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운 세상이 온다!
아무리 책읽기를 좋아하는 사람이라고 하더라도 요한계시록(묵시록)을 단숨에 끝내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겁니다. 길이로만 따진다면 요한복음보다 약간 길고 누가복음보다는 훨씬 짧은 요한계시록을 읽기가 힘든 이유는 이야기의 줄거리가 없이 극단적인 상징들과 비유로 가득 채워져 있기 때문입니다. 이런 문학적 장르를 가리켜 “아포칼립틱”, 즉 묵시문학이라고 합니다. 이 묵시문학은 유대인들의 가장 독특한 사상에 속합니다. 유대인들의 묵시문학은 기본적으로 이 세상을 악한 것으로 간주합니다. 악한 권세가 다스리는 이 세상은 곧 멸망할 것이라고 봅니다. 그 대신 하나님이 직접 다스리는 선한 세계가 곧 온다고 믿었습니다. 망하게 될 이 세상은 옛 에온이며, 다가올 세상은 새 에온입니다. 이 새로운 에온, 즉 새로운 세상은 하나님의 권능에 의해서만 우리에게 옵니다. 유대인들의 묵시문학은 바로 이런 새로운 에온을 대망하는 신앙에서 나왔습니다.
묵시사상을 이렇게 비유적으로 설명해볼까? 우리가 이 세상에 태어나기 전에 어머니 자궁에서 10달 가까이 살았습니다. 그걸 기억하는 분이 있나요? 어머니 자궁이라는 세계와 밖의 세계는 완전히 다릅니다. 또한 태아는 자기가 노력해서 세상 밖으로 나오는 게 아니라 어머니의 자궁이 열리면서 떠밀려 나오게 됩니다. 유대인들은 이와 비슷하게 이 세상이 끝나고 전혀 다른 세상이 온다고 믿었습니다. 그런 사상이 신약성서에도 많은 영향을 끼쳤는데, 그중에서 요한계시록이 가장 크게 영향을 받았습니다.
하나님의 심판
오늘 본문에서 요한은 이렇게 말하기 시작합니다. “그 뒤에 나는 새 하늘과 새 땅을 보았습니다. 이전의 하늘과 이전의 땅은 사라지고 바다도 없어졌습니다.”(1절) 여기서 “그 뒤에”라는 부사는 그 앞 구절에 나오는 심판을 가리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의 심판이 있은 다음이라는 뜻입니다. 아마 현대의 많은 사람들은 이런 말씀을 읽으면 “꿈깨라.” 하고 빈정댈지 모르겠군요. 심판은 무슨 심판이냐, 그건 다 무식했던 옛날 사람들이 생각했던 거야, 하고 말입니다. 과연 그럴까요? 성서기자들의 물리학적인 지식이 우리보다 못하겠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들이 실제로 무식한 건 아닙니다. 이 세상을 뚫어보는 힘은 그들이 우리보다 훨씬 앞섰습니다. 그들이 이 세상을 대하는 태도는 우리보다 훨씬 진지했습니다. 그런 진지성에서 하나님의 심판이라는 환상을 볼 수 있었습니다. 이게 무슨 뜻일까요?
요한은 지금 로마의 폭력과 불의에 직면하고 있습니다. 예루살렘이 흡사 지금의 바그다드처럼 파괴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인들은 콜로세움에서 프로 격투사들과 싸우거나 굶주린 맹수들과 싸워야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 악을 막아내거나 피할 수 있는 길이 전혀 없었다는 것입니다. 결국 요한은 하나님의 심판을 기대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하나님의 심판이 아니면 도저히 어찌해 볼 수 없는 그런 상황에서 요한은 이런 환상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죽음과 지옥이 불바다에 던져졌습니다. 이 불바다가 둘째 죽음입니다. 이 생명의 책에 그 이름이 올라 있지 않은 사람은 누구나 이 불바다에 던져졌습니다.”(계 20:14,15)
오늘 우리는 어떻습니다. 오늘 우리는 없는 게 없는 매우 풍요롭고 평화로운 세상을 살아가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그건 다만 외면적인 모습일 뿐입니다. 이 세상이 실제로 평화롭고 정의롭지는 않습니다. 서울의 몇몇 지역의 아파트는 몇 달 사이에 수억 원이나 올랐다고 하네요. 어떤 사람은 한 달 내내 노동을 해도 백만 원밖에 벌지 못하는 데 말입니다. 독일에서 수입한 벤츠는 날개 돋친 듯 팔릴 정도로 돈이 흔한 반면에 어떤 사람은 돈이 없어서 수술을 받지 못하기도 합니다. 유엔은 미국의 이라크 침략을 막지 못하면서 북한의 인권문제에 대해서는 말이 많습니다. 북한의 인권문제가 더 심각한가요, 아니면 미국의 이라크 침략이 더 심각한가요? 오해는 마십시오. 북한의 인권문제가 괜찮다는 뜻이 아닙니다. 오늘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이 과연 평화롭고 정의로운가를 묻고 있는 중입니다. 더 근본적으로 현대 문명이 생산하고 있는 악과 폭력을 뚫어본다면 하나님의 심판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을 겁니다. 지금과 같은 방식으로 석유를 사용하고 지구의 에너지를 소비하다가는 언젠가 지구는 회복될 수 없는 병에 걸릴 거라는 생태학자들의 불길한 예측은 바로 이런 심판 환상과 같습니다.
새 하늘과 새 땅
요한의 환상은 심판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그는 “새 하늘과 새 땅”을 보았습니다. 그 이전에 있었던 하늘과 땅과 바다는 모두 없어졌습니다. 파괴된 예루살렘이 이제 전혀 새로운 예루살렘으로 변모했습니다. 2절 말씀을 보십시오. “나는 또 거룩한 도성 새 예루살렘이 신랑을 맞을 신부가 단장한 것처럼 차리고 하느님께서 계시는 하늘로부터 내려오는 것을 보았습니다.” 결혼식 날의 신부처럼 단장한 새 예루살렘의 모습은 흡사 애니메이션 만화의 한 장면처럼 보입니다. 새로운 세상이 이전과 전혀 다르다는 사실을 시인의 감수성으로 이렇게 표현한 것입니다. 그 새로움이라는 게 무엇일까요?
우리가 일반적으로 새롭다고 말할 때는 오래 사용하다가 낡아진 것을 원래의 것으로 바꾸는 것을 의미합니다. 학생들이 가방을 사용하다가 새 가방을 사는 것처럼 말입니다. 헌집을 리모델링 하면 새집이 됩니다. 그러나 성서가 말하는 새롭다는 것은 그것과 전혀 다른 의미입니다. 이전에 있었던 것이 아니라 전혀 다른 것을 말합니다. 조금 고치거나 색칠을 하는 게 아니라 근본적으로 다른 것을 말합니다. 성서가 말하는 새로움은 과거가 아니라 미래의 문제입니다. 우리가 경험해보지 못한 미래로부터 오늘 우리에게 오는 것이 바로 새로운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타임머신을 타고 500년 전으로 돌아가는 것과 비슷할지 모르겠군요. 컴퓨터와 핸드폰을 사용하는 우리를 보고 그들은 어떻게 생각할까요? 그게 바로 성서가 말하는 새로움입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심
그런데 안타깝게도 우리는 그 새로운 세상을 구체적으로 그림을 그릴 수는 없습니다. 5백 년 전의 사람들이 컴퓨터와 핸드폰을 상상할 수 없듯이 말입니다. 요한계시록이 극단적인 상징과 비유로 진술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그 새 하늘과 새 땅은 직접적으로, 실증적으로 설명할 수 없는 세상이기 때문입니다. 그는 새로운 세상을 하늘로부터 울려나오는 음성을 전달하는 방식으로 설명합니다. “이제 하느님의 집은 사람들이 사는 곳에 있다. 하느님은 사람들과 함께 계시고 사람들은 하느님의 백성이 될 것이다. 하느님께서는 친히 그들과 함께 계시고 그들의 하느님이 되셔서”(3절)라고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요한이 환상으로 보는 그 새로운 세상에서 하나님은 우리를 직접 만나 주실 것입니다.
그렇다면 지금 우리는 하나님을 직접적으로 만나지 못한다는 말인가요? 옳습니다. 생각해보십시오. 우리가 하나님은 정의롭고 사랑의 원천이시고 모든 걸 하실 수 있는 분이라고 생각합니다만 이 세상은 여전히 정의롭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뜻과 전혀 다른 일들이 이 세상에서 많이 일어납니다. 만약 하나님이 지금 직접적으로 이 세상에 우리와 함께 하신다면 왜 그런 일들이 일어나겠습니까? 하나님이 지금 우리와 아무런 상관이 없다는 뜻은 아닙니다. 다만 하나님의 뜻이 완전하게 실현되지 않았다는 말입니다. 그 말은 이 세상을 이끌어 가시는 하나님의 통치방식이 직접적이지 않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요한에 따르면 새로운 세상에서는 하나님이 우리를 직접 다스리십니다. 그때는 감추어졌던 모든 것들이 그대로 드러날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하나님이 누구인지 확연하게 드러날 것입니다. 이런 상태를 어떻게 조금 더 구체적으로 설명할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일까요? 태어나자 곧 벨기에로 입양되어간 청년을 생각해봅시다. 그는 어머니를 찾기 위해서 수소문 끝에 연락이 닿았습니다. 그러나 형편 상 당장 만나지 못하고 편지로만 안부를 주고받았습니다. 그 청년은 어머니의 편지로 어머니의 사랑을 느끼기는 하지만 실제로 경험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다가 직접 만나게 되었습니다. 어머니 품에 안긴 이 청년은 어머니의 사랑이 무엇인지 직접 경험할 수 있습니다. 요한이 말하는 새로운 세상은 바로 이와 같이 하나님을 직접 만나는 세상입니다. 모든 생명의 실체들이 직접 드러나게 되는 세상입니다.
눈물, 고통이 없는 곳
요한은 그런 세상을 조금 더 실제적으로 표현합니다. 4절 말씀을 보십시오. “그들의 눈에 모든 눈물을 씻어주실 것이다. 이제는 죽음이 없고 슬픔도 울부짖음도 고통도 없을 것이다. 이전 것들이 다 사라져버렸기 때문이다.” 하나님과 직접 만나게 될 새로운 세상에는 눈물, 죽음, 슬픔, 울부짖음, 고통이 없습니다. 그것들은 이마 다 사라졌습니다. 전혀 새로운 세상입니다.
이런 환상을 보고 있는 요한이 처한 형편은 눈물과 고통이었습니다. 앞서 말씀드린 대로 로마의 폭력이 거의 막가파식으로 그들을 짓눌렀습니다. 사실 그런 폭력이 아니라고 하더라도 우리의 삶에는 눈물과 고통이 사라지지는 않습니다. 예컨대 학생들이 시험을 본 다음에 늘 후회합니다. 조금 더 공부를 하면 더 좋은 점수를 받았을 텐데 하는 후회 말입니다. 우리의 인생살이에서도 그런 일들은 부지기수입니다.
어떤 사람은 그렇지 않다 하고 말할지도 모르겠군요. 자기는 모든 삶에 만족한다고 말입니다. 현재 모든 것이 행복하고 아무런 불평불만이 없다고 말입니다. 물론 신앙이 깊은 사람이거나 자기 마음을 잘 다스리는 사람이라고 한다면 그런 영적인 평정을 누릴 수 있습니다. 그러나 자기는 그렇게 살아갈 수 있다고 하더라도 주변 세계를 바라본다면 모든 게 만족스럽다고 말할 수는 없을 겁니다. 왜냐하면 우리 주변에서는 눈물과 고통이 끊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자기 혼자서 기쁨과 평화를 누린다고 하더라도 주변을 조금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라고 한다면 눈물과 고통이 없는 새로운 세상에 대한 희망을 놓치지 못할 겁니다.
새로운 세상에 눈물과 고통이 없다는 이 증언은 마태복음의 산상수훈과 연결됩니다. 특히 팔복말씀의 핵심이 여기에 담겨 있습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마음이 가난한 사람은 행복하다. 하늘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슬퍼하는 사람은 행복하다. 그들은 위로를 받을 것이다.”(마 5:3,4)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 즉 이 세상 어디에서도 희망을 발견할 수 없는 사람들이 행복한 이유는 지금 요한계시록이 증언하고 있는 새로운 세상이 다가오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에서 위로를 받지 못해서 슬퍼하는 사람이 행복해질 수 있는 곳은 눈물과 고통이 사라진 새로운 세상입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 행복하다, 아니다 하고 기준을 세워놓은 그 모든 것들이 “다 사라져버렸기” 때문에 가난하고 슬퍼하는 사람이 행복할 수 있습니다. 반대로 이 세상에서 행복하다고 생각하던 사람은 불행해질지 모릅니다. 왜냐하면 자기가 중요하다고 붙들고 있었던 기준들이 무의미해졌기 때문입니다.
승리하는 자
다음과 같은 질문이 들리는군요. 눈물과 고통이 없는 새로운 세상을 기다리기만 하면 모든 게 다 해결되는가, 지금 우리를 지배하고 있는 악과 투쟁하지 않고 그저 감나무 밑에서 감이 떨어질 때를 입 벌리고 기다리기만 하면 되는가, 하는 질문 말입니다. 일단 기다림이 최선입니다. 왜냐하면 새로운 세상은 하나님의 직접적인 개입으로 일어나는 사건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런 기다림의 신앙은 무기력한 삶과는 전혀 다릅니다. 오히려 투쟁적인 삶의 방식입니다. 본문 7절과 8절에 “승리하는 자”와 “비겁한 자”가 비교되었습니다. 하나님이 새로운 세상을 가져온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사람은 악과 적당하게 타협하지 않습니다. 그는 정의와 평화를 위해서 투쟁합니다. 그걸 모르는 사람은 비겁하게 삽니다. 흉측스러운 사람, 거짓말쟁이가 됩니다. 요한은 그런 사람들이 차지할 곳은 불과 유황이 타오르는 바다라고 합니다. 거짓은 사라질 수밖에 없다는 뜻입니다.
여러분, 오늘은 교회력 마지막 주일입니다. 한 해가 이렇게 갔습니다. 우리의 인생도 역시 이렇게 속히 끝나겠지요. 여러분 자신에게 눈물과 고통이 있습니까? 아니면 주변에서 그런 사람들을 봅니까? 용기를 내십시오. 눈물과 고통이 다 사라지고 하나님이 직접 우리와 함께 하시는 그런 새로운 세상이 옵니다. 이런 희망을 가진 사람들은 오늘 이 세상에서 눈물을 씻는 일, 고통을 제거하는 일에 동참해야하지 않을까요?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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