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위일체 신앙의 토대
마 28:16-20, 성령강림후 첫째 (삼위일체) 주일, 2017년 6월11일
16 열한 제자가 갈릴리에 가서 예수께서 지시하신 산에 이르러 17 예수를 뵈옵고 경배하나 아직도 의심하는 사람들이 있더라 18 예수께서 나아와 말씀하여 이르시되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 19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 20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
다음의 질문에 대해서 여러분들은 어떤 대답을 하실 수 있는지 생각해보십시오. 신약성경에는 복음서가 왜 1권이 아니라 4권이나 들어 있을까요? 이런 질문을 뜬금없다고 생각하는 분들도 있을 겁니다. 원래 하나님이 4권을 복음서로 주셨다고 생각하니까 말입니다. 초기 기독교에서 생산된 복음서는 4권이 아니라 상당히 많습니다. 예를 들어 도마복음, 베드로복음, 야고보복음이 있고, 이외도 더 많습니다. 이 중에서 지금 신약성경에 들어있는 4권만 기독교 공의회로부터 공식적인 정경으로 인정받았습니다. 여기에는 중복되는 이야기도 많기에 굳이 4권을 다 성경으로 삼을 필요가 없어 보입니다. 4권을 하나로 편집하는 게 훨씬 좋아 보입니다. 초기 기독교가 4권을 다 성경으로 받아들인 이유는 예수님을 경험한 개별 공동체의 신앙 경험과 고백이 중요하다고 여겼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가 설교 본문으로 삼은 마 28:16-20절은 마태복음의 마지막 단락입니다. 이 짧은 구절 안에 초기 기독교의 여러 속사정이 숨어 있습니다. 병행구인 막 16:14-18절과 비교해서 읽어보십시오. 마태복음에는 부활의 예수님이 갈릴리에서 제자들을 만나는 것으로 나오지만 마가복음에는 갈릴리가 나오지 않습니다. 마태복음에는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라는 말이 나오지만 마가복음에는 그냥 세례 받은 사람이 구원받을 것이라는 말만 나옵니다. 마태복음은 이 대목에서 훨씬 더 신학적인 의미를 압축적으로 전합니다. 오늘 우리는 일종의 압축파일이라 할 수 있는 본문을 풀어서 이해해보려고 합니다. 이런 본문은 처음부터 마지막까지의 구절을 하나씩 차례대로 따라가는 게 이해하는 데 효과적입니다. 그 과정을 통해서 말씀의 핵심 메시지가 전달될 것입니다.
16절- 열한 제자, 갈릴리에서 예수 만나다
본문은 예수의 부활 이후 이야기입니다. 마태복음은 부활에 대한 이야기를 아주 간략하게 전합니다. 마 28:1-10절에 마리아를 비롯한 몇몇 여자들이 예수 묻힌 무덤에 찾아갔다가 천사와 부활의 예수님을 만났다는 이야기가 나오고, 11-15절에 예수의 시체 도난설에 대한 에피소드가 나오는 것으로 끝입니다. 부활 경험이 제자들에게는 절대적인 조건인데도 불구하고 그런 이야기가 마태복음에는 과감하게 생략되었습니다. 다른 복음서에 나오는 그런 이야기를 마태가 몰랐거나 별로 중요하다고 여기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오늘 본문에는 간접적으로, 암시적으로 비슷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가룟 유다를 제외한 열한 제자가 갈릴리로 갔습니다. 그들이 갈릴리로 간 이유는 예수님의 무덤에 갔던 여자들로부터 전해들은 이야기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마 28:10절에 따르면 부활의 예수님이 제자들을 갈릴리에서 만나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갈릴리는 지역적으로 오지입니다. 이방인 지역과 경계하고 있었기에 이방인들도 많이 살고 있었습니다. 예수의 고향인 나사렛도 갈릴리 지역에 있습니다. 예수 일행은 대다수가 갈릴리 출신입니다. 예수의 하나님 나라 선포는 갈릴리에서 시작되었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이 말씀하신 산으로 갔다고 합니다. 산은 고대로부터 신령한 느낌이 드는 장소였습니다. 모세는 호렙산에서 하나님을 경험했습니다. 예수님은 언젠가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을 데리고 산에 오르신 적이 있습니다(마 17:1 이하). 거기서 제자들은 예수의 용모가 빛나는 걸 경험했습니다. 예수님이 제자들과 마지막으로 만나는 자리가 산이었다는 사실은 바로 예수의 변모를 암시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17절- 의심하는 사람들
제자들은 거기서 부활의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본문은 제자들 중에서 아직도 예수님의 부활을 의심하는 사람들이 있었다고 말합니다. 그런 의심은 합리적인 겁니다. 오히려 믿는다는 게 이상합니다. 만약 우리가 일반적으로 알고 있는 것처럼 예수님이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 것이라면 지금도 우리 곁에 계셔야만 합니다. 당시에도 예수님은 당분간만 제자들에게 간헐적으로 나타나셨을 뿐입니다. 일반 사람들에게는 아예 나타나지도 않았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아주 특별한 현상이었습니다. 제자들도 그것을 정확하게 파악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니 의심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런 의심은 당시만이 아니라 오늘날도 똑같이 반복됩니다. 여러분은 부활에 대한 의심이 들지 않으십니까? 도대체 부활의 실체는 무엇일까요?
우리가 부활의 실체에 다가갈 수 있는 단서의 하나는 예수 승천 이야기입니다. 제자들과 초기 기독교인들은 예수의 부활을 승천과 동일한 것으로 이해했습니다. 승천이 무엇인지를 알면 부활을 아는 겁니다. 고대인들에게 하늘은 특별한 의미가 있었습니다. 일단 하늘은 비밀의 자리입니다. 아무도 하늘을 알지 못했습니다. 다만 거기서 생명이 시작되고 사람도 지구에서 살다 죽으면 그곳으로 올라간다고 생각했습니다. 예수님의 부활과 승천은 곧 예수님이 하나님의 절대적인 생명으로 변화되었다는 것을 가리킵니다. 당시 고대 이스라엘 사람들은 죽은 사람이 모두 음부, 즉 지하의 세계로 간다고 생각했습니다. 무덤에서 썩고 있는 시체를 보신 적이 있으신지요. 더 이상 희망이 없는 어둠의 세계로 떨어진 것이라는 사실은 부정할 수 없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이 그런 음부의 세계에 떨어지지 않고 새로운 생명으로 변화되었다고 믿었습니다. 그런데 본문이 말하는 것처럼 제자들 중에서도 그 사실을 의심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런 의심은 이들만이 아니라 그 뒤 기독교 역사에서 계속해서 등장했고, 지금도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들은 적지 않습니다. 부활을 의심하는 사람들을 그가 어떻게 설득하는지 그 다음 구절에 나옵니다.
18절- 하늘과 땅의 권세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다.” 고대인들에게 하늘과 땅은 세상 전체를 가리킵니다. 당시 사람들은 하늘의 권세를 신들의 것으로, 땅의 권세를 왕의 것으로 여겼습니다. 마태는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가 예수님의 것이라고 외쳤습니다. 그것을 세속 권력으로 생각하면 안 됩니다. 예수님은 그런 권력에 의해서 십자가에 처형당한 분입니다. 십자가에 처형당한 분을 하늘과 땅의 권세자라고 말하는 건 당시에 언어도단이었습니다. 성경이 말하는 권세는 더 근원적인 것을 가리킵니다. 그게 뭘까요? 여러분의 직장에서 권세는 사장이 쥐고 있습니다. 만약 돈벌이만을 삶의 모든 것이라고 생각하면 그런 경제적인 권력이 절대적이겠지만 평화와 사랑과 기쁨을 삶의 최고 목표로 아는 사람이라고 한다면 전혀 다른 권력을 생각할 겁니다. 제자들과 초기 기독교인들은 예수를 통해서 자신들의 생명이 완성된다고 믿었습니다. 그런 사람들에게 예수야말로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가진 분입니다. 오늘 우리도 이런 신앙을 그대로 받아들입니다. 예수를 통해서 죄와 죽음으로부터 해방된 사람들은 예수를 하늘과 땅의 권세를 가진 분이라고 고백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오늘은 성령강림후 첫째 주일이면서 ‘삼위일체’ 주일입니다. 하나님과 아들 예수와 성령이 위격으로는 구별되지만 본질의 차원에서 동일하다는 교리가 삼위일체입니다. 삼위일체가 처음부터 분명하게 기독교 교리로 자리 잡은 게 아닙니다. 삼위일체 교리의 출발점은 기본적으로 예수의 신성에 대한 질문입니다. 인간 예수가 하나님과 본질이 동일하냐 하는 질문입니다. 그 대답은 ‘호모 우시오스’, 즉 동질이라는 겁니다. 본문이 가리키는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라는 표현은 예수가 하나님과 동일하다는 의미입니다.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가진 존재는 하나님밖에 없는데, 예수가 그런 권세를 가졌다고 한다면 결국 예수는 하나님과 동일하다는 의미입니다. 제자들과 초기 기독교인들은 무엇을 근거로 예수를 하나님과 동질이라고 생각한 것일까요? 다시 말해서 그들은 무엇을 근거로 하나님에게만 가능한 구원을 예수에게서 경험했다고 용감하게 말하는 것일까요? 이것은 기독교 신앙의 가장 시원적인 질문이고, 이런 질문은 초기 기독교만이 아니라 오늘 우리에게 똑같이 중요합니다.
이 문제를 진지하게 대하려면 여러분은 당시 제자들의 자리로 돌아가서 실질적으로 생각해야 합니다. 그들은 예수님과 대략 3년 가까이 공동체 생활을 했습니다. 그들은 그동안 예수님에게서 많은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예수님이 선포한 하나님 나라에 대해서, 그리고 그 주제에 대한 비유도 들었습니다. 예수님의 행위도 그들의 경험에 한몫 했습니다. 그것의 절정은 십자가와 부활입니다. 그들은 예수의 운명에서 절대 생명을 경험했습니다. 다른 것과는 비교할 수 없는 경험이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에게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가 있다는 사실을 절감했습니다. 여러분들은 지금 그게 구체적으로 무엇인지 궁금하실 겁니다.
19절- 예수의 제자 삼기
마태는 예수님의 말씀을 19절에서 계속 이어갑니다. 이것은 예수님의 입을 빌린 마태공동체의 신앙고백입니다. 제자들은 전 세계로 흩어져서 사람들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어야만 합니다. 이 구절은 국내외 선교에 해당되는 구절로 알려져 있습니다. 오해의 소지도 있습니다. 대개는 제자 삼는다는 말을 전도해서 사람들을 교회로 끌어들여 교회를 성장시키는 것으로 여깁니다. 교회 성장이 자연스럽게 일어나는 건 바람직합니다. 그러나 제자 삼는다는 말을 교회 중심적 사고방식으로 받아들이면 곤란합니다. 이런 교회 중심적 사고방식이 많은 문제를 야기했고, 지금도 야기합니다. 칼 브라텐은 이런 상황을 가리켜 ‘영적인 교회 중심성’(spiritual eccleiocentricity)라는 말로 표현했습니다. 그의 책에서 한 문장만 인용하겠습니다. ‘교회가 스스로 정서적인, 또한 종교적인 욕구를 충족시키려고 할 때 하나님 나라의 문은 교회에서 차단되고 만다.’(신의 미래, 173쪽). 본문이 가리키는 것은 사람들을 목사의 제자나 선교사의 제자를 삼는 게 아니라 예수의 제자가 되게 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예수의 제자가 된다는 것이 무엇일까요?
예수의 공생애에서 제자들이 예수와 어떤 관계를 맺었는지를 살펴보는 게 중요합니다. 예수는 제자들을 ‘나를 따르라’고 불렀습니다. 제자들은 거기에 순종했습니다. 그 부름은 처음 한 순간으로 끝나는 게 아니라 예수와 함께 하는 동안 계속됩니다. 그 관계를 통해서만 스승과 제자의 관계가 성립됩니다. 구체적으로 한 가지를 말씀드린다면 율법에 대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당시의 규범이자 법도였던 율법에 저항했습니다. 그는 율법이 사람을 살리는 것이어야지 그것 자체를 목적으로 하면 안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혹시 장예모 감독의 <홍등>이라는 중국 영화를 보신 분들이 있으신지요. ‘공리’라는 중국의 대표적인 여배우가 주인공 송련을 연기합니다. 20살 송련은 계모의 강요에 어쩔 수 없이 봉건가문의 넷째 첩으로 들어가서 ‘넷째 마님’으로 불립니다. 그곳은 가문의 법도에 따라서 모든 게 움직입니다. 송련은 부정을 저지른 셋째 마님이 법도에 따라서 살해당한 뒤에 주인을 향해서 ‘당신은 살인자야’ 외치면서 천천히 미쳐갑니다. 그래도 그 가문은 다섯 번째 첩을 맞이합니다. 이런 법도가 예수 당시에는 율법이었습니다. 율법에 저항하다가 그것이 로마법에 저촉되어서 예수님은 십자가 처형을 당했습니다. 예수의 제자가 된다는 것은 인간을 비인간화하는 법도와 율법에 저항한다는 뜻입니다. 단순히 사회개혁에 대한 꿈 때문이 아니라 예수가 선포한 하나님 나라에 대한 열망 때문입니다.
20절- 항상 함께 있으리라
마지막 구절인 20절 후반절은 마태복음의 신학이 농축되어 있는 말씀입니다. 다시 읽어보겠습니다.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앞에서 예수님이 말씀하신 내용을 제자들이 그대로 실천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예수님에게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가 있다는 사실을 세상에 전하기도 쉽지 않고, 그런 것에 세상이 관심을 보이지도 않으며, 反(반)인간적인 율법에 저항하기도 쉽지 않습니다. 초기 기독교 지도자들도 그 사실을 다 알고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제자로서의 삶을 유지할 수 있었던 힘은 예수가 그들과 함께 한다는 믿음에 놓여 있었습니다. 이런 믿음은 마 1:23절에 나오는 임마누엘 신앙, 즉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는 신앙과 맥을 같이 합니다. 마태복음의 시작과 끝이 임마누엘입니다. 하나님은 예수의 출생 순간부터 예수님과 함께 하셨고, 예수는 우리와 세상 끝날 까지 함께 하신다는 겁니다. 이것보다 더 놀라운 사실은, 더 위로와 용기가 되는 약속은 없습니다. 예수를 통해서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의미이기 때문입니다. 이것만 확실하다면 우리의 삶에서 다른 것은 아무 지장이 없습니다.
임마누엘 신앙이 저절로 주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자칫하면 광신으로 빠질 수도 있습니다. 한국 기독교 초기에 어떤 목사는 길을 걸으면서도 예수님의 손을 잡고 가는 듯이 걸었다고 합니다. 하나님을 눈에 보이듯이 경험하는 것처럼 말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일종의 종교적 수사로는 가능하지만 사실적인 것으로 생각할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는 사실은 눈으로 확인할 수 있는 게 아닙니다. 하나님의 능력을 경험하는 것으로만 가능합니다. 하나님은 평화, 안식, 기쁨, 용서, 화해 등의 능력으로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바울의 견해에 따르면 믿음과 희망과 사랑이 그 능력인데, 그중에서 사랑이 가장 탁월합니다. 사랑은 하나님의 존재 방식이라서 우리 자신이 사랑할 수 있는 것은 아니라 사랑의 능력에 우리가 휩싸이는 겁니다. 우리의 삶에서 사랑의 능력이 강하게 나타날수록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한다는 사실은 더 분명하게 경험됩니다.
오늘 설교 제목을 다시 생각해 보십시오. ‘삼위일체 신앙의 토대’였습니다. 삼위일체 개념에서 핵심은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말은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구원받았다는 뜻입니다. 이런 기독교 교리가 실감 나지 않는 분도 있을 겁니다. 이 세상에서 자기를 성취하는 것에만 마음을 두는 사람이라면 이런 기독교의 가르침을 이해할 수 없고 경험할 수 없으며 동의할 수 없을 겁니다. 요즘 장관 청문회가 열리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장관 되는 걸 가문의 영광으로 압니다. 그 외의 다른 사회적인 지위와 돈벌이도 비슷하게 받아들입니다. 이런 것으로 구원받을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오히려 우리를 그런 조건에 더 묶이게 합니다. 삶에서 중요한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 경험입니다. 죄와 죽음으로부터의 해방입니다. 그 어떤 조건에 좌지우지되지 않는 평화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다음의 한 가지 사실을 잊지 말고 평생 영적 화두로 삼으십시오. 저도 그렇게 살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세상 끝날 까지 우리와 함께 함께 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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