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로’ 사랑하라.
요 13:31-35, 부활절 다섯째 주일, 2016년 4월24일
31 그가 나간 후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지금 인자가 영광을 받았고 하나님도 인자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으셨도다 32 만일 하나님이 그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으셨으면 하나님도 자기로 말미암아 그에게 영광을 주시리니 곧 주시리라 33 작은 자들아 내가 아직 잠시 너희와 함께 있겠노라 너희가 나를 찾을 것이나 일찍이 내가 유대인들에게 너희는 내가 가는 곳에 올 수 없다고 말한 것과 같이 지금 너희에게도 이르노라 34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35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불교를 자비의 종교라 하고 기독교를 사랑의 종교라고 합니다. 신약성경에는 사랑에 대한 이야기가 많습니다. 대표적인 구절을 두 군데만 인용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고전 13:13절은 ‘그런즉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중의 제일은 사랑이라.’고 했고, 요일 4:16은 ‘하나님은 사랑이라.’고 했습니다. 그 외에도 성경에 사랑에 관한 구절은 많습니다. 예수님도 사랑에 대해서 종종 말씀하셨습니다. 심지어 원수를 사랑하라고까지 말씀하셨습니다. 오늘 설교 본문에는 약간 다른 상황에서 ‘서로 사랑하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34,35절은 다음과 같습니다.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
이런 구절을 읽으면 여러분은 어떤 생각이 듭니까? 교회 안에서 교인들끼리 사랑해야겠구나, 그게 바로 예수님의 제자가 되는 증거구나, 하는 생각이 들 겁니다. 그렇습니다. 한 교회에 다니는 교인들끼리 사랑하지 못하면서 어떻게 예수를 믿는 사람들의 모임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사랑하라는 말을 실질적으로 받아들이기는 쉽지 않습니다. 교인들끼리의 관계도 형식적인 차원에 머물기도 합니다. 어떤 경우에는 오히려 미움과 적대감으로 나타날 때도 있습니다. 세계 교회에서 가장 많이 싸우는 교회가 아마 한국교회일 겁니다. 특히 로마가톨릭교회에 비해서 개신교회가 유별납니다. 왜 이런 차이가 나는 것일까요? 로마가톨릭교회는 교회의 본질인 보편성을 확보하고 있다는 게 가장 큰 이유입니다. 교구에 속한 모든 교회를 하나의 교회로 보는 관점입니다. 이에 반해서 개신교회에는 개교회주의가 강한 특징을 보입니다. 이런 개교회주의로 인해서 신자들이 남다른 열정으로 교회에 봉사하기는 하지만 다툼이 일어날 때는 이전투구도 마다하지 않습니다. 교회를 기업처럼 여기고, 교회에 다니는 건 기업에 투자하는 것으로 여깁니다. 이런 상황에서 ‘서로 사랑하라.’는 말은 아무런 설득력이 없습니다. 크게 다투는 경우가 아니라 평범한 경우라고 하더라도 ‘서로 사랑하라.’는 말씀을 실질적으로 받아들이기가 쉽지 않습니다. 무엇이 문제일까요?
오는 토요일에 결혼하는 정솔뫼 집사의 주례를 제가 맡아서 어떤 말을 할까, 생각 중입니다. 제가 1980년부터 36년 동안 목사로 살았기 때문에 비록 작은 교회에서만 목회를 했지만 이런저런 사연으로 주례를 본 적이 제법 됩니다. 몇 편의 주례사를 만들어놓고 거기에 맞춰서 말할 수도 있지만 저는 신랑과 신부가 늘 새로운 사람들이기 때문에 늘 새로운 말씀을 준비합니다. 이번 토요일에 저는 신랑 신부에게 ‘서로 사랑하라.’는 말은 하지 않을 겁니다. 그건 일반적인 말이어서 실질적으로 느끼기 힘들기 때문입니다. 사랑은 아직 결정된 게 아닙니다. 상대방을 보고 싶다거나 상대방의 실수를 용서한다거나 생일을 기억하는 것들을 사랑 자체라고 말할 수도 없습니다. 사랑하지 않아도 그런 일은 얼마든지 할 수 있습니다. 사랑은 더 근원적인 생명의 능력입니다. 하나님 자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가 하나님을 규정할 수 없듯이 사랑도 규정할 수 없습니다. 교회 이름을 ‘사랑의 교회’라고 붙여도 사랑의 능력이 생기는 건 전혀 아닙니다. 역설적으로, 사랑하라는 말을 들으면 들을수록 그 말은 부담스러운 것이 되고 맙니다. 그런 부담이 쌓이면서 사랑이 ‘공자 왈’처럼 진부한 말로 전락됩니다. 상황이 이런데도 예수님은 왜 ‘서로 사랑하라.’고 세 번이나 반복해서 말씀하신 걸까요?
예수님이 어떤 상황에서 이런 말씀을 하셨는지 봅시다. 오늘 본문 바로 앞 구절인 요 13:21 이하에는 가룟 유다에 대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유다는 예수님을 배신한 제자입니다. 예수님은 괴로워하면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 중 하나가 나를 팔리라.’ 오늘 본문 바로 뒤 구절인 요 13:36-38절에는 베드로에 대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38절 말씀은 이렇습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 대표적으로 유다와 베드로가 거명되었지만 실제로는 열두 제자 모두가 이런 일에 연루되었다고 봐야 합니다. 열두 제자만이 아니라 요한복음 공동체에 속한 모든 신자들에게 배신과 부인의 신앙적 위기가 찾아오곤 했습니다. 서로 사랑하라는 말은 일반적인 교훈을 주기 위한 것이 아니라 이렇게 공동체가 해체될지도 모를 위기 가운데서 나온 것입니다.
‘서로 사랑하라.’는 말씀에는 또 하나의 특징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새 계명’이라고 명명하셨습니다. 그런데 사랑이 새 계명은 아닙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미 한 말입니다. 레 19:18절은 다음과 같습니다. ‘원수를 갚지 말며 동포를 원망하지 말며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나는 여호와니라.’ 인류의 수많은 스승들도 사랑하라고, 또는 다른 말이지만 비슷한 뜻으로 새길 수 있는 말들을 했습니다. 예수님이 새 계명이라고 말했다는 것은 이것이 일반적인 의미에서의 사랑을 가리키는 게 아니라는 의미입니다. 일반적인 사랑이라고 했다면 굳이 새 계명이라는 이름을 붙일 필요가 없기 때문입니다.
34(b)절에서 예수님은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냥 넓은 의미에서, 일반적인 의미에서 사랑하라는 게 아니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사랑하라는 겁니다. 사랑이 예수라는 인격, 그의 삶, 그의 운명과 단단하게 연결되어 있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착하게 살고, 양심적으로 살고, 윤리 도덕가가 되어야 한다는 사실에 무게를 두는 게 아니라 예수를 믿고, 예수와 일치해야 한다는 사실에 무게를 두는 겁니다. 그게 기독교 신앙의 핵심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어떻게 사랑하셨기에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고 말씀하신 걸까요?
오늘 설교 본문 앞에 유다의 배신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고 앞에서 짚었습니다. 다시 그 앞으로 가면 예수님이 제자들의 발을 씻기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14,15절에서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주, 또는 선생이 되어 너희 발을 씻었으니 너희도 서로 발을 씻어 주는 것이 옳으니라. 내가 너희에게 행한 것 같이 너희도 행하게 하려 하여 본을 보였노라.’ 부활절이나 성탄절이 올 때마다 기독교 대표자들이 노숙자나 시설에서 살아가는 이들의 발을 씻기는 퍼포먼스를 벌입니다. 지금의 교황도 자주 그런 일을 합니다. 어떤 교회에서는 목사가 장로의 발을, 장로가 신자들의 발을 씻기는 행사를 벌입니다. 그걸 감동적으로 보는 사람들도 있지만 뭔가 어색하다는 느낌을 받는 이들도 있습니다. 이왕 그런 일을 하려면 매스컴에 나오지 말고 조용히 하면 좋겠다는 생각도 듭니다.
다른 사람의 발을 씻기는 일이 고대 유럽에서는 노예의 몫입니다. 예수님이 제자들의 발을 씻기면서 본을 보이셨다는 것은 신자들끼리 서로 노예처럼 철저하게 섬기는 자세로 관계를 맺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이게 실제로 가능할까요? 예수님의 제자들처럼 소수의 사람들로 구성된 공동체에서는 가능할 겁니다. 가족끼리도 가능합니다. 저도 딸들이 어렸을 때는 발은 물론이고 늘 목욕을 시켰습니다. 어떤 분은 남편이나 다 큰 아이들의 발을 가끔 씻기고, 발톱도 깎아준다고 합니다. 좋은 거 같습니다. 장애시설에서 활동하는 분들도 남의 발을 씻기는 일을 자주 해야 합니다. 수도원에서도 수사들끼리 그런 세리머니를 펼칩니다. 노예처럼 그대를 섬기겠다는 태도가 바로 ‘서로 사랑하라.’는 새 계명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노예의 태도가 세속사회에서는 현실적이지 않습니다. 노예처럼 섬기겠다는 태도로 기업을 운영할 수는 없습니다. 헬무트 틸리케는 <현대교회의 고민과 설교>에서 사랑하라는 말을 일반화하는 설교를 가리켜 가현설적 설교라고 충고한 적이 있습니다. 어떤 목사가 사랑에 대해서 감동적으로 설교하고 예배가 끝난 다음에 어떤 신자로부터 다음과 같은 질문을 받았습니다. 아프리카에서 굶는 아이들을 위해서 돈을 보내거나 어려운 이들이 있는 시설에 가서 봉사하는 일은 예수를 믿지 않아도 교양인으로서 얼마든지 할 수 있는데, 예수 믿는 기업가인 자기에게서 문제는 경쟁 기업가와의 관계라는 겁니다. 그 관계에서도 사랑하라는 명제가 타당한가, 타당하다면 구체적으로 어떻게 해야 하는가, 하는 문제를 현대인들은 안고 삽니다. 이 문제는 기독교 윤리에서 다뤄야할 굉장히 광범위한 주제라서 설교 시간에 자세하게 설명할 수 없습니다. 저는 주인의 발을 씻기는 노예처럼 ‘서로 사랑하라.’는 예수님의 이 말씀이 제자 집단에게 해당되는 것이기 때문에 오늘날의 제자 집단이라 할 교회 안에서만이라도 어떻게 실현되어야 하는지를 설명하겠습니다.
솔직히 말해서 세속 사회에서만이 아니라 교회라는 특별한 공동체 안에서도 발을 씻겨주듯이 노예처럼 섬기는 자세로 살아가기는 쉽지 않습니다. 사람은 거룩한 일을 하면서도 세속적인 생각에 떨어지기 쉬운 속성을 갖고 있습니다. 한 교회 안에서도 의식적으로나 무의식적으로 서로 경쟁을 합니다. 속상한 일들이, 어처구니없는 일들이 실제로 일어납니다. 어떤 이를 무시하기도 하고, 잘난 체 하기도 합니다. 그게 겉으로 크게 드러나지 않는다고 해도 속으로는 아주 민감하게 작동합니다. 우리 스스로 그런 행동을 할 때도 많습니다. 이건 어쩔 수 없습니다. 그런 모습을 보고 교회가 뭐 이 따위야, 하고 실망할 필요도 없습니다. 누구의 실수로 생겼든지 문제가 생기면 교회 전통이나 민주적인 과정을 통해서 덕스럽고 합리적으로 처리해나가면 됩니다.
저는 노예와 같은 섬김의 삶도 은사의 원리를 따르는 게 옳다고 생각합니다. 은사는 각각 다르고 고유합니다. 그 은사의 영역에서만 섬기는 자세를 유지하면 됩니다. 신자들이 교회생활의 모든 부분에서 섬기려고 할 필요가 없다는 말씀입니다. 모든 것에서 섬기는 태도로 살아가려면 지칩니다. 시험에 듭니다. 사랑의 짐에 눌려서 신음하게 됩니다. 저의 경우를 말씀드리면 이렇습니다. 목사인 저의 은사는 설교입니다. 노예가 주인의 발을 씻기듯이 말씀을 충실하게 준비해서 전하는 것이 저의 은사이고, 그것이 ‘서로 사랑하라.’는 말씀에 충실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여기에는 두 가지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1) 저는 목사이긴 하지만 교회의 모든 일을 감당할 수가 없습니다. 더 많은 것을 기대하는 분들에게 좋은 목사가 되지 못하는 한이 있어도 저는 제 감당할 수 있는 것만 할 수 있습니다. 2) 노예가 주인의 발을 씻긴 후에 보답을 기대하지 않는 것처럼 저는 설교를 듣는 여러분에게 기대하는 게 없습니다. 설교를 듣고 은혜를 받아 교회 봉사도 더 열심히 하고, 뭔가 변화되었으면 좋겠다는 기대를 하지 않습니다. 저 스스로 감당하지도 못할 일로 신자들에게 부담을 느끼지 않겠다는 것이며, 마찬가지로 신자들에게 부담을 주지도 않겠다는 뜻입니다.
이런 태도를 개인주의적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긴 합니다. 전폭적인 헌신을 누군가 하지 않으면 교회 공동체의 역동성이 사라진다고 걱정할 수도 있습니다. 지금 저는 그런 말씀을 드리는 게 아닙니다. 주인의 발을 씻기는 노예의 영성이 무엇인지를 말씀드린 것뿐입니다. 일단 그런 기초를 확실하게 갖추는 것이 필요합니다. 테니스를 배울 때도 작은 것부터 정확하게 배워야합니다. 욕심이 많아서 여러 가지 기술을 한 번에 배우려고 하면 오히려 실력이 늘지 않습니다. 일단 하나의 은사에서만이라도 노예의 영성으로 섬김의 태도를 배우는 게 중요합니다. 그게 자리를 잡으면 다른 부분으로 확장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교회를 구성하고 있는 신자들이 전체적으로 이런 태도를 유지한다면 사랑의 공동체라는 역동성을 갖추게 될 것입니다.
주인의 발을 씻는 노예의 영성을 오해할 수 있습니다. 니이체는 기독교 영성을 자학적인 것이라고 보았습니다. 기독교 영성을 모르고 하는 말입니다. 주인의 발을 씻기는 노예는 어머니가 아기를 목욕시키는 마음으로 그 행위를 하는 겁니다. 사심이 들어가지 않는 겁니다. 사심이 완전히 제거된, 마치 조각칼을 들고 조각을 하고 있는 예술가처럼 발 씻는 행위에 몰입하고 있는 노예라면 그의 행위는 사랑입니다. 우리는 어떻게 사심 없이 교회 공동체 안에서 주어진 은사에 따라서 섬기는 태도를 유지할 수 있을까요? 목사인 제가 어떻게 사심 없이 설교 은사에 집중할 수 있을까요?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보십시오. 제자들의 발을 씻기신 사건은 예수님이 자신의 사랑을 퍼포먼스로 보여준 것입니다. 정작 중요한 것은 사랑의 실체입니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입니다. 요 3:16절 말씀은 이렇습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예수님의 십자가가 곧 사랑의 실체라는 뜻입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십자가와 부활로 인해서 참된 생명을 얻었기 때문입니다. 참된 생명은 죄와 죽음으로부터의 해방을 가리킵니다. 이 사실을 알고 믿는 사람은 비록 부분적이나마 실제의 삶에서 노예의 영성으로 살아갈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한 사람만이 하나님의 마음으로 사랑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여기에 해당되는 한 여자가 누가복음 7:36-50절에 나옵니다. 예수님이 바리새인 집에 식사 초대를 받아서 갔습니다. 그 동네에 ‘죄를 지은 한 여자’가 있었다고 합니다. 창녀로 추정됩니다. 그런 여자가 식사 자리에 왔다는 사실 자체가 거기 모인 많은 사람들을 불편하게 만듭니다. 그녀는 예수님 곁에 다가와 앉아서 울었고, 그 눈물이 예수님 발에 떨어졌습니다. 머리를 풀어서 예수님 발에 떨어진 눈물을 닦은 뒤에 발에 입을 맞추고 향유를 부었다고 합니다. 노예와 같은 태도를 보였습니다. 아니 노예보다 한 걸음 더 들어간 절정의 사랑이었습니다. 주인인 바리새인을 비롯해서 거기 모인 사람들은 이런 상황을 아주 언짢게 생각했습니다. 예수님은 눅 7:47절에서 이 여자에게 사랑이 많다고 말씀하시면서 ‘사함을 받은 일이 적은 자는 적게 사랑하느니라.’고 바리새인을 책망하셨습니다. 현대 지성인의 한 전형이라 할 바리새인은 책잡힐 일이 많지 않은 사람이기에 결국 사랑의 능력도 없는 사람이라는 말씀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서로 사랑하라.’는 말씀을 들었지만 이게 억지로는 되지 않습니다. 이 말씀을 사랑의 명령으로 받아들여도 안 됩니다. 사랑은 율법이나 윤리가 아니라 예수를 생명으로 경험한 사람들에게서 나오는 삶의 능력입니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라는 말씀을 기억하십시오. 그분의 사랑을 아는 것만큼 우리는 ‘서로’, 그리고 ‘창조적으로’ 사랑하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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