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과 어두움
요1:1-5
12월은 빛의 달입니다. 성탄을 축하하는 불빛이 대도시 광장에, 북한과 대치하고 있는 전방 고지에, 교회당마다, 상점마다, 또는 각 가정마다 흘러넘치고 있습니다. 유럽은 12월초부터 모든 집 창문에 이런 데크레이션이 메달리기 시작합니다. 겨울철에는 오후 4시만 되면 어두워지기 시작하기 때문에 이런 성탄 불빛이 사람들의 마음에 강한 인상을 남기게 됩니다. 같은 빛이라고 해도 유원지나 디스코텍 같은 곳에서 정신없이 돌아가는 싸이키 조명과 조용한 시골의 교회당 성탄목에 달려 있는 은색 조명이 같지는 않습니다. 1984년 12월, 정확한 날짜는 잘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만 성탄절과 31일 사이의 어느 때인 것 같습니다. 쾰른에서 함께 공부하던 집사람은 미리 공부를 마치고 임신한 상태이기 때문에 먼저 고국으로 돌아갔고, 혼자 외롭게 지내고 있던 차에 "국제 성서 공부" 모임 주최로 수양회에 참석했습니다. 독일 학생들과 여러 나라에서 유학온 학생들, 30여명쯤이 쾰른에서 북쪽으로 1시간여 거리에 자리잡고 있는 수양관에 모였습니다. 그곳에 도착한 다음 2시간은 자유 시간이었습니다. 저는 혼자 산책을 나왔습니다. 저녁 안개 속에 눈이 내리고 있었습니다. 아랫 동네에 내려가자 작은 교회당이 보였고, 개가 짖고 있었습니다. 교회당 마당의 나무에 작은 성탄등이 걸려 있었습니다. 나는 그와 같이 아름다운 불빛을 처음 보았습니다. 눈, 안개, 개짖는 소리, 교회당 종소리가 성탄등을 더욱 빛나게 했습니다.
오늘 우리 교회 강단에도 이렇게 대강절 넷째 주일을 기리는 네 대의 촛불이 빛나고 있습니다. 이 대강절 초는 그저 단순한 장식품이 아닙니다. 우리 기독교의 본질을 드러내는 징표입니다.우리가 이런 대강절 촛불의 징표를 읽을 수 있고, 더 나아가서 우리 삶의 내용으로 체화시킬 수 있어야만 명실상부한 기독교인으로 사는 것입니다. 그 이유가 오늘 우리가 읽은 성경 본문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제가 공동역본으로 다시 읽어보겠습니다. "태초에 말씀이 계셨습니다. 말씀이 하느님과 함께 계셨습니다. 말씀은 하느님이었습니다. 그는 태초에 하느님과 함께 계셨습니다. 모든 것이 그를통하여 생겨났으며 그를 통하지 않고 생겨난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그 안에 생명이 있었습니다.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었습니다. 빛이 어두움을 속에 비치니 어두움이 빛을 이기지 못했습니다." 이 짧은 문장 속에 매우 중요한 단어들이 많이 등장합니다. 태초, 로고스, 하느님, 창조, 생명, 빛, 어두움 같은 단어들입니다. 오늘 우리는 이런 단어들을 자주 들었기 때문에 잘 알고 있거나, 아니면 잘 알고 있다고 착각합니다. 우리가 어떤 선입견을 갖지 않고 오늘 본문 말씀을 읽으면 무슨 철학 문장 같다고 생각이 들 것입니다. 성서와 교부들의 글들이 철학 자체를 말하고 있는 것은 아니지만 하나님의 계시를 철학적으로 설명하고 있는 것만은 분명합니다. 어쨌든지 요한은 지금 우주론적인 차원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요한복음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태초에 로고스가 있었다." 창세기는 이렇게 시작합니다.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요한복음은 예수 그리스도를 마리아와 요셉을 부모로 둔 한 자연인, 역사적 실존으로만이 아니라 오히려 우주 전체 사건과 연결시키고 있습니다. 이런 점에서 요한은 분명히 신학자입니다. 시간 안의 사건을 영원의 사건으로 인식하고 해석한다는 점에서 그렇습니다. 이 문제를 조금만 더 생각해봅시다. 나사렛 목수의 아들 예수가 우주의 처음에 존재했다고 요한이 증언합니다. 이 말은 곧 그가 우주의 종말과 연관된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나사렛 예수가 모든 존재의 근원이라는 말씀입니다. 궁극적으로 참된 것은 태초(아르케)로부터 시작됩니다. 그 아르케(알맹이)가 우주의 시작이고 과정이고 완성입니다. 현대 물리학도 우주의 시작인 빅뱅을 한 점의 대폭발로 설명합니다. 사실 한 생명의 시작도 난자와 정자라는 작은 씨앗으로부터 시작합니다. 아무 것도 없는 무로부터(엑스 니힐로) 이 세상의 창조될 때 이미 나사렛 예수가 있었고 그 창조 사건에 참여했습니다. 결국 요한이 말하려는 바는 이런 예수를 통해서만 우리가 참된 생명에 참여하게 된다는 사실입니다.
성탄절은 바로 이 사실을 기억하는 절기입니다. 예수가 바로 우주의 시작이었다는 요한의 증언을 기억하고 확인하는 절기입니다. 물론 여러분이 이런 사실을 이미 알고, 믿는다고 생각할지 모르겠습니다면, 별로 절실하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는 이런 우주의 시작에 대해서 관심이 없습니다. 지금 당장 먹고 살기도 힘든데 태초, 로고스, 생명 같은 것들을 생각할 필요가 있는가, 하고 질문할 것입니다. 그냥 예수를 믿으면 되지 않느냐고 말입니다. 그냥 믿는 거 하고 알고 믿는 것 하고는 전혀 다릅니다. 무조건 믿게 되면 통일교 신자도 될 수 있고, 무당도 될 수 있습니다. 기독교는 자신의 믿는 바를 끊임없이 성찰하고 주변 세계에 변증해왔습니다. 이런 점에서 우리는 이번 대강절과 성탄절을 맞아서 요한의 가르침을 되새겨보는 것입니다. 나사렛 예수가 우주의 시작이라고 말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아무리 곰곰이 생각해보아도 분명히 기원전3,4년이라는 역사 안에서 살았던 나사렛 예수가 최소한 100억년 이상이나 되는 이 우주의 시작때 이미 존재했었다는 요한의 설명을 이해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생각해보십시오. 현재 살고 있는 어느 한 사람이 500년 전에도 살았다고 한다면 말이 되냐요? 우리가 환생설을 인정하지 않는다면 말입니다. 요한은 우리에게 전혀 다른 방식으로 생각하게 만듭니다. 태초는 창조가 시작되는 때입니다. 이 창조는 바로 생명 사건입니다. 여기에 바로 요한의 깊은 신학이 담겨 있습니다. 예수가 참된 생명이기 때문에 태초의 창조사건이 예수에 의해서 일어난 것이라는 말입니다. 요한복음의 전체 주제는 바로 "생명"입니다. 예수는 생명의 아르케입니다. 따라서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습니다".
여기까지는 여러분이 대충 이해할 것입니다. 그러나 좀더 진지하게 생각하면 이 문제가 그렇게 간단한 게 아닙니다. 여기서 요한은 예수의 초자연적 능력을 주장하려는 게 아닙니다. 흡사 타임 머신을 타고 시공간을 마음대로 넘나드는 능력의 소유자라는 점을 증명하려는 게 아닙니다. 나사렛 예수는 우리와 똑같이 역사적 한계 안에서 살았기 때문에 100억년이라는 이 우주의 시간을 순식간에 뛰어넘을 수 없습니다. 요한은 이런 식이 아니라 전혀 다른 차원에서 예수를 이해하고 믿었습니다. 즉 예수가 태초의 창조사건에 참여했다는 말은 우리가 단순히 물리학적으로 생각하는 이런 생명의 차원에서 생각할 문제가 아니라는 말입니다.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나사렛 예수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을 뛰어넘는 생명의 근원입니다. 너무 어렵고 관념적이라고 생각하는 분이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요한은 우리같이 평범한 사람들이 이해할 수 있는 말로 설명합니다.
그게 바로 "빛"입니다.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의 빛이라"(4절). 생명이라는 말은 좀 복잡합니다만 빛은 아주 간단하면서도 확실합니다. 모든 생명은 빛이 있어야 유지됩니다. 진화론자들도 이 지구에 생명이 생기게 된 것은 빛 때문이라고 합니다. 그냥 탄소동화작용같은 현상만 보더라도 빛이 생명 현상에 멀마나 결정적인 요소인지 분명하게 알 수 있습니다. 빛이 없으면 식물이 사라지고, 식물이 사라지면 동물도 사라지고, 결국 인간도 멸종합니다. 요한은 예수가 바로 생명의 근원인 빛이라고 말합니다. 성탄절이 12월25일에 자리를 잡게 된 것도 고대 기독교가 이때가 되면 동지가 지나고 이제 다시 낮시간이 길어지기 시작했기 때문입니다. 이런 점에서 빛으로서의 예수는 생명 사건의 아르케입니다. 따라서 그는 시간을 뛰어넘어 태초에 존재하는 분입니다.
그런데 예수가 빛이라는 말은 단순히 태양이나 촛불 같이 이런 물리적 빛 자체는 아닙니다. 그는 다른 의미에서의 생명이며,이 생명의 근원인 빛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이 빛을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빛이 어두움에 비취되 어두움이 깨닫지 못하더라"(5절). 사람들은 진리를 알아보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숨어 있기 때문입니다. 흡사 아무나 시를 쓸 수 없고, 아무나 작곡을 할 수 없으며, 아무나 이창호의 바둑을 흉내낼 수 없는 것과 같습니다. 시의 세계나 음악의 세계도, 또한 바둑의 세계도 역시 숨어 있기 때문입니다. 이런 세상의 일도 이럴진데 하나님의 아들인 예수야 오죽하겠습니까? 예수가 메시야이며, 하나님의 아들이며, 생명의 아르케라는 사실은 눈에 드러나는 게 아니라 숨어 있습니다. 어두움은 빛을 알아보지 못합니다. 사실 어두울수록 빛이 훨씬 밝게 드러나는 게 원칙입니다만 예수는 그런 물리적 현상의 빛이라기보다 생명의 본질로서의 빛이기 때문에 사람들이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최근에 저는 우리나라 역사에서 벌어진 두 가지 사건을 보면서, 이런 빛과 어두움을 경험했습니다. 지난 14일 저녁에 저는 대구 동성로 대구 백화점 앞에 갔습니다. 의정부 여중생, 효순이와 미선이 사망 추모 집회때문이었습니다. 대구백화점 앞에서 1시간반 동안 추모집회를 갖고 6시부터 시위 행렬을 이어갔습니다. 손에 촛불을 들고 대구백화점 앞에서 캠프워크까지 대충 1시간 반 정도 평화 행진을 했습니다. 저는 이번 미선, 효선양의 사망 사건이 어쩔 수 없는 사고였는지, 아니면 미군들의 미필적 사고였는지 자세하게는 모르겠습니다. 어떤 경우였든지 미국의 태도와 우리 정부의 대처를 보면서 이게 아닌데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만약 미국이 사고가 났을 당시 일찌감치 우리가 이해할 수 있을 정도로 반성의 태도를 보였다면 이렇게 까지 국제간의 큰 문제로 비약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그들은 빛을 깨닫지 못한 어둠움의 세력이었습니다. 지난 19일 우리는 새로운 대통령을 뽑았습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이번만큼 대통령 선거게 관심을 보인 적이 없습니다. 19일 저년 6시에 티브이에서 출구조사가 발표되는 순간 손뼉치는 나를 본 우리 딸들이 그럽니다. "아버지는 월드컵 대회 때는 별로 뉴스를 보지 않더니 이번 대통령 선거에는 왜 이렇게 관심이 많아요?" 저는 개인적으로 이렇게 생각했습니다. 이번에 우리 민족이 처음으로 철학이 있는, 역사의식이 있는 대통령을 뽑았다고 말입니다. 소위 운동권 출신이며, 인권변호사였던 노무현씨가 우리의 대통령이 되었다는 사실을 저는 일종의 빛으로 보았습니다. 한 사람으로 인해서 역사가 근본적으로 바뀔 수 있다는 안이한 생각을 하지는 않습니다만, 결국 사람이 역사를 바꾼다는 사실을 믿습니다. 아마 우리의 역사가 상당히 달라질 것입니다.
어쨌든지 우리의 삶과 현실에서 작은 빛이나마 보았다는 것은 어두움의 시절에 기쁜 일입니다. 그러나 결국 이런 일들도 빛 자체는 아닙니다. 촛불 시위와 좋은 대통령 선출이 기분 좋은 일입니다만 그것이 생명 자체는 아니기 때문입니다. 생각해보십시오. 미국 부시 대통령이 공개석상에서 사과하고 그 말많은 소파를 적절하게 개정하고, 노무현 대통령이 정치를 멋지게 했다고 해서 우리의 생명이 완성되는 게 아니기 때문입니다. 우리 나라가 북유럽의 나라들처럼 정치, 복지, 노동 문제에서 최상의 사회를 만들었다고 해서 우리의 삶에서 어두움이 사라지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이런 노력들은 나름대로의 가치와 의미가 있긴 합니다만, 또한 우리가 이 땅에 살고 있는한 끊임없이 추구해야할 삶의 태도입니다만 이런 것으로는 아무리 좋은 성과를 이룩한다고 해도 역시 거기서 거기라는 말입니다. 여전히 우리의 삶에는 어두움이 사라지지 않습니다.
우리의 삶을 조금만 정직하게 들여야 보십시오. 어떤 일들로 가득차 있습니까? 물론 외면적으로는 빛으로 충만한 것 같이 보입니다. 개인적으로 차이가 있긴 합니다만 나름대로 많은 꿈들이 있습니다. 돈을 벌 계획이나 취미, 교양생활에 대한 계획도 있습니다. 조금 여유가 있는 사람들은 대형 쇼핑장에 가서 많은 물건들을 삽니다. 현대인들은 이런 일로 자유가 획득되리라고 생각합니다. 자기 마음대로 소비하고 자기를 성취함으로써 빛에 거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약간만 진지한 사람이라고 한다면 이런 일들이 얼마나 지루한지 알게 됩니다. 흡사 어린아이들이 구슬치기를 하면서 그것이 인생의 모든 것이라고 여기는 것과 같습니다. 어른이 된 사람의 눈에 이 구슬치기는 시시한 놀이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일상적으로 살아가는 이런 일들이 시시하다고 생각되지는 않나요? 아마 어떤 분들은 속으로 이렇게 생각할 것입니다. "당신은 이 현실을 모르고 너무 이상적으로, 이론적으로 말하고 있군." 저는 이 세상살이의 아름다움과 슬픔을 대충 알만큼은 압니다. 한 인간이 버텨내기 힘든 실존적 고통거리를 압니다. 예컨대 제가 즐겨 시청하는 "병원 24시"는 이 문제를 가장 리얼하게 증언하고 있습니다. 난치, 불치병을 앓는 어린아이들, 돈이 없어서 조기에 치료받지 못한 이런 어린이들을 보면서 신정론적 회의에 빠지거나 내 소유를 몽땅 그들에게 주지 못하는 내가 예수의 뒤를 따르는 기독교인인가 하는 자조에 빠지기도 합니다. 그러나 아무리 이 세상살이가 즐겁거나 아무리 견디기 힘들다고 하더라도 기독교인은 그것에 빠지지 않고 다른 세계에 삶의 중심을 두고 살아갑니다. 이런 의미에서 예수는 바로 하늘로서 내려운 생명의 떡입니다. 바울도 우리의 시민권이 하늘에 있다고 권면하고 있으면, 모든 성서가 바로 이 세상과 다른 생명의 근원에 대해서 증언합니다. 2002.12.22. 수성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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