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령, 진리의 영
요 16:12-15, 성령강림후 첫째 (삼위일체) 주일, 2016년 5월22일
12 내가 아직도 너희에게 이를 것이 많으나 지금은 너희가 감당하지 못하리라 13 그러나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니 그가 스스로 말하지 않고 오직 들은 것을 말하며 장래 일을 너희에게 알리시리라 14 그가 내 영광을 나타내리니 내 것을 가지고 너희에게 알리시겠음이라 15 무릇 아버지께 있는 것은 다 내 것이라 그러므로 내가 말하기를 그가 내 것을 가지고 너희에게 알리시리라 하였노라.
지난 주일은 성령강림절이었고, 오늘은 성령강림후 첫째 주일이면서 삼위일체주일입니다. 지난 일주일 동안 여러분은 성령이라는 단어를 몇 번이나 생각했습니까? 삼위일체나 성령은 제쳐두고 하나님이라는 단어를 일상에서 기억하는 경우도 드믑니다. 개인적으로 차이가 있습니다. 1) 신앙이 돈독한 사람들은 매일 하나님을 생각하면서 살기도 합니다. 늘 아침저녁으로 기도드리고, 성경을 읽고, 기회가 주어지는 대로 주변 사람들에게 하나님을 전합니다. 2) 최소한 신앙 훈련이 된 사람들은 특별히 어렵거나 중요한 일을 만날 때 하나님을 찾습니다. 수능, 결혼, 출산, 취업 등을 앞두고 하나님께 기도를 드릴 겁니다. 3) 명색만 기독교인이라 하는 사람들은 평소에 신앙에 관계된 것을 전혀 생각하지 않고 지냅니다. 마치 100미터 달리기 선수처럼 숨도 안 쉬고 일상을 처리하는 데 전념합니다. 속칭 ‘먹고사니즘’에만 정신을 파는 겁니다. 여러분들은 이 세 가지 행태 중에서 어느 하나에 속하든지, 또는 그 사이에 걸쳐 있을 겁니다. 신앙에 직접 관계된 일을 평소에 기억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여기서 최선은 성경의 세계를 깊이 아는 것입니다. 그 성경의 세계를 깊이 알게 되면 자신의 일상과 신앙이 점점 일치되는 경험을 하게 될 것입니다. 저는 설교하는 목사로서 여러분들이 그런 경험을 할 수 있도록 돕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여러분이 성경의 세계로 들어가려면 일단 세상에서 듣고 배웠던 것들을 내려놓아야 합니다. 이게 간단한 문제가 아닙니다. 지금 여러분의 마음이 쏠려있는 대상이 무엇인지를 보면 대답이 나옵니다. 돈, 건강, 가족, 노후설계, 명예, 권력 등등입니다. 사회정의와 참된 교육에 마음을 두는 분들도 있을 겁니다. 다 좋고 필요한 것들입니다. 그런 것들이 여러분들의 삶을 이끌어가는 알맹이(reality)입니다. 그런데 그런 것들은 다 지나갑니다. 그것만을 붙들고 있으면 허무에 떨어집니다. 성경은 하나님이 궁극적으로 참된 리얼리티라고 말합니다. 이 사실이 전제되지 않으면 기독교 신앙은 성립되지 않습니다. 아무리 교회에 열심히 나와도 수박 겉핥기 수준에 머물 뿐입니다. 삶에 대한 선입관을 내려놓고 오늘 설교 본문인 요 16:12-15절이 무엇을 말하는지 들어보십시오. 들을 귀를 가지신 분들은 천기누설과 같은 차원의 엄청난 이야기를 듣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 처형을 당하기 전에 제자들에게 주신 말씀이 요 13-17장에 나옵니다. 일명 ‘고별 설교’입니다. 상당히 긴 구절입니다. 15:26-16:15절에는 성령에 관한 말씀이 나옵니다. 예수님은 이제 곧 십자가 처형을 당해야 합니다. 그러면 제자들은 천애고아와 같은 상황에 떨어지는 겁니다. 십자가에 죽은 이를 메시아로 믿는다고 주변에서 손가락질을 당할 것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이 처할 엄중한 상황을 예상하고 두려워하지 말라고 위로하면서 자신이 떠나면 성령이 와서 제자들과 함께 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성령이 제자들을 어떻게 구체적으로 도울 것인지에 대해서 13,14절에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니 그가 스스로 말하지 않고 오직 들은 것을 말하며 장래 일을 너희에게 알리시리라 그가 내 영광을 나타내리니 내 것을 가지고 너희에게 알리시겠음이라.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이라는 표현을 잘 보십시오. ‘진리의 성령’은 ‘진리의 영’입니다. 성령과 영은 똑같이 헬라어 프뉴마를 번역한 겁니다. 번역자가 프뉴마를 경우에 따라서 성령, 또는 영으로 번역했습니다. 진리의 영은 헬라서 성경에 나오는 ‘토 프뉴마 테스 알레테이아스’의 번역입니다. 알레테이아는 우리말로 진리(眞理)입니다. 영어로는 truth, 독일어로는 Wahrheit라고 합니다. 우리말이나 한자나 영어, 또는 독일어는 원래 헬라어가 가리키는 그 깊이를 담아내지 못합니다. 헬라어 알레테이아는 벗어난다는 뜻의 접두사 ‘아’와 망각이나 은폐라는 뜻의 명사 ‘레테’의 합성어입니다. 즉 알레테이아는 망각에서 벗어났다, 은폐에서 벗어났다는 뜻입니다. 탈망각, 탈은폐라는 의미의 알레테이아를 좀더 정확하게 알려면 우선 헬라어 레테에 얽힌 헬라 신화를 알아야 합니다.
헬라 사람들은 죽은 사람이 이승에서 저승으로 넘어가려면 다섯 개의 강을 건너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첫 번째 강은 고통의 강으로써 ‘아케론’이라고 합니다. 망자는 그 강을 건너면서 죽음의 고통을 씻어냅니다. 두 번째 강은 비탄과 통곡의 강으로써 ‘코키토스’라고 합니다. 얼음보다 더 차가운 코키토스를 건너면서 모든 비탄과 통곡을 내려놓아야 합니다. 세 번째 강은 불의 강으로써 ‘플레게톤’이라고 하는데, 여기서 망자는 분노와 감정의 찌꺼기를 다 태워버려야 합니다. 네 번째 강은 두려움과 증오의 강으로써 ‘스틱스’라고 하는데, 이 강을 건너면서 망자는 두려움을 극복할 수 있게 됩니다. 마지막 다섯 번째 강은 망각의 강인 ‘레테’입니다. 망자는 레테 강물을 마시고 이승에서의 모든 기억을 잊게 됩니다. 망자가 건너야 할 이 다섯 개의 강 이야기는 신화적인 형식을 통한 인생살이를 가리킵니다. 이 세상에서 우리는 고통, 비탄, 분노, 증오, 망각을 겪으면서 삽니다. 이 과정에서 마지막 단계가 망각, 즉 레테입니다. 인공지능에게는 망각이 없습니다.
망각은 이중적입니다. 한편으로 망각은 구원의 길입니다. 사랑하던 사람과 어쩔 수 없이 헤어질 수밖에 없었던 분이 이중에 계신지요. 사기를 당해서 금전적인 큰 손해를 받은 분도 있을 겁니다. 참척이라는 단어로 표현되는 것처럼 자식을 먼저 보낸 분들이 계신지요. 망각의 강이 없다면 우리는 삶을 견뎌내지 못합니다. 다른 한편으로 망각은 삶을 파괴하는 요소입니다. 잘못된 것을 기억해야 하는데 망각에 의해서 잘못이 반복됩니다. 국가가 기념일을 기리는 것도 망각의 어리석음에 떨어지지 말자는 뜻입니다. 며칠 전에 국가기념일 중의 하나인 5.18민주화운동 36주년을 보냈습니다. ‘임을 위한 행진곡’을 합창으로 하느냐, 제창으로 하느냐, 하는 문제로 볼썽사나운 일이 벌어졌습니다. 참으로 딱합니다. 우리나라는 왜 이렇게 사소한 문제 하나 해결하지 못하는 나라가 되었는지, 부끄럽습니다. 기독교 신앙도 기본적으로 기억입니다. 성찬예식도 역시 예수님에게 일어난 구원 사건을 망각하지 말자는 거룩한 의식입니다. 망각은 뭔가를 감추는 겁니다. 망각으로 인해서 당연히 드러나야 할 어떤 것들이 은폐됩니다. 그래서 헬라 사람들은 진리를 가리켜 알레테이아, 즉 탈(脫)은폐 사건이라고 본 것입니다.
요한복음은 성령을 ‘토 프뉴마 테스 알레테이아스’, 즉 ‘탈은폐의 영’이라고 표현했습니다. 저는 이 구절을 읽으면서 가슴이 뛰었습니다. 헬라 사람들이 알레테이아라는 단어를 통해서 보려고 했던 세상과 삶의 어두운 깊이를 요한복음도 똑같이 보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도 저와 비슷한 심정일 겁니다. 세상은 우리 눈에 보이는 그런 것으로 다 가 아닙니다. 빙산의 일각만 보고 있는 것처럼 더 궁극적인 것은 다 은폐되어 있습니다. 우선 자연과학에서도 이것은 분명한 사실입니다. 지금 저는 설교단에 서서 설교하고 있습니다. 설교단은 나무로 만들어졌습니다. 설교단은 별개의 것으로 독립되어 있는 어떤 것이 아닙니다. 설교단의 재료인 나무는 말레이시아 숲에서 자란 것일지 모릅니다. 그 나무는 햇빛과 탄소와 물의 결합으로 자랐습니다. 이 설교단은 곧 오래 전 말레이시아 어느 숲속에서 자랐던 나무와 연결되어 있고, 더 멀리는 태양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이 설교단을 만든 사람의 온갖 수고가 신비로운 방식으로 여기에 들어 있습니다. 이 나무를 잘게 나누면 원소로 분해됩니다. 원소는 대부분이 빈 공간으로 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지금 보고 있는 모든 것들의 근원은 다 숨어 있는 것입니다. 인간이 지구의 주인 행세를 하면서 살고 있는 것도 그렇게 당연한 일이 아닙니다. 어느 순간에 인간이 멸종되고 다른 종이 지구를 지배할 수도 있습니다. 개인의 인생살이도 마찬가지입니다. 내가 왜 저 사람을 만나고, 다른 사람과는 헤어지는지, 왜 지금 우리교회에서 함께 신앙생활을 하는지가 다 숨어 있는 비밀입니다.
가장 궁극적인 비밀, 또는 가장 궁극적인 은폐가 무엇일까요? 하나님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숨어 계신 분이십니다. 하나님이 왜 궁극적인 비밀인지 성경에서 두 군데만 인용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하나는 모세의 호렙산 경험입니다. 하나님은 당신 이름이 뭐냐는 모세의 질문에 대해서 ‘나는 스스로 있는 자’라는 대답을 주셨습니다. 이 세상의 모든 것들은 스스로 존재하지 못합니다. 어떤 원인으로 인해서 나옵니다. 꽃과 나무와 새와 사람은 다 어떤 원인으로부터 나옵니다. 그 과정이 아무리 신비로워도 원인이 반드시 있습니다. 태평양 한 가운데의 작은 섬에 사는 나비의 날갯짓이 태풍으로 변하는 현상도 원인과 결과의 연결고리에서 벗어나는 게 아닙니다. 하나님은 그런 원인 없이 스스로 존재하는 분이이기 때문에 우리에게 궁극적인 비밀이자 은폐되어 있는 존재라고 할 수 있습니다. 바울은 고전 13:12절에서 하나님과 그의 구원 통치가 지금은 거울로 보는 것처럼 희미하다면서 종말에 이르면 얼굴을 맞대어 보듯이 분명하게 알게 될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종종 경험하는 삶의 저 깊고 어두운 심연에 자리합니다. 그래서 루돌프 오토는 하나님 경험을 누미노제, 즉 거룩한 두려움이라고 표현했습니다. 이런 점에서 하나님을 아는 것, 그를 경험하는 것이 가장 궁극적인 진리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요한복음 기자는 ‘진리의 영’인 성령이 바로 숨어계신 하나님을 알게 해준다고 말합니다. ‘진리의 영이 오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한다.’(요 16:13절)는 말씀이 바로 이 사실을 가리킵니다. 거꾸로 말하면 예수님의 제자들이 성령을 받았다는 증거는 그들이 하나님을 알게 되었다는 데에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을 인식하게 하는 것이 바로 성령, 즉 알레테이아의 영입니다. 요한복음이 성령을 궁극적인 진리에 대한 인식론적 토대로 본 이유는 다른 방식으로는 이 진리를 깨달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머리가 좋다거나 인격이 좋다고 해서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믿을 수는 없습니다. 성령을 통해서만 그것을 이해하고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오늘의 상황도 똑같습니다. 복음을 복음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억지로 되는 게 아닙니다. 오늘 예배에 참석하신 분들 중에는 믿음생활을 거부하는 가족으로 인해서 마음이 아픈 분들이 있을 겁니다. 사람은 좋은데도 하나님을 받아들이지 않는 이들이 적지 않습니다. 저는 설교자의 입장에서 그런 현상을 자주 경험합니다. 어떤 분들은 제 설교를 듣고 ‘저게 무슨 말이지?’ 하고 답답해합니다. 왜 답답해하는지 이해가 갑니다. 실용적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믿음으로 삶이 어떻게 새롭게 변화되었는지, 복잡한 현대 사회에서 믿음으로 승리할 수 있는 길은 무엇인지에 대해서 구체적인 말을 듣고 싶은데, 그런 게 없으니 답답해할 수 있습니다. 그런 분들이 잘 알아들을 수 있도록 설교자가 최선을 다해야 하는 건 당연하지만, 이건 설명을 쉽게 하고 안 하고의 문제가 아니라는 것은 분명합니다. 오죽 했으면 예수님 당시에도 예수님의 말씀을 어려워서 알아먹기 힘들다고 한 사람들이 있었으며, 오늘 요한복음에도 성령이 깨닫게 하신다고 말했겠습니까. 이런 점에서 우리는 ‘진리의 영이신 성령이여, 우리에게 오소서’ 하는 초기 기독교의 찬송가를 반복해서 불러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가장 궁극적인 깊이에 숨어 계신, 즉 은폐되어 있는 하나님을 성령이 어떻게 알게 해주셨다는 것일까요? 신약성경은 예수가 하나님이라는 사실에 대한 증언입니다. 고후 4:6절 말씀은 이렇습니다. ‘어두운 데에 빛이 비치라 말씀하셨던 그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을 우리 마음에 비추셨느니라.’ 골 1:15절은 이렇습니다. ‘그는 보이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형상이시오 모든 피조물보다 먼저 나신 이시니...’ 초기 기독교인들은 예수님을 하나님으로 인식했고 경험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불렀고, 이에 근거해서 삼위일체의 하나님을 믿게 되었습니다.
성령을 통해서 초기 기독교인들이 예수님을 궁극적인 비밀, 즉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보이는 형상으로 인식했다는 것이 구체적으로 무엇을 가리킬까요? 이것은 근본적으로 하나님 경험이 무엇이냐, 하는 질문입니다. 그것은 구원 경험입니다. 구원 경험은 해방 경험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해방을 경험했다는 것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나님을 경험했다는 뜻입니다. 그것을 압축적으로 표현하면 죄와 죽음으로부터의 해방입니다. 죄로부터의 해방은 자기 성취에 대한 강요로부터 자유로워진다는 것이며, 죽음으로부터의 해방은 자기 소멸에 대한 두려움으로부터 자유로워진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삶이 파괴되는 원인은 바로 이 죄와 죽음이라는 실존입니다. 우리는 끊임없이 자기를 성취해야 한다는 강요와 유혹으로 인해서 자신의 삶을 파괴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의 삶도 파괴합니다. 죄가 우리를 탐욕스럽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21세기 문명이 아무리 세련되어 보여도 실제로는 탐욕스럽습니다. 이윤만을 최고 가치로 여기는 기업은 둘째 치고 대학사회가 기업화되는 것이 바로 전형적인 예입니다. 이런 세상의 구조에 깊이 들어갈수록 우리의 삶은 해방이 아니라 구속과 심판으로 얼룩집니다. 로마 시대의 초기 기독교인들은 예수를 통해서 죄와 죽음으로부터 해방을 경험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과감하게 선포할 수 있었고, 성령이 자신들에게 왔다고 증언할 수 있었습니다. 지금 우리는 어떻습니까?
여러분들도 마음으로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죄와 죽음에서 해방된 삶을 살고 싶다는 생각이 간절할 겁니다. 이를 통해서 하나님의 선물인 완전한 자유를 누리고 싶을 겁니다. 그런데 실제로는 잘 안 되지요? 이럴 때 흔히 쓰는 성구가 있습니다. ‘마음은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도다.’(마 26:41). 우리는 시계추처럼 마음(프뉴마)과 육신(사르크스) 사이를 오가면서 삽니다. 간혹 신앙적으로 깊은 경험을 해도 육신으로 살아가는 현실의 무게를 떨쳐낼 수가 없습니다. 그런 삶의 반복으로 인해서 우리의 삶은 상투성에 떨어집니다. 모든 사람들이 높은 산으로 올라갈 수는 없으니까 영적인 체력이 부족한 사람들은 최소한 교회생활을 유지하는 것으로 살아도 됩니다. 그러나 영혼이 투명해서 그런 것으로 만족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예수의 제자들처럼 영혼의 소리에 민감한 사람들입니다. 그런 분들은 더 철저하게 구도정진의 태도로 프뉴마, 즉 마음의 소리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그것은 곧 성령의 이끌림을 받는 것입니다. 여러분 모두 성령에 민감한 사람이 되어 오늘 성경본문 요 16:13절의 말씀처럼 ‘진리의 성령이 너희에게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신다.’는 사실을 실질적으로 깨닫게 되기를 바랍니다.
0개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