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명을 선택하라!”
신 30:15-20, 주현 후 여섯째 주일, 2020년 2월16일
보라 내가 오늘 생명과 복과 사망과 화를 네 앞에 두었나니 곧 내가 오늘 네게 명령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고 그 모든 길로 행하며 그의 명령과 규례와 법도를 지키라 하는 것이라 그리하면 네가 생존하며 번성할 것이요 또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가 가서 차지할 땅에서 네게 복을 주실 것임이니라 그러나 네가 만일 마음을 돌이켜 듣지 아니하고 유혹을 받아 다른 신들에게 절하고 그를 섬기면 내가 오늘 너희에게 선언하노니 너희가 반드시 망할 것이라 너희가 요단을 건너가서 차지할 땅에서 너희의 날이 길지 못할 것이니라 내가 오늘 하늘과 땅을 불러 너희에게 증거를 삼노라 내가 생명과 사망과 복과 저주를 네 앞에 두었은즉 너와 네 자손이 살기 위하여 생명을 택하고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고 그의 말씀을 청종하며 또 그를 의지하라 그는 네 생명이시요 네 장수이시니 여호와께서 네 조상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주리라고 맹세하신 땅에 네가 거주하리라.
복과 화
모세는 이스라엘 역사에서 볼 때 자기 민족을 이집트에서 끌어내어 가나안으로 인도해낸 민족 영웅입니다. 그는 40년 광야 생활이 거의 끝나고 가나안에 들어가기 직전 모압땅에서 죽습니다. 생존이 위태로웠던 광야 생활에 자신의 모든 에너지를 쏟아부어서 기력이 완전히 소진된 탓이었을까요? 어쨌든지 그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에 들어가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관한 가르침을 유언처럼 남겼습니다. 그게 신명기의 내용입니다.
오늘 설교 본문 16절은 가나안에 들어서 하나님을 따랐을 때 주어질 운명에 대한 설명입니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고 그 명령과 규례와 법도를 지키면 이스라엘 백성은 생존하고 번성하며 가나안 땅을 차지할 것이라는 겁니다. 17, 18절은 이와 반대되는 이야기입니다. 하나님을 버리고 다른 신을 섬기면 망할 것이며, 가나안 땅에서 오래 견딜 수 없을 것입니다. 한 마디로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께 순종하면 복을 받아 번성할 것이며, 불순종하면 화를 당할 것입니다. 우리가 너무 자주 들어서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가르침입니다. 당연하다 보니 새롭게 다가오지도 않습니다. 영혼의 공명이 일어나지 않는 뻔한 이야기로 들립니다.
다른 한편으로는 모세의 이 메시지가 현실성이 부족하다는 생각도 듭니다. 하나님 말씀에 순종해도 불행한 일을 당할 수 있고, 하나님을 믿지 않아도 잘 사는 사람은 잘삽니다. 개인적으로도 그렇고 국가적으로도 그렇습니다. 실제로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자처하던 고대 이스라엘은 다른 어느 민족보다 훨씬 더 큰 불행을 겪었습니다. 가나안에 들어가서도 본래 그곳에 살던 토착민들과 영토 분쟁을 끊임없이 벌였습니다. 주변의 여러 제국으로부터 많은 시달림을 받았습니다. 급기야 기원전 587년에는 바벨론에 의해서 나라가 완전히 망했습니다. 역사가들은 유대의 멸망을 하나님 신앙과는 별개로 설명할 수 있을 겁니다. 바벨론의 제국주의적 호전성에 유대 나라가 희생되었다거나, 유대 나라의 외교정책에 오류가 발생했다고 말입니다. 이런 일들은 오늘날에도 반복됩니다. 오늘 본문에서 모세는 유대의 흥망성쇠가 하나님의 손에 달렸으니 신앙생활을 똑바로 해야 한다고 강조합니다. 여러분은 일반 역사가들의 진단과 성경의 진단 중에서 어느 쪽이 옳다고 생각하십니까?
오늘날 기독교인들은 이 두 주장 사이의 적당한 위치에서 일상을 살아갑니다. 한쪽으로 치우치기도 하고, 중간쯤에 자리를 잡기도 합니다. 대다수 기독교인은 이 주장을 분리해서 받아들입니다. 실제의 인생살이는 세상의 원리에 따라서 대처하고, 신앙생활은 교회의 메커니즘을 따릅니다. 그래서 시계추처럼 오락가락합니다. 삶의 중심이 없는 겁니다. 이렇게 된 이유는 성서의 가르침을 정확하게 이해하지 못한다는 데에 있습니다.
생명 집중
모세는 신 30:15-18절에서 하나님을 따를 것인지, 다른 신을 따를 것인지 선택하라고 다그쳤습니다. 모세가 중간자의 관점에 서서 이스라엘 백성 당신들이 알아서 하라는 말처럼 들리지만, 사실은 하나님을 따라야 한다는 강력한 권고이자 명령입니다. 19절 말씀을 들어보십시오.
내가 오늘 하늘과 땅을 불러 너희에게 증거를 삼노라 내가 생명과 사망과 복과 저주를 네 앞에 두었은즉 너와 네 자손이 살기 위하여 생명을 택하고 …
이 구절에서 핵심은 “너와 네 자손이 살기 위하여 생명을 택하라!”입니다. 모세는 이것을 백성들에 영혼에 각인시키고 싶었을 겁니다. 이런 표현이 모호하게 들릴 수 있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할 것 없이 생명을 선택합니다. 모든 이들이 살려고 하지 죽으려고 하지 않습니다. 현대인들이 정신 바짝 차리고 돈을 버는 이유도 역시 생명을 얻으려는 데에, 즉 잘살아 보려는 데에 있습니다. 모세가 이렇게 당연한 이야기를 비장하게 선포한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 안으로 들어가 봅시다.
우선 생명이 무엇인지를 생각해보십시오. 간단히 말해서, 살아있는 것입니다. 숨을 쉬고 먹고 배설하고 무엇을 보고 말하고 생각하는, 그리고 아기 낳는 모든 일이 생명 현상입니다. 문화 활동도 생명 현상에 속합니다. 그림을 그리고 작곡하고 시를 씁니다. 부분적으로 육체적인 현상이 있고 정신적인 현상으로도 나타납니다. 어쨌든지 지금 우리는 살아있기에 기기묘묘한 세상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사랑하기도 하고 미워하기도 합니다. 기뻐하기도 하고, 슬퍼하기도 합니다. 모든 게 살아있다는 증거입니다. 이렇게 숨 쉬고 살다가 모든 생명 현상이 끝장나는 순간이 옵니다. 갑자기 오기도 하고 시나브로 오기도 합니다. 예외는 없습니다.
지금까지의 설명은 여러분이 다 압니다. 알지만 평소에 별로 진지하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잠시 생각하다가도 그 생각을 거둬들입니다. 그것보다 더 절실한 것에 매달릴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그 절실한 대상은 여럿입니다. 가장 대표적이고 일반적인 대상은 돈입니다. 돈이 우리에게 쾌적한 삶을 보장해준다고 확신하기 때문입니다. 이런 확신으로 인해서 생명 자체에 관한 관심을 줄어들고 쾌적한 삶의 조건을 향한 욕망은 늘어납니다. 그 결과는 평화와 안식의 실종입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이런 현상이 극대화됩니다. 이를 교회 문제와 연결해서 설명하면, 교회를 성장시키고 전도해야 한다는 목적에 묶여서 하나님을 놓치는 경우와 비슷합니다. 인생살이와 신앙생활의 메커니즘은 똑같습니다.
이렇게 된 데에는 생명에 대한 오해가 자리합니다. 사람들은 생명을 무의식적으로 자신의 소유로 여깁니다. 그렇게 오해할만합니다. 각자가 숨을 쉬고 각자가 먹습니다. 자기가 걸어야 하고, 건강도 자기가 챙겨야 합니다. 자기의 인생을 자기가 펼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걸 부정할 수는 없습니다. 그런데 생명은 훨씬 깊고 다양하고 풍부합니다. 제가 평생 취미활동으로 삼았던 테니스를 예로 들어야겠습니다. 테니스 수준은 천차만별입니다. 프로 선수들이 있고, 실업 선수들이 있고, 아마추어 동호회원들이 있습니다. 테니스 황제로 일컬어지는 페더러와 저 같은 동네 동호회원들의 실력은 비교 자체가 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페더러처럼 실력이 좋아야만 테니스를 즐길 수 있는 게 아니라는 사실이 중요합니다. 실력이 부족한 사람도 일종의 테니스 영성을 경험할 수 있고, 아주 뛰어난 사람도 그걸 놓칠 수 있습니다. 실력이 뛰어나면 더 좋겠지만, 테니스 영성에 들어간다면 그 실력의 차이는 미미해집니다. 테니스 실력을 돈으로 바꿔놓아도 똑같다는 사실을 아는 분들은 다 아실 겁니다. 삶의 본질을 성찰할 줄 아는 사람에게는 돈의 많고 적음이 결정적으로 문제가 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당신 말이 옳기는 하지만 현실에서는 그렇게 살기가 힘들다고 생각하는 분들이 있을 겁니다. 옳습니다. 우리가 눈을 뜨기만 하면 집값, 일자리, 경제성장 수치 등등만을 듣고 있으니 어쩔 수 없습니다. 교회에서 하나님 이야기는 희미하고 사람 이야기만 과잉되는 형국과 같습니다. 지금 모세의 연설을 듣는 이스라엘 백성들도 사실은 우리와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들은 가나안에 들어가서 가나안의 문명에 절대적인 영향을 받았습니다. 가나안 사람들은 바알을 섬겼습니다. 바알은 풍년과 후손을 약속하는 농경신입니다. 풍년과 다산이 당시 가나안 원주민들의 이데올로기였습니다. 인간은 어느 곳, 어느 때나 생존의 위협을 받기에 이런 풍요 이데올로기는 강력하게 작동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광야 40년의 빈궁했던 삶에 진저리를 냈습니다. 그들의 눈에 가나안 문명은 1970-80년대에 미국에 이민 간 한인 교포들의 눈에 비친 미국 문명과 같았습니다. 모세는 지금 그 바알을 섬기지 말라고 선포한 것입니다. 가나안에 들어간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모세의 연설은 짜증 나는 잔소리로 들렸을 겁니다. 이런 현실에서 아무도 자유로울 수 없습니다. 오늘날 정말 각박하게 돌아가는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생명을 택하라는 모세의 연설은 여전히 정당할까요?
생명을 택하라는 말은 생명에 집중하라는 뜻입니다. 그렇게 복잡한 이야기가 아닙니다. 숨 쉬고 먹고 보고 듣고 냄새 맡고, 다른 이와 관계를 맺는 일에 집중하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그건 시시한 일이라고 생각할지 모릅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그 무엇으로도 대체될 수 없는 생명의 실체(reality)입니다. 여러분이 직장 생활을 시작했다고 합시다. 은행이나 보험회사에 다닐 수 있고, 교사나 의사로 활동할 수도 있고, 농기구 공장이나 자동차 부품회사에 다닐 수도 있습니다. 무슨 일에 종사하든지 일단 숨 쉬고 먹고 보는 일을 가장 우선으로 생각해야 합니다. 그렇게 사는 사람이야말로 생명을 선택한 사람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사실은 지금 세상이 요구하는 스펙이나 조건이 없어도 생명에 집중할 수 있다는 점입니다. 여기 국회의원과 그 의원실에서 일하는 직원이 있다고 합시다. 두 사람의 사회적 신분은 크게 차이가 나지만 생명 선택에서는 아무런 차이가 없습니다. 여기 친구가 많은 사람이 있고, 외로운 사람이 있다고 합시다. 외로운 사람도 생명에 집중할 수 있습니다. 생명과 밀착할 수 있습니다. 외롭기에 겨울나무가 더 생생하게 들어올 수 있습니다. 여러분은 어떤 인생을 살기 원하십니까. 돈도 많고 친구도 많아야만 행복할 수 있다는 고정관념에 묶여 있지는 않으십니까.
생명 집중만으로 우리가 어떻게 행복한 인생을 살아갈 수 있느냐고 반문할 분들이 있을 겁니다. 여러분은 행복한 인생이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머리에 뭔가가 그려질 겁니다. 우리 교우들은 그런 행복한 인생을 살았으면 합니다. 제가 굳이 말하지 않아도 그런 인생 설계는 여러분이 잘하실 겁니다. 거꾸로 생각해보신 적은 없으신지요. 우리가 일반적으로 알고 있는 행복한 인생이, 사실은 행복하다기보다는 그렇게 믿고 싶은 것일지도 모르는데, 실제로는 수준 낮은 인생이거나 행복하지 않은 인생일 가능성은 없을까요? 우리가 세상에서 원하는 모든 것을 성취했더라도 숨 쉬고 먹고 마시는 기쁨, 소리를 듣는 기쁨을, 즉 하나님이 창조한 지구에서 존재하는 시원적인 기쁨을 경험하지 못했다면 행복한 인생이었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우리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작은 사물이 빛처럼 다가오는 존재의 신비를 경험하지 못한 사람이라면 그가 비록 대학교 총장이 되었다고 해도 행복한 인생을 살았다고 할 수 없습니다.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에게 생명을 택하라고 말한 이유는 그런 삶이 우리의 일상을 새로운 차원으로, 즉 생명 충만한 차원으로 올려놓기 때문입니다. 일상에서는 뜻하지 않은 여러 가지 갈등과 충돌로 인한 불편한 일들이 벌어집니다. 친구 관계와 가족 관계도 그렇고 교우들 관계에서도 그렇습니다. 자기 기준으로 상대를 판단하기에 벌어지는 현상입니다. 자기 기준이 옳을 때도 있고 틀릴 때도 있습니다. 자기에게 문제가 있다는 사실을 알아도 문제가 해결되는 게 아닙니다. 우리에게는 우리의 이성적인 판단이 작동되지 않는 무의식이 있기도 하고, 충동적으로 자기를 합리화하는 본능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럴 때 한 가지 사실만 분명하게 인식하고 있으면 이런 갈등과 충돌을 대개는 해결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생명을 선택하고 집중하는 데 방해가 되지 않으면 불편한 일들을 크게 문제 삼지 않을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주변에 짜증을 내게 하는 사람이 있어도 내가 숨을 쉬고 먹고 소리를 듣는 일에 방해를 받지 않으면 용납할 수 있습니다. 생활비가 줄었다고 합시다. 은근히 걱정되겠지만 생명 자체에 집중하는 사람은 그 상황을 얼마든지 극복할 수 있습니다.
이 문제는 중요하니까 조금 더 설명해야겠습니다. 여기 두 사람이 걷고 있다고 합시다. 한 사람은 이번 총선에 나선 후보입니다. 그는 표를 얻기 위하여 지역 주민들을 만나는 일에만 마음을 빼앗긴 터라 무심코 걷습니다. 다른 한 사람은 시간이 많아 산책을 나온 백수입니다. 그는 중력을 느끼면서 황홀하게 한 걸음 한 걸음을 내딛습니다. 두 번째 사람이야말로 걷는 행위를 경험한 사람입니다. 다리 수술로 2년 침대에서 누워지내다가 목발을 짚고 다시 걷게 된 사람도 이런 황홀한 느낌을 절감할 겁니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황홀한 경험을 몇 번이나 하겠습니까. 대개는 무언가에 쫓기면서 첫째 사람처럼 삽니다. 구도 정진의 자세로 생명에 집중하지 않으면 우리는 생명을 외면하게 됩니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은 이런 점에서 생명을 화두로 삼는 수행자들입니다. 우리는 출가하지는 않았으나 본질에서는 수도승들입니다. 일종의 재가 수도승들입니다. 여러분은 신앙의 연륜이 깊어지면서 생명에 더 집중하게 되었습니까? 그 생명의 신비 앞에서 더 기뻐하고 놀라워하게 되었습니까? 하나님이 선물로 주신 한 번뿐인 인생살이를 여러분은 어떤 자세로 살고 싶으신가요?
생명 집중의 길
마지막 질문은 어떻게 하면 우리가 생명에 집중할 수 있을까요? 모세가 이미 대답했습니다. 신 30:20절에서 모세는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고 그의 말씀을 청종하며 또 그를 의지하라.”라고 했습니다. 여기에 세 항목이 거론됩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 말씀을 청종하고 의지하라고 말입니다. 모세가 이런 말을 한 이유는 이럴 때야 비로소 생명의 본질이 무엇인지가 눈에 들어오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모세는 같은 구절에서 하나님이 “네 생명이시다.”라고 말했습니다.
하나님이 생명이라는 말은 막연한 게 아닙니다. 이 말은 하나님이 창조주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창조는 아름답고 선합니다. 그 사실을 실제로 믿는다면 자기 삶이 얼마나 아름답고 선한지도 알게 될 겁니다. 연봉이 적다고 해서 자기 삶을 초라하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자기 삶이 아름답고 선하다는 사실을 알기에 다른 사람의 삶도 아름답고 선하다는 사실을 인정합니다. 여러 가지 이유로 선하지 않고 아름답지 않은 부분들이 눈에 들어오면 고치려고 노력합니다. 이런 점에서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은 아무리 자기 마음에 들지 않는, 마치 악마처럼 보이는 대상이라고 하더라도 혐오하지 않습니다. 저는 잘난 채 잘하는 미국을 혐오하지 않듯이 밉상처럼 못나 보이는 북한도 혐오하지 않습니다. 바울이 “아무에게도 악을 악으로 갚지 말라.”라고 충고한 이유가 여기에 있지 않겠습니까.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인생살이에서 관건은 생명을 생명답게 살아내는 일입니다. 모세는 하나님이 바로 생명이라고 선포했지만, 우리 기독교인들은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예수야말로 생명이라고 믿는 사람들입니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이 보이는 형상으로 우리의 역사에 들어오신 분이 예수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이 실제로 예수에게 가까이 간다면, 그의 말씀과 그의 운명을 통해서 하나님과 친밀해진다면 세상과 인생을 이전과는 전혀 새롭게 경험할 것입니다. 땅과 하늘, 불과 바람, 새와 꽃, 그리고 빵과 포도주와 인간 노동과 이웃들이 다르게 경험될 것입니다. 무슨 말인가요? 세상 만물에 생명의 주인이신 하나님이 내재하신다는 사실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그것이 곧 생명 경험입니다. 이미 그런 경험을 한 분들이 많을 것이며, 그런 경험 안으로 점점 더 깊이 들어가는 분들도 계실 겁니다. 아직 그런 경험이 없다면, 이제라도 눈을 돌려보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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