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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절

부활의 오늘과 내일

mms://61.100.186.211/pwkvod/dawp/dawp_080323.wmvmms://wm-001.cafe24.com/dbia/dawp_080323.mp3부활의 오늘과 내일
2008.3.23. 골 3:1-4

오늘 우리가 읽은 골로새서 3:1-4절 말씀은 기독교 신앙의 엑기스와 같습니다. 엑기스는 물에 타서 마셔야지 그것만 먹기 힘든 것처럼 이 말씀도 그냥 먹기는 쉽지 않습니다. 아주 짧은 이 말씀에 등장하는 신앙 용어를 간추리면 다음과 같습니다. 부활, 천상의 것, 하나님의 오른편, 생명의 은폐성, 그리스도의 재림, 영광이 그런 것들입니다. 이게 도대체 뭔 말인가, 하고 약간은 막막한 생각이 들 겁니다. 저는 여러분들이 이것을 맛있게 먹고 소화를 잘 시킬 수 있도록 준비하는 요리사와 같습니다. 재료는 최상급인데 잘못하면 요리를 망칠 수도 있으니, 조심해야겠지요. 우선 바울이 이런 내용을 편지로 쓴 이유가 무엇인지를 살펴보는 것으로 시작하는 게 좋겠습니다. 그걸 알아야만 기독교 신앙이 우리의 삶과 직접적으로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으니까요.
본문의 바로 앞 구절인 골 2:16-23절에서 바울은 골로새 교우들이 세상의 여러 규범과 터부 같은 것에 묶여 있다는 사실을 지적했습니다. 16-19절은 철학과 종교적 터부이고, 20-23절은 윤리적 터부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와 더불어 세상에 대해서는 죽었고, 그분의 부활과 더불어 하나님에 대해서 살았다고 믿는 골로새 기독교인들이 세상의 문제로 인해서 시비가 분분하고, 또 그런 것을 두려워한다고 지적한 것입니다. 16절에 따르면 그들은 먹는 문제로 서로 비난했으며, 초승달 축제와 안식일 문제로 서로 싸웠습니다. 21절에 따르면 골로새 교우들은 “이것은 집지 말고, 저것은 맛보지 말고, 그것은 건드리지 마라.”하는 규정에 묶여 있었습니다. 바울에 따르면 골로새 교우들이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는 이런 것들은 모두 지나가는 것에 불과합니다. 이런 것에 마음을 쏟는 삶은 “제멋대로의 예배와 과장된 겸손과 부질없는 금욕주의”에(23절) 빠지는 것입니다. 이런 삶의 태도는 현명한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 육체의 욕망을 제어하는 데는 무기력하다고 합니다.
여러분들은 골로새 교우들의 삶과 신앙생활에 대한 바울의 지적을 보고, 자신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문제라고 생각할지 모르겠군요. 서로 다른 시대에 살고 있으니 구체적인 사안에서는 다를 수밖에 없지만, 근본적인 문제에서는 똑같습니다. 우리의 삶이 얼마나 이 세상의 것들에 묶여있는지는 여기서 일일이 지적할 필요도 없습니다. 오늘 우리도 온통 무엇을 지키는지 아닌지에만 몰두하고 있습니다. 바울의 표현을 그대로 빌리면 “과장된 겸손과 부질없는 금욕주의”에 빠져 있습니다. 무슨 뜻인가요? 이 세상이 요구하는 기준에 딱 맞게 살기 위해서, 마치 영어 토익 점수 커트라인에 들기 위해서 우리의 영적인 삶까지 희생시킨다는 뜻입니다.
바울은 그런 것이 우리의 육체적 욕망을 제어하는 데 아무런 능력이 없다고 합니다. 여기서 육체적 욕망은 단지 우리의 육체적 본능을 가리키는 게 아닙니다. 우리가 먹고, 남녀가 사랑을 나누면서 살아가는 본능은 하나님의 창조 능력입니다. 그것은 선한 것입니다. 바울이 말하는 육체적 욕망은 우리의 참된 생명을 파괴하는 악한 능력을 가리킵니다. 자기를 성취하기 위한 무절제한 욕심 같은 것이지요. 그런 욕망의 포로가 되면 아무리 많은 것을 소유해도 결국은 참된 만족에 이를 수 없습니다. 참된 만족이 없다면 그의 생명은 불행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이런 것은 우리가 이미 세상살이에서 경험한 것들입니다. 아무리 세련된 삶의 방식을 따른다고 하더라도, 세상이 요구하는 삶의 기준에 들어간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우리의 육체적 욕망을 없애주지 못한다는 바울의 지적은 정말 옳습니다. 그렇다면 기독교인들은 어떻게 살아야 하나요? 오늘 본문에서 바울은 바로 그것을 설명합니다.

천상의 것
바울은 본문 1절과 2절에서 반복적으로 천상의 것을 추구하라고, 거기에 있는 것들에 마음을 두라고 강조합니다. 이런 말씀을 듣고, 여러분은 그렇지 않으리라고 보지만, 혹시 실망하지 않으셨습니까? 너무 상투적인 답변이라고 말입니다. 현실성이 없다고 말입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이 세상만이 확실한 것이지 그 위에는 아무 것도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대개가 그렇게 생각하고 있을 겁니다. 그런 생각으로 이 세상에서 자기를 성취하는 데만 모든 힘을 소진하고 있습니다. 그런 생각은 사람들이 성서가 말하는 천상의 것이 무엇인지 아직 잘 모른다는 증거입니다. 부활과 생명과 세상을 진지하게 생각하지 않는다는 증거입니다. 성서가 말하는 천상, 위의 세계는 무엇일까요?
바울은 시편 110편을 인용해서 이렇게 말합니다. “거기에서 그리스도는 하느님의 오른편에 앉아 계십니다.”(1b) 여기서 말하는 하느님의 오른편은 단순히 그런 방향을 가리키는 게 아닙니다. 고대인들에게 오른편은 그 주체와 동일한 능력을 가리킵니다. 그리스도가 하느님의 오른편에 앉아 계시다는 말은 그리스도가 하나님과 동일한 능력과 동일한 존재 방식을 취하셨다는 뜻입니다. 천상은 바로 그런 곳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과 일치를 이룬 곳입니다. 그 천상을 우주 어느 공간으로 생각하면 곤란합니다. 하나님은 우주의 한 지점에 정좌하고 계신 분이 아닙니다. 우주 전체가 바로 하나님의 자리입니다. 하나님이 없는 곳은 없습니다. 지금 우리가 살아가는 이 땅도 바로 하나님이 계시는 곳이고, 우리가 지금 전혀 알지 못하는 우주의 어느 별도 역시 하나님이 계시는 곳입니다. 일정한 공간에 한정되지 않습니다. 온 세계가 하나님의 창조물이듯이 온 세계가 바로 하나님이 존재하는 천상입니다. 이 말은 하나님이 곧 천상이라는 뜻입니다. 그 하나님과 동일하신 예수 그리스도가 바로 천상입니다. 이제 우리는 천상의 것에 마음을 두라는 바울의 가르침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다른 게 아니라 하나님에게, 곧 그리스도에게 마음을 두라는 뜻입니다.
천상의 것에 마음을 두어야 할 이유는 두 가지입니다. 첫째, 기독교인들은 이 세상에서는 이미 죽은 사람들입니다.(3a)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받은 세례는 세상에 대해서 죽었다는 의미입니다. 세상에 대해서 죽는다는 신앙고백은 우리의 전체 실존에 해당되는 것이지 한 부분에 한정되는 게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알고 난 뒤에는 자신이 자랑으로 여기던 모든 것들을 배설물로 여기게 되었다는 바울의 고백이 바로 이 사실을 가리킵니다. 그가 자랑으로 여기던 것들이 무엇인지 여러분은 잘 아실 겁니다. 거기에는 우리가 높은 가치를 부여하는 것들도 포함됩니다. 그의 모든 학문과 종교적인 업적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골 2:22절에서 그런 것이 한번 쓰고 나면 없어져 버릴 것이라고 했습니다. 참으로 이상한 일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모두 애를 쓰면서 붙잡으려고 한 것들이 없어져버릴 것이라니요. 이 세상을 조금이라고 정확하게 들여다보는 사람이라고 한다면 바울의 이런 진술에 동의할 것입니다. 우리가 지난날 성취하려고 했던 그 모든 것들이 어디로 갔는지 생각해보십시오. 과학자들의 모든 발견과 발명이 어디로 갔는지 보십시오. 아무 것도 영원한 것은 없습니다. 이 세상에 던져진 우리가 소유하려는 모든 것들은 잠시 우리에게 머물러 있다가 빠져나갑니다. 우리가 세상에서 죽었다는 말은 이런 것들을 절대적인 것으로 여기지 않는다는, 여기서 생명을 얻을 수 없다는 뜻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런 것과 전혀 다른 것에 마음을 두어야겠지요. 그것이 바로 천상입니다. 하나님, 그리스도이십니다.
둘째, 바울에 따르면 기독교인들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아난 사람들이라는 게 또 하나의 이유입니다.(1절) 이것은 부활을 가리킵니다. 우리가 세례를 통해서 이 세상에 대해 죽었다면, 이제 하나님 향해서 새로운 삶을 얻었습니다. 부활은 우리의 능력이 아니라 이 세상을 창조하신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십자가에 처형당한 예수님을 죽은 자들 가운데서 삼일 만에 다시 살리신 하나님이 세상에서 이미 죽은 우리를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기독교의 가장 핵심적인 신앙입니다.
세상에 대해서 죽었다는 말은 위에서 설명한 대로 어느 정도 따갈 수 있지만, 다시 살았다는 말은 이해하기 힘들다고 생각하는 분들이 있을 겁니다. 세상에서 자기를 성취하려는 욕망을 포기한다는 것은 실제로 그렇게 살아가지는 못한다고 하더라도 일단 무슨 뜻인지는 알 수 있지만, 부활이라니요! 우리가 다시 살았다니요! 도대체 그게 무엇을 말하는 건가요?
바울의 설명을 잘 보십시오. “여러분의 참 생명은 그리스도와 함께 하느님 안에 있어서 보이지 않습니다.”(3b절) 우리 눈에는 보이지 않지만 하나님 안에 숨어 있는 그 생명이 바로 부활입니다. 그것은 이 세상과 더불어서 사라지는 게 아닙니다. 그것만이 영생입니다. 다시 말씀드립니다. 그 생명은 지금 우리 눈에 보이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 안에 감추어져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아난 우리의 생명은 지금 하나님 안에 은폐되어 있습니다. 사람들은 현재 드러난 것만은 확실한 것으로 생각하지만, 그것은 생명의 신비를 잘 모르는 데서 나오는 생각입니다. 지금 우리가 경험하는 것만 봐도 이것은 확실합니다.
요즘 저는 점심을 먹고 잠시 쉬는 시간에 베란다의 소파에 앉아 있을 때가 많습니다. 햇볕도 받고 화초의 향도 맡을 수 있어서, 참으로 행복합니다. 나뭇가지에서 순이 나오기도 하고, 꽃이 나오기도 합니다. 그것이 나오기 전에 우리 눈에는 아무 것도 보이지 않습니다. 그 나뭇가지를 잘라보십시오. 그 안에서 새순과 꽃을 찾을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순과 꽃은 도대체 어디 있다가 나온 겁니까? 그것은 순과 꽃과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나무 안에 숨어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아난 우리는 나뭇가지 안에 숨어 있는 순이나 꽃처럼 하나님 안에 숨어 있습니다. 그것을 눈에 보이도록 확인시키라고 말하는 것은 아직 봄이 오지 않았는데도 나뭇가지를 잘라서 순과 꽃을 찾아내라는 요구와 똑같습니다. 그런 요구를 하는 사람은 부활 생명의 은폐성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 안에 숨어 있는 생명이 곧 부활의 ‘오늘’입니다. 오늘 우리의 부활생명은 숨어 있기 때문에 그런 순간을 버텨내려면 인내심이 필요합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 살면서 여전히 부활 생명을 실제로 살지는 못합니다. 여전히 먹어야 하고, 슬프기도 하고, 외롭기도 합니다. 수많은 시행착오도 겪어야 합니다. 겨울철의 나뭇가지만 보면 순과 꽃을 상상할 수 없듯이, 이 세상에서 부활이 없는 것 같은 절망적인 순간도 겪게 될 겁니다. 그래서 우리에게는 신앙이 필요합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온전히 신뢰하는 그 신앙이 필요합니다. 바울이 그것을 설명하는 중입니다. 그런 신앙을 놓치지 말라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우리의 부활 생명이 하나님 안에 숨어 있다는 놀라운 사실을 알고 믿어야 한다고 말입니다.

부활 생명의 현현
부활 생명이 영원히 숨어 있지는 않습니다.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여러분의 생명이신 그리스도가 나타나실 때에 여러분도 그분과 함께 영광 속에 나타나게 될 것입니다.”(4절) 이게 부활의 미래입니다. 이 마지막 때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영광으로 나타납니다. 마치 마른 나뭇가지에서 어느 순간에 화사한 꽃이 피어나듯이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예수 그리스도처럼 궁극적인 생명을 얻게 될 것입니다. 그 순간을 상상해보십시오. 여러분은 하나님의 영광에 참여하게 됩니다. 여러분은 꽃으로 피어납니다. 지금 우리의 생명과는 질적으로 다른 생명 안으로 들어가게 됩니다. 그럴 때 비로소 우리는 참된 우리가 됩니다. 그때가 되어야 우리는 우리가 누구인지 확실하게 알게 됩니다. 그때 우리는 우리의 실체를 확인하고 놀라게 될 것입니다.
이런 부활 생명의 현현에서도 역시 예수 그리스도가 핵심입니다. 우리 스스로, 독자적으로 부활 생명의 실체 속으로 들어가는 게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갑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이미 부활의 실체가 되신 분이십니다. 그분이 우리에게 현재 나타나지 않는 이유는, 더 정확하게 말해서 우리가 그를 실체로 느끼지 못하는 이유는 우리가 아직 부활의 실체가 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마지막 때가 되면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 덕분으로 부활의 실체가 될 것입니다. 이런 희망을 안고 사는 사람이라고 한다면 그는 당연히 천상의 것을 추구하고 거기에 마음을 두어야하겠지요.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님에게 집중해야겠지요. 그가 이루실 부활의 세계에 모든 영적인 힘을 모아야겠지요.
세상 사람들은 본문이 말하는 그 부활의 미래를 확실하지 않다고, 그래서 믿을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먼 미래보다는 지금 당장 이 세상에서 잘 먹고 잘 사는 게 중요하다고 주장합니다. 그런 삶이 바로 바울이 말한 대로 지상의 것에 마음을 두는 것입니다. 바울의 경고를 잊지 마십시오. 그것으로 우리가 행복해질 수 없답니다. 그것으로 우리가 멋지게 살 수 없답니다. 그런 것은 우리의 육체적 욕망을 제어하는 데 아무런 능력이 없습니다. 그런데 마음을 두면 둘수록 우리는 점점 불안해지거나 약 올라 하게 되고, 또는 교만해질 뿐입니다.
오해하지 마십시오. 바울이 지금 이 세상의 일은 아무런 의미가 없으니까 포기하고 신앙적인 것에만 신경을 쓰라고 하는 게 아닙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 책임질 일에서 도망가도 좋다는 뜻이 아닙니다. 세상과는 담을 쌓고 교회 일만 하라는 것도 아닙니다. 바울이 역사허무주의를 주장하는 게 아닙니다. 제가 앞에서 말씀드린 대로 바울이 왜 본문을 기록하고 있는지를 다시 기억하십시오. “그들은 보이는 것에만 정신을 팔고 세속적인 생각으로 헛된 교만에 부풀어 있습니다.”(골 2:18b) 세상의 일로 자기를 앞세우는 것이 문제입니다. 역사적 책임은 마지막 부활의 세계로 들어가지 못한 기독교인들이 마땅히 감당해야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2천 년 전에 일어났던 예수님의 부활은 우리가 참된 생명으로 들어가는 유일한 길입니다. 오늘, 우리의 생명은 하나님 안에 숨어 있습니다. 내일, 여러분의 부활 생명은 영광으로 나타나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천상의 일입니다. 바로 여기에 여러분의 마음을, 여러분의 영혼을 붙들어 매십시오. 예수님이 부활하셨습니다!  

골로새서 3: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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