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 바울의 자유(고전 9:16-23)
도전받는 바울의 사도성
바울은 초기 기독교 공동체에서 매우 독특한 인물입니다. 다른 부분은 접어두고 사도성 문제만 해도 그렇습니다. 일반적으로 우리는 예수님이 공생애 중에 직접 제자로 부르신 12명을 사도라고 부릅니다. 예수님을 배신한 가룟 유다의 자리는 훗날 초기 공동체에 의해서 맛디아로 바뀌었습니다. 유다를 넣든지 아니면 맛디아를 넣든지 예수님의 제자 명단에는 바울이 들어갈 수 없습니다. 그러나 오늘 우리는 바울을 가리켜 예수님의 사도가 아니었다고 말하지는 않습니다. 바울은 열두 사도보다 더 뛰어나면 뛰어났지 결코 못하지 않았습니다. 이런 생각은 곧 교회의 전통이기도 합니다.
신약성서 안에 들어온 문서는 오직 사도의 권위로 기록된 것이었다는 역사적 사실에서 볼 때 바울의 사도적 권위는 거의 하늘을 찌를 듯합니다. 학자들에 따라서 약간씩 차이가 있지만 대개 27권의 신약성서 중에서 9권 내지 13권 정도가 바울의 서신이라는 건 분명합니다. 더구나 신약성서로 채택된 그의 편지들이 기독교 신앙과 신학을 형성하는데 끼친 영향을 생각해보세요. 그 어떤 제자도 바울을 능가할 수 없습니다. 물론 복음서를 기록한 저자들이 훨씬 중요하다고 말할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복음서는 어떤 한 사람의 집필이라기보다는 이미 초기 공동체에 전승되었던 내용들을 편집한 것이기 때문에 순전히 저자 자신의 글인 서신과 비교할 때 저자의 비중이 그렇게 높지 않습니다. 바울이 쓴 편지들을 보십시오. 로마서, 고린도서, 갈라디아서 등등, 기독교 신앙의 가장 중요한 내용들을 담고 있습니다. 이런 것을 감안한다면 바울은 사도들 중에서 가장 뛰어난 사람이었다고 보아야 합니다.
그러나 초기 공동체에서 바울의 사도성은 계속해서 도전받았습니다. 그 당시로서는 어쩔 수 없었을 것입니다. 예수님과 함께 생활했던 사람들이 대개 살아서 활동하던 그 당시의 상황을 생각해보십시오. 베드로를 비롯한 12명의 제자들, 예수님의 동생인 야고보를 비롯한 몇몇 친인척들, 그리고 예수님의 부활 승천을 목도한 500명의 신자들이 여전히 살아있을 때였습니다. 예수님을 전혀 만나본적이 없으며, 심지어 기독교인들을 박해하던 바울이 그들 앞에서 예수님의 사도를 자처한다는 게 과연 용납될 수 있었을까요? 물론 바울이 다마스커스 행로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환상 가운데 만났으며, 근본적으로 자신이 추종하던 율법으로부터 복음으로 완전히 신앙의 토대를 옮겼다고 하더라도, 그리고 회심 이후로 그가 공동체를 향해서 보인 헌신이 아무리 뚜렷하다고 하더라도 그것만으로 그의 사도성이 보장될 수는 없었을 것입니다.
사도적 권위
바울은 자신의 사도적 권위가 심각하게 훼손되는 상황에서 고린토 교회를 향해서 편지를 씁니다. 그의 심리상태가 고조되었으리라는 건 분명합니다. 9장 1,2절 말씀을 보십시오. “내가 자유인이 아니란 말입니까? 내가 사도가 아니란 말입니까? 내가 우리 주 예수를 뵙지 못했단 말입니까? 여러분은 바로 내가 주님을 위해서 일하여 얻은 열매가 아닙니까? 비록 내가 다른 사람들에게는 사도가 아닐지라도 여러분에게는 사도입니다. 주님을 믿는 여러분이야말로 내가 사도라는 것을 증명해 주는 확실한 표입니다.”
바울이 고린토 교회에서조차 사도적 권위를 완전하게 확보하지 못했다는 게 지금 우리의 눈에는 이상하게 보입니다. 고린토 교회는 원래 바울의 선교 2차 여행 때 세워진 교회거든요. 자신이 천신만고 끝에 세운 고린토 교회에서 무슨 일이 벌어졌기에 바울이 이렇게 섭섭한 마음을 토로할 지경에 이르렀는지 그 속사정을 지금 우리가 정확하게 파악할 수는 없습니다. 바울의 말을 빌려서 간접적으로 이렇게 추정할 수는 있습니다. 9장15절 말씀을 보세요. 바울은 자신에게도 베드로처럼 결혼할 자격도 있고, 교회로부터 생활비를 받을 자격도 있다고 진술하면서 이렇게 주장합니다. “그러나 나는 이런 권리를 조금도 써 본 일이 없습니다. 또 내 권리를 주장하고 싶어서 이런 말을 하는 것도 아닙니다. 그러느니 차라리 죽는 것이 낫겠습니다. 내가 보수를 받지 않고 일한다는 이 긍지만은 아무도 빼앗지 못할 것입니다.” 이런 말씀에 의하면 바울은 고린토 교인들에게 유별난 사람이라는 평을 받은 것 같습니다. 줏대도 없고 능력도 없는 사람이라는 평도 받았겠지요. 사람들은 뭔가 밖으로 보이는 권위가 있어야 그 사람을 인정합니다. 자기 PR이든지, 아니면 최소한 자기 권리를 분명하게 찾아야만 사람대접을 받는 게 세상의 이치인 것 같습니다. 이런 이치는 교회 안에서도 마찬가지로 작동하지요. 그런데 바울은 그런 것을 전혀 주장하지 않은 겁니다. 아무런 권리 주장 없이 그냥 말씀을 전할 때는 전하고, 돈이 없을 때는 아르바이트 하고 살았습니다. 그러니 사도적 권위가 손상 받지 않을 수 있겠어요?
대가없는 복음 선포
바울이 인간적인 생각으로 고린토 교인들에게 섭섭함이 있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그는 지금 자기를 알아달라는 뜻으로 이런 말을 한 것은 아닙니다. 다른 사도들은 여러 교회에서 마음이나 물질적으로 대접을 받고 있었지만 바울은 그런 것을 전혀 염두에 두지 않았습니다. 그는 교회로부터 대접받는 것보다는 대접받지 않고 복음을 전하는 것을 더 중요하게 생각했습니다. 18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보수가 있다면 그것은 내가 복음을 전하는 사람으로서 응당 받을 수 있는 것을 요구하지 않고 복음을 거저 전할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복음을 거저 전하는 것이 곧 자기가 받을 대접이라는 진술을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나요? 목사의 사례금 문제가 한국교회에서 매우 예민하지만, 아무도 그걸 공론화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어떤 교회의 목사는 연봉 1억을 받는다거나, 어떤 교회에서는 대기업 임원 정도의 대접을 받는다고 합니다. 반면에 대다수의 목회자들은 최저생계비에도 미치지 못하는 사례금을 받고 있습니다. 저는 여기서 이런 구체적인 문제를 거론하려는 건 아닙니다. 복음을 거저 전하는 것을 목사가 받아야 할 대접이라는 이런 바울의 생각이 우리에게도 필요하지 않느냐 하는 거죠. 모든 목회자들이 이런 생각을 같이 나눌 수 있다면 목회자 사이의 빈부격차는 많이 줄어들겠지요. 이런 데서부터 한국교회의 구체적인 개혁도 싹이 트리라 봅니다.
그러나 이런 문제는 단지 목회자의 사례비에만 한정되지 않습니다. 우리의 세속적인 삶도 궁극적으로 이런 구조로 나가야 합니다. 의사, 변호사, 대학선생, 고급관리는 ‘복음을 거저 전한다’는 바울의 고백을 마음에 새겨야 합니다. 우리와 같은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이런 주장이 지나친 이상주의자의 발언처럼 공소하게 들릴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현실이 척박하다고 하더라도 기본적으로 그런 마음을 품고 살아가야하지 않을까요? 그런 이상과 꿈이 없다면 기독교인들의 영성이 이 시대정신과 어떻게 다르다는 말인가요?
다른 한편으로 생각하면 ‘복음을 거저 전한다’는 바울의 생각은 그렇게 비현실적인 것만도 아닙니다. 미국은 어떤지 모르지만 유럽, 특히 독일은 머리통 터져라 하고 대학을 가려고 하거나 숨도 쉬지 않고 돈을 벌려고 하지 않는 것 같습니다. 개원한 의사들도 오전에 2시간, 오후에 3시간 정도 진료하는 정도에 머뭅니다. 왜냐하면 아무리 수입이 높다고 하더라도 대개가 공동의 복지를 위한 세금으로 나가기 때문입니다. 그들의 제도가 지고지선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지만, 인간이 개인적으로 이타적인 삶을 유지할 수 없다면 제도적으로라도 ‘거저 전한다’는 쪽으로 나가는 게 지혜롭고, 현실적이라고 봅니다.
자유와 종 됨
바울은 왜 사례비를 받지 않고 복음을 거저 전하는 것일까요? 이미 여러분이 그 대답을 알고 있을 겁니다. 복음 전하는 일은 도저히 돈으로 환산할 수 없을 정도로 귀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물론 돈이 없다면 먹고 살기가 힘들다는 사실을 바울은 알고 있었겠지요. 그래서 경우에 따라서는 빌립보 교회로부터 선교비를 받기도 했습니다. 바울이 그렇게 꽉 막힌 사람은 아니었지요. 그러나 그에게 돈은 단지 그렇게 먹고 살기 위한 것,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필요한 도구에 불과했지 결코 복음을 전하는 일에 대한 대가는 아니었습니다.
이런 점에서 복음 전하는 일이 그 무엇보다도 중요하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사람이야말로 진정한 사도라 할 수 있습니다. 모든 교회에서 존경받고 대접받는 것보다도 복음과 일치하는 것이야말로 사도의 권위라는 말씀입니다. 바울은 바로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내면으로부터 참된 자유를 확보할 수 있었습니다. 사례비와 상관없이, 어느 교회로부터 받는 존경과 대접과 상관없이 복음의 궁극적인 가치를 몸으로 깨닫고 있는 사람이었기 때문에 참된 자유를 얻을 수 있었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이 자유는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것과는 차원이 다른 겁니다. 우리는 보통 자기 마음대로 하는 것을 자유라고 생각하지요. 돈과 권력을 통해서 자기의 자유가 확장된다고 사람들은 생각합니다. 그런데 바울은 거꾸로 자기 마음대로 하지 않는 것을 자유라고 생각합니다. 사람들 위에 권위적으로 군림하는 게 아니라 그들의 위치로 자기를 낮추는 것입니다. 19절 말씀을 보십시오. “나는 어느 누구에게도 매여 있지 않는 자유인이지만 되도록 많은 사람을 얻으려고 스스로 모든 사람의 종이 되었습니다.” 자유와 종은 정반대 개념이지만 바울에게서 하나로 통합되었습니다. 이제 바울은 그 문제를 좀 더 구체적으로 언급합니다. 그것을 따라가 봅시다.
율법 너머의 자유
바울은 본문 20-22절에서 요즘 우리가 이해하기 힘든 그 당시의 상황 안에서 자유문제를 설명합니다. 그것은 곧 율법에 얽힌 사연입니다. 모세를 통해서 주어진 율법은 이스라엘 사람들이 하나님의 백성으로 자리매김하는 가장 중요한 잣대였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기독교 공동체에 의해서 율법은 그 절대적인 위치를 잃게 되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율법이 완전히 무의미하게 되었다는 게 아니라 그 본래적 의미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성취되었다는 뜻입니다. 결국 초기 기독교 공동체는 이제 율법의 의무로부터 해방된 것이죠. 그들은 더 이상 율법적인 의무에 매이지 않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향한 믿음에만 집중했습니다. 그러나 그 당시의 기독교인들 중에서 상당히 많은 이들은 태어날 때부터 율법을 수행하며 살던 사람들이었기 때문에 여전히 율법을 지켰습니다.
이런 문제가 그 당시에 심각한 갈등을 불러온 이유가 무엇인지 한 가지 예를 들어볼까요? 고린토 전서 8장은 우상 앞에 놓였던 고기에 대한 설명입니다. 그 당시 시장에 파는 고기는 이방 신전에 바쳤던 것이기 때문에 기독교인 중에서는 그것을 거부하는 사람들도 있었고, 또는 개의치 않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율법적으로만 본다면 그런 고기는 먹을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율법에서 자유롭다고 생각한 사람들은 거리낌 없이 그걸 먹었습니다. 서로 다른 생각을 하는 사람들끼리 서로 비난했습니다. 한국 전래의 제사가 우상숭배냐 아니냐 하는 논쟁과 비슷합니다. 바울의 입장은 어떤 것이었을까요?
바울에 따르면 우상은 원래 없는 것이기 때문에 시장에서 파는 고기를 먹는다고 해서 잘못된 것은 아닙니다. 그것이 곧 기독교인의 자유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아직도 그런 문제에서 자유롭지 못한 사람들을 위해서 자신의 자유를 남용하지 않는 게 중요하다고 말합니다. “다만 여러분의 자유로운 행동이 믿음이 약한 사람을 넘어지게 하는 일이 없도록 조심하십시오.”(고전 8:9). 이어서 그는 “만일 음식이 내 형제를 넘어뜨린다면 나는 그를 넘어뜨리지 않기 위해서 절대로 고기를 다시 입에 대해 않겠습니다.”(13절)고 결론을 내립니다.
이런 의미에서 바울은 본문 20-23절에서 자신이 율법의 지배를 받지 않지만 율법을 따르는 사람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율법을 따랐다고 설명합니다. 또한 그는 율법 없는 사람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는 율법 없이 살았다고 했습니다. 이 말은 곧 율법의 수행 여부가 아니라 복음만이 그의 삶을 끌어가는 힘의 근원이었다는 의미입니다.
오늘 우리는 거의 자기가 삶의 기준이 되어 살아갑니다. 우리의 가정생활로부터 사회생활에 이르기까지 모든 기준이 바로 자기 자신입니다. 그런 상태에서는 사람들에게 인정받고 대우받는 것에 모든 것을 걸어두기 마련입니다. 여기서 진정한 자유가 보장될까요? 바울은 자기 자신마저 신뢰하지 않은 사람입니다. 그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만 신뢰했습니다. 이런 사람에게 진정한 자유가 주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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