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6. 9.10. 요한 6:52-59
유대인들의 질문
오늘의 설교는 지난 8월20일의 설교 “하늘생명의 밥”(요 6:22-33)의 후속편인 셈입니다. 그때의 설교에서 오늘 본문의 핵심을 이미 말씀드렸습니다. 하늘생명의 밥은 성만찬의 비밀을 의미한다는 것이 그 핵심이었습니다. 그때는 주로 오병이어의 기적과 연관해서 참된 양식이 예수님이라는 사실을 말씀드렸는데, 오늘은 주로 성만찬을 중심으로 말씀드리게 될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유대인들의 질문으로부터 시작됩니다. “이 사람이 어떻게 자기 살을 우리에게 먹으라고 내어 줄 수 있단 말인가?”(52절) 그들은 단순히 질문하는 게 아니라 격렬하게 따지고 있습니다. 그들이 그렇게 따지게 된 이유는 앞서 주신 예수님의 말씀 때문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생명의 빵에 대해서 언급하시다가 51절에 이르러 과격하게 말씀하십니다. “나는 하늘에서 내려 온 살아있는 빵이다. 이 빵을 먹는 사람은 누구든지 영원히 살 것이다. 내가 줄 빵은 곧 나의 살이다. 세상은 그것으로 생명을 얻게 될 것이다.” 그렇지 않아도 예수님이 말씀이 마음에 들지 않아서 찜찜하던 차에 자신의 살이 바로 빵이라고 하니 유대인들은 더 이상 참을 수 없었겠지요. 요한은 이런 유대인들의 심리상태를 정확하게 묘사했습니다. 41절에서 유대인들은 못마땅해서 웅성거리기 시작하였고, 이제 52절에서 따지기 시작했다고 말입니다.
유대인들이 그렇게 따지는 건 일리가 있습니다. 그들이 잘 알고 있는 목수 요셉의 아들인 예수가 하늘로부터 내려온 빵이라고 하더니, 이제는 자기 살이 바로 그 빵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누가 이 말을 곧이들을 수 있겠습니까? 특히 여기서 사용된 용어 ‘살’은 육체덩어리를 가리키는 헬라어 사르크스입니다. 헬라어에는 이와 비슷한 다른 용어도 있습니다. 소마는 ‘몸’을 가리킵니다. 보통 우리가 몸의 부활이라고 할 때 쓰는 용어가 바로 소마입니다. 그런데 요한은 예수님의 사르크스가 곧 생명의 빵이라고 표현했습니다. 조금 노골적으로 말하면 사르크스는 고깃덩어리를 뜻합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소고기를 먹듯이 예수님의 살을 먹는다는 말인가요? 그건 곧 식인종이 되라는 말인데, 누가 그 말을 정상적인 것으로 듣겠습니까?
초기 그리스도인들이 오해받았던 것 중의 하나가 바로 이것입니다. 그들이 실제로 사람의 살을 먹는다고 말입니다. 초기 그리스도인들이 성찬식에서 예수님의 살과 피라고 선포하니까 그 내용을 정확하게 모르는 사람들이, 또는 알면서도 박해의 근거를 얻기 위해서 사람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신다고 말했습니다. 여러분은 이미 예수의 살을 먹는다는 게 무슨 뜻인지 알고 있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이런 문제는 그렇게 간단한 게 아닙니다. 여기에는 몇 가지 어려운 문제가 놓여 있습니다. 하나는 빵과 포도주를 예수님의 살과 피라고 믿는다고 해서 그것이 실제로 살과 피일 수 있는지에 대한 질문이고, 다른 하나는 그런 살과 피를 먹는다고 어떻게 영원히 산다는 말인가 하는 질문입니다. 우선 본문 말씀을 조금 더 따라가도록 합시다.
먹고 마심
자기 살을 먹으라고 우리에게 내어 줄 수 있단 말인가, 하고 따지는 유대인들을 향해서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정말 잘 들어 두어라. 만일 너희가 사람의 아들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시지 않으면 너희 안에 생명을 간직하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을 누릴 것이며, 내가 마지막 날에 그를 살릴 것이다.”(53,54절) 이 말을 듣고 유대인들이 고개를 끄덕였을까요? 그럴 리가 없습니다.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믿고 있는 우리도 이해하기 어려운 말씀이니 그 당시 유대인들에게야 오죽했겠습니까? 예수님의 다른 말씀들, 즉 기도에 대한 말씀이나 비유 말씀, 또는 죄인을 구원하러 왔다는 경구는 대체적으로 이해할 수 있고, 전도하라는 말씀은 실천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시라니요, 그것이 영원한 생명에 이르는 길이라니요, 무슨 뜻인가요? 자칫하면 우리는 여기서 길을 잃을 수도 있습니다.
여러분은 예수님의 먹고 마신다는 말을 일단 실질적으로 생각해야 합니다. 사람을 비롯해서 모든 생명체들은 먹고 마셔야만 생존이 가능합니다. 이 생존은 바로 생명입니다. 우리의 생명은 곧 먹고 마시는 걸 기초로 합니다. 동물은 물론이고 어떻게 보면 식물도 역시 먹고 마십니다. 식물도 영양분과 물을 섭취하지 못하면 죽습니다. 이런 점에서 먹고 마신다는 말 자체는 크게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문제는 예수님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신다는 데에 있습니다. 우리가 사람의 살을 직접 먹고, 피를 직접 마실 수는 없는 거 아닌가요? 설령 그렇게 하고 싶어도 예수님의 육체는 더 이상 이 세상에 없기 때문에 먹을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초기 그리스도교 공동체는 성만찬을 통해서 예수님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시는 의식을 거행했습니다. 빵과 포도주를 예수님의 살과 피로 믿고 그것을 나누어 먹었습니다.
제 앞에 빵과 포도주가 있습니다. 우리는 이것을 예수님의 살과 피로 믿습니다. 로마 가톨릭 교회는 “이것은 주님의 몸입니다.”는 선언 이후에 빵이 실제로 예수님의 몸으로 변한다는 화체설을 주장합니다. 그러나 개신교회는 실제적인 변화가 일어난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빵이 살을 상징하거나, 또는 기념한다고 믿습니다. 어느 쪽을 택하든지 여기서 중요한 사실은 빵과 살의 일치입니다.
기독교에 냉소적인 사람들은 그리스도교 신앙을 관념적이라고, 현실적이지 않다고 비판합니다만 그건 틀린 말입니다. 그리스도교는 유물론적입니다. 예수님의 살을 여기 앞에 놓여 있는 물질인 빵이라고 믿는 종교를 관념적이라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이건 매우 중요한 문제입니다. 그리스도교 신앙은 철저하게 인간의 살을 중요하게 여깁니다. 그리스도교의 가장 중요한 성례전이 바로 예수님의 살과 피를 기념한다는 사실이 그걸 증명합니다.
물론 그리스도교 신앙이 역사철학적인 의미에서의 유물론과는 다릅니다. 이 세상의 물질적인 가치를 절대적인 것으로 여기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교 신앙은 기본적으로 물질과 영의 일치를 추구합니다. 물질은 다만 물질이 아니라 궁극적인 생명을 담고 있으며, 영은 물질에 내재하고 있습니다. 물질과 영의 일치는 바로 그리스도교 신비주의자들이 해명해보려는 가장 궁극적인 관심이었습니다.
물질과 영이 어떻게 일치될까요? 우리는 그것을 아직 완전하게 알지는 못합니다. 그걸 조금씩 알아갈 뿐이지 완전하게 아는 사람은 없습니다. 밥을 생각해 봅시다. 비록 물질이기는 하지만 여기에는 농부의 땀과 수고, 그의 마음이 담겨 있으니까 영적인 것이기도 합니다. 우리가 먹는 점심에도 그것을 만든 사람의 사랑이 담겨 있으니까 영적인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조금 더 근본적인 쪽으로 생각해볼까요? 코엘료의 <연금술사>라는 소설이 있습니다. 산티아고라는 목동은 이집트의 피라미드 근처에서 보물을 발견할 수 있다는 신탁을 받고 여행을 떠납니다. 그는 여행 중에 연급술사를 찾아가는 동행을 만났고, 그이 덕분으로 오아시스에서 실제로 연금술사를 만납니다. 연금술사는 산티아고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모든 물질은 자기의 시간이 주어졌다. 그 시간이 채워지면 다른 물질로 변한다. 납의 시간이 채워지면 금이 될 수도 있고, 금의 시간이 채워지면 납이 될 수도 있다. 모든 물질은 소통한다. “여기 모래 한 알이 우주다!” 코엘료의 생각은 물리학적으로 크게 틀리지 않았습니다. 모든 건 변합니다. 여기에 무엇이 작용하는 걸까요? 정령들의 놀이인가요, 기(氣)인가요, 우리가 믿는 성령인가요? 제가 말씀드리려는 것은 물질은 단지 물질만이 아니라 영과 결합되어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 궁극적인 내막을 우리가 아직 모르고 있을 뿐이지요. 그것이 곧 이 세상의 신비입니다. 그 신비가 곧 우리가 믿는 하나님의 통치 방식입니다.
생명의 신비
여기까지의 설명에 대해서는 생각이 완전히 막힌 사람이 아니라고 한다면 대충 이해하고 동의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다음이 문제입니다. 다시 앞에서 제시되었던 질문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그것은 곧 빵과 살의 일치, 그것을 통한 영원한 생명 사건이 왜 예수에게서만 가능한가 하는 질문입니다. 이것은 인간이 세상에서 죄 짓지 않고 더 나아가서 이웃과 더불어 오순도순 살면 충분하지 왜 반드시 예수를 믿어야 하는가, 하는 질문과 닿아있습니다. 오늘 저는 여러분들에게 딱 떨어지는 대답을 드릴 수 없을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이런 궁극적인 질문에 대해서는 아무도 실증적인 대답을 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런 문제는 결국 신앙고백의 차원에서 풀어갈 수밖에 없습니다. 논리적인 증명이 아니라 믿음이 필요한 단계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그 믿음의 내용이 무엇인지를 설명하는 건 필요합니다.
오늘 본문이 예수의 살과 피를 그렇게 강조하는 이유는 초기 그리스도교 안에 강력하게 활동했던 영지주의 때문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몸을 부정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인간처럼 살과 피를 갖고 있을 리가 없다는 말이죠. 여기에 대해서 사도들과 교부들은 적극적으로 대처했습니다. 예수가 마리아의 몸에서 태어났다는 사도신경의 내용도 기본적으로는 바로 예수의 육체성을 말합니다. 예수는 바로 우리와 똑같은 몸으로 세상에 태어나서, 똑같은 방식으로 살았던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우리와 다른 조건은 하나도 없었습니다. 그는 살과 피가 없는 귀신이 아니었습니다. 이는 곧 예수는 역사적 실존인물이라는 의미입니다. 우리와 똑같은 심성을 갖고 사셨습니다. 기쁨, 슬픔, 좌절, 평화, 허무 등등, 그는 우리가 이 세상에서 경험하는 모든 삶을 그대로 경험하신 분이십니다. 그리스도교 신앙은 예수를 그렇게 이해합니다.
그러나 그분은 우리와 똑같을 뿐만 아니라 다르기도 하십니다. 57절 말씀을 보십시오. “살아 계신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셨고 내가 아버지의 힘으로 사는 것과 같이 나를 먹는 사람도 나의 힘으로 살 것이다.” 본문에 의하면 우리는 예수님의 힘으로, 예수님 덕분으로 삽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을 살릴 수 있는 능력이 없습니다만, 예수님에게는 그런 능력이 있습니다. 이게 바로 예수님과 우리의 근본적인 차이입니다. 그래서 초기 그리스도인들과 더불어 오늘 우리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를 메시아라고 믿습니다. 그가 우리를 구원하신다는 말씀입니다.
그걸 어떻게 알며, 어떻게 믿을 수 있나, 하는 질문이 가능합니다. 그걸 증명할 길은 없습니다. 더 정확하게 말하면 지금 그리스도교는 그걸 증명하는 과정에 있습니다. 예수가 바로 우리 생명의 토대라는 사실을 증명하는 중이라는 말씀입니다. 오해는 마십시오. 그리스도교 신앙이 진리가 아니라는 말은 아닙니다. 예수가 메시아성이 유보되어도 좋다는 뜻이 아닙니다. 우리는 이미 초기 그리스도교의 신앙에 따라서 그 사실을 믿습니다. 성서와 2천년 그리스도교 역사를 통해서 우리는 그리스도교의 가르침이 진리라는 사실을 믿고 있습니다. 다만 그것이 모든 사람들에게 완전히 밝혀지게 될 그 순간, 결정적인 카이로스가 아직 오지 않았습니다. 그때를 기다리는 우리에게 두 가지 숙제가 놓여 있습니다. 하나는 예수가 바로 생명의 빵이라는 사실을, 그의 살을 먹고 피를 마셔야 한다는 사실을 우리 그리스도교 공동체 안에서 더욱 심화해나가는 일이며, 둘째는 그것을 실질의 삶에서 실천하는 것입니다. 이 두 가지 요소가 성만찬 공동체의 자리입니다.
첫 번째의 일은 바로 그리스도교가 성만찬 공동체로 자기 정체성을 유지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빵과 포도주라는 물질을 함께 먹고 마시면서 예수를 통한 구원의 신비를 맛봅니다. 이것은 우리에게 영적인 기쁨의 토대가 됩니다.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에 속한 사람들은 성만찬의 궁극적인 기쁨을 서로 나누는 사람들입니다. 그것이 곧 진정한 의미의 코이노니아입니다.
두 번째 일은 이 세상에서 우리가 성만찬적인 삶을 치열하게 실현해나가는 것입니다. 세상의 빵을 그리스도의 살로 승화시키는 노력이 필요하겠지요. 빵의 독점은 서로 나누어 먹어야 하는 성만찬의 본질을 훼손하는 행위입니다. 밥이 하늘이라는 생각은 요즘 거의 망각된 것 같습니다. 농사도 기술의 대상으로 떨어지고 있으며, 먹을거리도 벌이의 수단이 되고 말았습니다. 오늘의 교회는 이 세상의 먹을거리를 예수의 살과 피로 살려내야 할 사명을 갖고 있습니다.
여러분, 예수님의 약속을 믿으십시오. 예수님은 그의 살을 먹고, 피를 마시는 사람을 마지막 날에 살린다고 하셨습니다.(54절) 부활의 약속이며, 영생의 약속입니다. 역사적 예수에게서 이미 그런 신비로운 생명사건이 일어났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은 이런 생명의 신비 안에서, 그것을 믿고 희망하며 그것의 현실화를 위해서 투쟁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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