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음”
히 11:1-3, 8-16, 성령강림후 아홉째 주일, 2019년 8월11일
1.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니 2.선진들이 이로써 증거를 얻었느니라 3.믿음으로 모든 세계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어진 줄을 우리가 아나니 보이는 것은 나타난 것으로 말미암아 된 것이 아니니라
8.믿음으로 아브라함은 부르심을 받았을 때에 순종하여 장래의 유업으로 받을 땅에 나아갈새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나아갔으며 9.믿음으로 그가 이방의 땅에 있는 것 같이 약속의 땅에 거류하여 동일한 약속을 유업으로 함께 받은 이삭 및 야곱과 더불어 장막에 거하였으니 10.이는 그가 하나님이 계획하시고 지으실 터가 있는 성을 바랐음이라 11.믿음으로 사라 자신도 나이가 많아 단산하였으나 잉태할 수 있는 힘을 얻었으니 이는 약속하신 이를 미쁘신 줄 알았음이라 12.이러므로 죽은 자와 같은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하늘의 허다한 별과 또 해변의 무수한 모래와 같이 많은 후손이 생육하였느니라 13.이 사람들은 다 믿음을 따라 죽었으며 약속을 받지 못하였으되 그것들을 멀리서 보고 환영하며 또 땅에서는 외국인과 나그네임을 증언하였으니 14.그들이 이같이 말하는 것은 자기들이 본향 찾는 자임을 나타냄이라 15.그들이 나온 바 본향을 생각하였더라면 돌아갈 기회가 있었으려니와 16.그들이 이제는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니 곧 하늘에 있는 것이라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들의 하나님이라 일컬음 받으심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시고 그들을 위하여 한 성을 예비하셨느니라.
우리가 교회 생활을 하면서 가장 많이 듣는 단어 중의 하나는 ‘믿음’입니다. 김 집사는 믿음이 좋다거나 박 집사는 요즘 믿음 생활이 게을러졌어, 같은 말을 합니다. 성경에는 믿음에 관한 이야기가 많습니다. 예수님도 ‘당신 믿음이 당신을 구원하였다.’라는 말씀을 종종 하셨습니다. 바울은 율법과 대항하는 복음 공동체의 특징을 주로 믿음에 근거해서 주장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는 믿음으로 의로워지는 것이지 행위로 의로워지는 게 아니라고 말입니다. 마틴 루터가 로마가톨릭 교황청과의 투쟁에서 내건 가장 중요한 신학 구호가 ‘오직 믿음’이라는 사실에서 특히 우리 개신교도들에게는 믿음이 핵심적이라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새로운 관점에서 믿음을 규정하는 신약성경의 한 대목을 오늘 설교 본문으로 삼았습니다. 히브리서 11장입니다. 히브리서 기자가 말하는 믿음이 무엇인지를 우리가 안다면 우리의 삶 전체가 새로운 차원으로 업그레이드될 것입니다. 우선 히 11:1,2절을 읽겠습니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니 선진들이 이로써 증거를 얻었느니라.
위 구절이 멋진 표현이긴 하지만 머릿속에 확 들어오지는 않습니다. 첫 문장을 먼저 보십시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라고 했습니다. 실상(實狀)은 헬라어 ‘휘포스타티스’의 번역입니다. 헬-영 사전에 이 단어는 confidence, assurance로 나옵니다. KJV은 이 단어를 substance라고 번역했고, 루터는 Zuversicht라고 번역했습니다. ‘확신’이 문맥상 가장 무난합니다. 그리고 ‘바라는 것들’이라는 표현보다는 희망한다는 표현이 더 적합합니다. 영어 성경과 독일어 성경은 다 희망(hope)하는 것들이라고 번역했습니다. 이 첫 문장을 다시 정리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믿음은 우리가 희망하는 것들을 확신하게 합니다.’ 이어서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라는 표현이 나옵니다. ‘증거’에 해당하는 헬라어 프라그마를 KJV은 evidence라고 번역했고, 루터는 Nichtverzweifeln이라고 번역했습니다. 실상이나 증거 모두 확실한 어떤 것을 의미합니다. 믿음이야말로 우리 삶의 가장 확실한 토대라는 뜻입니다.
무조건 믿기만 하면 만사형통이라는 말인가, 하고 질문할 수 있습니다. 기독교 신앙을 그렇게 오해하는 경우가 없지 않습니다. 한때 베스트셀러였던 조엘 오스틴 목사의 <긍정의 힘>이 그런 종류의 책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매혹할 만한 삶의 조건들을 하나님께 구하고, 그 문제가 해결되리라는 확신을 얻는 긍정적인 삶의 태도를 기독교 신앙으로 주장한 겁니다. 그 확신이 그 사람에게 좋은 영향을 끼칠 수 있습니다. 고달픈 인생살이에서 낙심하지 않고 생기 있게 살아갈 수 있게 하기 때문입니다. 저는 그런 신앙에 동의하지 않지만, 그렇게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들을 무시할 생각도 없습니다. 그들에게도 제가 다 알지 못하는 믿음의 능력이 경험될 수 있다는 사실을 부정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제가 그들의 신앙에 동의하지 않는 이유는 그런 방식의 신앙생활로는 하나님과의 관계가 깊어지지 않는다는 데에 있습니다. 장난감을 사달라고 엄마를 조르고, 마지못해 엄마가 사준 장난감을 손에 넣고 즐거워하는 어린아이와 같은 상태에 머무는 겁니다. 신앙이 철부지 어린아이 상태로 머물면 그 신앙은 균형감각을 잃게 되고, 그 과정이 반복되면 신앙이 왜곡되거나 말라비틀어져서 죽습니다.
성경이 말하는 믿음은 자기가 바라는 바가 이루어졌느냐, 아니냐의 관점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가 깊어졌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바라는 것들’은 희망하는 것들이라고 앞에서 말씀드렸습니다. 그 희망하는 것들은 ‘보이지 않는 것들’입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미래에 이루어질 하나님의 약속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바라고 희망하는 구체적인 내용은 하나님의 부르심에 대한 우리의 응답이라는 차원에서만 의미가 있습니다. 히 11:8절 이하에는 아브라함과 그 가족들 이야기가 나옵니다. 아브라함은 믿음으로 하나님의 부르심에 순종했다고 합니다. 미래가 손에 잡을 수 있듯이 확실하지는 않았지만 믿음으로 갈대아 우르를 떠났고, 중간 기착지인 하란을 떠나서 가나안까지 갔습니다. 아브라함이 가나안에 가서 부자가 되겠다는 욕망을 실현하려는 게 목적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에 순종했을 뿐입니다. 그는 가나안에서도 하나님의 부르심과 약속을 확실하게 붙들었습니다. 그의 아내 사라도 나이가 출산 시기를 지났지만, 아들을 허락하실 것이라는 하나님의 약속을 믿었습니다. 이들의 믿음을 가리켜 본문은 희망하는 것들의 휘포스타티스, 즉 실상이요 확신이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무엇이 인간적인 기대나 소원이며, 무엇이 하나님의 부르심에 대한 순종인지 아닌지를 구분할 수 있느냐, 하는 문제가 우리 앞에 놓였습니다. 아브라함이 가나안으로 이주하는 것이 과연 하나님의 뜻이었는지 어떻게 알 수 있었을까요? 그것을 구분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오늘 예배드리는 분 중에서 다른 교회에 다니다가 옮겨오신 분들이 있을 겁니다. 교회를 옮기는 것이 자기 생각인지 아니면 하나님의 부르심인지 어떻게 판단할 수 있을까요? 이런 문제는 저에게도 해당합니다. 16년 전에 대구 샘터교회를 시작했습니다. 이런 판단이 하나님의 뜻인지 아닌지를 어떻게 알 수 있을까요? 우리는 개인적이고 사사로운 자기 생각을 하나님의 부르심이라고 합리화하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제가 모든 사정을 다 아는 게 아니지만, 지금까지 성경과 기독교 전통에서 배운 바에 따르면, 특히 오늘 본문에 따르면 자기의 선택과 결정을 의심하지 않는다는 사실이 중요합니다. 아브라함이 그랬고, 모세가 그랬습니다. 그게 믿음이고, 오늘 본문이 말하는 실상이며 증거입니다.
어느 교회를 선택했는지, 누구와 결혼했는지 등등의 문제는 사실 사소합니다. 실제로 중요한 문제는 우리의 전체 운명이 걸린 구원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믿지 않는 세상 사람들과는 전혀 다른 삶을 선택했습니다. 아브라함이 갈대아 우르를 떠나서 가나안으로 가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받은 사건이나 모세가 자기 민족을 애굽에서 끌어내서 가나안으로 데리고 가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들은 사건과 같습니다. 구원이 성취될 그 미래는 우리에게 아직 오지 않았습니다. 그 미래가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한다면 굳이 교회에 나올 필요는 없습니다. 아브라함이 갈대아 우르에서 다른 사람들과 비슷한 방식으로 한평생을 사는 것에 만족했다면 굳이 갈대아 우르를 떠나지 않아도 좋았을 겁니다. 모세도 마찬가지입니다. 70~80년, 또는 80~90년이라는 인생은 어떻게 살아도 즐겁게 지낼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이 땅에서 일어나는 인생살이를 우리 운명의 모든 것으로 생각하지 않습니다. 죽음 이후의 미래까지 생각합니다.
이 대목에서 죽어서 천국 간다는 말이구나, 하고 생각하시는지요? 저는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그런 천국, 또는 천당에 가고 싶지 않습니다. 많건 적건 일부 사람들이 지옥에서 영원히 고통당하고 예수 믿은 저와 우리만 잘 먹고 잘사는 천국을 저는 생각할 수가 없습니다. 믿음의 업적에 따라서 어떤 이는 황금 면류관을 받고 어떤 이는 개털 모자를 받는 천국을 저는 상상할 수 없습니다. 저의 인식 능력 밖에 놓인 문제를 저는 구체적으로 묘사하지 않겠습니다. 죽음이 끝이 아니라는 제 말은 아주 단순합니다. 하나님을 믿는다는 의미입니다. 그 하나님은 제가 포함된 세상을 창조하고 완성하실 분이십니다. 그 하나님을 믿기에 아주 짧은 한평생의 삶으로 제 운명이 끝난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만약 어떤 사람이 500년 전의 세상은 없었어, 그건 다 허상이야, 지금 내가 살아서 경험하는 세상만이 참된 실제야, 하고 말한다면 미친 사람이라는 말을 들을 겁니다. 세상을 하나님이 창조하셨다는 사실을 믿는 사람은 빅뱅으로부터 지금까지, 그리고 이후 이어질 종말까지의 우주 역사에 자신이 참여할 것이라는 사실을 믿습니다. 그게 구체적으로 어떻게 이루어질지는 모릅니다. 아브라함이 어떻게 가나안에 이르게 될지, 모세가 어떻게 광야를 지나서 약속의 땅에 이르게 될지 몰랐던 것처럼 말입니다. 바로 이 대목에서 우리에게는 믿음이 필요합니다. 믿음이 있는 사람에게는 아직 희망으로 남아있는 미래가, 그리고 보이지 않는 그 세계가 확실한 휘포스타티스로 다가올 것입니다.
현대인들은 자신의 궁극적인 미래에 관해서 별로 진지하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지구에서 벌어지는 생명 현상의 궁극적인 비밀에 관해서도 관심이 없습니다. 우주는 더 말할 것도 없습니다. 자기 개인의 실존에 갇혀 있습니다. 여기에는 두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하나는 지금 당장 여기서 먹고 사는 문제만으로도 골치가 아프다는 사실입니다. 다른 하나는 지금 여기서 재미있게 살기만 하면 충분히 행복하다는 생각입니다. 그래서 이전투구의 세상살이에서 버텨내고 재미있는 일들을 찾아서 바쁘게 삽니다. 이렇게 살아가는 현대인들에게 하나님 신앙이 들어갈 자리는 점점 더 줄어듭니다. 앞으로 한 세대인 30년이 지나면 대한민국의 기독교인 숫자는 대폭 줄지 않겠습니까. 그런 방식으로 그들이 행복하게 살기만 한다면 저는 그들을 옆에서 말릴 생각이 없습니다. 우리가 보통 말하는 재미있는 인생살이만으로 사람이 행복하게 살지 못한다는 사실을 여러분은 이미 알고 계실 겁니다. 인간은 배불리 먹고 재미있는 놀이만으로 만족할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자신이 어디서 왔는지, 그리고 어디로 가는지에 관한 궁극적인 질문을 피할 수 없습니다. 그걸 피하는 순간에 그는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인간의 본질을 놓칩니다. 우리가 개나 고양이가 아니라면 본질을 놓친 채 행복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우리에게 끊임없이 자신의 근원과 미래인 하나님에게 영적인 눈을 돌리라고 말합니다.
저는 앞에서 제 운명의 미래를 하나님의 창조 신앙에서 확신한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그것이 무슨 의미인지를 오늘 본문 히 11:3절에서 전해 들을 수 있습니다. 제가 본문을 일단 읽겠습니다.
믿음으로 모든 세계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어진 줄을 우리가 아나니 보이는 것은 나타난 것으로 말미암아 된 것이 아니니라.
히브리서 기자는 믿음을 단순히 인간의 감정이나 심리 현상으로 보는 게 아니라 세계에 대한 정확한 통찰과 인식과 확신의 문제로 봅니다. 세계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만들어졌다는 사실을 아는 게 중요합니다. 세계는 지구의 모든 생명체와 사물들, 그리고 우주의 별과 블랙홀까지, 성경의 표현으로 하늘과 땅에 속한 모든 것들을 가리킵니다. 세계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만들어졌다는 사실을 창세기에 나오는 창조 이야기만이 아니라 시편을 비롯한 모든 성경이 말합니다. 지금 히브리서 기자가 너무 뻔한 이야기를 하는 것으로 들리겠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그는 지금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하지 않았다는 세력과 논쟁하는 중입니다. 옛날이나 지금이나 세상은 원래 그렇게 존재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많습니다. 똑같은 세상에서 살지만 이렇게 생각이 다릅니다. 논쟁을 통해서 이 문제가 해결되지는 않을 겁니다. 자연과학이 발전할수록 기독교의 창조 신앙을 부정하는 사람들이 늘어나는 추세입니다. 그들은 자연과학이 설명할 수 있는 것만을 실재(reality)라고 주장합니다. 빅뱅이 왜 일어났는지, 그리고 세상에는 우연한 일들이 왜 발생하는지를 다 알지 못하는 이유는 자연과학이 충분할 정도로 발전하지 않아서라고 말합니다. 인공지능이 나온 뒤로는 이런 주장이 더 강력해졌습니다. 인간의 문제와 세상의 모든 문제를 인공지능과 같은 자연과학이 다 해결해줄 것으로 기대합니다. 과연 그럴까요?
이에 관해서 히 11:3b절이 중요한 관점을 짚었습니다. “보이는 것은 나타난 것으로 말미암아 된 것이 아니니라.” 여기서 보이는 것은 지금의 세계입니다. 보이는 물질로서의 세계가 물질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루터는 이를 철학적인 의미를 살려서 번역했습니다. “보이는 만물은 무에서(aus nichts) 만들어졌습니다.” 나타난 것의 반대인 나타나지 않은 것을 루터는 무(無)라고 표현한 겁니다. 무는 단순히 없다는 개념이 아니라 모든 존재하는 것들의 근원을 가리킵니다. 이런 말들이 어떤 이들에게는 말장난처럼 들릴지 모르겠습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모든 것들의 궁극적인 차원을 생각하면 무를 생각할 수밖에 없습니다. 무를 말하지 않고는 유(有)를 말할 수도 없습니다. 우리는 보이는 것이나 나타난 것만 생각하면서 삽니다. 하늘, 땅, 나무, 고양이, 하루살이, 뻐꾸기, 아파트, 도로, 다리, 자동차는 다 보이는 것들입니다. 우리에게 익숙합니다. 그래서 이런 보이는 것들만이 실재한다고 생각합니다. 소나무와 고양이의 중간쯤 되는 생명체는 없습니다. 그런 생명체는 그리스 신화에 나옵니다. 상반신은 사람이고 하반신은 말인 생명체가 그것입니다. 고대 그리스인들이 무와 유의 근본에 관해서 문제를 제기했다는 뜻입니다. 무는 왜 없는 것일까요? 지금 우리는 2019년 8월을 살고 있습니다. 5백 년 전은 오늘 우리에게 보이지 않으니 오늘 우리에게 일종의 무나 마찬가지입니다. 그런데 5백 년 전이 없으면 오늘도 없습니다. 더 거슬러 올라가면 138억 년 전의 빅뱅이 오늘을 있게 하는 근원입니다. 오늘 우리가 보는 세계는 아득하다고 말할 수밖에 없을 정도로 복잡하고 다층적이고 심층적이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이 창조했다고 말할 수밖에 없을 정도로 신비롭습니다. 성경은 곳곳에서 하나님의 영광이 온 세상에 가득하다고 외쳤습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세계를 하나님의 창조물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게 하는 것이 바로 믿음이라고 말했습니다. 그 믿음은 희망하는 것들의 실상이고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이기 때문입니다. 무슨 말인가요? 세상의 실체를 믿음의 눈으로 알 수 있다는 뜻입니다. 일부 과학자들은 인간의 이성적인 인식 능력으로만 세상을 바라보지만, 우리 기독교인은 믿음으로 세상을 봅니다. 자연과학자들이 말하는 이성적 인식 능력과 비교하면 기독교의 믿음은 뭔가 부족하다고 느끼는 분이 있을지 모르겠지만, 그렇게 생각할 필요가 전혀 없습니다. 믿음으로 살아가는 사람이라고 해서 이성적인 인식 자체를 부정하는 게 아닙니다. 다만 우리는 인간 인식에 한계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물리학을 제대로 공부한 사람은 물리의 세계를 알면 알수록 모르는 부분이 더 늘어난다는 사실을 인정합니다. 양자역학이 발견된 이후로 엄밀한 자연법칙이 별개로 존재한다는 주장도 힘을 잃고 있습니다. 과학자가 어떤 관점으로 대상을 관찰하느냐에 따라서 결과가 달라집니다. 궁극적인 물리의 세계에는 확정되거나 예측될 수 없다는 뜻입니다. 그걸 ‘불확정성의 원리’라고 합니다. 양자가 미시의 세계라서 우리의 일상에서는 실감이 나지 않지만, 그 양자가 세계를 구성하는 토대라는 점에서 세상은 여전히 비밀로 가득하다는 사실이 더 분명해졌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세상의 모든 비밀 그 중심에 하나님이 계십니다. 그 하나님은 권능으로 세상을 지으셨고,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에게 자신을 나타내셨습니다. 그 하나님을 믿는 사람에게는 떠돌이 나그네 인생을 살면서도 아브라함처럼 약속의 땅 가나안으로 들어갈 것이라는 사실에 대한 확신이 주어질 것입니다. 나이를 먹을수록 그런 확신이 더 강해질 것입니다. 이런 믿음을 여러분은 경험해보셨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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