상살이에서 경험한 것에 따르면 병에서 벗어나는 것보다 더 중요한 구원도 없습니다. 그렇지만 나병에서 치료된 사람은 사마리아 사람만이 아니니까 나머지 아홉도 포함됩니다. 앞에서 예수님이 나머지 아홉은 어디 있느냐고 질문하신 뒤에 사마리아 사람을 지목해서 구원받았다고 하신 걸 보면 여기서의 구원은 단순히 나병 치료만을 가리키는 게 아니라는 건 분명해보입니다. 그렇다면 사마리아 사람이 세상 마지막 때 하늘나라에 들어갈 것을 약속받았다는 뜻으로 이런 말씀을 하신 걸까요? 그런 의미도 담겨 있는 말씀이겠지만 저는 더 근원적이고 실존적인 의미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오늘 설교 제목인 ‘믿음이 구원이다.’가 바로 그것입니다.
사마리아 사람을 다시 주목해보십시오. 이 사람은 동료들과 함께 예수를 향해서 불쌍히 여겨달라고 고함을 질렀습니다. 제사장에게 가서 몸을 보이라는 예수님의 말씀에 따라 제사장에게 가다가 몸이 치료된 것을 발견했습니다. 친구들은 각각 제 생각대로 다 흩어졌습니다. 이 사마리아 사람만 다른 급한 일을 제쳐두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예수님에게 와서 감사했습니다. 이 사람의 행동을 보고 예수님은 ‘당신 믿음이 당신을 구원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초기 기독교의 신앙도 반영된 것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과 초기 기독교인들은 예수를 믿음으로써 구원받는다고 생각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의 운명에 자신을 나타내셨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예수의 운명에 참여한다는 의미의 세례를 중요한 종교 의식으로 받아들였습니다.
사마리아 사람이 구원받았다고 해서 인생살이의 모든 문제가 다 해결된 것은 아닙니다. 이 세상에 두 발을 딛고 사는 한 삶의 짐을 지고 살아야 합니다. 역설적으로 구원받은 사람으로 살기 때문에 오히려 짊어져야 할 것이 더 많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을 믿지 않는 방식으로 작동되는 세상과 충돌하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에 등장한 사마리아 사람도 이후에 여전히 많은 문제를 겪었을 것입니다. 우리도 그런 어려움이 죽을 때까지 계속된다는 사실을 각오해야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구원의 능력은 우리를 이 세상에서 이미 구원받은 사람으로 살아가게 붙들어 줍니다. 어떤 상황에서도 나가야 할 방향을 놓치지 않게 합니다. 이는 마치 폭풍이 이는 바다에서 행해하는 배가 등대의 불빛을 발견한 것과 같습니다. 때로 희미하게 보이다가도 다시 선명하게 보이는 불빛을 향해서 나갈 수 있습니다. 이런 구원의 능력, 즉 삶의 능력은 믿음에서 주어집니다.
오늘 우리는 믿음이 아니라 불신의 시대를 삽니다. 선생을 믿지 못하고 정치인들을 믿지 못합니다. 심지어 의사도 믿지 못합니다. 남과 북이 서로 믿지 못하고 전쟁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매일 사건과 사고를 실시간으로 접하는 스마트폰 시대에 이런 불신은 더 심해집니다. ‘몰카’가 내 주변에 없는지 서로 의심하면서 조마조마하게 살아갑니다. 요즘 지난 정권의 청와대와 국정원에서 벌어졌던 일들이 속속들이 드러나고 있습니다. 블랙리스트와 화이트리스트라는 말도 나왔습니다. 정권에 반대하는 사람들의 사생활을 감시했습니다. 사찰, 전화 감청, 이메일 해킹 등등의 방법이 있습니다. 국가 안보가 아니라 정권 수호를 위해서 그런 일을 저질렀습니다. 불신을 자초하는 행위입니다. 그 외에도 우리의 세상살이 자체가 불안합니다. 자기 외에는 믿을 대상이 없으니 얼마나 초라한 세상인지, 얼마나 교만한 세상인지, 얼마나 불행한 세상인지 모르겠습니다. 그 중심에는 하나님에 대한 불신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자신의 운명과 미래를 맡길만한 대상을 상실했습니다. 그 상실감이 우리의 무의식까지 지배하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우리는 2017년 추수감사절 예배를 드리고 있습니다. 예배에 임하는 태도는 각자 다를 겁니다. 다른 것은 몰라도 예수님이 사마리아 사람에게 하신 말씀을 여러분의 머리와 가슴에 새겼으면 합니다. 여러분의 믿음이 여러분을 구원할 것입니다. 영광과 감사의 삶에서 여러분은 구원의 능력을 경험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을 향한 절대적인 신뢰로부터 여러분은 생명 충만감을 느끼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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