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령이 도우시리라!
롬 8:22-27, 성령강림 주일, 2018년 5월20일
22.피조물이 다 이제까지 함께 탄식하며 함께 고통을 겪고 있는 것을 우리가 아느니라 23.그뿐 아니라 또한 우리 곧 성령의 처음 익은 열매를 받은 우리까지도 속으로 탄식하여 양자 될 것 곧 우리 몸의 속량을 기다리느니라 24.우리가 소망으로 구원을 얻었으매 보이는 소망이 소망이 아니니 보는 것을 누가 바라리요 25.만일 우리가 보지 못하는 것을 바라면 참음으로 기다릴지니라 26.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는 마땅히 기도할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 27.마음을 살피시는 이가 성령의 생각을 아시나니 이는 성령이 하나님의 뜻대로 성도를 위하여 간구하심이니라.
성령 경험
오늘은 세계교회가 성령강림절로 지키는 주일입니다. 행 2장에 성령강림 사건이 나옵니다. 소위 ‘오순절 성령강림’ 이야기입니다. 지금도 교회에서는 성령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합니다. 성령의 역사라든가, 성령 충만을 받아야 된다고 말입니다. 성령을 자신이 마음먹은 대로 부릴 수 있는 듯한 태도를 취하는 목사들도 없지 않습니다. 순복음교회 유형의 오순절 계통 교회에서 이런 현상이 자주 일어납니다. 이런 현상 앞에서 기독교인들은 양 극단으로 나뉩니다. 하나는 성령을 주술적인 능력으로 받아들이는 신앙 태도이고, 다른 하나는 성령을 냉소적으로 대하는 신앙 태도입니다. 지성적인 기독교인들은 주로 후자 쪽에 치우치는 경향이 강합니다. 성령과 실제 삶과는 별로 연관성이 없다는 생각이 분명하기 때문입니다. 오늘 이 자리에 모인 여러분들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오늘 설교 제목은 ‘성령이 도우신다!’입니다. 성령에 대한 가장 중요한 개념의 하나는 이 제목이 가리키는 것입니다. 성령은 우리를 돕습니다. 이 사실을 안다면 삶을 전혀 새롭게 바라볼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성령의 도움이라는 게 손으로 확인할 수 있는 게 아니라서 평소에 절실하게 느끼지 못한다는 사실입니다. 성령만이 아니라 정말 중요하지만 평소에 절실하게 느끼지 못하는 것들은 지천으로 널려 있습니다. 예를 들어서 요즘 우리 동네에 찔레꽃이 한창입니다. 찔레꽃 향기에 대한 경험이 있으신 분들은 알 겁니다. 우리의 마음을 달콤하고 평화롭게 해주는 힘이 그 향기에 있습니다. 단순히 기분을 좋게 해주는 것만이 아니라 여러 가지 점에서 사람이 세상에서 생명을 유지할 수 있게 하는 능력이 찔레꽃에서 나옵니다. 찔레꽃만이 아니라 모든 식물들이 그런 역할을 합니다. 사람 중심의 일상에 과잉 노출된 현대인들은 이런 엄중한 사실을 실질적으로 느끼지 못합니다. 그만큼 우리의 내면적인 삶이 위축되었다는 뜻입니다. 이런 삶의 패턴이 반복되면 우리의 삶은 날이 갈수록 경직됩니다. 자기의 작은 경험을 절대화하고, 그것을 기준으로 남을 비판하고 잘난 척하는 것으로, 거친 표현으로 바꿔서 꼰대 짓으로 인생을 채워갑니다. 신앙생활도 이와 비슷합니다. 바리새인들처럼 율법주의와 성경문자주의와 근본주의에 길들여지면 기독교 영성이 형편없이 위축됩니다. 바울은 신앙과 삶을 가장 깊은 차원에서 가장 풍요롭게 경험한 사람입니다. 바울은 그 경험을 성령이 우리를 돕는다는 말로 표현했습니다. 롬 8:26절을 읽을 테니 들어보십시오.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는 마땅히 기도할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
성령이 우리의 연약함을 돕는다는 말이 구체적으로 무슨 뜻일까요? 눈에 보이지도 않고 손으로 만져지지도 않는 성령이 우리를 어떻게 돕는다는 말입니까? 요술을 부린다는 걸까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해 친히 간구하신다는 게 무슨 뜻일까요?
탄식의 삶
이에 대한 대답을 찾으려면 우선 우리의 연약함이 무엇인지를 알아야 합니다. 위에서 인용한 구절에 따르면 우리가 무엇을 기도해야할지를 모르는 것이 우리의 연약함입니다. 일반적으로는 무엇을 기도해야 할지에 대해서 우리가 모르지 않습니다. 구체적인 기도 제목도 많습니다. 바울은 다른 편지에서 쉬지 말고 기도하라고 권면했습니다(살전 5:17). 본문이 가리키는 것은 우리 삶에서 가장 궁극적인 실존, 즉 우리 노력으로 헤어 나올 수 없는 차원의 것들입니다. 지금 우리는 분명히 살아있지만 곧 죽는다는 사실을 압니다. 실제로 죽기 전에도 우리는 죽음을 그림자처럼 안고 삽니다. 인생 자체가 모순으로 가득합니다. 요즘 대한민국 젊은이들은 그것을 실감할 겁니다. 출세하고 부자가 되었다고 해서 생명을 충만히 누리는 게 아닙니다. 대한항공 사주 가족들의 행태에서 알 수 있듯이 사람은 좋은 것을 아무리 많이 소유하고 있어도 그것만으로 만족하지 못합니다. 자신이 곧 죽을 것이라는 사실을 의식적으로나 무의식적으로 알고 있기에 크게 작게 안하무인으로 행동할 수밖에 없는 게 인간입니다. 이와 비슷한 일들을 볼 때마다 저는 롬 8:22절이 말하는 탄식을 생각합니다. ‘피조물이 다 이제까지 함께 탄식하며 함께 고통을 겪고 있는 것을 우리가 아느니라.’
탄식은 세상 사람들만이 아니라 기독교인에게도 똑같이 적용됩니다. 성령을 받은 기독교인들이라 하더라도 세상 사람들과 완전히 다르게 사는 게 아니기 때문입니다. 똑같이 먹고 사는 문제로 어려움을 겪고, 똑같이 자식 문제로 고민합니다. 만약 기독교인이 영적인 만족만으로 인생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면 탄식하지 않겠지만, 그렇지 못하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합니다. 영육 이원론적 관점에서 문제를 해결하려는 사람들이 있긴 합니다. 기독교 역사에서 자주 나타났습니다. 그들을 영지주의라고 합니다. 몸으로서의 현실을 최대한 부정함으로써 현실을 초월하는 방식의 신앙입니다. 한국교회에서는 구원파 신자들에게 그런 성향이 나타납니다. 이와 다른 방식이지만 현실을 초월하려는 또 하나의 다른 방식은 열광주의 신앙입니다. 유명 가수의 콘서트 장에서 스트레스를 날려버림으로써 현실의 고난을 극복하려는 사람들처럼 열광적인 부흥회 유의 기독교 집회에서 현실을 초월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바울은 도사들처럼 현실을 가볍게 뛰어넘는 식의 신앙을 제시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탄식할 수밖에 없는 실존 가운데 들어가서 투쟁하고 기다리는 삶의 태도를 제시합니다. 롬 8:23절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 곧 성령의 처음 익은 열매를 받은 우리까지도 속으로 탄식하여 양자 될 것 곧 우리 몸의 속량을 기다리느니라.” 이 문장에는 우리에게 낯선 단어가 나옵니다. 입양된 사람이라는 뜻의 양자와 몸의 속량입니다. 양자는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로 인정받는다는 뜻, 말하자면 구원받는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몸의 속량은 몸의 해방입니다. 이것도 구원을 가리킵니다. 구원의 순간을 기다린다는 말은 곧 역설적으로 구원이 아직 완성되지 못했다는 뜻입니다. 구원이 완성되는 순간을 기다리는 기다림의 영성이야말로 기독교적인 삶의 핵심입니다.
여기서 기다린다는 말의 의미를 여러분은 잘 알고 있습니다. 궁극적으로 우리는 예수의 재림을 기다립니다. 그 재림의 때에 세상은 생명 심판을 받고 완성됩니다. 그걸 기독교는 최후의 심판이라고 말합니다. 생명이 완성될 종말이 아직 오직 않았으니 우리는 여전히 탄식할 수밖에 없는 인생을 살아야 합니다. 종말과 현재 사이에 놓인 큰 간격을 건너뛸 수 없습니다. 여기에 놓인 구체적인 삶을 감당해야 합니다. 기쁨만이 아니라 고통도 받아들여야합니다. 만약 종말 생명을 향한 희망이 없다면 무조건 이 현실의 원리에 충실하면 됩니다. 그게 세상 사람들의 삶입니다. 이런 점에서 기독교인들의 실존은 세상 사람들의 것보다 더 고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럴 바에야 차라리 기독교 신앙을 버리는 게 편할지 모릅니다. 많은 기독교인들이 형식적으로만 신앙생활을 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실질적으로 기독교 신앙을 진지하게 대하면 인생살이가 더 피곤해질지 모른다는 무의식에 영향을 받기 때문입니다.
바로 이 대목에서 바울은 성령이 우리의 연약함을 돕는다고 말했습니다. 비유적으로 설명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어느 집 딸에게 걱정거리가 생겼습니다. 혼자서는 도저히 해결할 수 없는 문제였습니다. 혼자서 고민합니다. 밥맛도 잃었습니다. 얼굴에 수심이 가득했습니다. 어머니는 딸의 걱정거리가 무엇인지 알고 있었습니다. 딸을 대신해서 남편에게 걱정거리를 설명하고 해결해달라고 부탁했습니다. 이제 딸은 걱정거리로 인해서 더 이상 고민하지 않아도 되었습니다. 왜냐하면 어머니의 부탁을 받은 아버지가 문제를 해결할 것이라는 사실을 믿기 때문입니다. 성령이 우리를 위해서 하나님께 간구해주신다는 사실을 확신할 수만 있다면 비록 탄식할 수밖에 없는 현재의 삶 가운데서라도 이전과는 전혀 다른 삶을 살아갈 수 있을 겁니다. 여러분은 그 사실을 확신하고 있으신가요? 그런 경험이 있으신가요?
성령이 우리의 연약함을 돕는다거나 우리를 위해서 간구해주신다는 말은 신학적이고 문학적인 표현입니다. 그래서 오해받기도 쉽습니다. 성령이 마술을 부리듯이 우리를 돕는 것이라고 말입니다. 성경에 나오는 천사를 날개 달린 어떤 희귀 생물체로 오해하는 것과 같습니다. 성령이 우리의 연약함을 돕는다는 말은 기독교인의 신앙적인 깨달음이 단순히 인간의 인식능력이 아니라 성령의 도우심으로 주어지는 것이라는 뜻입니다. 따라서 여기서 중요한 것은 탄식할 수밖에 없는 기독교인의 실존을 해결하는 길이 무엇인가에 대한 것입니다. 바울은 오늘 설교 본문이 포함된 롬 8장 전체에서 이 길을 말합니다. 그것을 아는 사람은 성령의 사람입니다. 성령의 도움을 받는 사람입니다.
그리스도의 사랑
바울이 롬 8장에서 제시하는 길은 그리스도의 사랑과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일단 두 구절을 먼저 읽겠습니다. 롬 8:35절입니다.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란이나 곤고나 박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 롬 8:39절입니다. 이게 8장의 결론 구절입니다.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어떤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 여기에 열거된 단어들은 모두 이 땅에 살고 있는 기독교인들의 실존을 억압하는 세력들입니다. 몸이 아직 해방을 얻지 못했기에 탄식하게 만드는 요소들입니다. 요즘 우리도 똑같은 것들을 경험합니다. 바울은 이런 것들이 그리스도의 사랑과 하나님의 사랑에서 우리를 끊어내지 못한다고 했습니다. 그리스도의 사랑과 하나님의 사랑, 축약하면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이야말로 구원의 길이라는 뜻입니다. 이 사실을 깊이 깨닫게 하는 능력이 곧 성령입니다. 여러분은 지금 어떻습니까? 성령을 경험하셨습니까?
그리스도의 사랑과 하나님의 사랑은 너무 자주 들어서 상투적으로 느낄 수가 있긴 합니다. 사랑을 낭만적으로만 생각하는 경향도 있습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은 존재론적인 사건입니다. 롬 8:1절 이하에서 바울은 이게 왜 성령의 도우심으로만 깨달을 수 있는 것인지를 설명했습니다. 1절은 다음과 같습니다.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정죄함이 없다는 말은 의로워졌다는 뜻입니다. 사람들은 세상에서 의롭다는 인정을 받기 위해서 안간힘을 씁니다. 학력과 재력과 사회적 지위와 행복한 삶의 조건들이 이런 것과 연관됩니다. 바울 당시에는 율법을 잘 지키는 것이 인정받는 길이었습니다. 현대인들이 살아가는 방식도 이와 똑같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이제 전혀 다른 길을 제시했습니다. 그리스도 예수와의 결합으로 의로워진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법이 죄와 죽음의 법에서 우리를 해방시켰기 때문입니다(2절).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우리의 능력과 업적으로 의로워지는 게 아니라 그런 것 없이 예수를 믿음으로 인정받게 되었으니, 그것을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이라고 말한 것입니다. 이게 잘 받아들여지지 않지요? 그런가보다 하는 정도로 받아들여집니까? 아니면 아주 실질적인 것으로 받아들여집니까? 저를 향해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고 싶지는 않으신가요? 그리스도의 사랑을 실질적으로 경험함으로써 의로워진 경험이 분명하다면, 그게 실제 삶에서 어떻게 나타나는지를 더 구체적으로 설명보라고 말입니다.
저는 두 가지로 말씀드리겠습니다. 하나는 일반적인 삶의 차원입니다. 예수님을 통해서 저는 제 인생을 사람의 기준이 아니라 하나님이 기준으로 바라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사람에게 인정받는 것보다는 하나님에게 인정받는 것이 옳은 인생이라는 생각입니다. 아마 여러분도 다 아는 생각이긴 할 겁니다. 그런 생각을 대충 따라간다고 해서 실제로 그렇게 살지 못하는 게 문제이긴 합니다. 하나님에게 인정받는 것이 더 옳은 이유는 여기서만 삶이 풍요로워지기 때문입니다. 거꾸로 사람으로부터의 인정은 우리의 삶을 풍요롭게 하지 못합니다. 우리를 만족시키지 못한다는 뜻입니다. 가장 가까운 부부나 친구관계에서 여러분이 그걸 경험했을 겁니다. 상대방의 인정을 받는다는 것이 어려울 뿐만 아니라 인정받으면 그 다음에 더 크게 인정받고 싶어 합니다. 그리고 상대방도 역시 자기를 인정해달라고 요구합니다. 서로에게 부담이 될 정도로 결속되려고 합니다. 사람들은 그걸 사랑이라고 말하겠지만 사랑이라기보다는 의무에 가깝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그 어떤 것도 요구하지 않습니다. 모든 것을 우리에게 베푸실 뿐입니다. 예수님은 공중의 새와 들의 꽃을 보라고 말씀하신 적이 있습니다. 어떤 수고도 하지 않으면서도 그들은 고유한 방식으로 자신들의 존재감을 절정으로 드러내면서 살아갈 수 있습니다.
다른 하나는 목회의 차원입니다. 저는 별로 부지런한 목회자가 못 됩니다. 성공한 목회자도 못 됩니다. 그럴만한 능력도 없습니다. 예수님을 통해서 저는 그런 것들이 별로 중요한 게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목회 업적이 있어야만 하나님에게 인정받는 게 아니라는 뜻입니다. 이건 자기 합리화가 아니라 가장 궁극적인 현실에 대한 깨달음입니다. 저는 목회 업적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잘 믿는 것이 최선의 목회라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목사도 그 믿음만으로 의롭다는 인정을 받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의롭다고 인정받는 것은 관념적인 교리가 아니라 실제 삶의 능력에 속합니다. 의롭다는 인정을 받은 사람은 자유와 평화와 기쁨의 삶을 누린다는 뜻입니다.
어떤 분들은 굳이 예수를 믿을 필요가 어디 있냐, 예수 믿지 않아도 그냥 세상에서 성실하게 살고 자기 성찰을 하면서 양심적으로 살면 행복할 수 있다고 주장할 겁니다. 그렇게 주장하는 사람은 다음의 두 가지 경우 중에 하나입니다. 하나는 행복하지 않지만 행복한 것처럼 포즈를 취하는 경우이고, 다른 하나는 정신적인 내공이 뛰어난 경우입니다. 전자에 대해서는 제가 더 설명할 필요는 없습니다. 후자에 해당하는 이들은 존경할만한 분들입니다. 철학자, 시인, 예술가들에게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들의 정신적인 내공에 대해서는 왈가왈부하지 않겠습니다. 다만 저는 그들과 같은 방식의 삶을 선택하지 않았습니다. 그런 선택을 하고 싶지도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의 사랑만이 탄식할 수밖에 없는 현재의 삶을 극복하게 한다는 사실을 이미 알아버렸기 때문입니다. 이를 알게 하신 이가 바로 성령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은 성령강림주일입니다. 교회가 성령강림절을 지킨다는 것은 가장 깊은 차원에서 생명을 이해하고 받아들인다는 뜻입니다. 그것을 바울은 ‘성령이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는 것’이라고 표현했습니다. 여러분 모두 성령의 사람들이 되기를 진심으로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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