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ser::bec483ba-d204-47d4-afbd-8005746530c3

부활절

복된 믿음

 

복된 믿음

(요 20:19-31)


예수의 부활과 신앙의 위기

기독교 신앙이 일반 종교와 결정적으로 다른 점은 신앙의 가장 중요한 토대가 역사적으로 실존했던 한 인물에게 놓여있다는 사실입니다. 예수님과 그에게 일어난 사건이 없으면 기독교 신앙 자체가 성립되지 않습니다. 불교는 이와 좀 다릅니다. 부처님이 없어도 불교 신앙은 성립됩니다. 선승불교의 가르침에 따르면 오히려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죽이라고 합니다. 각자가 자기 안에 있는 부처를 발견하고 부처가 되는 것을 목표로 하기에 그런 깨달음의 길에서 역사적 부처가 방해가 되면 그것을 던져 버리라는 것입니다. 기독교 신앙에서 예수님을 없애면 신앙 자체가 불가능합니다. 우리 내부에 있는 어떤 궁극적인 진리를 찾는 것이 우리 기독교 신앙의 목표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예수님에게 일어난 하나님의 구원 사건에 의존하는 것이 우리 신앙의 토대입니다.

예수님에게 일어난 가장 중요한 구원 사건이 십자가와 부활입니다. 십자가 사건은 우리가 이해하기가 어렵지 않습니다. 십자가는 우리의 일상적 경험에서 증명이 가능한 역사에서 공개적으로 일어난 사건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분명히 숨을 거두셨습니다. 그리고 아리마데 요셉의 무덤에 장사되었습니다. 이것으로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이 세상에서의 삶은 완전히 끝났습니다. 이것은 예수님에게 십자가 처형 선고를 내린 빌라도와 그 측근들도 확인할 수 있고, 예수님을 신성모독자로 본 산헤드린 위원들도 확인할 수 있는 사건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죽음을 바라보는 시선은 달랐지만 그 사건이 일어났다는 사실만은 누구나 똑같이 인정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부활은 달랐습니다. 예수님의 부활 현현은 일부의 사람들에게만 일어났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과 그를 추종하던 이들에게만 일어난 사건이었습니다. 사도 바울이 전하는 바에 따르면 부활 경험자 리스트가 있었습니다. 부활의 주님이 제일 처음 게바에게 나타나셨고, 다른 열두 제자, 그리고 오백여 형제, 야고보, 모든 사도, 마지막으로 바울에게 나타났습니다.(고전 15:4-8) 이런 질문이 생길 겁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이 공개적으로 일어났던 것처럼 부활도 공개적으로 일어났어야 하는 게 아니냐고 말입니다. 일리가 있는 질문입니다. 만약 부활의 주님이 빌라도와 산헤드린 공회에 신문기자들이 사진을 찍고 뉴스를 쓸 수 있는 방식으로 나타났다면 복음 선포가 쉬웠을지도 모릅니다.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소수의 사람들에게만 부활의 주님이 나타나셨습니다.

초기 기독교 공동체가 처한 영적인 딜레마가 바로 이것이었습니다. 한편으로는 부활의 주님에 대한 저들의 경험이 아주 명백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그것을 사람들에게 객관적으로 설명할 길이 없었습니다. 이런 점에서 기독교 신앙은 늘 위기입니다. 생각해보십시오. 우리의 가장 중요한 예수님의 부활이 부정되는 순간이 온다면 우리의 신앙이 어떻게 될까요? 사이비 교주를 따르던 사람들이 교주의 실체가 드러날 때 모두 실망하고 흩어지는 것과 똑같은 일들이 벌어질 겁니다. 우리가 부활 신앙에 서 있다는 사실은 백척간두와 같습니다. 우리가 실제로 그런 절체절명의 순간을 느끼고 있을까요?

많은 기독교인들은 그런 영적인 위기 상황을 직면하고 싶어 하지 않습니다. 그런 것이 있다는 사실조차도 모르고 있습니다. 더 노골적으로 말하면 예수님이 부활했든지 않든지 내 삶이나 신앙생활에 아무런 상관이 없다고 생각하는 이들이 적지 않습니다. 지금 돈 버는 일 급한데 부활은 무슨 부활인가요? 부활은 죽어봐야 아니까 그때 부활하면 좋고, 아니면 말고 하는 식의 신앙이 흔합니다. 교회 공동체도 마찬가지입니다. 부활 문제는 적당하게 넘어가고 대신 교회 공동체의 확장을 최대 목표로 하거나, 또는 도덕주의적 변화를 그 목표로 삼습니다. 기독교 신앙을 하나의 종교생활이라고 생각한다면 예수님의 부활이 없어도 교회 운영은 얼마든지 가능합니다. 깊이 생각해야 할, 그렇게 해도 쉽게 답을 얻기 힘든 부활 생명을 신앙의 중심으로 삼기보다는 교회 성장을 내세우면 신자들의 더 뜨거운 반응을 얻을 수도 있습니다. 개인적인 도덕성과 사회적인 역사개혁을 주장하는 것도 청중들이 매력을 느낄 만한 겁니다. 그런 것들은 세상에서도 인정해주기도 합니다. 그러나 신앙의 차원에서 이런 일들은 나이브한 겁니다. 

매주일 사도신경으로 부활 신앙을 고백하는 우리가 다른 일에만 관심이 많을까요? 믿음이 없거나 지성이 부족해서 그런 것은 아닙니다. 우리의 일상과 부활에 놓인 경계선을 뚫고 나가지 못하기에 그렇습니다. 이것은 마치 죽음이 명백한 현실인데도 우리가 평소에 별로 진지하게 생각하지 않고 사는 것과 비슷합니다. 결국 여기에는 무엇이 ‘생명의 현실’(reality of life)이냐 하는 근본적인 질문이 놓여 있습니다. 요한복음 공동체가 씨름했던 문제도 이런 것과 연결됩니다.


도마의 의심

요한복음 20:19절 이하에 따르면 안식 후 첫날, 그러니까 일요일 저녁에 유대인들을 두려워한 제자들이 한 방에 모여 있을 때 부활의 주님이 나타나셨다고 합니다. 마침 그곳에 도마가 없었습니다. 주님을 보았다는 제자들의 말을 듣고 도마는 믿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그의 손의 못 자국을 보며 내 손가락을 그 못 자국에 넣으며 내 손을 그 옆구리에 넣어보지 않고는 믿지 아니하겠노라.”(요 20:25) 도마의 반응은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죽었던 예수님을 만났다는 말을 직접 확인해보지 않고 믿을 수는 없는 노릇입니다.

여드레 후에 예수님이 다시 제자들에게 나타나셨습니다. 그때는 도마도 있었습니다. 주님은 도마에게 이렇게 이르십니다. “네 손가락을 이리 내밀어 내 손을 보고 네 손을 내밀어 내 옆구리에 넣어 보라. 그리하여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요 20:27) 도마는 초기 기독교의 가장 중요한 신앙형식을 통해서 고백합니다. “나의 주님이시오, 나의 하나님이시나이다.” 예수님은 다시 도마에게 이렇게 이르십니다. “너는 나를 본고로 믿느냐.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되도다.”(요 20:29)

이 이야기에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두 번 나타나셨습니다. 한번은 도마가 없을 때, 다른 한 번은 있을 때입니다. 공통되는 사실은 문이 닫혀 있었다는 것과 예수님의 몸에 십자가 상처가 남아 있다는 것입니다. 이 두 사실은 상충되는 것입니다. 문이 닫혀 있는데 거기를 출입할 수 있는 존재라고 한다면 우리와 똑같은 존재라 할 수는 없습니다. 몸에 십자가 상처를 그대로 갖고 있다는 것은 여전히 인간과 똑같이 이 세상의 생명 형식을 그대로 지니고 있다는 뜻입니다. 이런 일이 가능할까요? 쉽게 말해서 혼령이면서 사람일 수 있을까요? 기체이면서 동시에 고체인 물질이 가능할까요? 기온에 따라서 기체가 액체로 변하기도 하고, 액체가 고체가 될 수는 있지만, 지금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이 세상에서는 그것이 동시에 일어날 수는 없습니다. 그런데 요한복음이 전하는 보도에 따르면 부활의 주님은 이 두 가지 속성을 그대로 지닌 분이십니다. 밀폐된 공간을 마음대로 넘나들면서 동시에 인간과 똑같이 시공간 안에 존재하셨다고 말입니다.

예수님의 부활 현현에 대한 성서의 보도를 세상 사람들은 인정하지 않으려 할 것이며, 더구나 인정하기도 힘들 겁니다. 부활 경험은 제자들의 착각이라고 생각하겠지요. 예수님을 향한 사랑과 그리움이 사무쳐서 생전의 주님이 그들에게 환상으로 나타난 것에 불과하다고 말입니다. 그러나 복음서나 서신이나 막론하고 기독교 전통은 예수님의 부활 현현을 제자들의 심리적 현상으로 설명하지 않습니다. 그들에게 경험된 명백한 역사적 사건이라고 주장합니다. 그들에게 나타난 예수님은 바로 십자가에 처형당한 바로 그 예수님이라는 사실을 어느 한 순간에도 소홀하게 다루지 않았습니다.

만약 그들의 부활 경험이 명백하지 않았다면 부활 사건을 굳이 신앙의 중심으로 삼지 않았을 겁니다. 부활보다는 일반적인 사랑과 평화와 정의를, 내면의 자유를 전하는 게 교회를 확장하는데 더 유리했을 테니까 말입니다. 그런 주장은 아무에게도 부담 없이 받아들여졌을 테니까요. 부활 주장은 기독교 공동체를 오히려 위태롭게 할 만한 것이었습니다. 그래도 그들은 부활을 초지일관 하게 전했습니다. 바울 같은 이도 예수님의 동정녀 탄생에 대해서는 아무런 관심이 없었지만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은 모든 것의 중심이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만일 다시 살아나지 못하셨으면 우리가 전파하는 것도 헛것이요 또 너희 믿음도 헛것”(고전 15:14)이라는 그의 진술에 따르면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이 기독교 신앙의 모든 것이라도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생명 현실과 믿음

요한복음은 대략 기원후 90-100 사이에 기록된 말씀입니다. 복음서 중에서 가장 늦게 기록되었습니다. 그 시기는 예수님의 부활을 경험한 제자들과 초기 공동체의 교우들이 모두 죽었을 때입니다. 상황이 완전히 달라졌습니다. 요한공동체 안에 도마와 같은 입장을 취하는 이들이 늘어났습니다. 직접 예수님을 확인하지 않으면 그의 부활을 믿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기자가 주는 대답은 이것입니다.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되도다.” 보지 못하고 믿는다는 게 무슨 뜻이며, 그것이 가능할까요?

본다는 것은 실증적으로 확인한다는 뜻입니다. 보는 것이야말로 무엇이 실재한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는 최선의 방식인 것은 분명합니다. 그러나 모든 것이 그렇지는 않습니다. 지구의 자전과 공전을 우리는 볼 수가 없습니다. 그래도 그 사실을 믿습니다. 왜냐하면 물리학자들의 연구를 통해서 그것이 사실이라는 것을 들었기 때문입니다. 빛의 속도가 초속 30만 킬로미터라는 사실을 보고서가 아니라 들어서 믿을 뿐입니다. 모든 물질이 원소로 구성되어 있다는 사실도 우리가 일상에서 볼 수는 없습니다. 남편이나 아내가, 또는 부모나 자식이 나를 사랑한다는 사실은 어떻게 믿을 수 있을까요? 대충만 알뿐이지 완벽하게 알 수는 없습니다. 일상에서도 우리는 보지 않고도 믿으면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물론 위에서 예로 든 것과 예수님의 부활과는 성격이 다릅니다. 물리적 사실은 다른 모든 사람들이 진리로 받아들이는 것이지만 예수님의 부활은 일부의 사람들만 진리로 받아들입니다. 전자는 실험을 통해서 반복적으로 확인이 가능하지만 후자는 그것이 불가능합니다. 그러나 이 두 가지가 서로 다른 게 아닙니다. 물리적 사실도 그것이 확실한 것으로 알려지기 전까지는 가설로만 남아 있었습니다. 더구나 모든 사람들이 인정하기까지는 많은 시간이 필요했습니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코페르니쿠스와 갈릴레이에 의해서 주장된 지동설이 처음부터 진리로 받아들여진 게 아닙니다. 그들은 종교재판을 받기도 했습니다. 같은 물리학자들 사이에서도 설왕설래가 많았습니다.

예수님의 부활도 역시 그렇습니다. 지금은 기독교인만 그것을 진리로 믿고 있을 뿐이지 다른 이들은 거부합니다. 이는 마치 지동설이 처음 제시되었을 때와 비슷한 상황입니다. 부활의 실체가 완전하게 드러나는 순간이 와야만 사람들은 그것을 믿을 수 있을 겁니다. 그 이전까지는 콩으로 메주를 쑨다고 해도 이것을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왜 그런지 아세요? 사람들의 선입관이 너무 강하기 때문입니다. 부활이 불가능하다는 선입견 말입니다. 그것은 이 땅에서 경험하는 그런 생명 현상에만 묶여 있어서 사로잡히게 된 선입견입니다. 먹고 마시고, 장가가고 시집가고, 남녀가 만나서 자손을 번식하고, 자신이 욕망을 성취하는 방식으로 살아가는 생명 현상 안에만 머물러 있다는 말씀입니다. 이럴 경우에는 예수부활과 거기에 의존해서 우리가 미래에 참여하게 될 부활 생명을 인식할 수도 믿을 수도 없습니다.

부활이 없다고 생각하는 사두개인들이 예수님에게 물었습니다. 칠 형제가 있었는데, 큰 형이 한 여자와 결혼해서 살다가 자식을 낳지 못하고 죽은 뒤에 율법에 따라서 동생이 형수와 결혼했지만 또 자식을 낳지 못하고 죽었다고 합니다. 그렇게 칠 형제가 모두 죽었을 때 이 여자는 누구의 아내가 되겠느냐 하는 질문이었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이 하나님의 능력을 오해했다고 대답하셨습니다. 부활의 세상에서는 장가와 시집가는 방식으로 생명을 이어가는 게 아닙니다. 하늘의 천사처럼 하나님의 존재 안에 들어가는 것이 바로 부활 생명이라고 가르치셨습니다.(막 12:18-27)

그렇다면 우리가 어떻게 부활 생명의 현실을 오해하지 않고 바르게 인식할 수 있을까요? 어떻게 우리의 영성이 하나님의 통치에 가 닿을 수 있을까요? 두 가지가 필요합니다. 하나는 소극적인 점이고, 다른 하나는 적극적인 점입니다. 소극적인 점은 우리의 선입견을 허무는 일입니다. 어리석은 부자의 비유에서 그 사람은 풍년이 들은 뒤 창고를 넓히고 먹고 그곳에 곡식과 재산을 보관하는 것으로 구원을 얻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하나님은 오늘 밤에 네 영혼을 거둬 가면 그것이 누구의 것이 되겠느냐 하고 대답하셨습니다. 이렇게 소유가 생명을 확보하는 길이라는 선입견을 허무는 작업이 쉽지 않겠지만 우리는 그런 작업을 쉬지 말아야 합니다.

더 중요한 것은 적극적인 부분인데, 생명의 근원이신 하나님, 그의 통치, 그의 약속을 더 깊이 학습하고 알아가는 것입니다. 그것이 신학이고 성서읽기이고 공동체 활동입니다. 이는 물리학자가 되기 위해서 옥스퍼드나 케임브리지 물리학과나 유수한 연구소에 들어가 공부하는 것과 비슷합니다. 예수 부활에 근거한 공동체가 지난 2천년 동안 지속되어 왔습니다. 중간에 변질되기도 했지만 세례와 성만찬과 설교를 중심으로 하는 예배가 살아 있는 기독교 공동체는 하나님의 구원 통치에 몰두하는 이들의 모임으로 독보적이었습니다. 오늘도 우리는 그런 전통에 서 있습니다. 이런 전통 안으로 들어간 사람이라면 자기가 직접 부활의 주님을 보지 못했어도 그분을 믿을 수 있습니다. 그는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을 수 있습니다. 그걸 믿는 사람은 그 이름에 힘입어 생명을 얻습니다. 그것이 바로 요한복음의 결론이기도 합니다.(요 20:31)

여러분, 우리는 복 받은 사람입니다. 부활의 주님을 보지 못하고도 믿을 수 있으니, 이에 더 큰 복이 어디 있겠습니까? 혹시 이 사실이 여전히 믿어지지 않는 분들이 있습니까? 그렇다면 여러분은 아직 기독교 신앙의 중심으로 들어오지 않고 주변에서 어슬렁거리는 중입니다. 믿어지지도 않은 것을 억지도 믿으라는 말씀이 아닙니다. 그건 광신입니다. 부부가 서로에게 진실하게 한 평생을 살았다면 보지 않아도 상대방을 믿을 수 있는 것처럼 우리가 그동안 기독교 신앙의 중심에 서 있었다면 부활의 주님을 이해하고 믿을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지금 이 순간에 생명의 신비가 우리를 사로잡고 있다는 게 그 증거입니다. 샘터교회 교우 여러분, 예수님의 부활을 직접 목도한 제자들이 아니지만 그것을 믿을 수 있다니, 얼마나 놀라운 ‘복된 믿음’인가요? 주님을 찬양합시다. (2009.4.19)

요한복음 20:19-31
mms://wm-001.cafe24.com/dbia/dawp_090419.mp3
mms://61.111.3.15/pwkvod/dawp/dawp_090419.wmv

설교의 다른 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