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명이 죽음을 삼키다.
인간은 누구나 죽습니다. 너무나 당연한 말이지만 현대인들에게는 이 사실이 별로 중요하게 다가오지 않습니다. 사람들은 이 사실을 전혀 모르는 것처럼 살아갑니다. 왜 그럴까요? 현대인의 삶을 어떻게 분석하는가에 따라서 다른 대답이 나오겠지만, 제가 보기에는 다음과 같이 두 가지 큰 이유가 있습니다. 한 가지는 지금의 삶이 너무나 생생하기 때문에 이것이 끝장난다는 사실을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다른 한 가지는 현대인들의 삶이 허무에 사로잡혀 있기 때문에 죽음을 애써 외면한다는 것이다. 여러분은 어느 쪽이신가요? 죽음이라는 문제를 진지하게 생각한 적이 있으신지요? 이런 주제를 전제하지 않는 철학은 없으며, 그런 신학은 없으며, 그런 신앙도 없습니다. 그리스도교의 모든 신앙 내용은 바로 이 죽음이라는 주제로 통과해야만 합니다. 바울도 역시 이 문제를 밑바탕에 두고 그리스도교 신앙을 설명합니다.
장막집
바울은 본문 1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가 들어 있는 지상의 장막집이 무너지면 우리는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에 들게 된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바울은 우리의 육체를 장막집이라고 묘사합니다. 장막집이 무너진다는 것은 우리가 죽는다는 뜻이겠지요. 그때서야 우리는 하늘의 영원한 집에 들어가게 됩니다. 말하자면 죽는다는 건 완전하지 못한 집에서 이사를 나가서 하나님이 지으신 완전한 집으로 들어간다는 의미입니다. 이사를 다니는 것처럼 묘사되는 바울의 이런 가르침은 어떤 사실이라기보다는 비유입니다. 어떤 진리를 비유로 설명하는 이유는 그것이 우리의 생각을 뛰어넘기 때문입니다. 바울도 죽음을 정확하게 말할 수 없기 때문에 흡사 전셋집에서 자기 집을 마련해서 이사를 가듯이 장막집을 벗는다고 표현한 것입니다.
사실 죽음은 우리가 결정적인 그 무엇으로 설명할 수 있는 그런 대상이 결코 아닙니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아직 아무도 죽음 너머로 갔다고 돌아온 사람이 없기 때문입니다. 안개 낀 숲길을 간다고 합시다. 그 안에 있을 때는 그 숲이 진짜 숲인지, 들판인지를 잘 모릅니다. 그리고 그 숲이 얼마나 넓은지, 그 숲이 주변의 다른 것들과 어떻게 다른지 잘 모릅니다. 일단 그 숲을 빠져나가야만 그 숲이 눈에 들어옵니다. 지금 우리의 삶은 아무도 숲 밖으로 나갔다가 돌아온 사람이 없는 그런 숲속에서 길을 가는 것과 비슷합니다. 그러니 누가 죽음의 문제를 실체론적으로 설명할 수 있겠습니까.
물론 생물학적인 설명은 가능합니다. 숨이 멎는다거나 뇌파가 정지된다는 식으로 죽음을 정의내릴 수는 있습니다. 죽음은 인간의 생물학적인 운동이 끝나는 것이라는 말입니다. 죽음으로 인간은 기본에 관계를 맺었던 주변의 모든 것들과 헤어져야 합니다. 가족, 교회, 직장, 취미 등등, 모든 것들과의 연대성이 파괴됩니다. 그런데 어떤 점에서 보면 죽음은 다시 우주의 모든 것들과 하나가 되는 사건이라고도 볼 수 있습니다. 가족과는 헤어지지만 우리의 몸은 흙이 됨으로써 지구 전체와 친구가 됩니다. 기존에 있었던 몸의 기능은 사라지지만 전혀 다른 방식으로 이 세계와 관계를 맺는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런 점에서 죽음은 여전히 신비로운 사건입니다.
여러분, 제가 지금 시답지도 않은 죽음론(論)을 강의하거나, 더 나아가 죽음 예찬론을 펼치는 게 아닙니다. 죽음은 단지 단백질 덩어리인 육체에만 관계되는 게 아니라는 점을 말씀드리는 중입니다. 그 육체는 바울의 주장대로 무너질 장막집입니다. 이것만 본다면 우리는 이 세상에서 아무 것도 바랄 것이 없습니다. 우리의 육체가 갖고 있는 건강과 젊음과 아름다움은 순식간에 무너지기 때문입니다. 그뿐만 아니라 이 땅에서 누리는 우리의 삶은 어떤 조건에서도 만족을 찾을 수 없습니다. 이런 점에서 여러분은 이 세상의 그 어느 누구도 부러워할 필요는 없습니다. 여러분이 보기에 괜찮아 보이는 사람도 역시 늘 불만과 불안을 안고 살고 있습니다. 이게 바로 육체의 장막으로 살아가는 인간의 실존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4a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이 장막에 머물러 있는 동안 우리는 무거운 짐에 짓눌려 신음하고 있습니다.” 어느 누구도 여기에서 예외는 없습니다.
하늘의 집
여기까지의 설명은 일반적인 것입니다. 실존철학자들도 인간 삶의 비극과 딜레마와 부조리를 이렇게 짚었습니다. 그들도 인간의 숙명이 결국 죽음으로 귀결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정확하게 인식하고 있습니다. 삶을 정직하게 직시하려는 사람이라고 한다면 누구의 눈에나 들어오는 범위는 바로 여기까지입니다. 사람들은 그 다음에 대해서는 더 이상 말할 게 없습니다. 그래서 대개는 허무주의에 빠지거나 열광주의에 치우침으로써 죽음의 문제를 대면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그렇지 않습니다. 그는 전혀 새로운 영적 시각으로 죽음의 문제를 뚫고 나갑니다.
바울에게는 ‘하늘의 집’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 집은 “사람의 손으로 지은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세워 주시는 집입니다.”(5b) 여기서 말하는 하늘의 집은 무엇일까요? 하나님이 우주 공간 어딘가에 호화 별장이라도 마련하셨다는 말인가요? 간혹 휴가철을 맞아 쉬러가는 팡시온이 준비되었다는 건가요? 바울이 말하는 이 하늘의 집은 그런 건물이 아니라 오히려 옷과 비슷합니다. 하늘의 집으로 들어간다는 것은 썩게 될 옷을 벗어놓고 썩지 않을 옷으로 갈아입는 것과 비슷합니다. 바울은 고린도전서 15장에서도 이와 비슷한 언급을 한 적이 있습니다. “이 썩을 몸은 불멸의 옷을 입어야 하고 이 죽을 몸은 불사의 옷을 입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이 썩을 몸이 불멸의 옷을 입고 이 죽을 몸이 불사의 옷을 입게 될 때에는 ‘승리가 죽음을 삼켜 버렸다. 죽음아, 네 승리는 어디 갔느냐? 죽음아, 네 독침을 어디 있느냐?’라는 성서의 말씀이 이루어질 것입니다.”(고전 15:53-55)
오늘 본문 2절에서 바울은 “우리는 옷을 입듯이 하늘에 있는 우리의 집을 덧입기를 갈망”한다고 했습니다. 집을 덧입는다는 말은 시(詩)적인 표현입니다. “덧입는다.”는 말을 잘 새겨야합니다. 바울은 4b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이 장막을 벗어 버리고자 하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하늘의 집을 덧입음으로써 죽음이 생명에게 삼켜져 없어지게 되기를 갈망하고 있습니다.” 바울의 이 진술은 매우 중요한 두 가지 사실을 담고 있습니다.
첫째, 그리스도교 신앙은 육체를 포기하지 않습니다. 우리의 장막을 벗어버리는 게 아니라 다른 것으로 갈아입는 것입니다. 바로 여기서 그리스도 신앙이 헬라 철학과 구별됩니다. 헬라 철학은 죽음을 육체라는 감옥으로부터 영혼의 해방이라고 생각했지만 그리스도교 신앙은 그렇게 이원론적으로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몸과 영은 다른 현상으로 나타나기는 하지만 하나입니다. 우리의 몸은 죽어도 역시 우리의 몸입니다. 물론 우리의 몸은 썩을 겁니다. 그러나 썩는다고 해서 그것 자체가 완전히 소멸되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는 썩는다는 것을 무조건 이상한 것으로 볼지 모르지만, 그것은 변화일 뿐입니다.
그리스도교 역사에 간혹 인간의 몸을 무시하는 사조가 등장하곤 했지만 그런 건 오래 버티지 못했습니다. 예수님의 인간성을 부정한 영지주의적 가현설도 역시 그리스도교 역사에서 여지없이 제거되었습니다. 바울은 지금 비록 몸이 어려운 상태에 있었지만 이 장막집을 억지로 벗어버리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현재의 몸까지 하나님의 창조 사건이며, 죽음 이후에도 여전히 그 리얼리티가 훼손될 수 없는 생명의 본질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우리가 장막을 벗어버리려는 게 아니라 갈아입는다고, 덧입는다고 했습니다.
둘째, 죽음은 생명에게 삼키게 됩니다. 바울은 옷을 덧입는다는 비유를 신학적인 용어로 바꾸어 설명합니다. 현재 우리의 몸은 무너질 수밖에 없는 지상의 장막집입니다. 그러나 하늘의 집으로 갈아입으면 이 죽음까지 생명 사건 안으로 포함됩니다. 죽음이 생명에게 삼켜지면 그 죽음은 극복됩니다. 큰 생명 사건 안에 죽음이 들어가면 그 죽음도 역시 생명의 일부가 될 것입니다. 비록 낡은 옷을 입고 있었다 하더라도 새 옷을 그 위에 덧입으면 그 사람의 모양새는 새 옷으로 나타나듯이 죽음이 생명에게 삼키게 되면 죽음은 이제 더 이상 없습니다. 생명이 우리 전체를 지배하게 됩니다.
오늘 우리는 너무 까다로운 주제에 발을 들여놓은 것 같군요. 주제로 그렇지만 본문 자체가 조금 복잡하게 구성되어 있어서 따라잡기가 간단하지 않습니다. 조금 더 인내심을 갖고 생명이 죽음을 삼킨다는 게 무슨 뜻인지 생각해봅시다. 예를 들어, 여기 용광로가 있습니다. 고철이 용광로에서 녹게 되면 그 고철이 지난날 무슨 용도로 쓰였든지 아무 상관없습니다. 불이 철을 삼킨 것입니다. 서울의 난지도는 옛날에 쓰레기 매립장이었습니다. 모든 생명이 죽은 것 같았던 그곳이 이제는 아름다운 숲으로 변했다고 합니다. 생명이 죽음을 삼킨 것인지 모릅니다.
오늘 성서 말씀은 단순히 그런 자연현상을 말하는 게 아닙니다. 이 말씀은 예수님의 부활을 가리킵니다. 십자가에 처형당하신 예수님이 부활하셨다는 것은 생명이 죽음을 삼킨 사건입니다. 예수님의 부활로 인해서 이제 죽어야 할 우리의 운명이, 즉 썩어야 할 우리의 몸이 생명을 얻게 되었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의 부활 이후로 죽음의 힘들은 근본적으로 더 이상 우리를 지배하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생명이 죽음을 삼켰기 때문입니다.
믿음의 세계
그런데 여기서 우리는 이렇게 질문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오늘 우리의 현실에서 이런 일이 실제로 일어날까요? 생명이 죽음을 삼켰다는 게 실제로 느껴지나요? 아닙니다. 우리의 삶은 오히려 죽음의 힘에게 지배당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개인적으로 낙심할 때도 많습니다. 우리 주변에 뜻하지 않은 사고나 질병으로 죽는 사람도 많습니다. 그리스도인들도 여기에 예외가 아닙니다. 우리의 몸은 쉽게 파괴되고, 우리의 마음도 쉽게 낙심됩니다. 오늘의 현실만 본다면 생명이 죽음을 삼켰다는 말을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여러분, 생명이 죽음의 능력을 완전히 제압하는 일은 종말론적으로 가능합니다. 생명이 죽음을 삼킨다는 바울의 진술도 정확하게 보면 그것이 이루어졌다는 게 아니라 무거운 짐을 진 것 같은 오늘의 현실에서 그것을 기다리고 희망한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의 부활 사건도 역시 그렇습니다. 이미 역사 안에서 발생한 것이지만 그것이 모든 사람들에게 현실로 적용되는 건 종말에서 가능합니다.
그렇다면 결국 생명 사건은 오늘 우리와 별로 상관이 없다는 말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는 지금 죽음이 지배하는 오늘과 생명이 죽음을 삼키는 종말의 긴장 가운데서 살고 있을 뿐입니다. 이런 긴장을 쉽게 해결하려고 너무 욕심을 내지 마십시오. 죽음의 현실에 지배당함으로써 종말론적 부활 사건을 망각하지 마시고, 종말론적 부활에 열광적으로 집착함으로써 현실에서 우리가 짊어져야 할 짐들을 왜곡하지 마십시오.
그런 긴장이 바로 그리스도인의 실존이기는 하지만 우리는 그것을 극복할 수 있습니다. 아니 이렇게 말하는 게 옳겠군요. 그 긴장에는 이미 그것이 극복된 영적인 평화가 담겨 있습니다. 현실을 지배하는 죽음의 힘들이 이미 종말론적 부활의 영에 의해서 무너져 내리고 있다는 사실을 우리가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런 사실에 근거해서 살아가는 삶의 태도가 곧 그리스도인들의 믿음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사실 우리는 보이는 것으로 살아가지 않고 믿음으로 살아갑니다.”(7절)
바울은 여기서 보이는 것에 의존하는 삶과 믿음에 의존하는 삶을 대치시키고 있습니다. 우리 앞에 보이는 것들은 죽음의 힘에서 벗어나지 못합니다. 만약에 우리가 그런 것들만 붙들고 있다면 생명이 죽음을 삼켰다는 사실을 놓치고 말입니다. 반면에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일어난 부활을 믿을 수 있다면 생명이 통치하는 세계를, 생명이 죽음을 삼킨 세계를 볼 수 있습니다. 이게 과연 어떻게 가능한가요? 실제로 보인다는 건가요? 그렇지는 않습니다. 이미 일어난 것이지만 여전히 우리가 기다려야 할 하나님의 사건입니다.
우리는 보이는 것이 아니라 믿음에 삶의 토대를 둔 사람들입니다. 예수님의 부활로 인해서 생명이 죽음을 삼켰다는 사실을 믿습니다. 죽음이 이미 생명 안으로 휩쓸려 들어갔기 때문에 이미 죽은 사람이나 아직 살아있는 우리나 아무런 차이가 없습니다. 예수님의 부활로 인해서 이제 죽음과 삶은 전혀 새로운 사건이 되었습니다. 무너져 내릴 수밖에 없는 우리의 몸을 이미 생명이 껴안았습니다. 이 놀라운 일이 예수님에게 시작되었습니다. 여러분을 위해.
0개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