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령 임재와 마술
(사도행전 8:9-24)
사도행전을 대표하는 구절은 1장8절입니다. 승천 장면에서 나온 주님의 말씀입니다.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여기서 성령, 권능, 땅끝, 증인이 키워드입니다. 각각의 단어가 기독교 신앙 전체를 감당할 정도로 깊은 의미가 있습니다. ‘성령’이 우리에게 임한다는 것이 무슨 뜻일까요? 그런 경험이 우리에게 있을까요? 성령을 받은 사람들에게 주어지는 ‘권능’은 무엇일까요? 그런 권능이 우리에게 있을까요? ‘땅끝’과 ‘증인’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의 영적 관심이땅끝, 즉 세계 전체에 이르고 있을까요? 증인으로 산다는 말이 우리에게 실감이 날까요? 초기 기독교의 신앙 정체성에 대한 사도행전의 이 진술은 오늘 우리에게 그대로 적용됩니다. 거기에서 기독교인으로 산다는 것의 근본 의미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빌립과 시몬
오늘 설교 본문(행 8:9-24)도 사도행전 전체의 주제를 일관되게 보여줍니다. 이 이야기는 복음이 예루살렘과 유대지역을 넘어서 사마리아에 전파되는 역사적 분기점을 배경으로 합니다. 예루살렘이 포함된 유대지역은 유대인들의 정통성을 그대로 유지한 곳입니다. 이에 반해서 사마리아는 이방인들과 혼혈인들이 뒤섞여 살던 곳이었습니다. 남쪽 유대 지역의 사람들은 사마리아를 낮추어보았습니다. 바로 그 사마리아 지역에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전파되었습니다. 여기에는 두 가지 사건이 동기가 되었습니다. 하나는 예루살렘 교회에서 일곱 집사를 선택했다는 것이며, 다른 하나는 예루살렘 교회가 큰 박해를 받아서 사도들을 제외한 많은 기독교인들이 여러 곳으로 흩어지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런 와중에 일곱 집사의 한 사람인 빌립이 사마리아에 가서 전도했습니다. 빌립의 설교와 그가 행한 표적에 많은 사람들이 감동을 받았습니다. 심지어 더러운 귀신이 쫓겨나가고, 중풍병자와 못 걷는 사람들이 고침을 받았다고 합니다.
그 사마리아에 시몬이라는 마술사가 살고 있었습니다. 그는 큰 능력을 행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가 행하는 마술은 사마리아 사람들을 놀라게 했습니다. 누가는 이 사실을 이렇게 전합니다. “낮은 사람부터 높은 사람까지 다 따르며 이르되 이 사람은 크다 일컫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하더라.”(행 8:10) 학자들의 연구에 따르면 이 시몬은 사마리아 지역에서 신으로 추앙받았다고 합니다. 150년경에는 거의 모든 사마리아 사람들이 시몬을 최고의 신으로 숭배했다는 기록도 있습니다. 누가도 “오랫동안 그 마술에 놀랐으므로 그들이 따르더니”(행 8:11)라고 말합니다. 이 시몬이 사마리아의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빌립에게서 세례를 받고 빌립을 따라다녔다고 합니다. 마치 무당이 교회에 나오기 시작한 것과 비슷합니다. 그가 빌립을 따라다닌 이유는 빌립이 표적과 큰 능력을 행했기 때문입니다.
여기까지의 이야기만 놓고 본다면 빌립과 마술사 시몬 사이의 경쟁에서 빌립이 승리했다는 사실만 드러납니다. 많은 기독교인들이 이런 차원에서 기독교 신앙을 이해합니다. 예수를 믿으니까 병도 낫고 사업도 잘되고, 모든 일들이 잘 풀리더라, 하는 주장에 솔깃해합니다. 더 나아가서 예수를 믿지 않는 사람들이 잘 되는 거 못 봤다는, 전혀 사실에 근거하지 않는 주장에도 맞장구를 칩니다. 복음을 전파하기 위해서라도 예수 믿는 사람들은 잘 살아야 한다고 합니다. 그게 바로 하나님이 살아 계시다는 표적이라는 겁니다. 이런 신앙은 기독교의 진수가 아니라 껍질입니다. 껍질을 진수인 것처럼 주장하고 따르는 것은 신앙의 왜곡입니다. 그 이유가 무엇인지 우리는 오늘 본문에서 배울 수 있습니다.
성령의 임재
사마리아 사람들이 빌립의 전도로 복음을 받아들이고 세례를 받았다는 소식을 전해들은 예루살렘의 사도들은 이 사실을 확인하기 위해서 베드로와 요한을 사마리아 지역으로 보냈습니다. 이런 일들은 당시에 흔했습니다. 바울의 편지인 갈라디아서에 따르면 베드로는 바울과 바나바가 복음을 전하던 안디옥 교회를 방문하기도 했습니다. 베드로와 요한은 사마리아에 와서 사마리아 신자들이 성령을 받도록 안수하고 기도했다고 합니다. 그러자 그들이 성령을 받았습니다. 그 이전까지는 사마리아 기독교인들이 단지 예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았을 뿐이지 성령을 받지는 못했습니다.
사마리아 사람들이 성령을 받았다는 게 무슨 뜻일까요? 이 질문에 답하기 전에 이 질문과 연관해서 사마리아 신자들에게 있었던 두 가지 사실을 먼저 확인하겠습니다. 하나는 사마리아 사람들이 이미 예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았다는 사실이고, 다른 하나는 그들에게 이미 표적과 큰 능력이 임했다는 사실입니다.
1) 초기 기독교에 세례에 대한 논란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문제는 주로 세례 요한의 세례에 한정되었습니다. 기독교인들 중에서 세례 요한의 세례만 받은 사람들이 고린도지역에 살고 있었습니다. 바울은 그들에게 예수의 이름으로 세례를 준 일이 있습니다.(행 19:1-6) 초기 기독교에서는 세례 요한의 세례와 예수 이름을 통한 세례의 관계를 어떻게 볼 것인가 하는 논란이 있었습니다. 오늘 본문에 따르면 예수 이름을 통한 세례로 충분하지 못했습니다. 성령 임재가 필요했습니다.
2) 두 번째 사실인 표적과 큰 능력은 더 복잡합니다. 표적과 큰 능력은 은사입니다. 우리는 그것들을 주로 성령의 은사라고 말합니다. 성령을 받았다는 증거가 바로 큰 능력으로 나타납니다. 설교 머리에서 인용한 행 1:8절도 성령이 임하면 권능을 받는다고 했습니다. 빌립을 통해서 사마리아에 일어난 표적과 큰 능력은 분명히 성령으로 인한 사건들입니다. 그렇다면 누가의 진술은 모순입니다. 사마리아 기독교인들에게 은사를 통한 성령의 능력이 나타났는데도, 그것을 부정했으니까요. 누가는 왜 이렇게 서로 모순되는 말을 하는 걸까요?
여기에는 다음과 같은 사연이 숨어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빌립이 행한 표적과 큰 능력이 성령의 역사가 분명하지만 사도적인 인정을 받지 못했다는 사실을 지적하는 것이라고 말입니다. 그럴 수도 있긴 합니다. 기독교 초창기에 사도적인 권위를 추락시키는 행위는 모두를 위해서 바람직한 게 아니었습니다. 만약 기독교인들이 제각각으로 예수의 복음을 전하다보면 복음의 근간이 허물어질 수도 있었을 겁니다. 그런 차원에서 빌립의 활동이 옳기는 하지만 사도적인 권위가 있는 예루살렘 교회로부터 인정을 받아야 한다는 사실을 여기서 강조했는지 모릅니다. 이런 설명만으로는 위에서 말씀드린 모순이 깨끗하게 해소되지는 않습니다. 누가의 이 진술에는 더 근본적인 어떤 이유가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이어지는 에피소드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빌립을 따라다니던 마술사 시몬은 성령이 임하는 것을 보고 마음이 동했습니다. 그는 돈을 내고 성령을 임하게 하는 권능을 받고 싶어 했습니다. 베드로는 그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네가 하나님의 선물을 돈 주고 살 줄로 생각하였으니 네 은과 네가 함께 망할지어다.”(행 8:20) 일종의 저주입니다. 그 뒤로 베드로의 말이 길게 이어집니다. 시몬의 마음이 바르지 못하고 악하므로 복음과 아무런 상관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 악을 회개하면 용서받을지 모른다고 권면했습니다. 시몬을 향한 베드로의 책망은 당시 초기 기독교가 봉착한 영적 위기가 무엇인지, 또한 어떻게 그런 위기를 극복했는가를 대변합니다.
우선 시몬의 잘못이 무일까요? 본문의 묘사만으로 본다면, 그가 돈으로 성령의 능력을 사려고 했다는 것이 그 대답입니다. 그가 왜 돈으로 그런 거래를 시도했는지를 누가는 설명하지 않습니다. 고대 헬라 시대에는 이런 일들이 관행적으로 일어났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런 행태가 지금 우리의 눈에는 이상하게 보일지 모르지만, 오늘 우리의 삶도 사실은 똑같습니다. 아니, 우리의 경우는 더 심합니다. 모든 걸 돈과 연관시킵니다. 젊은 남녀들이 배우자를 선택하는 기준도 돈 버는 능력입니다. 외모도 역시 돈과 연관됩니다. 오늘 대학교 총장들께서 노골적으로 CEO가 되겠다고 나섭니다. 돈을 잘 버는 능력이 모든 것보다 우선합니다. 이런 걸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우리가 시몬을 탓할 수는 없습니다.
시몬 이야기에서 핵심은 돈이 아닙니다. 시몬이 그렇게 유치하거나 비열한 사람도 아닙니다. 그는 사마리아의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빌립에게서 세례를 받은 사람입니다. 빌립에게서 일어나는 표적과 큰 능력에 마음을 빼앗긴 것은 분명하지만 나름으로 진정성이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여기서 언급된 돈은 더 근본적인 것을 말하기 위한 매개입니다. 더 근본적인 것은 성령 임재였습니다. 성령 임재는 초기 기독교로 하여금 정체성을 유지할 수 있게 하는 가장 본질적인 사건이었습니다. 그것이 성령세례입니다. 그것만이 기독교가 다른 종교나 다른 사상이나 철학과 구별되는 근거였습니다. 그래서 본문은 사마리아 사람들이 예수 이름으로 세례를 받았지만 성령을 받아야한다고 주장할 정도였습니다.
마술 넘어
성령의 임재가 구체적으로 무엇인가, 하는 앞의 질문으로 돌아갑니다. 오늘 본문은 그것을 묘사하지 않습니다. 베드로와 요한이 안수를 하자 그들이 성령을 받았다고만 말합니다. 이에 반해서 빌립이 행한 표적과 큰 능력은 비교적 소상하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축귀와 치병이 그것입니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알고 있는 내용들입니다. 이런 축귀와 치병은 특별하다기보다는 마술사 시몬도 행할 수 있는 일반적인 능력입니다. 그렇다면 시몬이 돈을 내면서까지 얻으려고 한 성령 임재 능력은 축귀와 치병보다 훨씬 신비롭고 큰 능력일 것으로 추정됩니다. 그것이 무엇일까요? 누가는 왜 이 중요한 장면에서 구체적으로 묘사하지 않고, 성령을 받았다고만 간단하게 언급하고 이야기를 끝내는 걸까요?
사도행전 2장을 보면 이에 대한 간접적인 대답이 나옵니다. 오순절 성령강림 사건에 대한 보도입니다. 성령이 임하자 그곳에 모였던 사람들이 방언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런 성령의 권능을 경험한 사도들은 예루살렘 큰길에 나가서 예수 그리스도를 전할 수 있었습니다. 성령의 임재가 방언으로 나타난다는 사실은 사도행전 곳곳에 나옵니다. 앞에서 인용한 요한의 세례에 대한 보도에서도 바울이 예수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 안수하자 성령이 임했고 방언을 하게 되었다는 사실이 언급됩니다.(행 19:6) 고린도전서 14장도 방언에 대해서 자세하게 설명합니다. 이런 일련의 보도를 종합하면 초기 기독교에서 방언이 성령 임재의 중요한 현상이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방언은 별로 신기한 현상이 아닙니다. 축귀나 치병이 훨씬 특별한 현상입니다. 마술의 능력을 소유하고 있던 시몬이 돈을 내면서까지 얻으려고 한 능력이라고 하기에는 방언은 별 의미가 없는 현상입니다.
본문은 성령의 임재가 어떤 현상인지를 구체적으로 묘사하려는 게 아닙니다. 오히려 그런 묘사가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말하려는 겁니다. 이 말을 이상하게 생각하지 마십시오. 성령의 경험이 근본적으로 불가능하다는 말이 아니라 우리의 작은 경험과 불완전한 인식능력으로 성령을 재단할 수 없다는 말입니다. 그 이유는 아주 분명합니다. 성령은 하나님의 영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경험하지만 하나님을 직접 볼 수 없는 것처럼 성령 경험이 가능하지만 성령을 직접 묘사할 수는 없습니다. 음악가들에게 음악경험이 가능하지만 음악 자체를 실증적으로 말할 수 없는 것과 비슷합니다. 이런 데서 많은 신자들이 혼란을 느낍니다. 그리고 성령을 왜곡하기도 합니다. 그런 일들이 초기 기독교부터 계속되어왔습니다. 그럴 때마다 성서기자들과 신학자들은 투쟁했습니다. 그 흔적이 바로 성서이며, 지난 2천년 기독교 역사입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마술사 시몬은 사람들이 놀란 만한 일들을, 말하자면 초능력과 마술을 많이 행했습니다. 그에게서 일어난 현상들은 빌립이 행한 표적 및 큰 능력과 다를 게 없었습니다. 이런 현상들은 이상한 게 아닙니다. 사람들은 열광적인 상태에 이르면 이런 경험을 하게 됩니다. 기독교만이 아니라 다른 종교에서도 얼마든지 일어나는 현상입니다. 심지어 최면술로도 이런 현상을 일으킬 수 있습니다. 초기 기독교에도 이런 현상들이 일어났습니다. 성령 임재는 겉으로는 이런 것들과 비슷한 현상으로 나타날 때가 있지만 근본적으로는 다릅니다. 초능력과 마술은 신기한 현상에 호기심을 갖고, 더 나아가 이기적으로 사용하는 것입니다. 사마리아 사람들이 시몬을 신으로 숭배했던 것처럼 말입니다. 그러나 성령 임재는 하나님이 주관하시는 생명의 신비를 경험하게 합니다. 초능력처럼 보이는 현상 너머에 계시는 하나님에게 영혼의 귀와 눈을 열게 됩니다. 이런 경험이 있는 사람에게는 초능력과 마술이 아주 시시하게 보입니다. 그런 것에 더 이상 관심을 보이지 않습니다. 바울이 지병을 안고 살면서도 그것이 치료되기를 두 번만 기도하고 말았다는 사실에서도 이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성서가 축귀와 치병과 방언을 비롯한 여러 은사를 분명히 말하고 있지 않느냐, 그러니 오늘도 그런 경험이 필요하지 않느냐, 하고 생각할 분들이 있을 겁니다. 그런 것은 성령 임재에 대한 주술적인 세계관에 묶여 있던 고대인들의 고유한 경험이었습니다.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누가가 구체적으로 묘사하지 않은 성령 임재입니다. 축귀와 치병은 이제 병원에서 해결하면 됩니다. 방언은 외국어를 잘 배우면 됩니다. 성령 임재에 대한 가장 크고 참된 증거는 예수 사건입니다. 그에게 일어난, 그를 통해서 약속된 종말론적 부활 생명에 대한 믿음과 희망입니다. 여러분에게 그 세계가 날이 갈수록 더 또렷해지고 있나요? 그렇다면 성령을 경험한 사람입니다. 아니면 초능력과 치병, 축귀 같은 신기한 현상에 마음이 끌리나요? 돈으로 성령 임재 능력을 얻으려한 시몬과 비슷한 사람입니다. 예수님이 세례 받을 때 임한 비둘기 같은 성령이 예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그의 제자로 살아가는 여러분에게 2010년 한 해에도 늘 함께 하기를 바랍니다. (주현절 후 첫째 주일, 1월1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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