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활의 증인이란?
행 5:27-32, 부활절 첫째 주일, 2016년 4월3일
27 그들을 끌어다가 공회 앞에 세우니 대제사장이 물어 28 이르되 우리가 이 이름으로 사람을 가르치지 말라고 엄금하였으되 너희가 너희 가르침을 예루살렘에 가득하게 하니 이 사람의 피를 우리에게로 돌리고자 함이로다 29 베드로와 사도들이 대답하여 이르되 사람보다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이 마땅하니라 30 너희가 나무에 달아 죽인 예수를 우리 조상의 하나님이 살리시고 31 이스라엘에게 회개함과 죄 사함을 주시려고 그를 오른손으로 높이사 임금과 구주로 삼으셨느니라 32 우리는 이 일에 증인이요 하나님이 자기에게 순종하는 사람들에게 주신 성령도 그러하니라 하더라.
오늘 설교 본문인 행 5:27절에 따르면 예수님의 제자들이 유대교의 최고 법정인 산헤드린 앞에서 재판을 받는 일이 벌어졌습니다. 당시는 예수님이 이미 세상을 떠난 뒤에 제자들만 남아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사람들에게 전할 때였습니다. 제자들의 복음 전도가 유대교에게는 기분 나쁜 일이었습니다. 원래 유대교와 초기 기독교 사이의 관계가 그렇게 나쁘지 않았습니다. 기독교는 유대교 안에서 바리새파와 사두개파처럼 나사렛파로 자리를 잡고 있었습니다. 유대교의 전반적인 질서를 그대로 따르면서도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신앙이 가능했기 때문입니다. 문제는 기원후 70년에 발생한 예루살렘 함락입니다. 수년에 걸친 유대인과 로마 군대 사이에 벌어진 전쟁은 결국 로마 티투스 장군에 의해서 예루살렘이 정복되는 것으로 끝났습니다. 그때가 기원후 70년입니다. 예루살렘 성전도 허물어지고 제사장 제도도 없어지게 되었습니다. 유대교는 율법 중심으로 명맥을 이어나갔습니다. 율법을 신학적으로 연구하는 율법학자들의 학문 활동, 그리고 율법을 실제 삶에서 철저하게 실현해보려는 바리새파 운동을 활발하게 전개하기 시작했습니다. 기독교인들에게도 율법을 강요하기 시작했습니다. 자신들의 말을 따르지 않는 기독교인들을 박해했습니다. 오늘 본문이 보도하는 것처럼 제자들이 산헤드린의 재판을 받게 된 것도 다 이런 사정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마틴 루터가 로마가톨릭에 의해서 종교재판을 받는 형편과 비슷합니다.
28절에서 대제사장이 예수님의 제자들에게 묻습니다. ‘우리가 이 이름으로 사람을 가르치지 말라고 엄금하였으되 너희가 너희 가르침을 예루살렘에 가득하게 하니 이 사람의 피를 우리에게로 돌리고자 함이로다.’ 예수 죽음의 책임이 자신들에게 있는 것처럼 말하고 다니지 말라는 겁니다. 산헤드린의 입장을 이해 못할 거는 없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처형은 유대교의 종교법이 아니라 로마의 형법에 의한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처형에 대한 책임이 유대인들에게 있는 것처럼 말하는 것은 명예훼손이자 유언비어 유포입니다. 따라서 그런 내용을 공개적으로 사람들에게 전하는 예수님의 제자들을 용납하지 않겠다고 지금 위협하는 중입니다.
제자들을 대표해서 베드로가 대답합니다. 대답을 간추리면 핵심적으로 네 가지입니다. 1) 사람보다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이 옳다. 2) 당신들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달리게 했다. 3) 하나님이 예수님을 살리고 높이셨다. 4) 우리는 이 일에 증인이다. 이런 베드로의 주장을 듣고 산헤드린 의원들은 기가 막히기도 하고 골치 아프다고 생각했을 겁니다. 행 5:33절에 따르면 산헤드린 의원들이 크게 화를 내면서 제자들을 없애버릴 생각을 했다고 합니다. 다행히 가말리엘이라는 바리새파 율법교사가 중재에 나서서 제자들을 채찍 형에 처한 다음에 풀어주게 했습니다. 이렇게 시국이 엄중한 가운데서도 제자들은 유대교의 권위에 주눅 들지 않고 자신들의 신앙적 소신을 밀고 나갔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제자들이 자신들의 정체성을 예수 사건에 대한 증인이라고 보았다는 사실입니다. 32절 말씀을 읽겠습니다.
우리는 이 일에 증인이요 하나님이 자기에게 순종하는 사람들에게 주신 성령도 그러하니라.
증인은 법적인 용어입니다. 고대 유대교 법정이나 로마 법정에서 증인의 말은 법적인 효력이 있었습니다. 요즘 청문회에서도 증인 선서를 볼 수 있습니다. 증인으로 나온 사람은 양심에 따라서 사실만을 말해야 합니다. 만약 나중에 증인의 말이 거짓으로 드러나면 처벌을 받아야만 합니다. 헬라어로 증인은 ‘마르투스’라고 하는데, 이 단어는 증인(witness)이라는 뜻과 동시에 순교자(martyr)라는 뜻도 있습니다. 제자들이 자신들의 정체성을 증인이라고 고백했다는 것은 순교를 각오할 정도로 신앙을 자신의 운명과 일치해서 생각했다는 뜻입니다.
이런 말을 들으면 현대 기독교인들은 뭔가 불편한 마음이 들거나, 또는 그런 태도는 제자들에게나 어울리지 우리와는 거리가 먼 거라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현대 기독교인들은 대개 신앙을 교양 수준에서 받아들입니다. 살아가는데 교양이 필요하기는 합니다. 교양이 있는 사람과 없는 사람의 차이는 큽니다. 언행이 세련된 사람과 함께 지내면 기분이 좋아지지만 거친 사람과 지내면 기분이 나빠집니다. 그러나 교양은 사람에서 절대적인 게 아닙니다. 교양이 있으면서 악한 사람이 있고, 교양이 없으면서 선한 사람이 있다면 여러분은 어떤 사람을 택하겠습니까? 교양은 사람의 겉모양입니다. 포장입니다. 때에 따라서 포장은 바뀔 수도 있으니까 필수는 아닙니다. 기독교 신앙을 교양 수준으로 여기는 사람은 자기 정체성을 증인으로 여길 수 없습니다.
이 말을 ‘모이면 기도하고, 흩어지면 전도하자.’는 구호처럼 무조건 교회생활에 묶여서 살아야 한다는 것으로 받아들이면 곤란합니다. 열광적으로 교회에 매달리는 사람으로 보이는데, 포즈만 그렇게 취할 뿐이지 실제로는 증인이라는 단어가 가리키는 순교와는 반대로 생각하고 행동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예컨대 세상 사람들 못지않게 자본주의에 물들어 있고, 세상 사람들 못지않게 많이 생산해서 많이 소비하는 것을 삶의 목표로 여깁니다. 세상 사람들 못지않게 자기를 확인하는 것에만 몰두하고 있습니다. 기도와 찬송과 예배와 봉사 등, 종교적인 형식을 정성스럽게 따라가고 있지만 실제 삶의 내용은 세속적입니다. 신앙생활을 통해서 자기의 욕망을 성취하려고 합니다. 이런 신앙행태는 또 하나의 다른 교양입니다. 이런 신앙행태를 증인의 삶이라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복잡한 세상에서 대충 기독교적인 교양을 유지하면서 사는 것만 해도 괜찮지 않느냐, 굳이 증인의 정체성 운운하면서 심각하게 생각하면서 살기에는 이 세상살이가 너무 고달프지 않느냐, 하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런 것으로 만족하는 분들은 그렇게 살면 됩니다. 모두가 증인으로 살아갈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증인으로서의 기쁨을 누리지 못한다는 것만은 알아두어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증인으로 산다는 것은 그 어떤 것으로도 대체될 수 없는 삶의 깊이로 들어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 말은 거꾸로, 우리가 증인으로 살지 못하는 이유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삶의 깊이를 경험하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 경험이 무엇일까요?
베드로는 산헤드린 대제사장의 질문에 겁을 먹지 않고 당당하게 대답했다고 앞에서 말씀드렸습니다. 그 대답에서 베드로는 아주 중요한 사실을 짚었습니다. 십자가형을 당하신 예수님을 하나님이 살리셨다는 겁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가리킵니다. 그 부활이 실제로 무슨 의미인지를 31절에서 이렇게 설명했습니다.
이스라엘에게 회개함과 죄 사함을 주시려고 그를 오른손으로 높이사 임금과 구주로 삼으셨느니라.
‘그를 오른손으로 높이사’라는 말은 부활 승천을 가리킵니다. 이런 표현은 신화적입니다. 하나님에게 오른손이 있고 왼손이 있는 게 아닙니다. 하나님이 옛날 왕처럼 우의정과 좌의정을 두고 문무백관을 그 아래로 두는 분은 아닙니다. 오른손이라는 표현은 하나님이 예수님을 당신과 동일한 능력을 행사할 수 있게 하셨다는 뜻입니다. 그 능력은 부활입니다. 하나님이 이런 놀라운 일을 행하신 이유가 있습니다. 본문이 말하는 대로 회개와 죄 사함입니다. 부활이 회개와 사죄의 근본적인 능력이라는 뜻입니다. 이런 표현이 멀리 느껴지는 분들도 있을 겁니다. 부활 자체도 믿기 힘들고, 회개와 사죄는 더더욱 거리가 멀게 느껴집니다. 그러니 예수 그리스도의 증인으로 산다는 베드로의 말을 실감 나게 들을 수가 없습니다. 회개와 사죄가 무엇을 가리키는지를 먼저 아는 게 필요합니다.
예수님이 공생애를 시작하면서 첫 번으로 외친 말씀은 ‘회개하라 하나님 나라가 가까이 왔다.’입니다. 회개라는 말을 들으면 일단 죄가 생각날 겁니다. 틀린 생각은 아닙니다. 성서는 죄를 인간의 삶을 파괴하는 가장 근원적인 것으로 여깁니다. 그래서 창세기 앞부분에서 아담과 이브의 죄, 가인의 죄, 바벨탑을 쌓은 이들의 죄를 말하고, 거기에 따른 하나님의 징벌을 말합니다. 죄를 존재론적 무게로 받아들이는 겁니다. 저는 성서의 가르침이 옳다고 생각합니다. 보십시오. 사람 사이에 끊임없이 갈등과 싸움과 폭력행사가 벌어집니다. 어느 사회이건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는 사회는 없습니다. 가난한 나라거나 잘 사는 나라나 차이가 없습니다. 법이 발전한 나라나 법이 없는 오지나 차이가 없고, 못 배우고 못 살던 고대 사회나 풍요를 구가하는 21세기나 별 차이가 없습니다. 보이는 폭력만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폭력이 인간 사회를 지배하고 있습니다. 근본 원인이 뭐라고 생각하십니까? 성서는 죄라고 말합니다.
죄는 자기를 높이는 마음을 가리킵니다. 학자들에 따라서 약간씩 다르게 표현합니다. 어거스틴은 교만이라고 했고, 아퀴나스는 자기 사랑, 판넨베르크는 자기집중이라고 했습니다. 자기를 중심에 두려는 생각이 바로 죄입니다. 우리 주변에서 벌어지는 수많은 충돌, 그로 인해 벌어지는 불행의 이유는 자폐적이고 퇴행적으로 자기에게 집중하는 마음, 즉 교만이라는 죄에 있습니다. 사람은 자기중심성에서 벗어날 수 없기 때문에 기독교는 모든 사람이 죄에 물들었다고 말합니다. 이런 말은 사람을 비하하려거나 사람을 죄책감에 사로잡히게 하려는 게 아니라 있는 그대로의 사람을 직관하려는 것입니다. 저는 이런 인간 이해가 저 개인을 놓고 볼 때도 옳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아무리 노력해도 자기중심에서 벗어나지 못합니다. 좋은 의지를 갖고 있는 사람들도 모이면 충돌하게 되어 있습니다. 수도원에 들어가도 이 문제가 해결되지 않습니다. 많은 공동체들이 실패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바울이 로마서에서 말하듯이 모든 사람들이 죄의 지배 아래 놓여 있습니다.
회개는 자기중심에서 벗어나는 것입니다. 문제는 이게 불가능하다는 데에 있습니다. 자기 스스로는 회개가 불가능합니다. 그건 죽을 때까지 우리가 견뎌야 할 실존입니다. 하나님이 완전히 다른 길을 허락하셨습니다. 자기중심성에서 벗어나지 못함에도 불구하고 죄를 용서받는 길을 허락하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기만 하면 죄에서 용서받을 수 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으로부터 의롭다는 인정받는다는 칭의입니다. 실제로는 아닌데 그렇다고 인정받는 것입니다. 칭의가 구원이기 때문에 신약성경은 반복해서 예수를 믿으라고 호소합니다. 십자가에 달려 죽었으나 하나님에 의해서 죽은 자로부터 살아난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라고 말입니다.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는다는 것, 예수를 부활한 자로 믿는다는 것, 그를 종말에 재림할 자로 믿는다는 것은 예수를 길과 진리와 생명으로(요 14:6) 믿는다는 뜻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생명의 실질(reality)로 경험하는 것입니다. 이게 기독교 신앙의 진수입니다. 이게 여러분들에게 얼마나 실질적으로 느껴지는지 모르겠습니다. 삶을 단순히 고상하게 잘 먹고 잘 사는 차원에서만 생각하면 이런 말은 도저히 받아들여지지 않습니다. 새로운 시각이 열려야만 합니다. 저는 2015년 4월부터 2016년 3월까지 수요일 저녁마다 <욥기>를 욥기를 공부하면서 많은 걸 새롭게 깨달았습니다. 그 중의 하나인 38:24절 말씀이 기억납니다. ‘광명이 어느 길로 뻗치며 동풍이 어느 길로 땅에 흩어지느냐.’ 그 구절을 읽으면서 바람에 색깔을 입히면 어떻게 보일지를 상상해보았습니다. 바람이 강도와 방향과 높낮이에 따라서 여러 가지 색깔로 나타난다면 세상은 완전히 색다르게 보일 겁니다. 이런 상상력을 가진 사람과 없는 사람의 세상 경험은 질적으로 다릅니다. 예수님을 전혀 다른 생명체로, 즉 부활한 자로 경험하는 사람은 전혀 다른 세계로 들어가는 겁니다. 그 경험이 너무 또렷하기에 그는 증인으로 살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여러분은 지금 어떻습니까?
베드로는 이런 새로운 생명의 경험을 죄 사함이라고 말했습니다. 죄 사함을 단순히 자신의 부도덕한 행위가 용서받았다는 것에 한정해서 생각하면 곤란합니다. 죄는 자기중심성이라고 앞에서 말씀드렸습니다. 죄가 용서받았다는 말은 더 이상 자기중심으로 살지 않아도 된다는 허락을 받았다는 뜻입니다. 참으로 혁명적인 가르침입니다. 이 가르침을 실제로 이해하고 믿는 사람이라면 그는 자유와 평화를 삶의 내용으로 삼고 살아갈 수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죄 사함은 오직 믿음 하나로 자유와 평화가 주어졌다는 선언입니다. 노예 해방 선언과 같습니다. 이것보다 더 역동적인 삶은 없습니다. 그 삶이 부활 신앙의 요체입니다.
우리가 자유와 평화를 누리지 못하는 이유는 세상이 요구하는 어떤 것에 대한 부담 때문입니다. 그런 요구들은 아주 특별한 상황을 제외하면 대개 허상입니다. 자기 집이 30평이나 50평이냐에 민감합니다. 연봉이 3천이냐 5천이냐에 민감합니다. 그 차이라는 걸 크게 느끼는 사람들은 거기서 벗어나지 못합니다. 제가 목사니까 교회 문제로 바꾸면 다음과 같습니다. 목회에서 교회성장을 최고 가치로 두는 목사라면 그게 짐이 됩니다. 그런 짐은 바로 죄로 인한 징벌입니다. 이런 데서는 결코 목회의 자유와 평화를 누릴 수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모든 짐으로부터의 해방입니다. 그 해방이 죄 사함입니다. 잘 생각해보십시오. 왜 힘들게 노동하고, 돈 벌고 애를 쓰며 삽니까? 자유와 평화 때문입니다. 그걸 안식이라고 해도 좋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자유와 평화를 찾는다고 하면서도 실제로는 세상의 노예로 사는 겁니다. 베드로는 자유와 평화를 가리키는 죄 사함을 경험했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의 증인으로 산다고 고백한 것입니다. 여러분은 지금 어떻습니까?
이런 말을 들을 때마다 마음은 원이지만 육신이 약해서 어쩔 수 없다 하는 말을 자주 합니다. 어떻게 해야 할까요? 어떻게 우리는 베드로처럼 예수 그리스도의 증인으로서 회개와 죄 사함, 즉 자유와 평화를 누리면 살 수 있을까요? 21세기 대한민국의 상황은 좋지 않습니다. 왜 그런지는 저보다 여러분이 더 잘 알 것입니다. 천박하고 세속적이고 포악한 사회구조를 여러분 개인이 스스로 뚫고 나가기는 불가능합니다. 그런 사회구조에서 자유와 평화는 요원해보입니다. 자유와 평화는 관념으로만 떠돌고 실제로는 억압과 전투로 살아갑니다. 마음 같아서는 모든 걸 때려 치고 수도원에 들어가고 싶지만 이게 현실에서 불가능하니, 최선은 재가 수도자처럼 사는 겁니다. 무슨 일을 하든지 예수의 부활을, 즉 회개와 죄 사함을 주시려고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를 새로운 생명의 세계로 높이셨다는 사실을 마음에 새겨야 합니다. 이런 삶의 태도를 진실한 마음으로 구도자처럼 유지한다면 여러분은 여러분의 삶에서 자유와 평화의 영역이 확장되면서 결국 산헤드린 대제사장 앞에서 베드로가 고백한 것처럼 부활의 증인으로서 당당하게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0개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