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ser::bec483ba-d204-47d4-afbd-8005746530c3

기타

새로운 세상, 11월28일

2004.11.28.                            
새로운 세상
렘 33:14-18

야훼의 약속
야훼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고 있는 예레미야는 현재 구금되어 있는 상태입니다. 바벨론에 의해서 예루살렘이 함락되고 시드기야 왕도 사로잡혀 가게 될 것이라는 예언이 화근이 되어 감옥에 갇힌 예레미야는 이제 더 이상 백성들을 만날 수 없게 되었습니다. 예루살렘이 초토화하는 대재앙을 앞에 두고 아무런 조치도 취할 수 없는 예레미야로서는 단지 야훼 하나님과의 영적인 사귐 속으로 들어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너는 나를 불러라. 내가 대답하리라. 나는 네가 모르는 큰 비밀을 가르쳐 주리라.”(렘 33:3). 야훼 하나님과의 영적인 사귐을 방해할 수 있는 대상이 하나도 없다는 사실의 리얼리티를 확보한 사람이 곧 예언자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저자거리에 있든지 광야로 쫓겨나 있든지 오늘의 예레미야처럼 권력에 의해서 감옥에 갇혔어도 하나님과의 영적인 사귐을 계속 유지할 수 있었습니다. 물론 대개의 평범한 사람들은 이런 사귐이 무엇인지 알지 못할 뿐만 아니라 부분적으로 느낀다고 하더라도 삶의 조건에 따라서 그런 영적인 상황이 유동적입니다. 이는 흡사 사람들이 일상의 삶에서 평화와 기쁨을 누리지 못하고 작은 조건들 때문에 혼란에 빠지는 것과 비슷합니다.
야훼 하나님과 영적인 소통을 나누는 예레미야에게 다음과 같은 말씀이 내렸습니다. “장차 내가 약속한 복을 이스라엘 국민과 유다 국민에게 그대로 내릴 날이 온다.”(14절). 이런 표현 방식을 문자의 차원에서 접근하면 하나님이 인간처럼 말을 하는 것으로 생각되겠지만 우리는 그렇게 생각할 수 없습니다. 마음이 거룩한 영으로 가득 찬 예레미야에게 흡사 야훼 하나님이 직접 말씀하시는 것 같은 깨달음이 일어났다는 뜻입니다. 그것은 곧 “야훼 하나님의 약속”이었습니다. 이 약속은 이미 앞에서 주어진 것입니다. “내가 다윗의 정통 왕손을 일으킨 그 날은 오고야 만다. 이는 내 말이라, 어김이 없다. 그는 현명한 왕으로서 세상에 올바른 정치를 펴리라. 그를 왕으로 모시고 유다와 이스라엘은 살 길이 열려 마음 놓고 살게 되리라. ‘야훼 우리를 되살려 주시는 이’라는 이름으로 그를 부르리라.”(렘 23:5,6). 예레미야는 무너지는 민족의 운명을 눈앞에 두고 감옥 안에 갇힌 몸으로 이제 야훼로부터 들었던 그 약속을 다시 회상하고 있습니다. 당장은 망하게 되겠지만 결국 야훼 하나님이 살 길을 열어주신다는 그 약속을 붙들었습니다.
유대인들은 바로 약속의 민족이었습니다. 예언자들은 뒤뚱거리는 그 민족의 역사 앞에서도 꾸준하게 이런 야훼의 약속을 기억하고 민중들에게 상기시켰습니다. 유대인들이 야훼 하나님의 약속에 토대를 두고 살아왔다는 사실은 이미 노아 홍수 이후에 무지개를 보고 그것을 더 이상 홍수에 의한 멸망이 없으리라는 야훼 하나님의 약속으로 믿었다는 설화로부터 시작해서, 아브라함과 이삭, 야곱에 이르는 족장들에게 주신 야훼 하나님의 약속을 그들의 신앙적 토대로 삼았다는 사실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야훼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기다림이 얼마나 치열한지 그들은 아직도 메시아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 기독교와 유대교 사이에 긴장이 있습니다. 우리도 역시 예수님의 재림을 기다리고 있지만 그 재림은 이미 2천년 전에 역사적으로 이 세상에 오셨던 바로 그 예수님이라는 점에서 유대인들의 기다림과는 다릅니다. 물론 여기서 2천년 전 사건이 불러온 차이를 강조하는가, 아니면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을 강조하는가에 따라서 그 긴장의 강도는 좀 달라질 겁니다. 후자를 강조한다면 우리는 유대교와 더불어서 공동의 대화를 많이 나눌 수 있겠지만 전자를 강조한다면 대화의 맥이 자주 끊겨질 것입니다. 유대교와 관계는 앞으로 우리가 시간을 두고 천천히 풀어야 할 숙제이지만, 가능한대로 서로 통할 수 있는 대목부터 대화를 나누어가는 지혜는 필요합니다. 그렇게 공동으로 나눌 수 있는 대화 중의 하나가 바로 오늘 예레미야도 지적하고 있는 ‘야훼 하나님의 약속’입니다.

올바른 정치
예레미야에게 주어진 야훼 하나님의 약속은 구체적으로 다음과 같습니다. 앞으로 오게 될 다윗의 정통 왕손은 “세상에 올바른 정치를 펼 것이다.”는 것입니다.(15절). 예레미야는 요시야 왕의 통치를 올바른 정치라고 표현한 적이 있습니다. 그의 아들 여호야김의 잘못된 정치를 비난하면서 바른 정치의 전형을 요시야에게서 찾았습니다. “누구에게 질세라 송백나무를 쓰면 그것으로 왕노릇 다 하는 것 같으냐? 너의 아비는 법과 정의를 펴면서도 먹고 마실 것 아쉽지 않게 잘 살지 않았느냐? 가난한 자의 인권을 세워주면서도 잘 살기만 하지 않았느냐? 그것이 바로 나를 안다는 것이다. 내가 똑똑히 말한다. 그런데 너는 돈 욕심밖에 없구나. 죄 없는 사람의 피를 흘리려고 눈을 부릅뜨고 백성을 억누르고 들볶을 생각뿐이구나.”(렘 22:15-17). 오늘 본문에서 언급하고 있는 올바른 정치는 곧 가난한 자들의 인권을 세워주는 것을 의미합니다. 야훼 하나님을 믿는 왕의 정치는 바로 이런 일에 최선을 기울이는 것이어야 한다는 뜻이겠지요.
유대인들이 희망하고 있는 미래는 매우 정치적인 성격을 띠고 있었습니다. 예레미야의 예언도 역시 다윗의 정통 왕손이 등장해서 올바른 정치를 펼치게 될 것이라고 선언하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와 비교할 때 고대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통치가 정치적으로 작동한다는 생각에 훨씬 강하게 묶여 있었습니다. 그래서 예언자들은 완고한 왕들을 향해서 야훼 하나님의 뜻대로 정치를 펼치라고 끊임없이 외쳤으며, 그런 와중에 상당한 피해를 입기도 했습니다. 고대 유대인들이 하나님의 나라를 정치적인 것으로 생각했다는 사실은 그들이 그만큼 현실적인 삶을 소중하게 여겼다는 뜻이겠지요. 소외되고 가난한 사람들을 실제로 도우려면 개인의 도덕심에 호소하는 것도 한 방법이겠지만 정치적으로 해결하는 게 가장 효율적일 것입니다. 이런 일들은 오늘 우리에게도 여전히 타당합니다. 세금 제도를 사회정의 차원에서 바꾼다거나 전쟁 무기구입에 들어가는 돈을 이런 복지와 구제에 돌릴 수 있다면 가난한 사람들의 문제를 훨씬 효과적으로 해결할 수 있을 것입니다.
예레미야는 올바른 정치가 펼쳐지면 “예루살렘에서는 모두들 마음 놓고 살게 되리라.”(16절)고 야훼 하나님의 말씀을 전합니다. “마음 놓고 살게 될” 그 날을 기다리고 있는 이들이 평소에 얼마나 불안하게 살았는지 충분히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 당시 사람들이 마음을 놓지 못하는 이유는 단지 바빌론이라는 제국이 공격해왔다기보다는 오히려 가난한 사람들의 인권을 지켜주는 정의로운 정치가 실종되었다는 데에 있었습니다. 그들은 이제 다윗의 정통 왕손이 나타나 이런 문제를 완전하게 해결해서 모든 사람들이 마음 놓고 살게 될 날을 기다렸습니다. 그것이 곧 예레미야를 통해서 야훼 하나님의 약속으로 주어졌습니다.
예레미야를 통한 야훼 하나님의 약속에는 정치적인 것만이 아니라 종교적인 요소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다윗 후손으로 왕위가 계승되는 것과 아울러 레위 지파를 통한 종교의식도 끊이지 않게 되리라는 약속이(18절) 그것입니다.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통치가 온전하게 임하게 될 나라의 성격을 이렇게 정치적인 부부분과 종교적인 부분을 함께 염두에 두었습니다. 박해받던 기독교가 로마의 국교가 된 이후로 유럽을 황제와 교황이 지배한 역사적 사실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고대 문명의 실권이 늘 정치 지도자들과 종교지도자들에 의해서 좌우되었다는 사실을 감안한다면 고대 유대인들이 다윗 왕조의 복원과 레위 가문의 복원을 기대를 한 것은 당연합니다.
결국 예레미야가 야훼 하나님의 약속이 성취되기를 기다리는 그 새로운 세계는 바벨론에 의해서 단절되었던 정치의 정통성과 종교의 정통성이 회복되는 때라고 할 수 있습니다. 늘 생존의 위협으로 인해 좌불안석하던 그들에게 그것이 곧 하나님의 약속이었습니다. 흡사 우리가 일제 식민 통치 시절에 해방되어 국가의 모습을 갖추기를 희망했던 것과 같습니다. 그들은 더 이상 정처 없이 떠돌아다녀야 하는 신세를 면할 수 있고, 자기들에게도 나라가 있다는 사실을 떳떳하게 선포할 수 있는 그러한 때야말로 야훼 하나님이 살아있다는 증거로 생각했을 것입니다. 우리가 보더라고 아주 자연스러운 생각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통치
오늘 우리는 예레미야를 통해서 선포된 야훼 하나님의 약속이 70년 후에 실현되기는 했지만 그것으로 인해서 유대가 완전한 평화를 누리지 못했다는 사실을 눈여겨보아야 합니다. 다윗의 후손을 통한 왕권의 승계도 계속될 수 없었고, 기원후 70년에 로마에 의해서 예루살렘이 다시 멸망한 다음에는 레위 자손을 통한 제사 행위도 사라졌습니다. 예레미야의 희망과 기다림은 2천5백년이 흐른 다음에야 경우 달성되었는지도 모릅니다. 세계 2차대전 이후에 이스라엘이 독립국가가 되었지만 팔레스타인과의 분쟁으로 인해서 그들은 여전히 예루살렘 거리에서 마음 놓고 살지 못하는 실정입니다. 그렇다면 예레미야에 의해서 선포된 야훼 하나님의 약속은 여전히 이루어지지 않은 것이겠지요.
앞에서 저는 유대교의 메시아 기다림과 우리 기독교의 기다림이 일정 부분에서는 소통되지만 다른 부분에서는 긴장이 있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아직도 정치적인 구원을 메시아의 근본 행위로 보고 있기 때문에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메시아로 인정하지 않습니다. 이미 예수님이 처음 역사에 등장하셨을 때도 역시 이런 정치적인 메시아 희망으로 인해서 예수님에게 실망하고 돌아간 사람들이 적지 않았는데, 그런 현상은 지금도 여전합니다.
우리는 결코 정치적인 사건을 소홀하게 생각할 수 없습니다. 앞에서 확인했듯이 올바른 정치는 가난한 사람의 인권을 지켜준다는 점에서 이 세상에서 가장 하나님의 뜻에 맞는 행위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기독교인들은 정치를 통해서 우리의 생명의 완성된다고 믿지 않습니다. 민주화와 복지가 완벽하게 이루어졌다고 생각되는 북유럽 국가에서도 여전히 삶의 무의미와 허무가 숙명처럼 따라다니며, 우리가 개인적으로 수많은 욕망을 성취했다고 하더라도 그것으로 우리의 생명이 조금도 완성되었다는 생각을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역사 허무주의에 빠져도 된다는 말은 결코 아닙니다. 역사를 초월하는 그 궁극적인 생명의 세계와 영적으로 연결되어 있지만 않는다면 우리의 모든 행위는 그 잠정성과 유한성으로 인해서 순식간에 훼손된다는 사실을 좀더 진지하게 들어야 보아야 합니다. 거꾸로 그런 초월적인 힘을 인식하고 있는 사람만이 이 역사의 부조리 앞에서 두려워하지 않고 부단히 투쟁해나갈 수 있습니다.
이미 예수님이 빌라도에게 재판을 받으면서 당신의 나라는 로마의 대표적 정치인이었던 빌라도가 관심을 갖고 있는 그런 나라가 아니라 하나님 아버지의 나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생명의 차원을 전혀 다른 데로 돌려놓도록 하셨습니다. 이 세상을 창조한 분인 하나님만이 인간의 생명을 완성할 수 있으니까 오직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만 구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물론 하나님의 통치는 때로는 정치적인 방식을 통해서 나타날 수도 있고, 예술과 문학의 방식으로도, 또는 자연과학의 방식으로도 나타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자신의 인격으로 자유롭게 활동하시는 그 하나님의 통치와 성령의 다스림은 늘 우리의 의도와 판단을 벗어나기 때문에 우리는 그를 우리의 생각 안으로 담아내기보다는 그분의 뜻에 우리를 맡기는 게 훨씬 바람직합니다. 바람직한 정도가 아니라 그런 방식이 아니면 우리는 전혀 생명의 세계에 참여할 수 없습니다.
이런 점에서 우리 기독교인들은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실 것을 기다리고 살아갑니다. 다윗과 같은 정치가가 나타나기를 기다리는 게 아니라 이 세상을 창조하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이 세상을 심판하실 예수 그리스도가 그의 약속대로 우리에게 다시 오실 것을 기다립니다. 그 세상은 전혀 새로운 세상입니다. 우리의 삶이 약간 진보하거나 개량되는 정도가 아니라 예수의 부활 사건에서 일어났던 것 같은 전혀 새로운 생명의 시작입니다. 여러분에게 주어진 삶의 조건 안에서 최선을 기울여 살아가십시오. 그러나 그런 모든 삶의 시도들은 여러분을 찾아오시는 예수님의 재림과 연결되어 있어야만 합니다. 그 때 우리는 동네에서 놀던 아이들이 집에서 부르면 모든 놀이를 그만두어야 하듯이 우리의 일상을 접고 그 생명의 세계를 맞아야 합니다. 대강절 첫 주일을 맞으며 이 기다림의 내용이 무엇인지 진지하게 성찰해보시기 바랍니다.
예레미야 33:15-18

설교의 다른 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