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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조절

바디매오의 구원 이야기 (막 10:46-52)

바디매오의 구원 이야기

10:46-52, 창조절 9(종교개혁 501주년), 20181028

 

46.그들이 여리고에 이르렀더니 예수께서 제자들과 허다한 무리와 함께 여리고에서 나가실 때에 디매오의 아들인 맹인 거지 바디매오가 길 가에 앉았다가 47.나사렛 예수시란 말을 듣고 소리 질러 이르되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거늘 48.많은 사람이 꾸짖어 잠잠하라 하되 그가 더욱 크게 소리 질러 이르되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는지라 49.예수께서 머물러 서서 그를 부르라 하시니 그들이 그 맹인을 부르며 이르되 안심하고 일어나라 그가 너를 부르신다 하매 50.맹인이 겉옷을 내버리고 뛰어 일어나 예수께 나아오거늘 51.예수께서 말씀하여 이르시되 네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 맹인이 이르되 선생님이여 보기를 원하나이다 52.예수께서 이르시되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하시니 그가 곧 보게 되어 예수를 길에서 따르니라.

 

맹인 거지바디매오

오늘 설교 본문인 막 10:46-52절에는 예수님이 제자들, 그리고 다른 무리와 함께 예루살렘으로 올라가기 위해서 여리고를 나서는 중에 일어난 어떤 사건에 관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여리고는 오래 전 여호수아가 이스라엘 백성들을 이끌고 약속의 땅인 가나안으로 들어가기 위해서 벌인 첫 전투에서 큰 승리를 거둔 곳이라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매우 인상 깊은 장소입니다. 10:46절은 처음 장면을 이렇게 묘사합니다.

 

예수께서 제자들과 허다한 무리와 함께 여리고에서 나가실 때에 디매오의 아들인 맹인 거지 바디매오가 길가에 앉았다가 ...

 

바디매오라는 이름의 맹인 거지가 길가에 앉은 이유는 동냥을 얻기 위한 것입니다. 시각장애인이 일반적인 노동을 한다는 건 불가능했습니다. 부모로부터 큰 재산을 물려받았다면 거지가 되지는 않았을 겁니다. 당시 사람들은 장애를 하나님의 징벌로 받아들였기 때문에 시각장애인이 사회적으로 배척받는 것은 물론이고 스스로도 좌절감에서 벗어나기 힘들었습니다. 바디매오는 가장 비참한 운명에서 살아갈 수밖에 없는 사람들을 대표합니다.

바디매오는 눈으로 세상을 볼 수 없어서 촉감과 청각으로만 세상을 느낍니다. 보이지 않으니 후각은 발달했겠지요. 그는 오늘도 길가에 앉아서 지나가는 사람들의 발걸음 소리와 이야기 소리를 듣고 있습니다. 바람이 불어도 나뭇잎이 흔들리는 건 못 보고 바람소리만 듣습니다. 구름이 끼었는지는 몸에 닿는 햇살로 추정할 뿐입니다. 앞으로 인생을 설계할 수도 없습니다. 일생을 즐기는 일은 더더욱 요원합니다. 그냥 하루하루를 버틸 뿐입니다. 그에게 하루는 인생 전체일지 모릅니다. 갑자기 그는 사람들의 웅성거리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이건 평소에 듣던 로마 총독, 예루살렘 성전, 성지 순례, 풍년과 흉년, 관혼상제 등등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전혀 뜻밖의 소리가 들렸습니다. ‘저기 예수가 지나가시는군. 어젯밤에 여리고에서 일박 하시고 이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신다네.’

우리는 많은 뉴스와 소문을 들으면서 삽니다. 정보 과잉의 시대입니다. 인터넷과 SNS가 발달하면서 옛날 같으면 알지 못했을 시시콜콜한 소식까지 듣습니다. 연예인들의 사생활도 사람들의 귀를 끌어당깁니다. 대개는 몰라도 될 일들입니다. 심지어 가짜 뉴스도 나돌아 다닙니다. 뉴스와 소문들이 과잉 생산되고 과잉 소비되는 시대를 살기에 역설적으로 영혼을 울리는 소리는 듣지 못합니다. 저는 티브이 없이 사는데, 인터넷까지 끊고 사는 게 낫지 않을까 하는 마음이 들곤 합니다. 수도원으로 들어가지 않고 이 현실에서 목회자이며 글을 쓰는 사람으로 살려면 인터넷을 포기하긴 힘듭니다. 중요한 뉴스 외에는 가능한 접속하지 않도록 노력하는 수밖에 없습니다. 나이를 먹을수록 시간이 소중하기 때문입니다.

시각장애인인 바디매오는 세상과의 소통이 어려웠지만 그렇기 때문에 오히려 중요한 소리를 들을 수 있었던 게 아닐는지요. 그는 소리가 나는 쪽을 향해서 다음과 같이 외칩니다.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주변에 있던 사람들이 바디매오를 향해서 시끄러우니 좀 조용히 하라고 책망했습니다. 그럴만합니다. 예수는 당시에 민중들의 존경을 받는 유랑 랍비로 활동하고 있었습니다. 사람들은 랍비 앞에서 최대한 조용히 하고 말씀을 들어야 합니다. 맹인 거지의 행동을 사람들은 민폐라고 여겼습니다. 바디매오는 한 번 더 크게 소리를 질렀다고 합니다.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주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라는 문구는 성경 전체의 압축이라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기독교 예배에는 키리에 엘레이손이 반드시 나옵니다. 우리가 바로 앞에서 부른 거룩찬송에 나오는 자비를 베푸소서.’가 바로 그것입니다. 바디매오처럼 비극적인 운명에 처한 사람만이 아니라 남이 부러워할만한 위치에 오른 사람도 키리에를 불러야 합니다. 우리의 인생이 순식간에 지나간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이라면 당연히 이렇게 외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작은 일상에서도 우리는 목말라하고 있습니다. 좋은 집에서 넉넉한 부를 쌓고 살아도 외로움과 권태를 피하지 못합니다. 대다수 사람들은 가능하지 않다는 것을 아는데도 불구하고 끝없이 자기를 채우려는 갈망에 매달려서 살아갑니다. 저는 우리의 실존이 길가에서 구걸하고 있는 바디매오의 실존과 크게 다르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저도 그와 마찬가지로 하나님 앞에서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라고 외칩니다. 그런 극진한 태도로 예배를 드리고 일상을 살아가고 싶습니다. 일종의 거룩한 열정이 저의 영혼을 화염처럼 사로잡기를 기도하고 있습니다.

 

보기를 원하다

예수님이 바디매오의 외침 소리를 들었습니다. 못들은 척하고 그냥 지나칠 수도 있었습니다. 그렇게 한다고 해도 사람들이 뭐라 하지 않습니다. 더구나 밤이 되기 전에 예루살렘까지 가려면 서둘러야 합니다. 바디매오 같은 이에게 관심을 두기 시작하면 끝이 없습니다. 예수님은 바디매오를 부르라.’ 말씀하셨습니다. 만나보겠다는 겁니다. 제자들이 바디매오에게 가서 이렇게 이릅니다. ‘안심하고 일어나시오. 예수님이 당신을 보자고 하십니다.’ 바디매오는 겉옷을 내버리고 뛰어 일어나서 예수님 앞에 섰습니다. 그 광경이 눈에 선합니다. 앞을 보지 못하니 빨리 움직일 수는 없었습니다. 눈을 껌뻑거리면서 양손을 펼쳐서 장애물을 확인해야만 합니다. 옆에서 누군가 도와주었을지 모릅니다. 예수님은 바디매오에게 묻습니다. ‘저에게서 무엇을 원하십니까?’ 바디매오는 단도직입적으로 선생님이여, 보기를 원하나이다.’고 대답했습니다.

지금 바디매오는 말이 안 되는 대답을 한 겁니다. 말이 되는 대답은 한 푼 주십시오.’입니다. 바디매오가 여리고 길가에 앉아 있는 이유는 단 한가지입니다. 오가는 사람들에게서 동냥을 얻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 앞에서 바디매오는 차원이 전혀 다른 것을 요구했습니다. 이 세상에는 한 푼을 원하는 식으로 살아가는 사람이 있고, 보기를 원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우리의 현실에서는 한 푼이 최선입니다. 대다수 사람들은 여기에 매달려 있습니다. 어쩔 수 없습니다. 입에 풀칠을 하지 않고는 살아갈 수 없기 때문입니다. 바디매오는 보기를 원한다.’고 대답했습니다. 결과가 어떻게 되었을까요? 우리는 결과를 압니다. 그는 보게 되었다고 합니다.

심학규가 효녀 심청이 덕분으로 눈을 뜬 것처럼 바디매오의 눈이 실제로 뜨인 것일까요? 저는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쇼크나 열병으로 시력을 잃었던 사람들 중에서 나중에 어떤 계기로 시력이 회복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다른 병도 비슷합니다. 존경하는 스승이나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면 만성 두통이 없어질 수도 있습니다. 각종 암도 자연 치유가 가능합니다. 제가 1977년도에 영어 공부를 하기 위해서 읽었던 <Reader’s Digest>에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나옵니다. 어떤 사람이 암에 걸려서 사망 선고를 받았습니다. 그런데 어쩌다가 그의 몸에 악성 종양이 생겼습니다. 백혈구가 악성 종양과 싸우면서 힘이 강해져서 암 세포까지 제압했습니다. 이런 일들은 아주 우연하게 일어나기에 일반화할 수는 없지만 의학적으로 설명이 안 되는 것도 아닙니다. 저는 지금 바디매오에게 일어난 생체 현상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게 아니라 성경기자가 말하려는 핵심이 무엇인지에 관해서 말씀드리는 중입니다. 마가복음 기자는 바디매오의 시력이 돌아왔는지 아닌지에 관심이 있는 게 아니라 그가 예수님을 통해서 구원을 경험했다는 사실에 관심이 있는 겁니다.

 

바디매오의 믿음과 구원

오늘 본문 마지막 절인 52절을 읽겠습니다. 여기서 바디매오 이야기를 전하는 마가복음 기자의 생각을 따라잡을 수 있을 겁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하시니 그가 곧 보게 되어 예수를 길에서 따르니라.

 

예수님은 바디매오에게 두 마디 말씀을 하셨습니다. 첫 마디는 가라.’입니다. 예수님이 제자들을 처음 만났을 때는 주로 나를 따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개인적으로 찾아온 다른 사람에게도 그렇게 말씀하신 적이 종종 있습니다. 어떤 부자 청년에게 재물을 다 팔아서 가난한 사람에게 나눠주고 나를 따르라.’(10:21)고 말씀하셨습니다. 경우에 따라서는 가라.’(5:34)고 말씀하기도 했습니다. 가라는 말씀에는 따르라는 말씀이 함축된 것으로 보입니다. 정말 친밀한 사이에서는 가라는 말이나 오라는 말이 같은 뜻이기 때문입니다.

두 번째 말씀은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입니다. 도대체 바디매오의 믿음이 무엇이기에 그 믿음으로 구원을 받았다고 말씀하신 건지 궁금합니다. 성경이 그걸 자세하게 말하지 않습니다. 간접적으로만 알 수 있습니다. 바디매오는 예수님을 가리켜 다윗의 자손이라고 호칭했습니다. 이 호칭은 메시아라는 뜻입니다. 바디매오는 늘 길가에 앉아서 행인들의 말을 들었기 때문에 예수님이 누군지에 대한 이야기도 많이 들었을 겁니다. 그는 예수님을 메시아, 즉 그리스도로 받아들였습니다. 그는 예수야말로 자신을 구원할 분이라고 믿을 수 있었습니다.

그의 믿음에는 좀더 근원적인 성격이 있습니다. 이게 중요합니다. 사람들이 시끄럽다고 책망하자 바디매오는 더 큰 소리로 예수를 불렀습니다. 예수를 향한 열망이 그의 영혼을 사로잡았습니다. 다른 사람들의 말은 귀에 더 이상 들어오지 않았습니다. 그는 오직 한 사람에게만, 한 가지 사실에만 집중했습니다. 무엇을 먹을까 마실까 입을까 염려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는 말씀처럼 그는 예수를 통한 구원에 온 열정을 쏟았습니다. 영혼이 뜨겁고 순전한 사람입니다. 그게 믿음입니다. 그 믿음이 그를 구원했습니다.

저는 바디매오처럼 영혼이 순전할 수만 있다면 맹인이 되어도 좋다고 생각합니다. 예수님께, 즉 진리와 생명에 가까이 갈 수 있다면 다른 것은 보지 못해도 좋습니다. 여러분도 마찬가지일 겁니다. ‘당신은 실제로 시각장애인이 아니니까 그렇게 말하는 거야.’라고 생각할 분들도 있을 겁니다. 그럴지도 모릅니다. 저는 사람들의 형편을 다 직접 경험한 게 아니기에 모든 사람들에게 다 들어맞는 대답을 드릴 수는 없습니다. 성경이 손가락으로 가리키는 세계를 제가 알고 있는 한도 안에서 설명하는 것뿐입니다. 실제로 제가 시각장애인이 된다면 크게 충격을 받겠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잃어버리지는 않을 겁니다. 그렇다면 세상에서 많은 것을 보면서 사는 사람을 부러워할 필요는 없는 게 아니겠습니까. 궁극적으로 우리는 모두 조금 후에 맹인이 된다는 사실 역시 중요합니다. 아무리 그 운명을 피하려고 해도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조금 일찍 맹인이 되어도 생명이신 예수에게 더 가까이 갈 수만 있다면 크게 손해날 일은 없습니다.

제 생각에 현대인들은 눈이 너무 밝은 게 오히려 문제입니다. 촌사람이 처음으로 서울 구경을 간 거와 비슷합니다. 볼 거도 많고 먹을 거도 많고, 구경거리가 너무 많아서 정신을 차릴 수 없습니다. 인생을 조금이라도 더 즐기지 않으면 큰일이 날 것처럼 바쁘게 뭔가를 쫓아다닙니다. 그렇게 해봐야 실제로는 남는 게 없다는 것을 알 만한 사람들은 다 압니다. 기껏 해봐야 뭔가를 이뤘다는 만족감이나 재미있었다는 감정이 남습니다. 그 밑에는 커다란 공허가 자리합니다. 이렇게 살면서 믿음이 깊어지기를 바라는 것은 우물가에 가서 숭늉을 찾는 겁니다. 믿음이 깊어지지 않으니 구원 경험도 깊어지지 않는 건 당연합니다.

 

제자가 된 바디매오

마가복음 기자는 52절에서 예수님의 말씀 다음에 바디매오에게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를 두 가지로 코멘트 합니다. 한 가지는 그가 보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성경기자가 그의 시력 회복에 관심을 갖는 게 아니라고 앞에서 말씀드렸습니다. 그런데 여기서는 분명히 명시적으로 언급되었습니다. 보게 되었다는 표현은 그가 구원받았다는 사실에 대한 술어입니다. 당시 사람들에게는 구원을 병 고침이나 장애 고침, 또는 축귀의 방식으로 설명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성경 언어는 종교적인 것이지 사실적인 게 아닙니다. 만약 이런 일이 사실적인 것이라고 한다면 당시 모든 장애인을 예수님이 고치셨어야만 합니다. 궁극적인 관점에서 본다면 눈으로 보는 게 본다.’의 실제 의미는 아닙니다. 그것은 피상적으로만 보는 겁니다. 진짜 보는 것은 숨어있는 세계입니다. 시를 예로 들겠습니다. 이시영의 단시 벼꽃전문입니다. ‘개구리 한 마리가 번쩍 눈을 뜨니/ 무논의 벼꽃들이 활짝 피어난다개구리와 벼꽃의 관계는 눈에 보이는 게 아닙니다. 시인의 눈에만 보입니다. 바디매오는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며, 그리스도라는 사실을 보게 되었습니다. 알고 믿게 되었습니다.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이 어디에 있을까요? 없습니다.

다른 코멘트는 바디매오가 예수를 길에서 따랐다.’는 것입니다. 예수를 따랐다는 말은 제자가 되었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이 52절에서 바디매오에게 건넨 첫 마디는 가라.’였습니다. 그는 가지 않고 예수를 오히려 따랐습니다. 그에게 특별한 일이 벌어졌습니다. 지금까지 시각장애인으로 살다가 보게 되었다면 그는 보는 방식으로 세상을 즐겨야 합니다. 가족들이나 친구들도 만나야 하고, 앞으로의 인생 계획도 세워야합니다. 빨리 집으로 돌아가는 게 순리입니다. 다른 사람들도 바디매오가 당연히 집으로 돌아갈 것으로 예측했을 겁니다. 그는 사람들의 예상을 깼습니다. 이전의 삶으로 돌아갈 수가 없습니다. 당연합니다. 예수를 만나서 구원을 경험한 사람은, 또는 사랑의 능력에 사로잡힌 사람은 다시 이전의 삶으로 돌아가지 못합니다.

바디매오 이야기는 자칫 우리와 거리가 멀어 보입니다. 바디매오의 특별한 경험은 종교적인 차원이라서 지금 우리가 사는 세속의 현실에서 실감할 수 없다는 겁니다. 물리학의 양자역학을 현실에서 실감할 수 없는 거와 비슷합니다. 양자역학을 몰라도 세상을 사는 데 아무 지장이 없는 것처럼 바디매오의 경험을 몰라도 세상을 사는 데 아무 지장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대다수의 기독교인들은 종교 동호회원처럼 신앙생활을 합니다. 길가에 앉아 구걸하던 시각장애인 바디매오와 같은 간절함이 없고, 믿음도 없으며, 궁극적인 것을 보는 경험도 없고, 예수를 뒤따름도 없습니다. 안타까운 일입니다. 저는 담임 목사로서 바디매오 구원 이야기가 바로 여러분 자신의 이야기가 되기를 진심으로 바랍니다.

마가복음 10:46-52
https://youtu.be/lJesFtbm0cA
http://afreecatv.com/nfermat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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