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 하늘과 새 땅
재림 지연 사태
초기 기독교는 재림 공동체라고 불러도 좋을 만큼 예수님의 재림을 매우 생생하게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재림은 자꾸 지연되는 가운데 세상을 떠나는 기독교인들이 늘어갔습니다. 이제 그들에게 예수 재림의 지연이 매우 심각한 문제로 등장하게 되었습니다. 이러 사태 앞에서 사람들의 반응도 각양각색이었겠지요. 어떤 사람들은 예수님의 재림을 위해서 기도하였을 것이며, 어떤 사람은 교회를 떠나기도 하고, 또 어떤 사람들은 그 의미를 새롭게 해석했겠지요.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어떤 사람들은 이 재림 신앙 자체를 조롱했습니다. 그들의 주장은 다음과 같습니다. “그리스도가 다시 온다는 약속은 어떻게 되었는가? 그 약속을 기다리던 선배들도 죽었고 모든 것이 창조 이래 조금도 달라진 것이 없지 않느냐?”(4절).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 특이한 것은 베드로가 이들을 가리켜 ‘자기들의 욕정을 따라’ 사는 사람들이라고 표현했다는 사실입니다. 물론 이 표현이 특별히 모욕적인 것은 아닙니다. 이것은 세상 사람들이 자기의 생각대로, 자기 주관대로, ‘자기 원하는 대로’ 사는 것에 대한 일반적인 표현입니다. 지금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모든 일반적인 삶의 태도도 이와 같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면밀히 살핀다기보다는 자신의 내부에서 우러나오는 욕구에 충실할 뿐입니다. 이런 점에서 아무리 그럴듯한 삶이라고 하더라도 그것이 하나님의 뜻에 의한 순종의 결과가 아니라면 결국 ‘욕정을 따라 사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베드로는 여기서 예수님의 재림이 지연되는 사태를 조롱하는 사람들의 속셈이 무엇인지 여기서 암시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재림 자체에 대해서 관심을 기울이기보다는 그것을 하나의 핑계거리고 삼고, 자기 욕정대로 살아가는 사람들이라고 말입니다.
그렇다 하더라도 그들의 문제 제기가 그렇게 터무니없는 건 아닙니다. 그들의 표현대로 모든 것이 창조 이래 조금도 달라진 것이 없는 상태에서 예수님의 재림을 운운한다는 건 좀 이상하게 보이기 마련입니다. 45억 년 전부터 빛을 내던 그 태양은 오늘도 여전히 빛을 냅니다. 하늘과 땅이 우리 앞에 옛날 모습 그대로 자리를 잡고 있습니다. 내일 태양이 사라질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오늘 우리 중에 있을까요? 여전히 지구가 자전하고 공전하고 있으며, 하늘에 별이 빛나고 있는데 예수님의 재림이라니, 이게 무슨 해괴망측한 주장입니까? 초기 기독교인들만이 아니라 오늘도 우리는 이와 비슷한 조롱을 받고 있습니다. 또는 우리 자신도 이런 조롱에 한몫 거들고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일단 베드로의 설명에 귀를 기울입시다.
세상의 변화
베드로는 예수님의 재림을 조롱하는 사람들이 일부러 외면하고 있는 사실이 있다고 주장합니다. 그것은 곧 하나님이 말씀으로 하늘과 땅을 창조했다는 사실입니다. “하느님의 말씀에 의해서 땅이 물에서 나왔고, 또 물에 의해서 이루어졌습니다.”(5b). 물에 의해서 땅이 이루어졌다는 말은 만물의 근원을 물이라고 본 탈레스 철학의 영향일지 모르겠습니다. 성서가 그런 영향을 받았다고 해도 큰 문제는 아닙니다. 여기서 중요한 건 이 세상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창조되었다는 사실이니까요. 노아 홍수를 기억하고 있는 성서기자는 물에 잠겨서 옛날의 세계는 멸망했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하늘과 땅은 지금도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서 여전히 유지되고 있습니다.(7a). 이 하늘과 땅은 심판의 날에 불에 타 버립니다.(7b). 불에 탄다는 이 개념도 역시 이 세상이 불에 의해서 멸망당했다가 다시 시작된다는 헤라클레이토스의 철학에 영향을 받았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성서가 그 당시의 주변 세계관에 영향을 받았지만 그 중심에는 하나님을 두고 있기 때문에 오늘 그 성서를 읽는 사람들은 이런 문제에 대해서 크게 염려할 게 없습니다. 성서 기자들이 독단론에 빠지지 않고 주변 세계에 대화의 문을 열어두었다는 점에서 그들이 진리론적 태도를 견지했다는 증거입니다.
지금 베드로는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요? 베드로는 지금 재림신앙을 조롱하는 사람들의 논리적 문제점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그들의 눈에는 세상이 하나도 변하지 않은 것 같지만 실제로는 결정적으로 변했고, 또한 변할 것이라고 말입니다. 그들은 겉으로 드러난 세상의 현상만 바라보는 반면에 성서기자는 그 내면의 세계를 보고 있습니다. 이 세상의 내면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근본적인 변화가 일어나고 있습니다. 그런 변화들은 곧 세상의 종말, 즉 예수님의 재림을 예고하는 것들입니다.
여러분, 세상이 우리 앞에 이렇게 놓여 있습니다. 이 세상은 바라보는 관점에 따라서 전혀 다르게 보입니다. 어떤 사람에게는 이 세상이 하나님과 아무런 상관없이 자기 방식으로 돌아가는 것처럼 보이고, 우리처럼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에게는 하나님과 밀접하게 연관된 것처럼 보입니다. 우리는 이 세상을 영적인 시각으로 보는 사람들입니다. 오늘 본문에 따르면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해서 세상을 보고 있습니다. 영적으로 본다는 게,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해서 바라본다는 게 무슨 뜻인지 이해하기 어렵다고 생각할 사람들이 있을 겁니다. 본문 말씀을 중심으로 이 문제를 좀 더 생각해보십시다.
성서기자는 세상에 대해서 고대인들의 세계관이었던 물과 불로 설명했습니다. 여기서 핵심은 다음과 같습니다. 이 세상의 존재 근거는 세상 내부가 아니라 외부에 놓여 있습니다. 그 외부는 물론 하나님,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가장 간단한 물리적 사실을 말씀드리겠습니다. 이 지구는 스스로의 힘에 의해서 움직이는 게 아니라 전적으로 태양에 의존하고 있습니다. 만약 태양이 에너를 10%만 잃는다고 하더라도 이 지구의 생명은 멸종하게 될 것입니다. 태양은 은하계 안에서 작은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별이기도 합니다. 거시 물리학이 너무 먼 이야기라면 우리와 가까운 사실을 생각해보세요. 요즘 감기로 고생하는 분들이 많습니다. 감기에 걸리지 않기 위해서 우리가 지구에 있는 바이러스를 모두 없애버렸다고 합시다. 어쩌면 그것으로 인해서 인간이 사라질지도 모릅니다. 언젠가 본 <우주전쟁>이라는 영화는 이런 이야기입니다. 지구에 외계인이 침략합니다. 인간이 그 어떤 무기로도 대항할 수 없었습니다. 그 외계인을 무너뜨린 것은 지구에 있는 박테리아(세균)였습니다.
여러분, 무슨 말씀입니까? 이 세상을 그저 표면적으로만 보지 말아야 합니다. 그 내면의 영적인 세계는 훨씬 풍부하고 깊습니다. 오늘의 과학도 이 세상이 어떤 힘에 의해서 이렇게 풍요로운 생명을 꽃피웠고, 이렇게 유지되고 있는 그 내막을 정확하게 모르고 있습니다. 분명히 어떤 힘들이 작용하는데, 우리의 인식 체계에는 감추어져 있다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이 이 세상을 창조했다고 믿는 우리는 그것을 영적인 현실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러한 영적인 현실을 염두에 두고 있는 사람이라고 한다면 표면적으로 돌아가는 이 세상을 보고 예수의 재림 지연을 조롱하지는 못할 겁니다.
세계 해체
성서기자는 앞에서 재림 지연에 대한 조롱을 방어한 다음에 이제 재림신앙을 적극적으로 설명합니다. 그에 따르면 재림신앙과 연관해서 우리가 세 가지 요소를 생각해야 합니다.
첫째, 시간의 상대성입니다. 성서기자는 시편 90:4절을 인용해서 이렇게 말합니다. “주님께는 하루가 천년 같고 천년이 하루 같습니다.”(8절). 시간이 무엇인가에 대해서 생각할 때마다 아득해지는 느낌이 듭니다. 지구의 나이가 45억년이라고 하는데, 그 세월과 어제라는 24시간 사이에 어떤 차이가 있는지 정확하게 파악하기 힘듭니다. 옛 어른들의 가르침처럼 우리의 인생이 낮잠 자는 한 순간처럼 느껴지기도 합니다. 성서기자는 예수님의 재림 지연을 단순히 우리의 시간개념으로 계산하지 말라고 합니다.
둘째, 재림지연은 인류 구원과 연관됩니다. 아직 구원받지 못한 사람들이 구원받을 수 있는 기회를 주기 위한 하나님의 은총이 바로 재림지연이라는 것입니다.
셋째, 재림은 ‘도둑처럼’ 갑자기 일어납니다. 예수님도 이미 이런 비유의 말씀을 주신 적이 있습니다.(마 24:43). 종말은 우리에게 갑자기 다가옵니다. 개인의 죽음도 역시 그렇습니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전혀 예상하지 못한 순간에 죽어 가는지 모릅니다. 물론 질병이나 사고가 아니라 늙어 죽을 때는 약간 다르다고 할 수 있지만, 그런 죽음마저도 역시 근본적으로는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개인의 죽음만이 아니라 지구 생태계도 도둑처럼 허물어질 수 있습니다. 흡사 제방의 둑이 넘치기 직전까지는 여전히 제방이 안전한 것처럼 보이다가도 한쪽이 허물어지기 시작하면 막아낼 수 없는 것과 비슷합니다.
성서기자는 이 세상의 마지막에 벌어질 일을 이렇게 묘사합니다. “그 날에 하늘은 요란한 소리를 내면서 사라지고 천체는 타서 녹아 버리고 땅과 그 위에 있는 모든 것은 없어지고 말 것입니다.”(10절). 이런 표현에는 유대인들의 묵시사상이 그대로 나타나 있습니다. 기독교는 유대교에 뿌리를 내리고 있었기 때문에 이런 영향을 받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복음서와 요한계시록에도 이와 비슷한 표현은 많습니다.
이런 성서의 보도를 읽는 현대 기독교인들은 두 가지 반응을 보입니다. 하나는 고대인들의 이런 세계이해는 무의미하다고 생각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이제 현대인들은 성숙한 사람들이니까 이런 미숙한 세계관을 벗어버려야 한다고 말입니다. 신학적인 용어로 말씀드린다면 성서를 탈(脫)신화화해야 한다는 주장입니다. 이와는 반대로 이런 묵시사상적인 묘사를 문자 그대로 받아들여야 한다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제가 요즘 마틴 로이드 존스의 책을 읽고 있는데, 이런 분들이 바로 이런 주장을 합니다. 제가 보기에 이 두 태도 모두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이런 성서 전승에 참여한 사람들은 어쩔 수 없이 고대인들의 세계관을 그대로 따르고 있긴 하지만 그들이 주목하는 것을 그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통치였습니다. 이 세상은 아무리 위대해 보여도 하나님의 피조물에 불과합니다. 이런 세상은 아주 간단히 해체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새 하늘과 새 땅
이런 설명을 들으면서 기독교의 가르침은 매우 부정적이고 비관적인 게 아닌가 하고 생각하면 큰 착각입니다. 물론 기독교가 이 세상의 삶을 부정적으로 접근하고 해석한 적이 많았습니다. 역사를 부정하고, 인간 삶을 금욕주의적으로 해석하고, 성속을 이원론적으로 했습니다. 이런 주장들은 기독교의 근본을 충분히 이해하기 못했기 때문에 나온 것입니다.
이 세상이 해체된다는 오늘 본문의 묘사가 말하려는 것은 매우 분명합니다. 그것은 곧 이 세상을 부정하려는 게 아니라 이 세상의 한계를 뚫어봄으로써 ‘새 하늘과 새 땅’을 희망하는 것입니다. 13절 말씀을 보십시오. “그러나 우리는 하느님의 약속을 믿고 새 하늘과 새 땅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낡은 세상은 불타 없어지고 전혀 새로운 하늘과 땅이 시작됩니다. 여기서 새 하늘과 새 땅이 핵심입니다.
사람들은 성서가 말하는 새 하늘과 새 땅을 매우 막연하게 생각할지 모르겠습니다. 지금 당장 벌어먹고 살아야 할 일이 많습니다. 농사문제도 그렇고, 비정규직 노동자 문제, 6자회담 같은 게 현안입니다. 학생들이라고 한다면 지금 학기말 시험을 어떻게 치르는가 하는 게 곧 가장 중요하기 때문에 새 하늘과 새 땅은 완전히 남의 나라 이야기같이 들립니다. 사실 우리 앞에 놓은 일상은 그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중요합니다. 밥 먹고, 배설하고, 사람을 만나고, 인간다운 세상을 만들기 위해서 투쟁하는 모든 일들이 우리에게 소중합니다. 그러나 이런 일이 소중하기 때문에 우리는 새 하늘과 새 땅을 향한 성서의 가르침을 놓치지 말아야 합니다.
좀 더 구체적으로 질문합시다. 우리는 무슨 새 하늘과 새 땅을 기다리고 있습니까? 우리가 완전히 노동으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그런 세계인가요? 더 이상 전쟁이 없는 세계를 말하는 건가요? 완전한 복지사회가 건설되는 세계, 배아줄기의 개발로 건강과 장수가 보장되는 세계인가요? 개량과 진보로 이루어지는 그런 세계를 위해서 우리가 최선을 다 해야겠지만, 성서가 말하는 새 하늘과 새 땅은 그런 것과는 다릅니다. 새 하늘과 새 땅은 우리의 노력으로 성취되는 게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전적인, 종말론적인 통치로 이루어지는 세계입니다. 전혀 새로운 생명인 부활의 예수님이 이 세상에 다시 오셔서 세상을 심판하십니다. 생명과 아닌 것이 확실하게 구분되는 심판을 통해서 우리에게 새 하늘과 새 땅이 시작됩니다. 그래서 성서 기자는 이렇게 충고합니다. “하느님의 심판날을 기다릴 뿐 아니라 그 날이 속히 오도록 힘써야 할 것입니다.”(12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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