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르심에 합당한 사람
살후 1:1~4, 11~12, 창조절 아홉째 주일, 2022년 10월30일
살후 1:1절은 이렇습니다. “바울과 실루아노와 디모데는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데살로니가인의 교회에 편지하노니 … ” 여기서 실루아노는 ‘실라’를 가리킵니다. 실라와 디모데는 바울의 제자들입니다. 그들은 바울의 2차 선교 여행 시에 한 팀이었습니다. 그들의 데살로니가 전도 이야기는 행 17장에 나옵니다. 그들은 데살로니가 회당에 들어가서 예수 그리스도를 전했습니다. 행 17:4절에 따르면 ‘경건한 헬라인의 큰 무리와 적지 않은 귀부인들’이 바울이 선포한 복음을 받아들였습니다. 데살로니가 교회에 문제가 생겼습니다. 예수의 재림이 얼마 남지 않았으니 일상에 충실할 필요가 없다고 여기는 사람들이 나오기 시작한 겁니다. 바울의 가르침을 오해해서 벌어진 일입니다. 살후 3:10절에 나오는 “누구든지 일하기 싫어하거든 먹지도 말게 하라.”라는 문장이 그들을 가리킵니다. 그들의 신앙을 바르게 이끌어주려고 바울은 편지를 썼습니다. 그 편지가 2천 년 동안 살아남아서 오늘 우리도 읽을 수 있게 된 것입니다.
바울은 우선 데살로니가 교인들을 칭찬합니다. 그들의 믿음이 자라고 사랑이 풍성하게 되었으며, 어려움 가운데서도 크게 흔들리지 않았다고 말입니다. 4절 말씀을 들어보십시오.
그러므로 너희가 견디고 있는 모든 박해와 환난 중에서 너희 인내와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여러 교회에서 우리가 친히 자랑하노라.
박해와 환난은 당시 그리스도인들 모두 당하는 일이었습니다. 바울에게 일어났던 일을 보면 당시 그들이 처한 상황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고후 1장과 11장에 그 내용이 자세하게 나옵니다. 유대인에게서 다섯 번이나 태장을 당했고, 돌로 맞은 적도 있으며, 여행 중에서 겪은 어려움은 수도 없었고, 옥에 갇히고, 잠도 못 잤습니다. “여러 번 굶고 춥고 헐벗었노라.”(고후 11:27)라고 말합니다. 데살로니가 교인들 역시 바울 정도는 아니라고 하더라도 적지 않는 어려움을 당했을 겁니다. 다행히 그들은 그런 어려움을 견뎌냈고, 믿음을 지켰습니다. 그걸 바울은 자랑으로 여깁니다.
이제 바울은 살후 1장 후반부에서 데살로니가 교인들을 격려합니다. 11절에서 그는 그들을 위해서 항상 기도한다고 했습니다. 일종의 중보기도입니다. 11절을 다시 읽겠습니다. 바울의 심정과 그 편지를 읽는 데살로니가 교인의 심정으로 들어보십시오.
이러므로 우리도 항상 너희를 위하여 기도함은 우리 하나님이 너희를 그 부르심에 합당한 자로 여기시고 모든 선을 기뻐함과 믿음의 역사를 능력으로 이루게 하시고 …
바울은 하나님께서 데살로니가 교인들을 ‘부르심에 합당한 자’로 여겨주시기를 기도한다고 했습니다. 부르심(calling)은 교회에서 보통 ‘소명’으로 불립니다. 부르심에 합당한 자로 여겨달라는 말은 부르심에 합당한 자가 되라는 강력한 요청이기도 합니다. 소명에 합당한 사람이란 어떤 사람일까요? 어떻게 그런 사람이 될 수 있을까요? 더 근본에서, 소명은 무엇일까요? 자기 경험이 소명인지 망상인지 어떻게 알 수 있을까요?
소명의식은 양날의 칼과 같아서 아주 강렬하면서도 위험합니다. 쉬운 예로, 사이비 이단 교주를 생각해보십시오. 우리나라에서는 지금 신천지의 이*희 씨가 대표적입니다. 그가 하나님에게서 부르심을 받았는지 아니면 악령의 말에 넘어간 것인지는 구분하기가 쉽지가 않습니다. 신천지 교도들은 당연히 하나님의 부르심이라고 생각할 겁니다. 십자군 전쟁에 나선 이들도 나름으로 부르심을 받았다고 생각했겠지요. 루터는 당시 로마 가톨릭교회로부터 파문당했습니다. 루터를 악령에 사로잡힌 인물이라고 간주한 겁니다. 파문당한다는 말은 누군가 그를 죽여도 죄를 묻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역사가 흘러서 이제는 로마 가톨릭교회에서도 루터를 긍정적으로 평가하기 시작했습니다. 루터는 경건한 수도사요 신학자였는데, 당시 교황청이 제대로 대처하지 못해서 그리스도교의 대분열 사건이 일어났다고 말입니다. 역사는 늘 이런 식입니다. 결정적인 시기를 놓여서 걷잡을 수 없는 방향으로 흘러가곤 했습니다. 지금 우크라이나에서 벌어지는 전쟁도 비슷합니다. 우리가 아무리 노력해도 이런 갈등과 분열이 인류 역사에서 끝나지 않는 이유는, 성경의 표현 방식을 빌리면, 악마의 계략이라고 볼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으로부터 부르심을 받았다는 근거는 무엇일까요?
첫 출발은 자기를 부르신 이가 누군지 알려는 열정과 노력입니다. 그 하나님이 누군지를 알아야 그 부르심에 자신이 합당한지 아닌지를 알지 않겠습니까. 전문 산악인들은 산이 자신들을 부른다고 생각합니다. 그들은 오직 산에 관해서만 생각합니다. 그런 말이 있다고 합니다. 어느 산악인이 “당신은 위험한 산을 왜 오르십니까?”라는 질문을 받자 “산이 거기 있어서요.”라고 대답했다지요. 산이라는 존재에 자신의 영혼이 사로잡혔다는 뜻입니다. 그런 사람에게는 산이 위험한지 아닌지, 돈벌이가 되는지 아닌지, 좀더 편안한 삶이 있는지 등등은 아무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여러분은 이런 산악인 정도로 열망하시나요? 여러분은 어떤 존재에게서 부르심을 받았나요? 그분이 누군지가, 정말 궁금하지 않으십니까? 대충 아는 것으로 만족하시나요?
한 달에 한 번 우리 교회 현장 예배를 참석하는 분에게서 『판넨베르크의 사도신경해설』을 다 읽고 그리스도교의 깊이를 더 실감했다는 말을 얼마 전에 들었습니다. 그 책은 오래전에 제가 번역한 판넨베르크의 『사도신경해설』(한들출판사)을 다시 강독한 책입니다. 저는 그분에게 『기독교가 뭐꼬!』를 추천했습니다. 그분은 <대구 성서아카데미> 사이트에서 전자문자로 이미 읽었는데, 책을 구할 수 없느냐고 묻더군요. 하나님께 관심이 크신 분이라는 걸 느꼈고, 어떻게 해서라도 한 권 찾아서 드리기로 약속했습니다. 저는 하나님께 정말 관심이 있는 분들에게 마음이 갑니다. 그런 이들과 함께 하나님과 우리의 궁극적인 미래에 관해서 이야기하고 싶습니다. 저의 설교도 하나님만을 주제로 합니다. 그래서 어떤 분에게는 재미없게 들릴지 모릅니다. ‘산이 거기에 있기에 산을 오른다.’라는 말처럼 저는 하나님이 거기 존재하시고, 저를 부르시기에 그 하나님께 가까이 가려고 합니다. 어느 수준까지 그분에게 가까이 갈지 확신은 없습니다. 중간에 포기하고 내려올지도 모르고, 뜻하지 않은 사고로 파탄이 날지도 모릅니다만 갈 데까지 가보려고 합니다. 내 귀에 하나님께서 부르시는 소리가 들리지 않을 때까지요.
우리는 보통 하나님의 부르심을 낭만적으로 여길 때가 많습니다. 아니면 너무 무겁게 받아들이기도 합니다. 자기의 일상을 포기하고 세계 오지에 선교사로 간다거나 오로지 교회 생활에만 전념하는 분들도 있습니다. 출가 수도사로 살기도 합니다. 저는 그런 삶이 나름대로 의미가 있기는 하나 그것만을 소명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오늘은 종교개혁 505주년 기념 주일입니다. 종교개혁에 관한 주제로 이번 <복음과 상황> 11월호에 두 꼭지가 실렸습니다. 루터와 칼뱅은 그리스도인의 직업을 소명으로 규정했습니다. 신부와 목사가 하는 교회 업무만이 아니라 일반 그리스도인이 살아가는 세속 직업도 똑같이 소명이라는 겁니다. 그런 전통에 따라서 이제 우리 개신교회에서는 성직과 세속직의 질적인 차이는 없어졌습니다. 무슨 직업이냐가 중요한 게 아니라 그 직업을 하나님의 소명으로 여기느냐가 중요합니다. 우리를 부르신 하나님은 어떤 분이신가요? 여러분은 신앙생활의 세월이 길어지면서 하나님께 더 가까이 다가가십니까?
바울에 따르면 부르심에 합당한 삶을 살아가는 사람에게는 두 가지 일이 일어납니다. 하나는 모든 선을 기뻐할 줄 아는 것입니다. 다른 하나는 믿음의 역사(the work of faith)가 성숙해지는 겁니다. 선한 일과 믿음의 일은 설교 앞부분에서 잠시 말씀드렸던 데살로니가 교회의 실제 문제와 연결됩니다. 그들 중에 일부는 예수의 재림이 임박했다는 생각으로 일상을 거의 포기했습니다. 사이비 교도들에게 나타나는 가장 특징적인 것 중의 하나가 일상에 관한 불성실입니다. 일상에 과몰입하는 것도 잘못이지만 일상을 등한히 여기는 태도도 그리스도교 신앙에서 옳은 게 아닙니다.
1) 일상에서 선을 기뻐하는 삶은 말처럼 쉽지 않습니다. 우리는 보통 다른 이들의 칭찬에 목을 매거나 자기 기분대로 삽니다. 남에게 피해를 주지 않고 자기 식대로 즐겁게 살면 된다는 겁니다. 사람에게는 그럴만한 능력이 없습니다. 자기를 그냥 내버려 두면 당연히 이기적으로 살거나 분노하거나 약올라 하면서 삽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에 합당하게 살려고 노력하는 사람에게만 선을 기뻐하는 삶이 가능합니다. 동의하기 어려우신가요? 하나님과의 관계 없이도 일종의 휴머니스트로서 선을 기뻐하면서 살아갈 수 있다면 저는 그런 분을 존경하겠습니다. 저의 경험으로는 그게 쉽지 않았습니다. 자연인으로서의 저는 아무리 노력해도 그렇게 선한 인간이 못됩니다. 있는 그대로 두면 저 자신에게 한없이 매몰되거나 아니면 적당하게 위선적으로 삽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을 강하게 느낄 때만 최소한 선한 일이 무엇인지를 분간하면서 그런 삶을 추구할 수 있습니다.
2) ‘믿음의 역사’라는 표현에서 볼 때 바울은 데살로니가 교인들의 믿음이 단지 관념에 떨어지지 말고 행함의 차원으로 나아갈 것을 기도했습니다. 믿음과 행함의 균형이라는 말은 우리가 자주 들었지만, 잘 안 됩니다. 예를 들어서 롬 12:17절에서 바울이 한 말을 기억해보십시오. “아무에게도 악을 악으로 갚지 말고 모든 사람 앞에서 선한 일을 도모하라.” 악을 악으로 갚지 않는 것이 곧 믿음의 행위입니다. 우리는 당한 것보다 더 크게 갚아주거나 최소한 당한 것만큼 갚으려고 합니다. 악을 악으로 갚지 않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이라서 오늘 본문은 하나님께서 ‘능력으로’(with power) 이루어 주실 것을 기도했습니다. 하나님의 능력이 임하지 않으면 우리는 분노를 조절할 수 없고, 앙갚음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여러분은 어디서 하나님의 능력을 경험하십니까? 조금 더 정확하게 표현하면 어디서 하나님의 선하신 능력을 경험하십니까? 앞에서 저는 하나님의 부르심에 합당한 사람으로 살려면 우리를 부르신 그 하나님께 가까이 가야 한다고 말씀드렸습니다. 하나님의 능력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께 가까이 가려는 노력은 게을리한 채 선을 기뻐하고 믿음의 행위를 이뤄보려고 애를 쓰는 건 기껏해야 바리새인의 길입니다. 비유적으로 이렇게 설명할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온종일 책을 읽습니다. 저녁이 되어 어두워지면서 글씨가 잘 보이지 않습니다. 책 가까이 얼굴을 들이밉니다. 눈을 더 크게 뜹니다. 그래도 한계가 있습니다. 가장 좋은 방법은 불을 켜는 겁니다. 생명의 빛이라 할 수 있는 하나님의 선한 능력을 경험하는 사람은 당연히 선을 기뻐하고 믿음의 행위를 따라갑니다. 악을 악으로 갚아야겠다는 마음이 들지 않습니다. 천사도 아닌 사람이 어떻게 그럴 수 있느냐, 화도 내고 미워하기도 하고, 원통 해하기도 하는 게 사람 아니냐, 하고 말씀하실 수 있습니다. 물론입니다. 저도 화가 날 때는 나고, 어떤 사람이 싫어질 때는 싫어집니다. 그건 제가 하나님의 선한 능력을 잠시 잃어버렸기 때문입니다. 이럴 때는 다시 불을 켜고 책을 읽듯이 하나님의 선한 능력 안으로 들어가야 합니다.
저는 요즘 몰트만의 책 『절망의 끝에 숨어있는 새로운 시작』(Im Ende-der Anfang)을 조금씩 읽으면서 강독한 녹화 파일을 유튜브에 올립니다. 최근에 읽은 대목이 인상적이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의롭게 하신다는 가르침인 칭의론은 단지 우리의 개인적인 사죄에만 해당하는 게 아니라 행악자나 희생자 모두가 죄에서 해방되는 차원으로 심화 확대되어야 한다고 그는 주장합니다. 악을 행하는 자들은 악의 세력을 거부할 수 없다는 절망에 떨어지고, 희생당한 자들은 자신의 운명 앞에서 절망합니다. 하나님의 의는 이들 모두에게 실현되어야 한다는 겁니다. 그걸 어떻게 실현할 것인지는 우리의 몫입니다. 80~81쪽에 이런 문장이 나옵니다. “의롭게 된 자들의 삶은 단지 자기 자신과 연관된 지속적인 참회 이상의 것이다. 그들의 삶은 하나님의 이름을 거룩하게 하고, 그의 뜻을 행하며, 그의 나라를 희망하며, 그의 영원한 존재를 영화롭게 하는 것으로 가득할 것이다.”
그렇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행하신 하나님의 정의로움을 정말 실질적으로 안다면 그는 개인적인 절망이나 분노에 떨어지지 않고 하나님 나라를 향한 열망 가운데서 진정한 의미에서 정의로운 세상을 향해서 치열하게 투쟁하게 될 것입니다. 다시 강조합니다. 개인적인 적개심이나 분노가 아니라 하나님 나라의 의를 세우려는 거룩한 열망이 여기서 중요합니다. 그런 신앙적인 차원에 들어간다면 그는 미움과 두려움이 아니라 사랑과 희망으로 선한 일을 즐거워하고, 믿음의 행위가 무엇인지를 찾아 나설 겁니다. 한 마디로 악을 악으로 갚지 않습니다.
바울의 기도는 12절로 이어집니다. 11절에서 말한 부르심에 합당한 사람들 가운데서 ‘우리 주 예수의 이름이’ 영광을 받게 된다고 했습니다. 예수께서 말씀하셨던 일이 우리 가운데서 나타나는 게 곧 그분의 이름이 영광을 받는 것입니다. 보통은 하나님의 영광이라고 말하는데, 여기서는 예수의 영광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영광과 예수의 영광을 하나로 본 것입니다.
그런데 12절에는 정말 놀라운 말씀이 나옵니다. 데살로니가 교인들도 영광을 받게 될 것이라고 말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이나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이라는 말은 이해가 가지만 우리 그리스도인의 영광이라는 말은 너무 엄청나서 부담스럽기조차 합니다. 우리에게는 영광이라기보다는 오히려 부끄러움과 죄가 훨씬 크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영광을 받는다는 말은 우리가 살아있는 동안 영광스러운 존재로 변한다는 뜻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오는 영광의 빛에 휩싸인다는 뜻입니다. 바울은 이런 그리스도인의 영적 실존을 갈 2:20a절에서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예수 그리스도를 ‘살아있는 자’로 경험하는 것이야말로 곧 영광을 얻는 것입니다.
여러분도 이런 신앙으로 살고 싶겠지만 잘 안 될 겁니다. 그래서 바울은 본문에서 ‘우리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언급했습니다. 은혜를 모르는데 어떻게 영광을 경험할 수 있겠습니까. 번뇌와 망상으로 잠을 못 이루는 사람이 어떻게 이 가을의 풍요로움을 느낄 수 있겠습니까. 예수 그리스도와 그가 행한 일이 자기 안에서 살아있다는 사실을 절감한다면, 그래서 죽는 순간에도 십자가와 부활의 예수 그리스도가 자기와 함께한다는 사실을 절감한다면 그는 이미 영광을 얻는 사람입니다. 이 영광을 불교 용어로 바꾸면 온갖 번뇌와 망상이 사라진다는 뜻의 열반(nirvana)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인가요? 부르심에 합당한 사람으로 살려고 애를 쓰십니까? 우리를 부르신 분에게 조금이라도 가까이 가려고 지금도 노력하십니까? 그런 기도를 드립니까? 저는 오늘 설교자로서 바울의 말에 기대서 여러분에게 권면합니다. 우리를 부르신 그분의 부르심에 합당한 사람이 되어서 그분의 영광을 드러내며, 예수 그리스도에게 드러난 하나님의 영광에 여러분도 참여하기를 진심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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