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운 계명 ‘사랑’
요 13:31~35, 부활절 다섯째 주일, 2022년 5월15일
저를 비롯한 모든 설교자는 늘 자신에게 이렇게 묻습니다. “당신은 설교 내용대로 사는가?” 오늘 저는 이런 질문에 가장 자신 없는 주제로 설교하게 되었습니다. 그 주제는 ‘사랑’입니다. 사랑은 최고 수준의 문학이나 예술만이 아니라 통속적인 문화 현상에서도 단골 주제로 등장하기에 누구나 알고 있다고 여깁니다. 드라마나 영화의 영향인 거 같은데, 요즘은 일상생활에서도 사랑한다는 표현을 스스럼없이 하는 사람들이 늘었습니다. 부부나 연인들은 물론이고 부모와 자식 사이도 그렇습니다. 심지어는 목사와 교인들도 서로 “사랑합니다.”라는 말을 합니다. 문재인 전 대통령이 퇴임하던 날 청와대에 모인 이들을 향해서 경상도 사투리로 “국민 여러분, 사랑합니다.”라고 말씀하시더군요. 습관적으로라도 입 밖으로 내다보면 실제로 사랑할 줄 아는 사람이 될지 모릅니다. 저는 사랑한다는 표현을 자연스럽게 할도 모르고, 실제로 사랑의 능력이 없다고 여기기에 요 13:31~35절을 설교 본문으로 잡은 건 실수 같습니다. 설교 내용대로 살아갈 자신이 없어도 설교자의 운명이라 생각하고 그 말씀 안으로 들어가 보겠습니다.
사랑, 가능한가?
우선 오늘 본문의 요절이라 할 수 있는 34절을 다시 읽어볼 테니까 처음 듣는 것처럼 귀를 기울여 보십시오.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이런 말씀 앞에 서면 마음 한편이 서늘해집니다. 예수께서 ‘새 계명’을 주신다고 하셨으니 그리스도인이라면 반드시 지켜야 하지 않겠습니까. 더구나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라고 말씀했습니다. 오늘 본문 앞 단락에는 예수를 배신할 가룟 유다 이야기가 나옵니다. 요 13:21절은 다음과 같습니다.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시고 심령이 괴로워 증언하여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중 하나가 나를 팔리라 하시니 … ” 오늘 본문 다음에 나오는 단락에는 예수를 부인할 베드로 이야기가 나옵니다. 요 13:38절은 이렇습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 이 두 이야기 중간에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라고 말씀하신 겁니다. 예수께서는 배신당하고 부인당해도 제자들을 사랑하셨고, 우리의 죄를 위하여 십자가의 죽음을 받아들이셨습니다. 그의 죽음은 곧 그의 사랑을 의미합니다. 이런 사랑이 우리에게 가당키나 한가요?
오늘날 ‘사랑’이라는 단어는 바겐세일 상품처럼 나돌아다니지만, 사랑이 얼마나 어려운지는 알만한 사람은 다 압니다. 스파크가 일어나듯이 사랑에 푹 빠지는 경험도 시간이 흐르면서 이런저런 이유와 사연으로 대부분 시들해집니다. 오히려 상처로 남는 경우가 더 흔합니다. 상처로 남는다면 그건 사랑이었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보통 후회 없이, 미련 없이 사랑했다는 말을 하지만, 도대체 그런 사랑이 가능한지 저는 아직 동의하지 못합니다. 그렇게 살도록 노력해야겠으나 사람에게는 근본에서 사랑의 능력이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조금 구체적인 예를 들어야겠습니다. 가장 전형적인 사랑은 연인 관계입니다. 연인들은 자신들의 사랑이 영원할 것처럼 여깁니다. 그들이 결혼하고 아이 낳고 현실의 어려움을 겪다 보면 처음 느끼고 경험했던 사랑의 열정은 대개 식어버립니다. 사랑의 실질 내용은 없이 형식적인 관계만 남습니다. 제가 보기에 세 가지 유형입니다. 부부관계 전문가도 아닌 사람이 말하기에 적합하지 않기는 하나, 그냥 참고만 하십시오. 첫째는 상대방에게 불만을 거의 배설하듯이 쏟아내는 유형입니다. 그의 눈에는 상대방의 유치한 점만 크게 보입니다. 한쪽이 일방적으로 당하기도 하고, 서로가 헐뜯기도 합니다. 둘째는 상대방을 자기 뜻에 맞게 고치겠다는 계몽적인 태도입니다. 상대방보다 자기가 조금이라도 낫다고 생각하는 이들이 아내와 남편 앞에서도 선생 티를 내는 겁니다. 주로 ‘교회 오빠’가 그렇습니다. 셋째는 아예 상대방에 관한 관심을 거두는 유형입니다. 거칠게 표현하면 “할 수 없어서 참고 산다.”거나 “아이들 때문에 산다.”라는 식입니다. 겉으로는 원만한 부부지만 실제로는 냉전을 유지하는 겁니다.
이 세 가지 유형은 서로 겹치기도 합니다. 저도 자유롭지 못합니다. 이처럼 처음 품었던 열정적인 사랑 관계가 이어지지 못하는 이유는 그 사람이 특별히 비인격적이거나 무식하거나 성품이 완전히 삐뚤어져서가 아니라 인간에게 원래 사랑의 능력이 없기 때문입니다. 능력은 없는데 다른 사람이 보기에 괜찮은 부부처럼 보이려니 흉내를 내거나, 그걸 견디지 못하는 사람은 끊임없이 공격합니다. ‘소울메이트’가 가장 바람직하나, 그게 어디 쉽습니까.
드물기는 하지만 평생 서로가 존중하면서 사랑의 깊이로 들어가는 부부들이 있습니다. 함께 살다가 한쪽이 먼저 죽으면 다른 쪽마저 삶의 의욕을 잃거나, 심할 때는 뒤따라서 빨리 죽기도 합니다. 그들은 평소에도 오직 남편이나 아내만을 자기 인생의 목표이자 근거로 생각합니다. 그런 분들을 보면서 정말 끔찍하게 사랑했다는 느낌이 듭니다. 일종의 현대판 「로미오와 줄리엣」이라고 말입니다. 그런 절절한 마음이야 이해할 수 있으나 그걸 사랑이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자기 남편이나 아내를 사랑한다면 상대방이 없어도, 아니 상대방이 없으니 더욱더 용감하게 살아야 하는 게 아닐는지요. 제가 먼저 죽으면, 당연히 그렇게 되겠지만, 아내가 죽은 사람을 못 잊어, 하지 말고 더 활기차게 자기에게 남은 몫을 살아갔으면 합니다. 사랑을 다른 말로 ‘삶의 용기’라고 한다면 당연히 그렇게 되겠지요.
교양과 사랑
부부와 연인만이 아니라 다른 사람과의 관계도 여기서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우리에게 친구가 있고, 직장 동료가 있고, 여러 동아리 회원들이 있고, 학생이라면 학교 친구나 스승과 제자도 있습니다. 우리의 경우에는 교인 관계도 해당합니다. 오늘 우리가 경험하는 일상에서의 사람 관계는 사랑이라기보다는 ‘거래’에 가깝습니다. 겉으로는 교양의 차원에서 사랑하는 포즈를 취하지만 속으로는 줄 만큼 주고, 받을 만큼 받으면 된다는 계산으로 삽니다. 참된 사랑은 사막을 헤매다가 우연히 오아시스를 만나는 일만큼 드문 것 같습니다.
우리가 사랑이라고 여기는 경험도 실제로는 사랑이 아니라 가까운 친구와 맥주 한잔하는 정도의 즐거움에 가깝습니다. 이런 비슷한 즐거움은 찾아보면 많습니다. 부모에게 유산을 물려받거나 자식에게 효도 받는 즐거움, 그리고 주변 사람들에게서 멋진 선물을 받는 소소한 즐거움도 사랑받는다는 느낌을 줍니다. 그걸 우리는 행복한 삶이라 여기고 거기에 매달립니다. 이런 즐거움이 우리가 이 땅에서 얻을 수 있는 가장 행복한 삶일까요? 정말 ‘복된 삶’이 무엇인지 몰라서 속고 있는 건 아닐까요? 사이비 이단 교주를 추종하는 사람들처럼 말입니다. 남에게 자랑하고 싶을 정도로 멋진 선물을 받아도 우리가 여전히 목마르다는 사실을 여러분은 다 알 겁니다.
바울은 고전 13장에서 사랑의 능력을 시적으로 묘사했습니다. 바울은 우리가 일반적으로 사랑이라고 여기는 행동과 사랑을 구분했습니다. 고전 13:3절은 이렇습니다. “내가 내게 있는 모든 것으로 구제하고 또 내 몸을 불사르게 내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게 아무 유익이 없느니라.” 구제와 자기희생이 곧 사랑이 아니라고 했습니다. 거꾸로 사랑 없이도 우리는 구제할 수 있고 자기를 희생할 수 있다는 말이 됩니다. 엄격하게 말하면 교회는 구제 기관이 아닙니다. 바울이 말하는 사랑은 휴머니즘이 아닙니다. 휴머니즘이 인간을 구원하는 게 아닙니다. 현대 역사에서 가장 강렬한 휴머니즘은 공산주의입니다. 가난한 자가 없는 유토피아를 꿈꾼 겁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그리고 당연하게도 실패했습니다. 이데올로기만 선하면 인간이 선하게 행동할 줄 알았으나 전혀 그렇게 못한 겁니다.
바울이 13장에서 나열한 여러 사랑의 속성 앞에서 우리는 모두 실패자라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오래 참고, 온유하며, 시기하지 아니하며 …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고전 13:4~7) 사랑의 무능력 앞에서 여러분이 좌절하겠으나 불안하게는 생각하지 마십시오. 사랑은 본래 하나님에게만 가능한 사건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에게 전적으로 의존해서 살아가는 사람만이 사랑하는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사랑은 하나님으로부터 발현하는 사랑의 빛이 우리를 통과하는 사건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인간으로서 제가 할 수 있는 일은 그분에게서 오는 사랑의 빛이 나를 휘감도록 나를 둘러싼 베일을 벗어버리는 일입니다.
영광과 사랑
이제야 저는 오늘 설교 본문이 서로 어울리지 않는 듯이 보이는 두 개념을 언급하는 이유를 알게 되었습니다. 다섯 절 중에서 앞의 31절과 32절은 ‘영광’을 말하고, 뒤의 33~35절은 ‘사랑’을 말합니다. 영광과 사랑이 어떻게 연결되는지 전체 단락을 통으로 읽어보십시오. 31절과 32절에는 영광(독사)이라는 단어가 다섯 번 나옵니다. 영광은 신적인 존엄을 의미합니다. 우리에게는 숨겨진 궁극적인 생명의 발현이 곧 신적인 존엄입니다. 본문은 예수의 영광과 하나님의 영광이 서로 결속되었다고 말합니다. 예수의 영광이 곧 하나님의 영광이고 하나님의 영광이 곧 예수의 영광입니다. 바울도 고후 4:6절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이라고 표현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생명이 완성되었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초기 그리스도인들은 예수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셨다고 고백했습니다. 말하자면 예수의 부활이 곧 하나님의 영광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을 사랑 실천에 대한 일반적인 명령으로 받아들이면 곤란합니다. 사랑하려고 노력해봤자 여러분은 앞에서도 이미 말씀드렸듯이 실패합니다. 그 외에 성경에 나오는 모든 윤리적 명제는 일반론이 아니라 아주 구체적이고 특별한 영적 상황을 전제합니다. 오늘 본문에서 그 상황은 부활의 빛에 대한 경험입니다. 그 부활의 빛에서만 사랑하라는 명제가 성립되는 겁니다. 부활의 빛이 없으면 사랑하라는 명제는 ‘수고하게 하고 무거운 짐’이 되게 하는 또 하나의 율법입니다. 예수께서 그런 율법을 제자들에게 말씀했을 리가 없습니다. 문제는 예수님이 그들을 떠나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제자들이 전적으로 의존해서 살아야 할 부활의 빛은 없습니다. 이제 그들은 부활을 경험한 자로 이 세상에서 예수 없이, 마치 고아처럼 자기들끼리 살아야 합니다. 본문에서 ‘영광’이라고 표현된 그 부활의 빛을, 즉 하나님 나라를 예수 없는 상황에서 드러내야 합니다. 그 빛을 드러내는 바른길이 바로 사랑입니다.
아가파테
‘사랑하라.’라고 번역된 헬라어는 ‘아가파테’(you should love)입니다. 이 아가파테는 영어 should라는 조동사가 포함된 단어입니다. 의사가 환자에게 매일 아침저녁으로 약을 먹어야 한다고 말할 때 이 조동사가 사용됩니다. 의사는 환자에게 약을 억지로 먹일 수는 없습니다. 환자가 게으르거나 병의 상태를 진지하게 생각하지 않으면 약을 챙겨 먹지 않을 겁니다. 의사는 강력하게 조언할 수 있을 뿐입니다. 서로 사랑하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받아들일지 아닐지도 역시 제자들이 선택해야 합니다. 자기가 먹고 사는 데에 직접 관계되는 게 아니니 그 말씀을 귀찮게 여길 수 있습니다. 영적으로 게을러서 마음이 가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그런 이들은 ‘아가파테’라는 말씀을 한쪽 귀로 듣고 다른 쪽으로 흘려보낼 겁니다. 우리는 지금 그 말씀 앞에서 어떤 태도를 보일까요?
이 대목에서 중요한 것은 ‘아가파테’에 연습이 필요하다는 점입니다. 학생들이 숙제하듯이 말입니다. 종교 언어로는 수행입니다. 그것도 저절로 되는 게 아니긴 합니다. 지금 자신이 어떤 공동체에 속했는지를 먼저 알아야겠지요. 교회는 취미생활 동아리가 아닙니다. 성지 순례를 위해서 함께 적금을 내는 모임도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과 영광을 기억하는 사람들의 믿음 공동체입니다. 생명 완성을 위해서 세상 마지막 때 다시 오실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는 사람들의 종말론적 공동체이자 구원공동체입니다. 성령 공동체입니다. 이 사실을 안다면 마치 수도원에서 수행하는 수도자들처럼 최소한 교회 ‘안’에서만이라도 사랑을 연습해서 자기 몸에 배도록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오늘 한국의 그리스도인들은 교회 ‘안’에서조차 사랑하라는 말씀을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개인과 개별 교회에 따라서 차이가 있긴 합니다.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라는 35절 말씀을 기준으로 본다면 오늘 한국 그리스도인과 교회는 교회 안에서조차 사랑하지 않는다는 게 분명합니다. 세상이 교회를 예수 공동체라고 여기지 않고 있으니까요. 교회가 마치 사기업처럼 운영되고 있으니, 그리고 세상 사람들보다 더 수준 낮은 내부 싸움도 적지 않으니 어떻게 예수 제자들의 모임이라고 인정을 받겠습니까.
교회 안에서의 사랑이 구체적으로 무엇일까요? 모든 이들을 품어주는 사랑과 옳고 그름을 세워나가는 정의가 교회 안에서 어떻게 작동하는지도 선을 긋는 방식으로 말하기 어렵습니다. 자기가 지금 교회 안에서 ‘아가파테’에 충실한 사람으로 행동하는지는 자신이 가장 잘 압니다. 그걸 모르면 알게 해달라고 성령께 기도해야 합니다. 선을 긋는 방식으로 말할 수는 없으나 자신이 예수 제자로서 “서로 사랑하라.”라는 말씀에 충실한지, 그리고 최선을 다하는지 아닌지에 대한 한 가지 표징은 있습니다. 그 사람이 있으면 교회가 교회다워지는 겁니다. 서로 더 신뢰하게 됩니다. 교우들이 다투다가도 그를 통해서 화해가 일어납니다. 그가 특별히 본받을만한 일을 많이 해서가 아니라 그의 존재 자체가 빛을 내는 겁니다. 어두운 방에 촛불이 켜지듯이 말입니다. 너무 뻔한 이야기인가요? 그렇지 않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과 영광에서 나오는 빛이 그를 비추기에 그는 자신의 사적 욕망이나 작은 자존심에 떨어지지 않습니다. 어쩌다가 잠시 흔들렸다가도 금방 털고 나와서 그 빛을 드러내는 방향으로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합니다. 지금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이런 문제에 아예 관심이 없습니까?
저는 앞에서 오늘 가장 자신 없는 주제로 설교하게 되었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설교가 끝날 때가 되니 다시 어느 정도 자신이 생겼습니다. 도덕군자나 박애주의자처럼 모든 사람을 사랑하라는 말씀이 아니라 예수의 영광과 부활 공동체인 교회 ‘안’에서 사랑하라는, 그 사랑을 수행의 차원에서 실천하라는 말씀이라는 사실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교회 ‘안’에서 사랑할 줄 알게 되어 영적인 내공이 생기면 교회 ‘밖’에서도 예수 제자처럼 사랑의 능력에 기대서 살게 될 것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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