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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강림절

생명의 날

 

생명의 날

(막 2:23-3:6)


안식일 문제

오늘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복음서 말씀에는 아주 잘 알려진 두 가지 이야기가 나옵니다. 첫 이야기는 막 2:23-28절입니다. 안식일에 제자들이 밀밭 사이로 지나가다가 이삭을 잘라 먹었습니다. 시골에서 어린 시절을 보낸 사람들은 그 풍경이 익숙할 겁니다.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에게 당신 제자들이 왜 안식일에 하지 못할 일을 저지르는가 하고 따져 물었습니다. 밀 이삭을 잘라서 손으로 비벼 터는 것이 바로 안식일 규정의 위반이라는 것입니다. 이에 대해서 예수님은 삼상 21장의 내용을 인용했습니다. 제사장 외에는 먹을 수 없는 빵을 다윗과 그 일행이 먹은 사건입니다. 율법이 절대적인 게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이어지는 둘째 이야기는 막 3:1-6절입니다. 예수님이 회당이 들어가셨습니다. 그곳에 한쪽 손에 장애를 가진 사람이 있었습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이 그를 고치는가 하고 주목했습니다. 그런 일은 안식일을 범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안식일에 생명을 살리는 것과 죽이는 것 어느 것이 옳으냐 하는 예수님의 질문에 대답을 못했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의 마음이 완악하다는 사실을 한탄하시고 보란 듯이 장애인을 고쳤습니다.

여기 두 이야기에서 예수님과 대립하고 있는 사람들의 주장은 터무니없는 게 아닙니다. 첫 이야기에서 바리새인들은 제자들의 경솔함을 꾸짖은 겁니다. 제자들이 밀 이삭을 잘라 먹지 않으면 당장 죽을 지경이었다면 바리새인들도 크게 뭐라고 탓하지는 않았을 겁니다. 랍비 유다에 의해서 수집된 구전 율법인 ‘미쉬나’에는 이런 예외 규정이 나옵니다. “생명이 위험할 경우에는 언제나 안식일 규정을 무시할 수 있다.” 바리새인들이 그렇게 꽉 막힌 사람들은 아니었습니다. 그들도 세상살이가 율법만으로 해결될 수 없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문제는 생명이 위태로운 경우가 아닌데도 불구하고 제자들이 안식일 규정을 어긴 것이었습니다.

우리는 바리새인들이 왜 그렇게 안식일을 중요하게 생각했는지를 알아야 합니다. 그런 것 없이 그들이 예수님을 무조건 트집 잡는 것으로만 보는 건 옳지 않습니다. 안식일은 두 가지 전통이 있습니다. 양쪽 모두 십계명 전승과 연관됩니다. 하나는 출애굽기에 나오는 십계명입니다. 거기에는 안식일이 하나님의 창조사건과 연관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은 육일 동안 세상을 창조하시고, 제 칠일에 쉬셨습니다. 하나님이 일곱째 날을 복되게 하시고 거룩하게 하셨다고 합니다. 십계명의 네 번째인 안식일 규정은 바로 그 창조 사건과 연루되어 있습니다.(출 20:11) 다른 하나는 신명기에 나오는 십계명입니다. 거기에는 안식일이 출애굽 사건과 연관되어 있습니다. “너는 기억하라. 네가 애굽 땅에서 종이 되었더니 네 하나님 여호와가 강한 손과 편 팔로 거기서 너를 인도하여 내었나니 그러므로 네 하나님 여호와가 네게 명령하여 안식일을 지키라 하느니라.”(신 5:15)

안식일을 지킨다는 것은 바로 창조와 출애굽을 기억한다는 의미입니다. 구약에서 창조와 출애굽은 가장 중요한 하나님의 구원 사건입니다. 무슨 뜻인가요? 유대인들은 일주일에 하루만은 창조자를 온전히 기억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일주일에 하루는 해방의 원천을 기억해야 했습니다. 이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없습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안식일에 모든 인간의 행위를 금지했습니다. 놀이도, 여행도, 노동도, 심지어는 음식 만들기도 금했습니다. 노예와 가축까지 노동을 하지 못하게 했습니다. 이 안식일은 정말 혁명적인 주장입니다. 칼 마르크스가 주창한 노동으로부터의 인간해방도 안식일 개념이 없었다면 가능하지 못했을 겁니다.

이렇게 종교적으로 뿌리가 깊은 안식일 전통에서 볼 때 예수님의 제자들은 분명히 거룩한 안식일을 범한 것이었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제자들의 행동을 그럴 수 있다고 넘어가기 시작하면 안식일 자체가 무의미해질 수 있다고 생각했겠지요. 제 삼자가 보았다면 바리새인들의 주장에 손을 들어주었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바리새인들의 주장을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제자들을 오히려 두둔하는 듯이 말씀하셨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형식과 본질

예수님은 제자들이 잘했다는 말씀을 하시는 게 아닙니다. 제자들이 잠깐 배고픈 걸 참지 못하고, 또는 그저 심심풀이로 밀 이삭을 따 먹은 것 자체를 칭찬할 수는 없었습니다. 예수님은 신앙의 형식과 본질의 관계에 대한 바리새인들의 오해를 지적한 것입니다. 안식일은 신앙의 형식이요, 종교적 규범입니다. 음식을 담는 그릇이라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신앙의 본질은 하나님의 구원 행위입니다. 하나님의 창조와 해방이 바로 안식일의 본질이었습니다. 무엇이 중요할까요? 형식인가요, 본질인가요? 안식일인가요, 하나님이 구원할 인간인가요? 그래서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있는 것이요,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있는 것이 아니다.”(막 2:27)

예수님을 무조건적인 형식 타파주의자라고 생각하면 곤란합니다. 모든 종교적 형식을 해체해야 한다고 말씀하신 분도 아닙니다. 예수님은 회당에서 말씀을 읽고 가르치셨고, 세례까지 받으셨습니다. 이 말씀은 형식주의자들을 향한 경고입니다. 형식 자체를 부정하는 게 아니라 형식주의에 대한 부정입니다. 본질이 형식에 담긴다는 점에서도 형식은 우리의 신앙생활에서 필수적이지만, 형식주의는 본질을 억압한다는 점에서 우리의 신앙을 파괴합니다. 바리새인들은 그걸 구분하지 못했습니다. 그들에게 안식일은 하나님의 구원이라는 본질을 외면하는 형식으로만 자리하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바로 그것을 짚은 겁니다.

오늘 한국교회에서 신앙의 본질을 억압하는 종교적 형식주의는 한 두 가지가 아닙니다. 안식일과 연관된 주일만 해도 그렇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주일성수’를 최고의 신앙 기준으로 여기고 있습니다. 주일을 지키지 않으면 주일을 범한 것이라고 말합니다. 어떤 분들은 다른 지역으로 출타했더라도 주일은 본 교회에서 지켜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주일을 빼먹다가 큰 사고를 당하거나 사업이 망했다는 이야기들도 많이 합니다. 거꾸로 어려운 가운데서도 주일을 지켜서 일이 잘 풀렸다고도 합니다. 성수주일이 절대규범으로, 마치 알라딘의 요술램프처럼 주술의 대상으로 받아들여지고 있습니다. 주일에 교우들이 함께 모여 예배드리는 걸 소홀히 여겨도 좋다는 말씀이 아닙니다. 주일의 본질을 망각하는 것, 그것을 훼손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그것이 바로 바리새인들의 율법주의입니다. 일상적인 용어로 바꾸면 법 만능주의입니다. 법이 담아야 할 본질은 어디론가 사라지고 단지 법이라는 껍질이 주인처럼 행세하는 사태를 가리킵니다.


완악한 사람들

형식주의가 어떻게 본질을 훼손하는지 오늘 둘째 이야기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한쪽 손을 못 쓰는 장애인이 회당에 있었습니다. 거기 모인 사람들은 이 사람에게 관심이 없었습니다. 예수님이 안식일을 범하는지 아닌지에만 신경을 곤두세웠습니다. 그들에게는 사람이 중요한 게 아니라 법이 중요했습니다. 성서는 그들을 완악하다고 말했습니다. 예수님은 그 완악함을 탄식하셨고, 분노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완악하다고 탄식한 그 사람들을 이상한 사람들이라고 보면 곤란합니다. 그들은 난폭하고 악독하고 비상식적인 사람들이 아닙니다. 정반대입니다. 그들은 아주 세련된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교회의 질서와 사회의 질서를 바르게 세워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오늘도 교회의 법을 강조하는 분들은 대개 원만하게 신앙생활을 잘 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교회에 빠지지도 않고 헌금도 책임 있게 잘 합니다. 그런 분들이 없으면 교회가 유지되기도 힘들겠지요. 지금 예수님을 고발하려고 신경을 쓰는 사람들이 바로 그런 사람들입니다. 겉으로는 완악할 게 하나도 없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바로 그런 이들을 완악하다고 탄식하셨습니다. 화를 내시기까지 했다고 합니다. 왜 그러셨을까요?

바리새인들은 안식일의 참된 의미를 놓치고 도그마의 차원에서만 받아들였습니다. 그들에게는 안식일에 하지 말아야 할 조항에만 관심이 있었습니다. 그것을 어기는 사람들이 누군지 눈에 불을 켜고 찾아내려고 했습니다. 안식일의 중심 의미인 생명은 실종되고 말았습니다. 겉으로는 법치 운운하지만 그 안에는 생명을 향한 감수성도 없고 연대감도 없습니다. 법을 지켰냐 아니냐 하는 관점으로만 판단했습니다. 이런 삶의 태도가 바로 완악한 겁니다. 우리도 우리 자신이 의식하지 못하는 순간에 간단히 완악한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사탄은 밖으로 별로 표시가 나지 않습니다. 은근한 말로, 세련된 어투로, 합리적인 설득으로 다가옵니다. 이를 구별하려면 보석 감정사처럼 영성의 전문가가 되어야만 그게 가능하겠지요. 오늘 설교 주제와 연관해서 그 기준을 말한다면 법 만능주의냐, 생명 지향성이냐에 있습니다.

지금 대한민국의 상황이 내외적으로 아주 위태로워 보입니다. 아마 저만이 아니라 세상에 조금만 관심을 갖고 있는 분들이라면 모두 똑같이 생각하겠지요.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공권력의 과잉행사입니다. 경찰과 검찰로 대표되는 공권력이 폭력적으로 행사되고 있습니다. 용산 재개발 지역에서 경찰의 미숙하고 지나친 진압으로 6명이 죽었습니다. 서울시청 광장에서의 집회를 허가하지 않습니다. 크고 작은 시위 진압에서 시민들을 폭력사범처럼 다룹니다. 경찰이 치안에 책임이 있다는 사실을 부정하는 게 아닙니다. 정권에 반대하는 모든 목소리를 불법으로 몰아가는 그 행태를 지적하는 겁니다. 검찰은 작년에 미네르바라는 닉네임으로 인터넷에서 활동하던 청년을 구속기소 했습니다. 실제 재판에서 무죄로 석방되었습니다. 며칠 전 검찰이 소위 박연차 게이트와 연관된 수사를 종료했습니다. 자신들의 수사가 아무런 잘못도 없다고 했습니다. 그렇게 정당했다면 노무현 전 대통령의 서거 이후에 이렇게 용두사미 격으로 수사를 종결하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들은 공권력이라는 칼을 들고 있으면서 정당하게 칼을 사용하지 않습니다.

다른 하나는 남북관계입니다. 어쩌면 이게 더 근본적으로 중요한지 모르겠군요. 유엔안보리에서 북한 제재안을 만장일치로 가결했습니다. 앞으로 북한은 대외 무역에 큰 차질을 빚게 될 겁니다. 북한은 이에 굴하지 않고 더 강하게 나가고 있습니다. 핵무기 원료를 본격적으로 늘리겠다고 했습니다. 해상에서 강제로 검문검색을 당하다가 무력충돌이 생기는 경우에 강하게 보복하겠다고 선포했습니다. 만에 하나 남북 사이에 무력충돌이 일어난다고 합시다. 전면전이 일어난다면 어떻게 될까요? 십중팔구는 북한이 전쟁에서 질 겁니다. 중국이 북한 지역을 접수하겠다고 달려들지도 모릅니다. 남한은 어떻게 될까요? 거의 모든 것이 파괴될 겁니다. 경제력은 3,40년 전으로 돌아가겠지요. 남한 곳곳에 있는 원자력발전소가 북한의 미사일 공격으로 파괴된다면 앞으로 우리 후손들이 원자핵에 노출되겠지요. 

남북이 이렇게 계속해서 충돌해야만 할까요? 다르게 생각하는 분들도 있겠지요. 법을 지키지 않는 북한이 문제라고 말입니다. 국제법을 무시한 채 핵실험을 하거나 미사일 발사를 하는 걸 어떻게 두고 보느냐 하고 말입니다. 북한에서 벌어지고 있는 반인권적 행태를 거론하기도 합니다. 강제력을 통해서라도 그들의 버르장머리를 따끔하게 혼내줘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미국과의 공조를 통해서 북한을 압박해야 한다고 합니다. 미국, 일본, 중국, 러시아와 우리의 입장은 다릅니다. 그들은 국가 이익에 따라서 외교정책을 펼치면 그만입니다. 남북전쟁으로 남한의 경제가 파탄이 나면 오히려 덕을 보는 나라도 있겠지요. 지금 최선은 남북의 전쟁을 막는 것입니다. 전쟁의 가능성을 가능한 줄여나가는 것입니다. 이 문제는 자존심의 차원이 아닙니다. 잘잘못의 차원이 아닙니다. 생존의 문제입니다. 

소망교회 장로이신 이명박 정권의 행태는 안식일 법을 고수하려다가 그 안식일 법이 담고 있어야 할 생명을 놓친 바리새인들의 그것과 비슷해 보입니다. 입에 법을 달고 다닙니다. 법을 지키라고 말합니다. 시민들이 법을 지키는지 아닌지만 눈에 불을 켜고 바라봅니다. 법이 중요하지요. 그러나 생명에 대한 영적 감수성이 메말랐다면 그게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4대강을 중심으로 토목건설을 밀어붙이기만 할 뿐, 그 강을 중심으로 한 생태에 대한 감수성은 무감각합니다. 이런 행태가 바로 장애인의 생명에 대해서는 무감각한 채 안식일 규정을 범하는가 하고 예수님을 고발할 준비를 한 바리새인들의 그 완악함이 아닐는지요. 

저는 정치 자체를 설교의 주제로 삼은 게 아닙니다. 하나님이 창조한 생명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사람과 세상을 살리는 이야기입니다. 만약 정치가 생명을 죽인다면 우리는 정치를 판단할 수밖에 없습니다. 경제와 교육이 인간과 자연의 생명을 죽인다면 그것을 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구약 예언자들의 전통입니다. 그뿐만이 아닙니다. 이 생명 이야기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정체성에 관한 것입니다. 우리는 주일에 모여서 단지 경건한 종교의식을 치루면서 종교적으로 만족하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우리가 그리스도로 믿는 예수님은 유대종교와 로마정치의 결탁에 의해서 십자가에 처형당하신 분이십니다. 우리가 창조주로 믿는 하나님은 예수님을 죽은 자 가운데서 생명으로 불러일으키신 분이십니다. 우리가 삼위일체의 영으로 믿는 성령은 지금 이 시간에도 우리에게 생명을 공급하시는 영이십니다. 

교회의 정체성이 주일예배 공동체에 놓여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십시오. 주일은 어떤 날인가요? 주님이 부활하신 날입니다. 하나님의 창조와 해방이 노래되는 날입니다. 종말론적 생명을 희망하는 날입니다. 생명의 날입니다. 이것이 너무 놀라워 우리는 일상을 멈추었습니다. 우리의 영혼은 바로 이 하나님의 생명 사건과 그 행위에 감전되어야 합니다. 그것 없는 성수주일은 공허한 외침입니다. 우리가 실제로 부활과 생명의 날인 주일예배 공동체에 속해 있다면, 그런 감격으로 주일예배에 참석하고 있다면 여러분이 처한 삶의 자리에서 반(反)생명, 거짓 생명과 선하게, 그리스도인다운 방식으로 투쟁하십시오. 거기서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안식일의 주인이신 주님께서 부활의 생명으로 우리를 지켜주십니다. (2009.6.14.)

마가복음 2:23-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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