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4월 20일 예배 영상 https://www.youtube.com/live/mJ660bUC5po?si=St7VGOKPDeSI74ab
▣ 들어가는 말
- 부활을 잊은 시대
“우리는 이 사람이 이스라엘을 속량할 자라고 바랐노라.”(눅24:21) 엠마오로 가는 제자들은 부활 소식을 들었음에도 이렇게 말합니다. 여기서 ‘속량하다’라는 의미의 헬라어는 ‘λυτροῦσθαι’(뤼트루스타이)인데, 이는 ‘값을 주고 자유롭게 하다, 구출하다’라는 의미입니다. 다시 말해서 엠마오로 가는 제자들은 이스라엘을 몸값을 주고 자유롭게 하실 분, 즉 이스라엘의 해방자, 구속자로 예수를 기대했다는 뜻입니다. 그들의 바람, 기대는 정당해 보입니다. 오늘날 그리스도인들 역시 예수를 구원자로 믿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표현에서 흥미로운 사실은 ‘과거형’을 사용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들에게 부활은 과거의 일인 것이지요. 오늘 우리도 ‘부활절’을 맞아 기념 예배를 드리고 부활에 관해 이야기를 나누지만, 부활절이 지나면 부활은 역사적 기념일이 되어버리고, 우리 삶엔 다시 침묵이 찾아옵니다. 부활은 우리 삶에 머물러 있지 않고, 기억 속에서조차 미끄러지고 말지요.
부활절은 해마다 돌아오지만, 우리는 과연 무엇을 기념하고 있는 걸까요? 초대교회와 성도들에게 부활은 예수의 죽음에서 다시 살아남일 뿐만 아니라, 세상의 질서가 전복되고 새로운 창조가 시작되었다는 선포였습니다. 그들이 가졌던 기존의 모든 사고와 신앙, 교리 … 모든 것이 완전히 무너지고 전혀 다른 새로운 신앙, 새로운 삶의 시작이었습니다.
그러나 오늘 우리에게 부활은 그저 ‘기념일’로 전락해버린 것 같습니다. 어떤 흥미도 가슴 떨림도 없는 과거의 이야기가 되어버린 것이지요. 부활은 성서 속에 기록되어 있는 죽은 언어에 불과한 것이 아닌가요. 산타 이야기 같은 그저 상식으로 기억할 뿐, 더 이상 살아 움직이지 않는 사건이 된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물어야 합니다.
“우리에게 부활은 여전히 살아있는 진리인가, 아니면 박제된 교리인가?”
▣ 잃어버린 부활
- 슬픈 빛을 띠고
예수는 부활했으나 두 제자는 엠마오로 향합니다. 그들의 눈은 부활한 예수를 보지 못합니다. “그들의 눈이 가리어져서” 대체 무엇이 그들의 눈을 가리게 했을까요. “예수께서 가까이 이르러 그들과 동행하시나” 예수는 그들 곁에 계셨고, 그들과 동행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예수를 볼 수 없습니다. 그들의 한마디는 오늘 우리 모두의 고백처럼 들립니다. “우리는 이 사람이 이스라엘을 구원할 자라고 기대했었다.” 우리도 예수가 우리를 구원해 줄 것이라 믿었지요. 우리 삶의 문제, 고통의 문제를 해결해 줄 것이라 믿었지요. 하지만 그 기대는 사라지고 삶에서 일어나는 수많은 고통과 문제는 그대로 남아 있습니다. 이제 우리는 구원을, 부활을 기대하지 않고 있는지도 모르겠네요….
- 눈이 가리어져
눈이 가리어진 것이지요. 절망의 상태라는 말입니다. 그 깊은 절망에서 그들에겐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20) 십자가에 달려 죽은 예수밖에 보이지 않습니다. “그는 십자가에서 죽었고, 그래서 우리는 모든 것이 끝이라고 생각했다.” 고통 속에서 부활은 공허한 위로처럼 들릴 뿐입니다. 고통 속에서 희망은 잊힙니다. 절망은 부활의 언어를 침묵시킵니다. 실존이 무너진 곳에서 부활은 외면당합니다.
그러나 예수는 그 절망의 길을 함께 걷고 계셨습니다. 부활은 우리의 상실, 고통, 절망 속에 숨어들어온 신비, 은혜입니다. 폴 틸리히는 말합니다. “부활은 시간 안의 사건이 아니라, 존재 안의 변형”이라고 말입니다. 부활해야 할 것은 예수의 시신이 아니라, 우리의 무기력, 절망, 편견, 차별, 사랑 없음입니다.
폴 틸리히는 “실존의 경계선에서 들려오는 외침이야말로 진리의 시작”이라고 말합니다. 십자가는 존재의 가장 깊은 어둠을, 부활은 그 어둠을 꿰뚫고 나오는 초월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깊은 어둠을 껴안고 맞서지 않으면, 외면하고 피하면 결코 부활을 경험할 수 없습니다. 엠마오로 가는 제자의 모습은 바로 고난과 고통, 절망을 피해 도망치고 있는 우리의 실존입니다. 그러기에, 부활한 예수를 볼 수도, 부활을 경험할 수도 없는 거지요. 그저 시간 속에 일어난 하나의 사건, 그저 기념해야 할 어떤 것으로만 부활을 알 뿐입니다. 존재의 변형으로의 부활 사건을 경험할 수 없습니다.
예수께서 어떻게 ‘고난’을 통해 부활하셨는지에 대한 성찰 없이는, 부활은 그저 하나의 ‘결말’이 되어버리고 맙니다. 그래서 부활을 그저 죽음 이후의 위로로만 소비하는 것이지요. 부활은 고난을 이긴 결과가 아니라, 고난을 껴안은 사랑의 드라마입니다.
- 부활의 공동체적 의미
부활은 단지 예수 한 분의 승리가 아닙니다. 바울은 고린도전서 15:20에서 “이제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사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도다”라고 말하며, 이 부활이 곧 우리 모두의 부활, 나아가 창조의 회복과 연결되어 있음을 강조합니다. 그러나 불행히도 오늘날 교회는 이 부활의 공동체적 차원을 잊고 개인 구원만을 강조합니다. 부활은 ‘나의 회복’이 아니라, ‘우리의 변혁’입니다.
엠마오로 가는 길은 예루살렘에서의 공동체로부터의 이탈이기도 합니다. 제자들은 공동체로부터 분리되어, 자기 방식의 결론에 도달한 채 떠나고 있습니다. “어떤 여자들이 우리로 놀라게 하였으니, 이는 그들이 새벽에 무덤에 갔다가 그의 시체는 보지 못하고 와서 그가 살아나셨다 하는 천사들의 나타남을 보았다 함이라”(22-23) “어떤 여자들이 환상을 보았다 하지만, 우리는 그걸 믿지 못한다.” 오늘날 교회도 이와 닮았습니다. 부활은 말하지만, 서로를 믿지 못하는 공동체, 의심과 고립, ‘나 혼자 걷는 길’ 속에서 부활은 증발합니다. 부활은 공동체 안에서만 온전히 드러납니다. 예수님이 빵을 떼어주셨을 때 비로소 그들의 눈이 열립니다. ‘떡을 떼는 행위’, 즉 공동체적 삶 속에서 부활은 재현되는 것입니다.
“그들과 함께 음식 잡수실 때에 떡을 가지사 축사하시고 떼어 그들에게 주시니 그들의 눈이 밝아져”(30-31) 떡을 떼실 때, 그들의 눈이 밝아집니다. 부활은 논리로 이해되는 사건이 아니라, 관계 속에서 드러나는 진실입니다. “함께 걸으며, 이야기하고, 떡을 떼는” 일상 속에서 예수는 드러납니다. 본회퍼의 말처럼, “예수는 교회의 가장자리가 아니라 세상의 중심에서 다시 살아나신다.”안병무식으로 말하면, “예수는 민중 속에서 다시 살아나야 한다.” 부활은 무엇보다 ‘우리’라고 하는 공동체 안에서 살아나야 합니다.
▣ 나가는 말
- 다시 예루살렘으로
눈이 밝아진 두 제자는 곧바로 예루살렘으로 돌아갑니다. “곧 그때로 일어나 예루살렘으로 돌아가 보니 열한 제자 및 그들과 함께 한 자들이 모여 있어, 말하기를 주께서 과연 살아나시고 시몬에게 보이셨다 하는지라”(33~34) 이제 그들의 부활은 지식이 아니라 경험이며, 기억이 아니라 사건입니다. 부활은 예배당 안에서만 선포되어서는 안 됩니다. 엠마오로 흩어진 이들의 삶 속에서, 현실을 뚫고 다시 살아나야 합니다.
예수의 부활은 단지 죽음을 이긴 사건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의 시작이었습니다. 톰 라이트는 말합니다. “예수의 부활은 하늘나라로의 탈출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가 이 땅에 시작되었다는 선언이다.” 하지만 오늘날 부활은 ‘천국행 티켓’처럼 여겨집니다. 지금 이곳의 불의와 고통은 외면한 채, 저 너머의 안식만을 기다립니다. 그러나 예수는 부활 후 제자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요 20:21) 부활은 하나님 나라의 사명에로의 파송입니다.
“부활해야 할 부활”이란 말은 역설처럼 들립니다. 하지만 그만큼 오늘날의 교회는 부활을 잊었습니다. 우리는 다시 고통의 실존을 꿰뚫는 부활, 공동체를 회복시키는 부활, 세상을 변화시키는 하나님 나라의 부활을 붙들어야 합니다. 부활은 한 사람의 무덤에서 시작된 일이지만, 자신과 온 세상을 뒤집는 사건입니다. 우리 삶 속에, 세상 속에서 ‘부활해야 할 부활’은 여전히 잠들어 있습니다. 그 부활을 부활시키십시오. 그 부활이 저와 우리 교회에 부활하기를 기도합니다.
부활의 주님,
십자가의 고통을 넘어,
가장 깊은 절망의 어둠을 넘어,
우리의 삶 속에 부활하소서.
이 불의한 세계 가운데 부활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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