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을 받는다는 것
고전 3:1-9, 주현 후 여섯째 주일, 2017년 2월12일
1 형제들아 내가 신령한 자들을 대함과 같이 너희에게 말할 수 없어서 육신에 속한 자 곧 그리스도 안에서 어린 아이들을 대함과 같이 하노라 2 내가 너희를 젖으로 먹이고 밥으로 아니하였노니 이는 너희가 감당하지 못하였음이거니와 지금도 못하리라 3 너희는 아직도 육신에 속한 자로다 너희 가운데 시기와 분쟁이 있으니 어찌 육신에 속하여 사람을 따라 행함이 아니리요 4 어떤 이는 말하되 나는 바울에게라 하고 다른 이는 나는 아볼로에게라 하니 너희가 육의 사람이 아니리요 5 그런즉 아볼로는 무엇이며 바울은 무엇이냐 그들은 주께서 각각 주신 대로 너희로 하여금 믿게 한 사역자들이니라 6 나는 심었고 아볼로는 물을 주었으되 오직 하나님께서 자라나게 하셨나니 7 그런즉 심는 이나 물 주는 이는 아무 것도 아니로되 오직 자라게 하시는 이는 하나님뿐이니라 8 심는 이와 물 주는 이는 한가지이나 각각 자기가 일한 대로 자기의 상을 받으리라 9 우리는 하나님의 동역자들이요 너희는 하나님의 밭이요 하나님의 집이니라.
바울은 기원후 50년경에 그리스의 교통 요충지인 고린도에 들어갑니다. 거기서 1년 반 동안 머물면서 교회를 세웠습니다. 교회가 자리를 잡게 되자 바울은 고린도를 떠나 다른 여러 곳을 다니면서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러는 중에 고린도교회의 소식을 인편으로 전해 들었습니다. 좋은 소식만 있었던 게 아닙니다. 교회를 흔들만한 문제들도 적지 않았습니다. 우상 제물로 바쳐졌던 고기를 먹어도 되냐 하는 논쟁, 여러 종류의 은사로 인한 갈등, 여자들이 예배 때 머리를 천으로 가리지 않는 문제, 성만찬에서 벌어지는 불미스러운 일들, 심지어 섹스 문제까지 나왔습니다. 그중의 가장 핵심적인 것은 교회 분열이었습니다. 고전 1:11,12절에 따르면 고린도교회 신자들이 제각각 바울 편, 아볼로 편, 게바 편, 그리스도 편이라고 주장했습니다. 이런 분열 이야기를 들은 바울의 마음이 얼마나 불편했을지는 불을 보듯 분명합니다.
육적인 사람, 영적인 사람
바울은 이런 분파와 분열이 육적인 생각에서 나온 것이라고 충고했습니다. 고전 2:14절에서 바울은 육적인 사람과 영적인 사람을 구분했습니다. 성령의 일은 영적으로만 인식할 수 있기 때문에 육적인 사람들은 성령의 일을 이해할 수도 없고 행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바울이 볼 때 고린도교인들은 육적인 사람들이었습니다. 고전 3:1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공동번역으로 읽겠습니다.
형제 여러분, 나는 여러분에게 영적인 사람을 대할 때와 같이 말할 수가 없어서 육적인 사람, 곧 교인으로서는 어린 아이를 대하듯이 말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육적인 사람’이라는 말은 영육이원론, 또는 성속이원론적인 차원에서 세속적이라는 뜻이 아니라 성숙하지 못하다는 뜻입니다. 교회 안에도 육적인 사람이 있습니다. 거꾸로 영적인 사람이라는 말은 세상과 아무 상관없이 홀로 고상하게 기도만 하면서 사는 사람을 가리키는 게 아니라 성숙한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바울이 볼 때 고린도교회 신자들은 예수를 믿는 사람들임에 틀림없지만 어린아이와 같았습니다. 어린아이들의 특징은 사소한 것으로 서로 시기하고 싸우는 것입니다. 자신의 작은 세계에 갇혀 있기 때문입니다.
고린도교회 신자들이 육체의 나이가 어리거나 공부를 적게 했다거나 인격이 잘못되었다는 게 아닙니다. 아무리 나이가 들고 공부를 많이 하고 인격적으로 고상해도 어린아이와 같을 수 있습니다. 삶의 중심을 뚫어보지 못하면 어쩔 수가 없습니다. 대학교수나 국회의원, 그리고 저처럼 목사로 살아도 삶의 중심에서는 어린아이와 같은 인식 수준에 떨어질 수 있습니다. 누가 어린아이처럼 생각하는지, 그리고 어른처럼 생각하는지를 구별하기가 쉽지는 않습니다. 자기 자신도 모를 수 있습니다. 이번 최순실 국정농단 특검이 아직 종료되지 않았는데도 벌써 장관들과 비서관들만이 아니라 여러 명의 이화여자대학교 교수들도 구속되었습니다. 그들은 어른일까요, 어린아이일까요? 대학교 총장이 어린아이이고, 그 학교 청소부가 어른일 수 있습니다.
바울은 서로 분열되어 있는 고린도교회 신자들에게 교회생활에서 무엇이 핵심적인 것인지를 설명하는 중입니다. 그것을 식물을 키우는 비유로 설명합니다. 바울은 복음의 씨를 뿌린 사람입니다. 아볼로는 물을 준 사람입니다. 그것만 놓고 바울의 역할이 더 중요하다거나 아볼로의 역할이 더 중요하다고 싸우는 것은 어린아이의 태도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복음의 씨를 자라게 하는 이가 하나님이라는 사실입니다. 이 사실을 뚫어본다면 바울 파, 게바 파, 아볼로 파로 나뉘어서 상대방을 배척하는 일은 가능하지 않습니다. 물론 교회 안에서도 서로 마음이 잘 통하는 사람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런 것은 인지상정이라 큰 잘못은 아닙니다. 로마가톨릭과 개신교회의 특성이 다르고, 장로교와 감리교회와 루터교회가 각각 다른 주장을 할 수 있습니다. 문제는 그런 차이에 집착하느라 교회와 신앙생활의 본질을 놓치는 데에 있습니다. 그렇게 되면 자신을 중심으로 다른 사람을 판단하고, 자신의 일을 중심으로 다른 사람의 일을 낮춰봅니다. 씨를 심고 물을 주는 역할은 사람이 할 수 있지만 실제로 자라게 하는 것은 하나님만 할 수 있다는 사실에 근거해서 교회생활을 하고, 실제 자기 삶을 영위하는 것이 영적인 사람, 즉 성숙한 사람의 태도입니다. 바울은 그것을 8절에서 ‘상’ 개념으로 보충해서 설명했습니다.
심는 이와 물 주는 이는 한가지이나 각각 자기가 일한 대로 자기의 상을 받으리라.
바울은 여기서 교인들이 자기가 한 일에 따라서 ‘상’을 받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공동번역은 상을 ‘삯’이라고 번역했습니다. 상이나 삯은 노동의 대가를 가리킵니다. 이 구절은 중요한 두 가지 사실을 함축하고 있습니다.
자기가 일한 대로
첫째, ‘각각 자기가 일한 대로’라는 말에는 하나님 앞에서 모든 역할이 동등하다는 뜻이 있습니다. 은사의 동등성을 가리킵니다. 이 문제를 바울은 고전 12장에서 자세하게 설명했습니다. 하나의 몸에 여러 지체가 있는 것처럼 예수를 머리로 하여 각각 다른 지체를 이루는 것이 교회입니다. 눈의 역할이 손의 역할보다 더 크다거나, 손이 발더러 ‘너는 필요 없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모든 지체가 몸에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이런 생각을 하는 사람이라면 교회에서 행해지는 각각의 역할을 높다거나 낮다고 평가할 수는 없고, 서로를 배척할 수도 없습니다. 목사의 역할이나 반주자의 역할도 본질적으로 동일합니다. 교회 청소도 근본적으로는 목사의 설교 행위 못지않게 중요합니다. 다만 차이가 있다면 어떤 사람은 전업으로 교회 일을 하고, 어떤 사람은 다른 전업으로 살면서 교회 봉사에 부분적으로 참여하는 것뿐입니다.
신학적으로 은사의 동등성이 있다 해도 실제로는 그 중요도에서 차이가 나는 게 아니냐 하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목사의 설교가 없으면 예배가 진행되지 않지만 다른 봉사는 없어도 큰 문제는 아니라고 말입니다. 현실적으로 그렇게 느껴지기는 하지만 본질적으로는 모든 역할이 동등합니다. 여기서 ‘자라게 하시는 이는 하나님뿐이다.’는 말이 핵심입니다. 큰 역할이나 작은 역할 모두 똑같이 자라게 하시는 하나님과 연결되어 있을 뿐입니다. 교회의 모든 역할이 유기적으로 연결되어서 신앙 공동체를 자라게 합니다. 사실은 세상도 마찬가지입니다. 무엇이 세상을 움직이고 있는지, 무엇이 생명을 가능하게 하는지를 보십시오. 세균은 보통 때 보이지 않지만 유기적으로 생명계 전체와 연결되어 있습니다. 국가 작동도 마찬가지입니다. 막강한 권한을 행사하는 대통령이나 노동현장에서 일하는 노동자, 또는 한 가정 살림살이를 하는 전업 주부와 다를 게 없습니다. 모두 한 나라 안에서, 또는 지구 안에서 각자의 역할을 하는 것뿐입니다.
둘째, 교회 안에서 행해지는 모든 일은 근본적으로 하나님의 일입니다. 너무 당연한 말로 들리겠지만, 여기에는 깊은 뜻이 있습니다. 우리가 교회에서 감당하는 역할은 모두 소명입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부름을 받았다는 뜻입니다. 저는 대구샘터교회 목사로 활동합니다. 여러 신자들과 관계를 맺고 있습니다. 교회 주보를 작성하고, 예배 설교도 하고, 총회와 운영위원회를 끌고나가야 합니다. 상담도 하고 경우에 따라서 심방도 합니다. 이런 것들이 겉으로는 다 신자들과 관계하고 있긴 합니다. 그러나 저의 모든 활동은 본질적으로 하나님의 일입니다. 여러분도 모두 똑같습니다. 이 말은 무슨 뜻인가요? 우리의 일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성립되기에 사람의 판단에서 자유롭습니다. 누가 알아주는지에 관해서 자유롭습니다. 세상의 모든 것으로부터 자유로워지는 삶입니다. 이것보다 더 큰 자유는 없습니다.
이게 말이 쉽지 실제로 이런 자세로 살기는 쉽지 않습니다. 우리는 늘 다른 이들과 비교하면서 살아가는데 익숙해져 있습니다. 연봉이 삶을 규정하는 절대적인 기준이 되고 말았습니다. 교회도 그렇게 서로 비교하면서 우쭐해하거나 부끄러워합니다. 고린도교회도 이런 문제로 계속 시끄러웠습니다. 오죽했으면 바울이 이렇게 ‘당신들을 어린아이로 생각하면서 말하겠다.’고 했겠습니까. 우리는 지금 어떻습니까? 어린아이인가요? 성숙한 영적인 사람인가요? 어떻게 하면 다른 사람의 판단에 의해서 좌지우지 되지 않고 하나님과의 관계에, 즉 생명 자체에 온전히 집중해서 살아갈 수 있을까요?
그 답을 여러분은 이미 알고 있습니다. 알고 있지만 그걸 능력으로 경험하지 못할 뿐입니다. 그 답을 하나의 교리로 설명하겠습니다. 칭의론이 그것입니다. 로마서와 갈라디아서에서 바울은 율법의 행위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하나님으로부터 의롭다고 인정받는다는 사실을 강조했습니다. 그것이 곧 구원이며 생명을 얻는 것입니다. 바울은 예수를 알기 전에 율법 전문가로 살았습니다. 당대의 지식인이요 종교 전문가였습니다. 율법은 그에게 자유를 제공하지 못했습니다. 율법은 거기에 집중하면 할수록 자신에게 더 심한 좌절감만 느끼게 했습니다. 쉬운 예로, 돈을 벌면 벌수록 사람은 기쁨과 평화를 누리기보다는 그것이 덧없다는 사실만 절감하게 됩니다. 그런 것마저 느끼지 못하고 평생 돈만 좇아 사는 사람도 있긴 합니다. 목사에게 율법은 교회성장입니다. 교회 성장에 목을 매면 맬수록, 그것의 달성 여부와 상관없이 목사는 좌절합니다. 그것으로 기쁨과 평화를 누릴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 것마저 느끼지 못하고 평생 교회 성장에만 마음을 두는 목사들도 있긴 합니다. 바울은 전혀 다른 길을 예수에게서 경험했습니다. 그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는 다른 것을 더 이상 알고 싶지 않다고(고전 2:2) 고백했습니다. 바울의 이런 경험이 무엇일까요?
여러분들은 어떤 경우에 가장 큰 기쁨과 평화를 느끼는지 생각해보십시오. 무엇을 하고 싶으며, 누구와 함께 하고 싶은지요? 영화와 연극을 즐기는 분들이 있습니다. 유명 가수의 콘서트 장을 자주 찾는 분들도 있습니다. 거기서 큰 즐거움을 느끼기 때문에 시간과 돈을 투자합니다. 분위기 좋은 레스토랑에 가서 근사한 식사를 하는 것도 많은 사람들이 즐기는 일입니다. 그 외에도 사람들이 기쁨과 행복과 평화를 느끼는 일들은 많습니다. 멀리 떨어져 살던 자식들을 명절 때 만나는 것도 그중의 하나입니다. 다 좋습니다. 여러분 모두 재미있게 살아가기를 바랍니다. 그런 것들과 질적으로 완전히 다른 한 분이 있다면 여러분은 어떻게 하시겠어요? 만사를 제쳐놓고 그분과 함께 하고 싶겠지요. 그분은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바울을 비롯해서 예수의 제자들과 모든 예수 추종자들은 예수를 전혀 새로운 존재로 경험했습니다. 그를 통해서 구원을 경험했습니다. 우리는 그런 경험을 공유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의 구원 경험은 죄와 죽음으로부터의 해방입니다. 죄는 자기 집중, 자기 연민입니다. 자기 스스로 자기를 구원해야겠다는 욕망이며 강요입니다. 창조자만이 가능한 생명을 피조물인 인간이 성취하겠다는 열정이 바로 죄입니다. 그 죄로 인해서 사람은 하나님과의 관계가 단절되며, 이로 인해서 죽음에 이르게 됩니다. 예수와 하나 된 사람들은 이제 더 이상 자기가 자기를 완성하기 위해서 애쓰지 않아도 됩니다. 이미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생명을 얻었기 때문입니다. 이 말은 그들이 예수를 죽은 자들로부터 부활한 자로 경험했다는 뜻입니다. 제자들과 초기 기독교인들은 자신들의 운명이 예수에 의해서 결정된다고 생각하고 두렵고 설레는 마음으로 세례를 받았습니다. 만약 이 사실을 실제로 알고 믿는다면 우리는 질적으로 전혀 새로운 삶의 세계로 들어가게 될 것입니다. 세상의 기준으로 인정받는 일에 묶이지 않고 살아갈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상을 받는다는 것
설교를 끝내기 전에 바울이 말한 ‘상을 받는다는 것’이 무엇인지 구체적으로 설명해줬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는 분들이 있을 겁니다. 또 어떤 분들은 이미 대답을 찾았을 겁니다. 이것을 우등상이나 문학상처럼 생각하면 곤란합니다. ‘상을 받는다는 것’은 남보다 더 좋은 것을 받는다는 것이 아니라 각자 하나님 안에서 자신의 일을 하는 것 자체를 가리킵니다. 여기서 ‘일’은 ‘자라게 하시는 하나님’과 관계를 맺는 것이라고 앞에서 말씀드렸습니다. 그렇습니다. 일을 통해서 하나님과 관계를 맺는 것보다 더 큰 상은 없습니다. 이걸 단순히 교리적인 것으로만 생각하지 마십시오. 실제로 삶의 능력입니다. 거기서 살아있음의 자유와 기쁨을 만끽할 수 있습니다. 생명 충만감이자 생명 완성입니다. 여러분은 이것 말고 어떤 상을 원하시는지요.
상에 대한 예수님의 비유 중에서 가장 유명한 것이 마 25:14절 이하(눅 19:11절 이하)에 나오는 달란트 이야기입니다. 주인이 출국하면서 종들에게 각각 금 다섯 달란트, 두 달란트, 한 달란트를 맡겼다고 합니다. 주인이 돌아와서 각각의 종들에게 보고를 받았습니다. 다섯 달란트 맡은 종은 장사해서 다섯 달란트를 남겼고, 두 달란트를 맡았던 종도 두 달란트를 남겼지만 한 달란트를 맡은 종은 한 달란트를 땅에 감춰두었을 뿐입니다. 보고를 받은 주인은 한 달란트를 그대로 가져온 종에게서 한 달란트를 빼앗았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했습니다. ‘무릇 있는 자는 받아 풍족하게 되고 없는 자는 그 있는 것까지 빼앗기리라.’ 이것은 삶의 본질에 대한 가르침입니다. 여기서 누가 더 많은 달란트를 맡았는지는 중요한 게 아닙니다. 그 달란트를 어떻게 관리했느냐가 핵심입니다. 삶을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일종의 거룩한 축제로 받아들이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하나님에게 받아들여지는 것이야말로 참된 축제입니다. 그들은 삶의 조건이 어떠하든지 삶을 더 풍요롭게 누립니다. 그런 사람은 이미 상을 받은 것입니다. 반면에 삶의 조건에만 매달리는 사람의 삶은 날이 갈수록 누추해집니다. 이런 사람은 평생을 살아도 상을 받지 못할 것입니다.
성경이 아무리 영적으로 풍요로운 삶을 말해도 일단 배가 고프면 아무 것도 생각나지 않으니 일단 배부르게 사는 길을 찾을 수밖에 없다고 생각하는 분들이 있을 겁니다. 이런 생각 앞에서 설교자는 할 말을 잊습니다. 한편으로 그렇게 생각하는 분들의 마음이 이해가 되고, 다른 한편으로 성경이 말하는 세계를 더 이상 설득력 있게 설명할 방법이 없기 때문입니다. 이럴 때는 불문곡직하고 성경 말씀을 그대로 전하는 게 최선입니다. 바울은 고린도교회 신자들에게 반복해서 ‘하나님께서 자라게 하신다.’고 말했습니다. 하나님께서, 하나님만이 하나님의 방식으로 우리의 삶을 지키신다는 뜻입니다. 그 사실을 영혼의 깊이에서 받아들이고 자신에게 주어진 역할을 교회 안에서, 그리고 세상에서 잘 감당한다면, 그는 분명히 하나님으로부터 예상하지 못할 상을 받을 것이라고 저는 믿습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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