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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순절

생명과 존재의 근원 (롬 4:13-25)

생명과 존재의 근원

4:13-25, 사순절 둘째 주일, 201531

 

13 아브라함이나 그 후손에게 세상의 상속자가 되리라고 하신 언약은 율법으로 말미암은 것이 아니요 오직 믿음의 의로 말미암은 것이니라 14 만일 율법에 속한 자들이 상속자이면 믿음은 헛것이 되고 약속은 파기되었느니라 15 율법은 진노를 이루게 하나니 율법이 없는 곳에는 범법도 없느니라 16 그러므로 상속자가 되는 그것이 은혜에 속하기 위하여 믿음으로 되나니 이는 그 약속을 그 모든 후손에게 굳게 하려 하심이라 율법에 속한 자에게뿐만 아니라 아브라함의 믿음에 속한 자에게도 그러하니 아브라함은 우리 모든 사람의 조상이라 17 기록된 바 내가 너를 많은 민족의 조상으로 세웠다 하심과 같으니 그가 믿은 바 하나님은 죽은 자를 살리시며 없는 것을 있는 것으로 부르시는 이시니라 18 아브라함이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라고 믿었으니 이는 네 후손이 이같으리라 하신 말씀대로 많은 민족의 조상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 19 그가 백 세나 되어 자기 몸이 죽은 것 같고 사라의 태가 죽은 것 같음을 알고도 믿음이 약하여지지 아니하고 20 믿음이 없어 하나님의 약속을 의심하지 않고 믿음으로 견고하여져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21 약속하신 그것을 또한 능히 이루실 줄을 확신하였으니 22 그러므로 그것이 그에게 의로 여겨졌느니라 23 그에게 의로 여겨졌다 기록된 것은 아브라함만 위한 것이 아니요 24의로 여기심을 받을 우리도 위함이니 곧 예수 우리 주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를 믿는 자니라 25 예수는 우리가 범죄한 것 때문에 내줌이 되고 또한 우리를 의롭다 하시기 위하여 살아나셨느니라.

 

유대인들은 자신들의 시조를 아브라함으로 여깁니다. 아브라함의 이야기는 창 12장부터 상당히 길게 나옵니다. 그는 아버지 데라와 아내 사라, 그리고 조카 롯과 함께 메소포타미아 문명의 발생지인 갈대아 우르를 떠나 가나안으로 이주했습니다. 중간 지점인 하란에 머물 때 아버지가 죽고 조카 롯만 데리고 아내와 함께 가나안으로 왔습니다. 그는 가나안에서 큰 재산을 일구었습니다. 자수성가 한 것입니다. 일찌감치 미국으로 이민 간 우리 교포 중의 한 사람이 사업을 해서 크게 성공한 경우와 비슷합니다. 유대인들이 아브라함을 특별하게 생각하는 이유는 아브라함이 혈통으로 자신들의 조상이라는 사실만이 아니라 그들의 하나님 신앙이 아브라함에게서 시작되었기 때문입니다.

 

15장에는 하나님이 아브라함과 약속을 맺으신 이야기가 나옵니다. 당시에 아브라함에게는 아들이 없었습니다. 그는 하인 중이 한 사람인 엘리에셀을 양자로 삼았습니다. 하나님은 엘리에셀이 아니라 아브라함이 직접 낳게 될 아들이 상속자가 될 것이라고 말씀하면서, 5절에서 아브라함의 자손이 밤하늘의 별처럼 늘어날 것이라고 이르셨습니다. 그뿐만이 아닙니다. 오늘 제 1독서인 창 17장에 큰 축복에 대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내가 내 언약을 나와 너 사이에 두어 너를 크게 번성하게 하리라.”(17:2). “보라. 내 언약이 너와 함께 있으니 너는 여러 민족의 아버지가 될지라.”(17:4). 비슷한 말씀이 이후로 반복해서 나옵니다. “이제 후로는 네 이름을 아브람이라 하지 아니하고 아브라함이라 하리니 이는 내가 너를 여러 민족의 아버지가 되게 함이니라. 내가 너로 심히 번성하게 하리니 내가 네게서 민족들이 나게 하며 왕들이 네게로부터 나오리라.”(17:5). 유대인들에게 더 매력적인 약속이 이어집니다. “내가 너와 네 후손에게 네가 거류하는 이 땅 곧 가나안 온 땅을 주어 영원한 기업이 되게 하고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리라.”(17:7).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주신 약속은 고대인들은 물론이고, 현대인들도 모두 염원하는 것들입니다. 후손, , 땅이 그것입니다. 이런 약속에 근거해서 유대인들은 자신들이 아브라함의 후손이라는 사실에 대해서 큰 자부심을 갖고 있었습니다.

 

그들의 종교적, 민족적 자부심에 대해서는 다른 사람이 뭐라 할 게 없습니다. 문제는 유대인들이 아브라함의 후손이라는 사실을 배타적인 특권으로 여겼다는 데에 있습니다. 아브라함의 후손이 아닌 사람들을 무시했습니다. 그들은 아브라함의 후손이자 하나님의 백성으로의 특징을 율법 실행으로 보았습니다. 율법에 따라서 할례도 받았습니다. 유대인들은 모두 율법을 따르고 할례를 받았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유대인들도 여전히 율법을 지키고 할례를 받는 게 좋다고 여겼습니다. 이런 신앙이 당시 초기 기독교의 대세였습니다. 바울은 율법주의자들만이 아니라 율법에 타협적인 세력과도 신학적 투쟁을 마다하지 않았습니다. 그 논리의 핵심은 율법 실천으로 아브라함의 후손이 되는 게 아니라 믿음으로 된다는 것입니다. 로마서는 바로 신학적 논리 한 가지에 집중하는 성경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바울이 무턱대고 율법을 부정하고 믿음만을 강조한 것은 아닙니다. 신학적인 토대가 명백했습니다. 두 가지 근거를 제시합니다. 하나는 율법의 존재론적 한계입니다. 바울은 롬 4:15절에서 그 사실을 다음과 같이 확실하게 밝혔습니다.

 

율법은 진노를 이루게 하나니 율법이 없는 곳에는 범법도 없느니라.

 

이 문장에서 율법은 오늘날의 실정법과 그 개념이 비슷합니다. 법은 처벌을 전제합니다. 운전하는 분들은 속도위반, 신호위반, 주차위반 등으로 일 년에 최소 한 두 번의 범칙금 통지를 받을 겁니다. 도로교통법이 없으면 위반도 없는 겁니다. 며칠 전에 헌법재판소는 간통죄를 국민의 기본권 침해로 보고 폐지 결정을 내렸습니다. 똑같은 행위인데도 하루아침에 감옥에 가는 피고인이 되기도 하고, 그렇지 않기도 하는 게 법의 속성입니다. 바울의 논리가 그것입니다. 율법은 율법을 지키지 못한 사람에게 징벌을 내려야만 합니다. 바울이 볼 때 그런 것으로는 사람을 살릴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아무도 율법을 완전하게 지킬 수 없기 때문입니다.

 

다른 하나는 아브라함이 모든 인류의 조상이라고 한다면 율법이 있는 유대인들만이 아니라 율법이 없는 이방인들에게도 조상이 되어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아브라함이 모든 민족의 조상이라는 사실은 유대인들도 인정하는 것입니다. 바울은 롬 4:16()절에서 창 17:5절을 인용했습니다. 만약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아가는 문제에서 율법만이 절대적인 기준이라고 한다면 율법이 없는 이방인들을 배척해야 하는데, 그렇다면 이방인들이 아브라함의 후손이라는 사실을 부정하는 게 됩니다. 바울의 반론을 듣는 유대인들은 대답이 궁색했을 겁니다. 바울이 없는 말을 하는 게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제 바울은 아브라함의 후손이 되는 조건을 율법이 아니라 다른 것으로 제시합니다. 이건 전혀 새로운 이야기는 아닙니다. 유대인들도 다 알고 있었지만 미처 그 깊이까지 들어가지 못한 것입니다. 그것은 곧 믿음입니다. 아브라함은 모세의 율법이 들어오기 훨씬 전에 믿음을 통해서 하나님으로부터 약속을 받았습니다. 아브라함도 할례를 받기는 했습니다. 그러나 그 할례를 받기 이전에 이미 믿음으로 축복의 약속을 받았습니다. 율법은 한참 나중의 일이고, 할례도 믿음을 통한 의보다 뒤의 일입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으로부터 많은 축복을 받고 약속의 관계를 얻게 때는 율법 이전이며, 할례 이전입니다. 하나님을 향한 믿음이 아브라함을 모든 민족의 조상으로 만든 것입니다. 사태가 이런데 왜 율법을 고집하면서 율법 없는 사람들을 배격하느냐는 게 바울의 주장입니다.

 

바울이 말하는 아브라함의 믿음이 구체적으로 무엇일까요? 아브라함과 아내 사라는 생리적으로 아기를 낳을 수 없는 나이가 훨씬 지났습니다. 출산은 완전히 포기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런데도 아브라함은 후손이 별처럼 많아질 것이라는 하나님의 약속을 의심하지 않았습니다. 4:20-22절에서 바울은 아브라함의 믿음을 이렇게 평가했습니다.

 

믿음이 없어 하나님의 약속을 의심하지 않고 믿음으로 견고하여져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약속하신 그것을 또한 능히 이루실 줄을 확신하였으니 그러므로 그것이 그에게 의로 여겨졌느니라.

 

아브라함의 의가 율법이 아니라 믿음에 의한 것이라면 율법으로 사는 유대인들과 율법 없이 사는 이방인의 문제가 해결될 수 있습니다. 바울의 주장에 따르면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오직 믿음에 의해서만 평가됩니다. 믿음이 있으면 율법이 없는 사람이라고 하더라도 하나님으로부터 의롭다는 인정을 받을 것이며, 믿음이 없다면 율법적으로 살아도 의롭다는 인정을 받지 못할 것입니다. 율법과 믿음의 관계를 비유적으로 이렇게 설명할 수 있습니다. 자식들이 부모에게 인정받는 길이 무언지를 생각해보십시오. 하나는 보모가 원하는 일을 잘 하는 겁니다. 효자, 효녀가 되는 겁니다. 다른 하나는 부모를 신뢰하는 것입니다. 전자는 율법이고, 후자는 믿음입니다. 바울에 따르면 아브라함은 율법 이전에 이미 믿음으로 의롭다 인정을 받았습니다. 그게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바른 길입니다. 그렇다고 율법을 거부하는 것은 아닙니다. 율법은 믿음에 뒤따라오는 것입니다. 믿음 안에 율법이 있는 거지 율법 안에 믿음이 있는 게 아닙니다. 이런 신학적 입장을 강조하기 위해서 바울은 아브라함이 믿음으로 의롭다 인정을 받았다고 말한 겁니다.

 

유대인들이 바울의 주장에 수긍했을까요? 받아들이지 못할 이유는 없습니다. 율법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유대인들이라고 하더라도 그것이 절대적이지 않다는 사실은 다 알고 있었고, 아브라함에게서 믿음이 가장 중요하다는 사실도 알고 있었습니다. 그들의 입장에서도 율법 실천보다 하나님을 믿는 것이 더 본질적이라는 주장을 부정할 필요는 없었습니다. 문제는 그 믿음의 대상이 예수 그리스도라는 사실에 있었습니다. 유대인들이 그걸 받아들이기는 어려웠습니다. 예수님이 당하신 십자가의 죽음은 유대인들에게 거리끼는 대상이었습니다(고전 1:23). 십자가에 달린 자는 오히려 하나님으로부터 저주를 받은 사람입니다. 그런데 바울은 예수님의 십자가가 바로 인류가 구원받을 수 있는 유일한 길이라고 주장합니다. 부활도 유대인들은 받아들이지 못했습니다. 유대인들 중에서 바리새파 사람들은 부활을 받아들였지만, 예수님이 부활했다는 사실은 인정할 수 없었습니다. 십자가와 부활 문제에 관한 바울의 주장은 유대인들에게 받아들여질 수 없었습니다

 

오늘 우리도 이 세상에서 이런 경험을 합니다. 교회 밖의 사람도 예수님에 대해서는 좋게 생각합니다. 인류의 훌륭한 스승으로 대접합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을 기꺼이 따르고 싶어 합니다. 사랑하라, 대접받고자 하는 대로 남을 대접하라는 말씀을 교회에 다니지 않는 사람들도 귀한 경구로 인정합니다. 인류의 스승으로 인정하는 겁니다. 기독교인들 중에도 예수님을 위대한 도덕군자, 지혜 교사정도로 여기는 분들이 없지 않습니다. 가난한 사람을 돕고, 사회정의를 이루는 것이 교회가 해야 할 가장 중요한 일인 것처럼 주장하기도 합니다. 엄격하게 말해서 이런 것들은 기독교 신앙에서 부수적인 것들입니다. 휴머니스트나 착한 사람이 되려고 예수 믿는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핵심은 예수의 십자가와 부활에 대한 믿음입니다. 바울은 그 어떤 상황에서도 이 핵심을 양보하지 않았습니다. 양보하고 타협했다면 기독교는 역사에서 사라졌을 겁니다. 본문 23-25절은 이렇습니다.

 

그에게 의로 여겨졌다 기록된 것은 아브라함만 위한 것이 아니요 의로 여기심을 받을 우리도 위함이니 곧 예수 우리 주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를 믿는 자니라 예수는 우리가 범죄한 것 때문에 내줌이 되고 또한 우리를 의롭다 하시기 위하여 살아나셨느니라.

 

이 말씀이 기독교 복음의 진수입니다. 이걸 믿을 수 있을까요? 예수님이 우리의 죄를 대신해서 십자가에 달리셨다는 사실과 우리를 의롭게 하기 위해서 부활하셨다는 사실을, 이 모든 것을 하나님이 하셨다는 사실을 실제로 믿으시는지요. 대다수는 그럴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경우에 따라서 이런 말씀이 마음에 와 닿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속된 말로, 지금 먹고 살기도 바쁜데 십자가는 무슨 십자가냐, 하는 겁니다. 지금 이 세상에서 버텨내기도 힘들고, 이 세상에서 재미있게 사는 것도 바쁜 마당에 부활은 무슨 부활이냐, 하는 겁니다. 예수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을 현실(reality)로 받아들이지 못하는 겁니다. 이에 관해서 진술하고 있는 복음서와 다른 신약성경을 아무리 읽어도 남의 이야기처럼, 강 건너 불처럼 느낄 뿐입니다. 저는 그런 분들이 당장 확신할 수 있는 해결책을 드릴 수가 없습니다. 비슷한 상황에 직면해서 복음을 전하고 있는 바울의 설명을 대신 말씀드릴 수 있을 뿐입니다.

 

바울은 유대인들이 조상으로 여기는 아브라함을 예로 들어 설명하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이 믿은 하나님이 누군지를 알면 예수의 십자가와 부활을 믿을 수 있다는 게 바울의 설명입니다. 그 사실을 17절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기록된 바 내가 너를 많은 민족의 조상으로 세웠다 하심과 같으니 그가 믿은 바 하나님은 죽은 자를 살리시며 없는 것을 있는 것으로 부르시는 이시니라.

 

인류 구원의 길인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을 이해하고 받아들이려면 우선 그 일을 행하신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를 알아야 합니다. 예수님을 믿는 것과 하나님을 믿는 것은 분리되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모르면 예수님에게 일어난 일을 알 수도 없고 믿을 수도 없습니다. 잘못하면 광신으로 떨어지고 맙니다. 예수님을 믿는 것과 하나님을 믿는 것이 직결되기 때문에 사도신경의 시작도 예수 그리스도에게 일어난 일에 앞서 하나님이 전능하고 하늘과 땅을 지으신 분이라는 사실을 고백합니다. 바울도 위 구절에서 바로 그 사실을 짚은 겁니다. 두 가지입니다.

 

1) 아브라함이 믿은 하나님은 죽은 자를 살리시는 분이십니다. 아브라함이 밤하늘의 별처럼 후손이 많게 될 것이라는 하나님의 약속을 받았을 때의 나이가 백세였습니다. 모든 생리 능력이 끊겨서 자식을 낳을 수 없었지만 하나님의 그는 약속을 믿었습니다. 이런 믿음을 어떤 이들은 허황된 것이라고 말할 겁니다. 기독교인들에게 허황된 믿음도 많긴 합니다. 로또를 구입하는 사람들처럼 대박의 꿈을 믿음으로 오해하기도 합니다. 아브라함은 자기의 후손이 많아질 것이라는 사실 자체가 아니라 하나님의 약속을 믿은 겁니다. 하나님은 죽은 자를 살릴 수 있는 유일한 분이라는 믿음이, 즉 생명의 근원이라는 사실에 대한 믿음이 소중합니다. 이런 믿음을 아는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이 하나님의 행위였다는 사실까지 알고 믿을 수 있습니다.

 

2) 아브라함이 믿은 하나님은 없는 것을 있는 것으로부르시는 분이십니다. 없는 것을 있는 것으로 부른다는 말은 하나님의 창조 사건을 가리킵니다. 무로부터의 창조입니다. 무와 유의 차이는 절대적인 겁니다.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은 있는 것인 유()의 변형일 뿐입니다. 핵에너지와 컴퓨터 공학과 예술도 다 이미 존재하는 것을 발견하거나 변형하는 것뿐이지 없는 것을 존재하게 하는 것은 아닙니다. 존재하는 것의 근거가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이 왜 유일한 구원의 길인지를 알 수 있습니다.

 

오늘은 사순절 둘째 주일입니다. 특별히 예수님의 고난과 십자가를 기리는 절기입니다. 유대인들은 메시야가 와서 인간의 모든 고난과 억울한 죽음을 해결해줄 것이라고 기대했습니다. 지금 우리도 그런 세상이 실현되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유대인들의 그런 기대와 달리 메시아이신 예수님은 오히려 고난당하고 십자가에 달려 죽었습니다. 초기 기독교인들은 예수님의 고난과 십자가를 하나님이 행하신 구원 사건으로 경험했습니다. 예수님의 운명이 하나님께서 인류를 구원할 계획이자 섭리의 실현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 것입니다. 그들이 얼마나 기뻤을까? 마치 밭을 갈다가 땅속에 보물이 숨겨 진 것을 발견하고 자기의 전 재산을 팔아 그 밭을 산 농부의 심정과 비슷했습니다. 잊지 마십시오. 이 놀라운 일을 행하신 하나님은 생명과 존재의 근원이십니다.

로마서 4:13-25
https://youtu.be/dFd-Ac1U1e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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